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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제국주의와 탈식민적 저항의 가능성 --이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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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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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인가 신식민인가?: 우리 사회의 시대적 모순


얼마 전 국내 일간지 지면에서 영어 공용화 문제를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소설가 복거일의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가 불씨를 지핀 이 논쟁은 영어의 의사소통적 기능을 넘어서서 한국 사회에서 영어가 지닌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다. 가령, 민족문학 진영을 대변하는 최원식은 복거일의 제안이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강력한 정치적 동원력을 행사해온 우리 사회의 '닫힌' 민족주의를 제어하는 효과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영어 공용화론은 IMF사태에 편승하여 한국의 국가주의를 해체하고 미국의 시장주의를 이식하려는 신식민주의적 기획에 굴복하고 공모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함재봉은 과거에 한민족이 한문, 불교, 유교 등의 외래 문화를 수입하여 우리 문화의 전통을 풍요롭게 한 사실을 예로 들면서,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것은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소국의 생존전략일 뿐더러 우리 문화가 세계적 차원의 보편성과 객관성을 확보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고 반박한다. 이에 대해 정과리는 복거일의 탈민족주의적 문제제기가 역설적으로 민족주의적 열정과 고민을 담고 있으며 이를 둘러싼 논쟁은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대립이 아니라 원리적 민족주의와 실용적 민족주의의 대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복거일의 영어 공용화론은 원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우리 사회에 잠복하고 있던 전통과 근대성, 혹은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긴장관계를 다시 표면화시킨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논쟁은 한국 특유의 현상만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영어 공용화의 문제는 미국 중심적 세계질서에 속한 모든 비영어권 국가들의 공통된 당면과제이다. 특히 제3세계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문제는 산뜻한 대안이나 해결책을 찾기 힘든 일종의 딜레마이다.그것은 한국을 포함한 오늘의 제3세계가 탈식민과 신식민을 동시에 경험해야 하는 시대적 모순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즉 정치적으로는 식민지해방이 이루어졌지만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서구 제국주의의 헤게모니 이전보다 더 교묘하게 제3세계 사회에 침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압둘 잔모하메드에 의하면, 제국주의가 식민적 단계에서 신식민적 단계로 진행할수록 물리적 폭력보다는 인식론적 폭력이 더 효과적으로 작용하며 지배자의 생산양식과 가치체계가 피지배자 스스로의 '동의'에의해 받아들여지는 '헤게모니적' 방식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된다.

실로 우리 시대에 들어맞는 지적이다. 미국 주도하의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세계화와 정보화를 미끼로 내걸며 제3세계의 적극적 동참을 부추기고 서구 문화제국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코스모폴리타니즘의 깃발을 앞세워 민족주의적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있다. 탈식민화의 구호는 난무하지만 신식민적 권력관계는 점점 더 공고해지고, 상호문화적 지구촌이 도래했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팍스 아메리카나의 세계질서는 어느새 그람시가 의미한 '지적, 도덕적 리더십'마저 확보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모순구조의 가운데에 바로 영어가 놓여 있다. 세계화가 곧 미국화를 뜻하는 상황에서 영어는 미국의 경제적·문화적 헤게모니를 재생산하고 '중심부'와 '주변부'의 불균등한 권력관계를 매개하는 가장 제국주의적인 언어이다. 하지만 '근대세계체제'의 바깥에 선다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우리에게 있어서 영어는 불가피한 현실이자 불가결한 생존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어는 제3세계가 근대성의 기원이 아니라 이식이고 모방임을 확인시켜주는 서글픈 거울이면서 동시에 서구가 그려놓은 근대성의 미로를 뒤따라가는 데 유용한 지도와도 같다. 요컨대, 영어는 완전한 거부/고립과 완전한 동화/예속의 양극단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해야하는 제3세계의 역사적 곤경이 구체화되는 장(場)이다.

이러한 제3세계적 곤경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아마도 오늘의 한국 사회일 것이다. 송승철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에서의 영어는 매체로서의 기능을 넘어서서 이미 '물신(物神)'이 되어버렸다.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유치원 아이들부터 머리가 벗겨진 기업 간부들에 이르기까지 영어는 개인의 능력과 적성을 가늠하는 보편적 잣대로 군림하고 있다. 타자의 언어이면서도 언제나 우리의 타자성을 상기시켜주는 영어, 우리 스스로를 '결핍'과 '부재'로 규정짓고 우리의 일상을 불안과 강박으로 짓누르는 영어야말로 한국인의 사회적 (무)의식을 지배하는 '초월적 기표'이다. 또한 그러한 영어가 얼마나 유창하냐에 따라 인간다움의 등급이 매겨지고 얼마나 '훌륭한'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영어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영어는 우리사회의 계급구조를 재생산하는 일종의 '문화 자본'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영어의 정치성에 대해 너무 무감각하다는 사실이다. 더 큰 문제는 설령 영어와 신식민적 자본주의의 공모관계를 인식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내세울 만한 해결책이 없다는 점이다. 언어와 권력의 문제는 권력의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는 한 딜레마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근자에 국내 학계에서도 영어와 관련된 문제들을 학술적 논의의 대상으로 삼기는 해도 문제제기의 차원에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영어의 이데올로기를 드러냄으로써 저항의 실마리를 찾아보자는 의도일 것이다.

특히 영미문학연구회에서 발간하는 『안과밖』에서는 창간 이후 거의 매호마다 영어(교육)의 이데올로기와 영문학
커리큘럼 등의 이슈를 특집이나 쟁점으로 다루어 왔다. 본 논문의 의도 역시 그러한 기획의 연장선상에 있다. 여기서는 우선 아프리카 문학의 매체로 영어를 채택할 것인가의 여부를 놓고 벌어진 치누아 아체베와 응구기 씨옹오 사이의 논쟁을 소개하고 그들의 논쟁이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영어제국주의의 억압에 맞서 어떤 형태의 저항이 가능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70년대 아프리카 작가들의 논쟁을 다시 끌어들이는 이유는 그들의 문제의식이 오늘날 한국 독자들과 특히 영어제국주의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국내 영문학자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II. 아체베와 응구기: 영어제국주의에 대한 두 가지 반응

영어제국주의의 문제는 최근 탈식민주의가 서구의 제도권 담론으로 잡으면서 중요한 화두로 부상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도 제3세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프리카 작가의 영어 사용을 둘러싼 치누아 아체베와 응구기 와 씨옹오 사이의
논쟁이다. 이는 루카치와 브레히트의 리얼리즘 논쟁이나 하버마스와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비견될 만한 비평적 '사건'이었다.

아체베와 응구기는 각각 나이지리아와 케냐 태생으로서 마르크스주의나 네그리튀드 같은 이데올로기적 쟁점에서는 다소 이견을 드러냈지만, 식민지해방 이후 아프리카의 영어권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정신의 탈식민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노력해왔다. 이들은 비록 '탈식민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문학 작품을 통해 아프리카의 식민적 과거와 신식민적 현재를 재조명함으로써 제3세계 탈식민주의 문학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한 인물들이다. 어떻게 보면, 이들의 논쟁도 그러한 탈식민주의적 실천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영어가 아프리카 민족문학의 매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체베의 논지를 살펴보자. 아체베의 주장은 요즈음으로 말하면 민족이라는 것 자체가 역사적 실재가 아니라 담론적 효과라는 구성주의적 입장에 근거하고 있다. 아체베는 우선 '아프리카 문학'이라는 개념을 문제삼는다. 아프리카 문학이란 아프리카 안에서 쓰여진 문학인가 아니면 아프리카에 관해 쓰여진 문학인가? 아프리카 문학의 주제는 아프리카에만 국한된 것인가 아니면 아무것이라도 괜찮은가? 아프리카 문학의 범위는 대륙 전체인가 사하라 사막 이남에만 해당하는가? 혹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문학도 포함되어야 하는가? 아프리카 문학의 언어는 아프리카의 토착어이어야만 하는가 아니면 영어, 불어, 아랍어 등의 외국어가 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민족의 본질론적 개념을 인정하던 70년대 독자들에게는 꽤나 흥미롭고도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계속해서 아체베는 '아프리카 문학'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기 위해 '민족문학(national literature)'과 '부족문학(ethnic literature)'을 구분한다. 아체베의 분류에 따르면, 민족문학이 국가단위의 개념이라면 부족문학은 국가 내부의 특정 부족에게만 해당하는 개념이다. 나이지리아를 예로 들면, 민족문학은 나이지리아의 국민이 접근할 수 있는 영어로 쓰여진 문학이고 부족문학은 하우사, 이보, 요루바, 에픽, 에도, 이죠 등의 특정 부족언어로 쓰여진 문학이다. 따라서 흔히 나이지리아의 민족문학으로 (잘못) 간주되는 것은 사실은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여러 개의 부족문학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며, 나이지리아의 유일한 민족문학은 영어로 쓰여진 문학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거기에 덧붙여서 아체베는 아프리카의 특수성을 간과한 채 아프리카의 민족문학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기 마련이라고 경고한다.

여기서 아체베가 의미하는 '아프리카의 특수성'이란 아프리카의 민족국가가 유럽 식민주의의 부산물이라는 엄연하면서도 잊기 쉬운(혹은 잊고 싶은) 역사적 사실이다. 아프리카 신생독립국들의 민족문학이 영어로 씌어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역사에서 비롯된 "오늘날 아프리카의 현실" 때문이다. 아체베의 도발적인 주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체베가 보기에, 식민주의는 그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역사의 죄악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가져다준 긍정적 효과도 부인할 수 없다.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부족들로 나누어져 있던 나이지리아를 근대적 민족국가로 '창조'해준 것도 영국 식민통치의 '덕분'이며, 특히 영어는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수많은 부족들을 하나의 '상상적 공동체'로 묶어주는 구심점이다. 아체베의 구절을 인용하면, "식민주의는 아프리카인들이 서로 얘기할 수 있는 하나의 언어를 주었다. 그것이 우리에게 노래를 선물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함께 탄식할 수 있는 말은 가져다주었다...... 오늘날 전국적으로 통하는 하나의 중심적 언어는, 좋든 싫든 간에, 영어뿐이며, 내일이 되면 다른 언어로 대체될지 모르지만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우리가 식민주의의 유산 중에서 나쁜 것은 폐기해야겠지만 그 과정에서 좋은 것까지 송두리째 내버리지는 말자."

영어 사용을 찬성하는 아체베의 논리는 정치적 현실뿐만 아니라 미학적 가능성에 근거한다. 자신의 모국어를 저버리고 정복자의 언어로 글을 쓰는 행위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끔찍한 배신"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아체베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 못지 않게 중요한 사실은 영어가 불가피한 현실에 의해 강요받은 언어이지만 아프리카 작가를 "창작력의 빈곤과 부재로 인한 좌절감"으로 빠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프리카 작가 J. P. 클락과 아모스 투톨라, 그리고 미국 흑인작가 제임스 볼드윈 등을 예로 들면서, 아체베는 흑인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을 세계 언어인 영어로 담아내는 작업은 유의미하고 생산적인 작업이라고 주장한다. 아체베가 그리는 미래의 아프리카 문학의 지형도는 그가 의미한 '민족문학'과 '부족문학'의 공존일뿐만 아니라 영어의 보편성과 아프리카적 특수성의 결합이다. 그것은 "여전히 아프리카의 뿌리와 교감하면서도 새로운 아프리카의 상황에 맞도록 개조된 새로운 영어"의 창조이다.

이러한 아체베의 주장을 두고 응구기는 제국주의의 승리를 기정사실화 하는 숙명론적 논리의 표본이라고 반박한다. 응구기는 언어가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아체베의 전제에는 동의하면서도 언어는 문화의 담지물이며 권력의 매개체임을 강조한다. 특히 식민통치에서 언어는 가장 필수적이고 효과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이다. 식민지 시대에 영어가 수행한 기능에 대해 응구기는 아체베와는 달리 철저하게 일면적인 평가를 내린다.

"총칼이 난무하는 밤이 지나고 분필과 칠판으로 말하는 아침이 다가왔다. 전쟁터의 물리적 폭력이 교실의 심리적 폭력으로 이어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전자는 잔인했지만 후자는 부드러웠다. 검은 대륙을 지배하는 그들의 진정한 힘은 첫째 날의 대포보다는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이었다. 대포의 뒤에 신교육이 있었다. 신교육은 대포와 자석의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대포보다 더 효과적인 무기가 되었으며, 정복을 영구적으로 만들었다. 대포는 우리의 몸을 짓이겼고 학교는 우리의 얼을 빼앗았다. 총알은 물질적 정복의 수단이었지만 언어는 정신적 정복의 수단이었다."

응구기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폭력으로서의 영어의 기능이 과거 식민지 시대나 현재 신식민 시대나 별로 달라진 게 없음을 강조한다. 즉 경제적 수탈과 정치적 지배는 식민지 해방과 더불어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종식되었어도 정신적 억압은 지금도 여전히 영어를 매개로 한층 더 교묘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케냐의 경우, 영어는 아체베가 말하듯 "여러 언어 중의 하나"가 아니라 "언어 그 자체"이며 다른 모든 언어는 영어의 권위 앞에 경의를 표하며 굴복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응구기가 시종일관 역설하는 "정신의 탈식민화"도 학교 강의실에서 기쿠유 대신 영어를 가르치는 상황에서는 민족주의자의 헛된 미망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영어 사용의 불가피성을 설파하는 아체베나 흑인문화 회복운동인 네그리튀드를 주도하면서도 아이러니컬하게 불어의 심미적 우수성을 역설하는 레오폴드 셍고르는 정신적으로 식민화된 지식인의 전형이다. 이들을 질타하는 응구기의 목소리는 준엄하고도 신랄하다. "우리는 아프리카 작가의 입장에서 언제나 유럽-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신식민주의를 비판해 왔다. 그렇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외국 언어를 존경하며 그 언어로 글쓰기를 계속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문화적 차원에서 신식민주의에 예속되어 굴복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프리카는 제국주의 없이는 못산다고 말하는 정치가와 아프리카는 유럽 언어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한다고 말하는 작가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응구기가 아체베의 주장을 비판하는 또 다른 근거는 영어의 상용화가 아프리카 사회 내부의 계급적 모순을 심화시킨다는 점이다. 구술문명에서 비롯된 아프리카 문학과 유럽의 문자문명을 대표하는 영어의 모순적 결합은 애초부터 식민지 교육을 받은 프티부르주아의 산물이며, 때문에 민중이 주체가 된 아프리카 민족문학과 양립할 수 없다. 한때는 "영어로 쓴 아프리카 소설"이 반식민주의적 저항과 민족주의적 투쟁을 문학적으로 실천한 것이 사실이지만, 식민지독립 이후에는 그러한 문학의 발전과정이 아프리카의 토착 프티부르주아가 자신들의 경제적·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이 주도한 아프리카 문학은 대외적으로는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 대내적으로는 원래 뿌리가 없었던 프티부르주아의 계급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응구기는 아프리카 작가들이 서구 출판시장과 국내 프티부르주아를 겨냥한 '잡종적' 글쓰기를 하기 이전에 먼저 농민과 노동자를 독자로 삼고 이들의 역사적 경험을 모국어로 전달하는 민족문학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응구기는 이러한 민족문학론의 연장선상에서 영문과 폐지론을 주창한다. 그 이유는 아프리카 대학의 영문과가 서구 문화제국주의의 전초기지로서 영어의 헤게모니를 전파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케냐의 나이로비 대학을 모델로 한 글에서 응구기는 기존의 영문과를 폐지하고 그 자리를 어문학과(Department of Linguistics and Literature)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어문학과에는 스와힐리어를 매개로 한 아프리카 민족문학을 중심으로 아시아 문학, 카리브 문학, 프랑스 문학, 영국 문학 등이 균형 있게 배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응구기의 제안은 일견 토착주의자 혹은 문화민족주의자의 발언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가 의도하는 바는 서구 문학 전반을 통째로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라 영문과의 독점적 헤게모니를 극복하기 위하여 아프리카 언어와 문학을 대학교육의 주변에서 중심으로 자리바꿈하자는 얘기이다.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응구기에 따르면,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며 유럽중심주의의 극복이다. "교육이란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수단이다. 우리 스스로를 되새겨본 이후에야 바깥으로 눈을 돌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아프리카를 다른 나라의 부속품이나 위성국의 위치가 아닌 중심에 두고 아프리카적 시각에서 세계를 바라봐야 한다."

이러한 응구기의 비판에 맞서 아체베는 완곡하면서도 확고한 어조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한다. 아체베는 "국민의 대다수가 문맹인 나라에서 소설을 쓴다면 누가 나의 독자층이 될 것인가? 영어가 아직도 외국어로 여겨지고 소수계층만이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내가 영어로 소설을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중대한 문제"에 대해 자신도 충분히 고민해왔지만 "납득할만한 대답"을 찾기 힘들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아체베는 "진지하지 못한 사람들"이 영어 문제를 놓고 "즉각적이고 손쉬운 치유책"을 내놓는 데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한다. "영어 사용을 폐지하라니! 그렇게 되면 무엇이 영어의 자리를 대신할 것인가를 놓고 완전히 사사오분 상태에 빠질 것이다. 누가 제안하기를 상이한 200여 개의 언어를 지닌 나이지리아는 너무 골치 아프니까 관두고 동부 아프리카로 건너가서 스와힐리어를 빌려오면 된다고 한다. 이거야말로 옛날에 왕위계승 문제로 시끄러운 왕국이 다른 왕국에서 왕권경쟁에서 밀려난 왕자를 데리고 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여기서 아체베는 응구기의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지만 그를 염두에 두고 있음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계속해서 아체베는 또 다른 예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응구기 식의 "지극히 단순한 처방"은 유명한 가수를 초청해놓고서는 대부분 관객이 귀머거리이므로 노래부르는 대신 춤을 추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상황이 그러하다면, "그 가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어줍잖게 춤을 추는 것보다는 자기 혼자만 알아듣더라도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르는 것이 낫다." 아체베는 자신이 이처럼 극단적인 얘기를 하는 이유는 "터무니없는 단순논리로 마구잡이 공격을 퍼붓는 자들에 맞서서 예술과 양식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응구기는 이러한 아체베의 반론을 의식이라도 한 듯, 최근에 나온 평론집에서 논의의 범위를 영어에서 영문학과 서구문화 일반으로 확장하면서 이전의 논지를 재확인한다. 여기서 응구기가 씨름하는 문제는 역시 문화제국주의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신식민주의 시대의 문화제국주의는 더 위험한 암세포이다. 그것은 새롭고 교묘한 모습을 취하며 가면으로 자신의 본색을 숨기기 때문이다. 응구기가 가장 못마땅해하는 것은 불균등한 권력관계로 말미암아 아프리카 사회가 유럽 문화의 침투에 완전히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곧 셰익스피어와 다니엘 디포를 읽는 것을 의미하는 교육제도 하에서, 아프리카의 젊은이들은 매일 프로스페로의 눈으로 캘리번을 보고 크루소의 눈으로 프라이데이를 보는 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이들은 헐리우드 영화만 상영하는 극장에서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의 '야만인들'을 마음껏 유린하는 인종주의적 영웅의 모험담을 보며 박수갈채를 보낸다. "이것이 바로 문화제국주의이다. 그것은 매우 강력한 억압의 도구로서, 역사 속에서 차지하는 우리 자신의 위치와 우리를 둘러싼 현실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일그러뜨린다...... 아프리카 사람이 유럽 문화와 역사를 통해 자기실현을 하는 것은 스스로를 정신적 불구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프리카 작가가 영어로만 소설을 쓰고 아프리카 대학에서 영문학을 문학의 시금석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것이 응구기의 질문이자 질책이다.

이상에서 간략히 소개한 아체베와 응구기의 논쟁은 지금까지 많은 관심만큼이나 많은 오해도 불러일으켰다. 언뜻 들으면, 이들의 논쟁은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평행선처럼 보이고, 제3세계 독자들은 이들의 상반된 입장을 두고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을 곰곰이 되새겨보면, 대립의 행간에서 양립의 틈새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응구기는 아체베가 "영어라는 제국주의 유산을 물려받고 감지덕지한다"고 비난하고 아체베는 응구기의 발언을 두고 "인기는 끌지 몰라도 현실성이 없는 흑백논리"로 치부하지만, 이들의 논쟁 이면에는 민족주의적 고민과 열정이 담겨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복거일의 영어 공용화론이 그렇다고 하지만, 아체베와 응구기의 논쟁이야말로 세계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이라기보다 아프리카 민족문학의 내부 갈등에 가깝다. 물론 세계주의는 그것의 대립항인 민족주의만큼이나 정의 내리기 힘든 개념이다. 그런데 세계주의의 개념을 어떤 식으로 규정하든 아체베의 입장을 세계주의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아체베는 식민지 역사의 유물인 민족국가의 경계선을 해체하기보다는 그것을 인정하고 전유함으로써 아프리카의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응구기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 민족(주의)은 극복과 해체의 대상이 아니라 반제국주의적 저항의 근거이자 전략인 것이다. 단지 민족(주의)을 재현하는 매체의 이데올로기를 놓고 의견을 달리할 뿐이다. 아프리카 작가의 영어 사용을 옹호하는 아체베나 반대하는 응구기 모두 서구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아프리카 문학의 궁극적 목표로 설정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들의 논쟁을 이데올로기의 차이가 아닌 전략과 방법론의 차이로 이해하는 편이 더 온당할 것이다.


III. 거부와 전유: 이분법적 대립에서 변증법적 통합으로


아체베와 응구기의 논쟁은 아프리카 민족문학의 방향을 놓고 아프리카 작가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이들의 문제의식은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 사회 전반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물론 나이지리아나 케냐는 아체베의 지적처럼 "단일 언어를 지녔던 행복한 유년시절"이 없었고, 따라서 한국의 경우와는 달리 식민지해방 이후의 아프리카 민족국가들로서는 공용어의 선택이 그들의 사회적·문화적 풍토를 결정짓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영어제국주의와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는 한국 독자들에게 이들의 주장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영어제국주의의 시대적·지역적 보편성이 그들의 고민과 우리의 현실을 연결시켜주기 때문이다. 응구기도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유럽의 식민지배라는 역사적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피억압자로서의 친연성과 저항주체로서의 연대의식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지정학적 통로이자 영국 식민지배의 부산물인 수에즈운하가 상징하듯, 제국주의와 그것에 대한 저항의 역사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연결고리"가 된다. 그 중에서도 영어라는 언어매체는 가장 핵심적이고도 상징적인 연결고리이다. 왜냐하면 영어는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의 연속성과 차이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19세기 팍스 브리태니카와 20세기 팍스 아메리카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중심부와 주변부의 불균등한 권력관계를 합리화하는 문화제국주의가 영어를 매개로 실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은 문화제국주의가 과거의 식민주의 시대에는 보완적 기능을 수행했지만 재의 신식민주의 시대에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영어의 이데올로기적 폭력이 신식민주의 시대에 와서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제3세계 사회에 작용하는 것이다.

영어제국주의가 이전보다 더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말은 '우리'와 '그들'의 경계선이 그만큼 더 모호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푸코가 근대사회의 특징으로 권력의 익명성과 편재성을 지적했듯이, 오늘날 제3세계인들은 신식민적 권력관계의 주체가 누구인지 이데올로기적 억압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영어를 통한 미국의 헤게모니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유지되고 강화되는지를 파악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침략을 침략으로 억압을 억압으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동시에 이는 영어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전략이 더 정교하고 다양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의 탈식민화'라는 공동 목표를 지향하는 아체베와 응구기가 갈라서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아체베는 영어 사용의 불가피성을 전제하며 '그들'의 그릇 속에 '우리'의 이야기를 담아내자는 데 비해, 응구기는 영어라는 그릇 자체가 '그들'의 주형(鑄型)으로 빚어낸 것이므로 그것을 폐기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한쪽은 전유를 다른 한쪽은 거부를 저항의 방식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아체베와 응구기의 상반된 전략은 탈식민주의적 저항의 두 가지 가능성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빌 애쉬크로프트를 비롯한 세 명의 호주 비평가들에 따르면, 영어제국주의의 헤게모니에 맞서는 탈식민적 글쓰기는 폐기와 전유의 두 가지 방식에 의존하게 된다. "영어의 특권을 폐기하고 부인한다는 것은 의사소통 수단에 대한 중심부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제국의 문화, 미학, 정상적이고 '올바른' 용법의 기준, 그리고 단어에 각인된 전통적이고 고정된 의미의 기본전제 일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반면에 중심부의 언어를 전유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그 언어를 포획하고 개조하여 새로운 용도로 사용하고 식민주의적 특권의 장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작업이다. 그것은 또한 영어로 하여금 우리만의 문화적 경험을 떠맡도록 만드는 것이며, 우리 것이 아닌 언어로 우리 자신의 정신을 전달하는 과정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거부와 전유가 동시발생적이고 상호보완적인 과정이며, 그래야만 저항은 효과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모든 탈식민주의 문학은 상이한 세계 사이의 간극을 조정한다는 점에서 상호문화적이며, 중심부의 표준영어(English)와 주변부의 토착화된 영어(englishes)간의 긴장관계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거부와 전유가 상호보완적이라는 말은 두 가지 방식 모두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음을 뜻한다. 우선, 아체베가 제안하는 전유의 방식은 분노와 독선에 빠지기 쉬운 탈식민주의 작가/비평가에게 유연하고 생산적인 분석틀을 제공해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전유는 탈식민주의적 '되받아 쓰기'를 가능케 한다. 이석구의 분석에 의하면, 아체베의 대표작인 『모든 것이 무너지다』는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오지』를 비롯한 서구의 인종주의적 아프리카 문학의 전통에 저항하는 탈식민주의 문학의 전형이다. 콘래드의 소설에서 아프리카는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역사 이적의 공간으로, 온갖 야만적인 본능과 억압된 무의식적 충동이 휴화산처럼 동면하는 곳으로, 백인 주인공의 가치와 규범이 도전을 받고 시련을 겪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전쟁터로 그려진다.

그러나 아체베는 서구의 장르인 소설과 서구의 언어인 영어를 빌어 서구가 만들어놓은 아프리카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즉 아프리카를 비하하는 데 사용되어진 영어를 되받아 사용함으로써 그 언어가 복무해온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려는 것이다. 서구 리얼리즘 소설의 기법을 차용한 아체베는, 식민지 이전의 아프리카에도 유구한 역사와 고유한 문화가 엄연히 존재했으며 문명과 기독교의 전파라는 슬로건을 내건 유럽의 식민지배는 아프리카 전통사회의 붕괴와 소멸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다큐멘터리처럼 담담하면서도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아프리카의 역사를 유럽중심적 시각이 아닌 아프리카의 시각에서 재구성하는 과정이며, 역사발전의 동인을 박탈당한 채 신화화되고 '로망스화'된 아프리카에 역사성을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탈식민주의의 기본과제가 서구중심적 역사와 문화의 '비틀어 읽기'와 '되받아 쓰기'라고 할 때, 아체베의 작업은 탈식민주의 문학의 전범이라 할만하다. 탈식민주의가 서구 정전의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를 일차적 임무로 상정하는 것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식민지 이전으로의 회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워버리고 싶은 식민주의의 흔적들은 우리의 일상적 의식구조와 언어행위 속에 너무나 깊이 침투해 있으며 심지어 탈식민주의적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에도 어김없이 스며 있다. 폐기와 거부에 앞서 전유를 탈식민주의의 전략으로 생각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식민주의에 오염되고 얼룩진 부분들이 모조리 삭제된 탈식민 문화는 유토피아적 상상력 속에서만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혼종성은 탈식민 시대의 존재론적 현실이자 탈식민주의의 인식론적 토대이기도 하다. 모든 형태의 저항이 지배와 억압을 전제하듯이, 탈식민주의도 자생적이고 자족적인 담론이 아니라 식민주의라는 선행 담론에 대한 반작용이며 그것의 극복과 해체를 지향하는 역담론이다. 거꾸로 말해서, 식민주의는 탈식민주의의 투쟁의 대상인 동시에 투쟁의 근거로 작용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체베가 영어의 공용화를 옹호하는 주된 이유도 영어가 지배 담론과 저항 담론이 조우하는 전쟁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영어가 대표하는 서구 언어와 문학은 (신)식민주의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탈식민주의의 저항이 전개되는 공간이라고 보는 것이다. 영국이 그어놓은 국경선을 인정해야 하듯이 영국이 남겨놓은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그런 점에서, 아체베에게 오히려 긍정적인 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영어는 분명 강요된 선택이긴 하지만 서구 문화제국주의에 맞서 '대화'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이며 그 속에 침투하여 교란작전을 펼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프리카 언어와 비아프리카 언어의 구분은 아체베에게는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영어든 아랍어든 스와힐리어든 간에 현재 아프리카 땅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프리카 문학'의 범주에 조셉 콘래드는 아니지만 나딘 고디머는 포함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피부색에 상관없이 그 작가가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느냐, 동일한 언어라도 그 속에 무슨 메시지가 담겨 있느냐 등의 '실질적 문제'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자는 것이다. 출처보다는 용도를 중시하고 모방과 포섭의 위험보다는 비판적 전유의 가능성을 우선하는 아체베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실용주의는 응구기의 다소 경직된 원칙주의보다 현행 탈식민주의 이론이 더 선호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체베 식의 '되받아 쓰기'는 가야트리 스피박이 경고하듯이 '균열 속의 반복'을 수반할 위험이 있다. 즉 지배자의 언어를 차용하여 지배 이데올로기의 균열을 유도하려는 작업 자체가 식민주의적 인식과 재현의 틀을 부지중에 반복하는 위험이다. 다시 말해서, 주체-타자, 중심-주변, '우리'-'그들'의 이분법적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탈식민주의의 담론적 실천은 식민주의의 논리와 언어를 거꾸로 되풀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비틀어 읽기'와 '되받아 쓰기'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탈식민주의는 결국 제3세계가 서구의 피조물이라는 서구중심주의적 시각을 스스로 추인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위험은 스티븐 슬레먼이 지적한 대로, 탈식민주의가 "제국의 담론에 가려진 채 문학 텍스트의 생산이 상당부분 결정론으로 채색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아룬 무케르지도 비슷한 우려를 표명한다. "이분법적 틀에 기초한 탈식민주의 이론은 탈식민 문화의 주체성을 과거의 점령자들에게 꼼짝없이 얽매이게 만든다. 그것은 '제국이 다시 글쓰기의 중심으로 회귀한다'라고 주장하며, 우리의 글쓰기가 우리 스스로의 필요에서보다는 부재하는 타자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은연중에 말해준다."

응구기의 문제의식이 요구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응구기가 아프리카 작가의 영어 사용을 반대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영어의 공용화는 아프리카 민중의 삶이 녹아있는 구전문학의 전통을 주변화시키고 아프리카 사회 내부의 계급적 모순을 고착화시킬 뿐만 아니라 서구 문화제국주의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 응구기가 항변하는 논지이다. 그런데 응구기가 내세우는 또 하나의 이유는 탈식민주의적 전유가 지닌 한계이다. 아체베 식의 '되받아 쓰기'는 과도기적 단계로서 유의미하지만 그것이 궁극적 목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응구기라고 해서 비판적 전유의 가능성을 전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케냐의 독립운동(Mau Mau) 과정에서 기독교 성서와 찬송가를 민중의 이데올로기 교육에 활용한 것을 두고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전유한 것에 비유하며 그 효과를 높이 평가하고, 아체베의 영어 소설에 대해서도 아프리카를 서구 세계에 올바로 알리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인정한다. 응구기 자신도 1986년 『정신의 탈식민화』의 출간을 기점으로 기쿠유어로만 작품활동을 하기 이전까지는 『한 톨의 밀알』을 비롯한 다수의 영어 소설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응구기가 역설하는 것은 탈식민화의 수단과 목적을 동일시하지 말자는 것이다. 응구기가 보기에, 식민적 과거와 신식민적 현재를 극복하려는 노력 못지 않게 탈식민적 미래를 지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비록 그 미래가 유토피아적이라고 하더라도 아니 유토피아적이기 때문에 더욱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응구기의 실천은 상징적이면서도 전복적이다. 자기가 속한 대학의 영문과를 폐지하고 영어 대신 기쿠유어로 소설을 쓰며 미국에서 활동하면서도 기쿠유어 학술지를 발간하는 등의 작업은 그 자체로는 현실적 파급력이 미약한 '찻잔 속의 태풍'처럼 보인다. 그러나 응구기는 영어제국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영어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어 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또한 기쿠유어가 영어 못지 않은 미학적·학술적 가치를 지닌 언어이며, 한때의 필명이었던 '제임스 응구기'보다 '응구기 와 씨옹오'라는 본명이 더 아름답고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고자 한다.

그렇기에 응구기의 실천은 현실에서 동떨어진 소망충족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개입하면서도 현실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이중의 기획이다. 그 기획의 이면에는 "아프리카를 서구의 눈으로 바라보는 습관을 극복하는 것은 아프리카어의 주변성을 극복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희망 섞인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 동시에 거기에는 "자신을 노예로 인정하지 않는 노예는 결코 온전한 노예가 아니다"는 제3세계인의 자긍심과 저항의지가 깔려 있다.

이러한 믿음과 용기는 오늘의 제3세계 탈식민주의가 갖추지 못한 미덕이다. 서구의 제도권 아카데미즘에 편입되어 주변성은 극복했지만 원래의 전복성과 실천성은 상실한 탈식민주의로서는, 응구기의 주장을 무모하고 시대착오적인 토착주의자의 발언으로 일축하기 이전에 그 속에 담긴 정신을 한번쯤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응구기의 원칙론은 이론화와 서구화의 길을 걷고 있는 탈식민주의를 불편하게 만들지 모르지만, 그러한 불편함은 생산적 긴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것은 탈식민주의의 잊어버린 과거를 기억나게 하고, 프란츠 파농의 절박한 외침과 호미 바바의 정교한 분석 사이에 가로놓인 간격을 일깨워준다.

그런 점에서, 응구기의 당위는 아체베의 식의 실용주의가 서구의 담론적 전략에 포섭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불침번이며 탈식민주의의 무디어진 비판의 칼날을 다시 예리하게 만드는 벼루의 역할을 한다. 만약 응구기의 존재가 마르크스주의의 그늘을 벗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려는 탈식민주의에게 달갑지 않은 참견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탈식민주의가 그만큼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뿌리로부터 멀어졌음을 반증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도식적으로 요약하자면, 아체베와 응구기는 영어제국주의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저항의 두 가지 방식을 대변한다. 즉 한 쪽이 현실론이라면 다른 한쪽은 당위론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양자간의 긴장이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 변증법적 통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아체베와 응구기가 탈식민주의의 전략으로 내세우는 전유와 거부는 양자택일의 상호배타적 관계가 아닌 수단과 목적의 상호보완적 관계로 파악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거부가 탈식민주의의 욕망이요 의지라면 전유는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방편이 되는 것이다. 아체베를 어중간한 '타협주의자'로 응구기를 완고한 '거부주의자'로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게릴라전을 펼치는 아체베의 지혜와 정면도전을 외치는 응구기의 용기가 함께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접근이 이루어질 때 영어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은 더욱 효과적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2001년 10월 27일
영미문학연구회 가을정기학술대회


발표자 이경원선생은 연세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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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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