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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 무대 올리기 - 황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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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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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otswitha of Gandersheim(935-1000)의 [Callimachus]에서 Callimachus는 Lord Andronucus의 아내인 Drusiana의 용모에 혹해 음욕을 품고 접근한다. Drusiana는 기독교인의 계율을 지키기 위해 자기 남편과의 동침도 거부할 정도의 금욕주의자이다. 그러다 Calimachus의 협박에 놀란 나머지 하나님께 죽음을 기원하고는 급사한다. 그러나 정염의 불길이 꺼지지 않은 Callimachus는 납골당에서 Drusiana의 시체를 시간(屍姦)하려는 시도를 한다. "너는 항상 나로부터 도망 다니면서 나의 욕망을 저지했지, 이제 내 마음대로 힘을 부려 너에게 흠집과 상처를 낼 수 있게 되었구나"(The Plays of Hrotswitha 63) 하면서 덤벼드는데 악마의 화신인 큰 뱀이 나타나 Callimachus를 물어 죽인다. 물론 모두다 부활하여 악인들은 참회하고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다는 교훈극이지만 이 시간 장면은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 응시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우선 상식적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여성에 대한 관심은 흔히 아름다움이라고 지칭되는 신체적 미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성에게 있어서 인간, 사물, 세계에 대한 이해력, 자연이나 사물에 대해 감응하는 능력, 타자들 처지에 대한 공감하고 보살필 수 있는 능력. 자기의 사고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능력 등은 남성의 응시에서는 대부분 제외되어 있다. 둘째, 남성 관심의 표적인 여성의 몸은 욕구하는 주체가 아닌 욕구되는 대상으로만 항상 존재한다. 극단적인 경우 [Callimachus]의 엽기적 사건처럼 그 욕망의 대상이 의식이 이미 끊어진, 고깃덩어리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Callimachus는 자신의 수욕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욕망하는 남성주체에겐 그 대상의 주체, 의식의 유무는 이미 의미 없으며 자신의 욕망으로 대상을 자기 동일화 시켜버린다. 현재에 와서도 이러한 자기도취적인 대상에 대한 폭력적 자기동일화 과정은 비일비재하다. 다만 다른 점은 그 방식이 보다 은밀하고, 세련되게 그리고 더욱 집요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1)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점도 현대 미국 희곡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 여성 인물들의 몸에 대한 인식이다. 가부장체제에서 조련되고 순치된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몸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하지 못해왔다. 남성작가들의 작품에서 보여지듯이 대부분의 경우 신화적 여성(대지의 여신 등)의 형상화나 아니면 남성응시의 산물인 여성성을 이미 자기 내면화하여 별 의식없이 살아가는 인물의 형상화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여성극작가의 경우, 여성억압의 본질이 여성의 몸에 대한 억압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가를 쉽사리 만나 볼 수 있다. Sophie Treadwell, Beth Henley, Maria Irene Fornes, Marsha Norman등 여류 극작가들은 가부장적 원형감옥(panopticon)의 감시체계하에 놓인 여성의 몸을 전통적인 드라마투르기로 극화한다. 그러나 이들 작가들에게 아쉬운 점은 여성의 몸을 작품의 주제나 소재 면에서 중요하게 취급한 반면 무대올리기의 형식적 측면에서는 과감한 실험이 미흡했다는 점이다.



Carolee Schneeman, Annie Sprinkle, Schgeko Kubota, Karen Finley, Robbie McCauley, Ana Mendieta, Ann Magnuson, Sandra Bernhard, Spiderwoman, Eve Ensler 등 소위 "노골적인 육체 보여주기"(The Explicit Body) 운동에 활동하는 공연자들은 여성의 몸 자체를 무대의 중심 연극기호로 설정하고 가부장 체제의 남성응시에 의해 여성의 몸이 순치된 몸으로 변신되는 과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나아가서 이들 공연자들은 여성의 몸 기호의 연극적 변신을 통해 해체구성의 가능성까지도 제시하는 정공법을 택하고 있다. 특히 노골적인 육체 보여주기 운동은 여성의 몸이 하나의 사물, 무생물처럼 분해, 조립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Callimachus]의 경우처럼 한 점의 고기 덩어리인 몸을 무대에 올린다. 그 결과 무대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아닌 "성구분 없는(non-gendered)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위한 실험실"(Dolan 17)로 바뀌는 것이다.



우선 남성극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여성 주인공들이 신비화 내지는 신화화한 인물로 주로 그려져 있다. 여주인공들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가부장적 문신을 알아채지 못한다. 두 가지 종류로 대별되는데 남성들의 욕망에 의해 재단된 여성성을 충실히 실천하는 [Death of a Salesman]의 Linda형과 대지의 여신 등 신화화되어 마침내 물신화된 [The Great God Brown]의 Cybel형이다. Linda는 자기 남편은 물론 아이들에게까지 하녀노릇을 하게 되어 마지막 장면에서 Willie의 묘지 앞에서도 "나는 이해 못하겠어요" 할 정도의 순치된 육체(docile body)이다. Thornton Wilder작 [Our Town]의 Emily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누구보다 지적으로 뛰어난 학생이었지만 자신의 몸은 Grover's Corner에 갇혀 있어야만 하며 지적으로 열등한 George는 대처에 있는 농과대로 갈 생각을 한다. 게다가 Emily는 때로는 자기의 평생 직업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연설을 하는 것이라고 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당대의 강요된 여성성에 따라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 정도로 내가 예쁘냐구?"라고 어머니를 채근한다. 소도시의 미국의 초월적 낙관주의를 보여주면서 작가는 인간들이 "무지와 장님 상태"에 살고 있을 뿐이라고 딱해 하지만 순진한 초절주의자인 Wilder 자신이 오히려 Emily의 억압의 의미에 대해 "무지와 장님 상태"에 있을 뿐이다.



Cybel 유형은 때로는 영원한 안식처로서의 모성이나, 남자의 모든 죄책감을 달래 줄 수 있는 창녀로 모습을 드러낸다. 가령 [Desire Under the Elms]의 Abbie처럼 "지쳐 젖무덤이 축 늘어진 음울한 모성"이기도 하고 [Strange Interlude]의 Nina처럼 애인(Darell), 아버지(Marsden), 남편(Evans) 세 남편을 모두 욕망하면서 잉태를 꿈꾸는 여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O'Neill도 후기에 들어서 이러한 물신화된 여성인물 형상화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인물을 그린다. 그 좋은 보기가 [Long Day's Journey into Night]의 Mary이다. 그녀는 Foucault가 인용한 원형 감옥의 희생자이다. 표피적 의미로는 그녀가 아편중독자로서 "모두가 자기를 감시하고 있다"라고 가족들에 대해 불평하지만, 그녀를 감시하는 것은 바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이다. 즉 싸구려 마취제를 맞고 객실이나 호텔을 전전하면서 영위한 불안한 삶이 그녀를 아편중독이란 비극적 종말로 이르게 한 궁극적 원인이 될 수 없다. 보다 구조적으로 사교나 공적 영역에서의 삶이 금지되어 있는 가부장 체제의 여성이 보이지 않는 남성의 시선에 의해 감시, 조련되는 감방 속의 수인이라는 점을 비유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Mary는 가부장 체제의 감금, 마비 상태를 잊기 위해 마약을 한 것이다.



Miller나 O'Neill이 여성성과 여성의 몸에 대한 인식이 미흡했다면 Tennessee Williams는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 그리고 여성성에 대해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The Glass Menagerie]에 나오는 "유쾌한 속임수"(the gay deceiver) 장면은 좋은 보기이다. 이 장면에서 Amanda는 분첩을 Laura의 절벽 가슴에 끼워 주면서 "여자는 아름다운 덫이며 남자들도 그러길 원한다" 라고 일러준다. Amanda는 권력의 미시물리학에 의해 조련되는 여성성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딸에게 전수하려고 한다. [A Streetca Named Desire]에서 Blanche는 한편 육체에 대해 양가적 태도를 보여준다. Stanley를 "저열하고, 볼품없고, 특징없이 석기 시대에나 나옴직한 유인원"이라고 비판하면서도 그의 육체적 매력에 이끌린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덧없고 덧없이 사라지나 ... 정신의 아름다움과 영혼의 풍요로움은 세월이 갈수록 더한다"라고 하나 그녀는 자신의 몸을 미끼로 삼아 남자를 유혹하여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모순에 빠져있다. 이처럼 가혹한 남부 가부장 체제에서 블랑쉬의 몸에 각인된 여성성과 그녀의 몸에 대한 주체적 인식은 엄청난 괴리를 드러내며 이는 결국 정신분열증으로 치닫는다. 즉 남부 사회에서 조련되고 순치된 여성성은 Faulkner가 밝혔듯이 특히 지체가 높은 여성일 경우 정신적인 것을 추구해야 하며 육체에 대해서는 무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체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는 블랑쉬의 첫 애인을 자살로 이끌고 스스로도 정상적인 이성관계를 맺지 못하고 미성년 애정집착증(pedophilia)이나 매음, 난교 등의 극단적인 성관계로 발전하다. 그에 비해 Stanley와 Stella의 관계는 영육이 잘 조화를 이루는 듯이 보인다. 결국 남부 귀족들의 위선적이고 성차별적인 몸에 대한 인식이 블랑쉬라는 비극적인 인물을 낳은것이다. [The Glass Menagerie]의 Amanda도 동일한 희생자이다. Amanda의 극단적인 성담론 혐오와 Blue Mountain 연애 얘기는 상호 충돌을 빚음과 동시에 Amanda 자신의 여성의 몸에 대한 혼돈된 인식을 선명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Laura만이 불구(crippled)가 아니며 Amanda와 Blanche 모두 몸의 인식에 있어서는 불구자이긴 마찬가지이다.


영과 육에 대한 모순적 내지는 양가적 태도는 [The Night of Iguana]에서 극적 갈등의 주요 양대축으로 설정된다. 극에서 이상주의와 정신을 대변하는 인물은 무명 시인 Nonno와 그의 손녀인 무명화가Hanna이다. 그리고 현실주의와 육체를 대변하는 인물은 호텔 여주인인 Maxine Faulk이다. 이 사이에서 방황하는 Shannon은 윌리엄스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숲의 가장자리에 묶여 있는 이구아나는 한편으로는 Shannon의 배교로 인한 죄의식의 등가물로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 억압된 육체적 욕망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물론 단순한 성적 욕망을 넘어서서 보다 근원적인 육체적 원리의 억압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이구아나를 묶어둔 포승줄이 끊겨 나갈 때 육체적 원리에서 해방된 Nonno의 절명시가 절창으로 흘러나온다. 이처럼 Williams에 의해 정신/육체의 이분법이 극화됨으로써 여성성이 문제적 개념으로 대두된 점은 주목할 만 하지만 남성 극작가들이 자신의 생물적 성의 한계로 인해 여성성이 억압적인 가부장체제의 산물이라는 인식에는 이르지 못한 듯이 보인다.



반면 여성극작가들의 경우 여성의 억압이 강요된 여성성에서 비롯되며 이는 곧 여성의 몸에 새겨진 가부장적 문신에 기인한다는 인식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Susan Glaspell의 [Trifles]는 보다 상징적인 방식으로 여성의 몸의 감금 상태를 극화하고 있다. 가냘픈 여성인 Minnie는 가부장제하의 올바르고 정당함의 화신인 Wright에 의해 새장 속에 갇혀 있는 신세이다. 그녀는 한 때 카나리아처럼 노래도 부르는 명랑한 처녀였지만 결혼이란 새장에 갇힌 이후 생명력이 고갈되고 응어리진 좌절과 분노는 남편 살해에까지 이른다. 따라서 보석함 속에 보관된 목이 부러진 새는 남편이 아닌 Minnie 자신의 초상이다. 이처럼 감금된 여성의 몸에 대한 핵심모티프(leitmotif)는 살인 단서를 찾는 과정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동네 부인들이 부엌이나 테이블(보다 구체적으로 quilt or knit)등 미니의 신체의 근접성(contiguity)의 축을 따라 증거를 찾고 남자들은 살인 사건의 논리적 추론에 근거한 유사성(similarity)의 축을 따라 증거를 뒤지고 있다. 남자들은 Wright가 공적 영역에서 도덕적으로 정당함에 대해 Wright에게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반면 Minnie의 몸의 억압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몰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들의 몰이해는 Treadwell의 [Machinal]에서 보다 첨예하게 극화된다. The Young Woman의 신체 부분을 소비적으로 향락하는 Boss는 그 신체의 주체성에 대해서는 형편없는 몰인식을 보여준다. Boss는 여주인공의 손에 매혹되어 청혼을 한다. 그녀의 작고 보들보들한 손은 가부장적 응시에 의해 생산되고 구성된 욕망의 대상인 동시에 여성성의 구체적 보기이다. 즉 Bartky의 여성성 훈련 실천 항목 첫 번째 덩치, 힘, 비만 원칙과 셋째 피부관리 원칙에 꼭 들어맞는다. 나아가서 그녀의 손은 여성과 남성의 권력관계를 드러내주는 제유이기도 하다. 즉, 이상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보드라운 살갗의 손은 남성들이 손만 뻗치면 언제든지 닿아 잡고서(handy, available)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대상이다. 마치 가부장체제에서 여성들의 신세가 그러하듯이. 반면 남편감인 Boss의 손은 두툼한 손은 두툼한 주머니와 연결된 권력과 소유욕의 제유이다.



이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길은 어느 한 쪽의 죽음일 수밖에 없다. Beth Henley의 [Crimes of Heart]의 Babe, [The Debutante Ball]의 Teddy, Maria Irene Fornes의 [Mud]의 Mae, [The Conduct of Life]의 Nena(Leticia), Sarita의 Sarita 등 그 예는 부지기수이다. (졸고 <영미문학과 페미니즘> Vol. 7. no. 2, 참조.)



전통적인 드라마투르기에 기초한 남성, 여성 극작가의 여성성 극화는 여성의 몸을 전경화시키기엔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성의 몸 자체를 대본과 무대 그 자체로 변환되는 "노골적인 육체 보여주기" 극운동이 70년대부터 성행하기 시작했다. Rebecca Schneider의 설명에 따르면 "노골적인 육체 보여주기"는 "펼쳐보여준다"(unfold)라는 라틴어의 explicare에서 유래하는데 "육체를 펼쳐 보여주기 위해서 ... 공연 예술가들은 무대를 노출시키기 위해 벨벳 커텐을 올리듯이 무덤의 유령처럼 그들의 육체를 둘러싸고 있는 의미의 껍질을 한 겹 한 겹 벗겨 나간다. ... 구멍과 신체 사지 부위, 말초부위, 촉각 부위 덩어리, 즉 재현으로 노골화된 육체는 무엇 보다 사회적 지표화(markings)의 장소이며 성, 인종, 계급, 연령, 세속성의 육체적 부위와 몸짓 서명(signature)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특권자와 특권을 박탈당한 자의 사회적 위계 질서를 기술하는 지표들, 즉 역사적 의미의 유령들을 대동하고 다닌다."(2) 그리하여 Susan Bordo식으로 풀이하면 "노골적 육체 보여주기"는 "육체의 과학적 철학적, 그리고 미학적 재현인 지적 육체(intelligible body)"가 "사회적으로 적응 가능한 효용적 육체(useful body)"(103)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과정을 차단하는데 있다.



동시대 육체 보여주기 무대는 따라서 Elin Diamond의 주장에 따르면 현실에 대한 거울적 이미지가 아닌 변증법적(Benjamin 식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주2) 즉 물적 현실(material)과 구성된 이상(constructed ideal) 사이의 긴장, 괴리관계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현상을 재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가령 화장의 마스카라가 녹아내린다든지 속눈썹이 흘러내린다든지 물적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구성된 이상으로서의 여성성 내지는 여성미가 인위적이고 강요된 것임을 폭로하는 것이다.



Carolee Schneman은 [Interior Scroll](1975) 공연에서 음부로부터 두루마리 원고를 꺼집어 내어 읽는데 그 내용은 자신을 비롯한 여성작가들의 시나리오를 혹평하면서 채택하지 않는 영화제작자에 대한 비판이다. 모놀로그중에서 "(나는 자신에게만 지껄여대는 남자들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 비평적이고 실제적인 영화언어에 주목하라. 이는 오로지 하나의 성만을 위해 존재할 따름이다. "라고 비판한다. 주3)


Annie Sprinkle은 [Post Porn Modernism](1989) 공연중에 무대 위에 설치된 변기에서 소변을 본다. 물론 이와 유사한 장면은 Beth Henley의 [The Debutante Ball]의 거실과 화장실을 동시에 병치시킨 무대 장면에서도 실천된 바 있다. 심정순은 이런 장면들을 바흐찐의 카니발적인 행위와 연결시키는 탁견을 보여준다. 그러나 무대 올리기 기법 측면에서 살펴 보면 이는 단순히 몸과 관련된 여성성의 바흐찐적 카니발만은 아니다. 일종의 반 에로티시즘 기법으로 가부장제에서 강제로 부과된 여성의 몸의 신비로움, 신성함을 의도적으로 깨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즉 전자가 권위적 담론에 대한 전복을 통해 결과적으로 억압계급의 숨통을 일시적으로 틔우는 역할의 안전 밸브(safety valve)라면 후자는 여성의 몸에 각인된 에로티시즘을 보다 생산적으로 지속적으로 제거하는 제스츄어이다. 실상 여성의 몸을 성애적으로 신비화 시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여성을 무지와 순진 무구 상태에 두려는 가부장적 기도이며 구조적으로 볼 때는 상품의 교환가치를 올리려는 자본주의의 기획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의 물신화에 대한 거부는 Spiderwoman의 공연에서도 잘 들어나 있다. [Reverb-ber-ber-rations](1990)에서 가부장적 여성미의 잣대로는 혐오스러운 7인의 배우가 고래 고래 노래을 부르며 쓰레기통을 드럼삼아 치고 "I gotta pee"라고 고함친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Schneider가 언급했듯 여성들의 반기억(counter-memory)에 버금간다. 즉 가부장제에서 권력의 미시물리학(microphysics of power)에 의해 구축된 여성성의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잔여적이고 저항적인 기운"이며 푸코식으로 "각성된 반복"(vigilant repetition)에 의해 환기될 수 있는 것이다.


Eve Ensler의 [The Vagina Monologues](1998)는 앞의 작품들처럼 반 에로티시즘이나 반포르노적인 단계에 그치지 않고 보다 당당한 여성의 몸의 재현으로 나아가는 듯 보인다. 동숭동에서 현재 진행 중인 서주희의 공연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여러 계층, 연령의 여성들을 인터뷰 방식으로 재구성한 이 작품은 여성들이 갖는 치부를 혐오감 주게 드러내지 않고 매력적인 담론으로 "펼쳐보인"(explicare)다. 그 결과 탈신비화된 vagina가 남성 응시와 소비적 욕망의 대상만이 아닌 그 소유주에게 주체성을 환기시켜 줄 수 있는 새로운 기품과 권위를 획득한 듯 보인다.



주석
1) 원조교제나 매춘도 시간의 연장선상에 있다. 상대방의 의식이나 감정을 돈으로 매수하여 제거시키고 그 몸뚱아리만을 취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대상이 지닌 욕망을 자기 욕망으로 폭력적으로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2) Rachel Rosenthal의 경우에는 "재현의 전형적인 체제 폭로하기" 또는 "여성재현을 전경화시켜서 성을 문화적 구성물로 조명하기"의 전략을 구사한다"(Forte 35).


3) 주요 독백 대사는 "I met a happy man / a structuralist film maker / he said we are fond of you / you are charming / but dont' ask us / to look at your films / we cannot / there are certain film / we cannot look at / the personal clutter / the persistence of feelings ... / he said we can be friends / equally / though we are not artists / equally I said we cannot / be friends."




2002년 1월 31일

한국영어영문학회 학술발표회



필자 황훈성 선생은 동국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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