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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읽히는 평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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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길영

작성일자

2008-07-17

이메일

조회

2020


요새 신문문화면들에는 한국문학 관련기사가 꽤 올라온다. 한국문학, 특히 소설이 일종의 부흥기를 맞고 있다는 반가운 기사도 있다. 곧 나오거나 조만간 나올 소설과 시에 대한 소개도 올라온다. 하지만 그런 기사들에 챙겨 읽을 만한 좋은 평론집에 대한 소개가 없어 한국문학 '독자'로서 아쉽다고 생각했다. 정과리 평론집 정도만 읽을 목록에 올려둔 상태이다. 내가 보기에는 '저주받은 걸작' 평론집인 임우기 평론집 [그늘에 대하여] 를 읽은 이후 읽는 즐거움이나 배움을 얻는 평론집을 읽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여기서 '배움'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일단 논외로 하자) 물론 내가 게으른 탓이다. 좋은 평론집들을 좀더 많이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나는 갖고 있다.

그런데 주간지 [시사인]에 읽을 만한 평론집에 대한 소개기사가 있어 퍼온다. 대체적으로 아래 글의 찬찬한 지적에 동의하지만, 역시 평론을 하는 신형철이 한 이런 지적에는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원론으로는 맞지만 각론에서는 동의하기 힘들다.

> "내면이나 문장 따위가 아니라 통찰과 논리라고 점잖게 말씀하신다. 맞다. 좋은 글을 만드는 힘의 90%는 통찰과 논리가 감당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좋은 ‘글’일 뿐이다. 좋은 칼럼·보고서·논문과 다르지 않다. 나머지 10%에 해당하는 것이 내면과 문장이다. 바로 그 10%가 평론을 ‘글’이 아닌 ‘문학’으로 만든다."

틀린 지적은 아니다. "통찰과 논리"가 있고 거기에 "내면이나 문장"이 겸비된다면 말이다. 하지만, "통찰과 논리"는 빈곤하거나 없으면서 "내면이나 문장"만 있는 글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이런 지적은 조금 나이브하다. 내가 보기에 지금 평론이 읽히지 않는 이유, 아니 적어도 내가 평론집을 굳이 찾아 읽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소위 평론들에 "통찰과 논리"가 없거나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다. 배우는 게 없기 때문이다. 배울 게 없는 글을 왜 시간과 돈을 들여 읽어야 하는가? (여기서 '배운다'는 말을 협소하게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점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내면이나 문장"이 핵심적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나는 좋은 평론의 덕목으로 굳이 둘중 하나를 택하라면 "내면이나 논리"보다는 "통찰과 논리"를 택하겠다. 물론 신형철의 지적대로, 평론은 "진리를 대변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내면의 격랑을 드러내는 목소리, 무색무취의 보편 문장이 아니라 스타일에 대한 고집으로 충전된 문장을 갖추"어야 한다.

비평가는 진리의 전달자나 해석가가 아니라 세상과,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사람이다. 그런 대화의 마음에서 읽히는 글, 독자나 작가, 세계와 대화하는 글이 나온다. 스타일은 단지 기교가 아니라 세계를 대하는 글쓴이의 태도의 표현이다.

하지만, 비평가의 글에 "내면과 문장"은 있되 "통찰과 논리"가 없으면 그런 글을 왜 읽는가? 많은 이들이 "내면이나 문장"을 갖춘 대표적 비평가로 작고한 김현을 꼽는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김현의 글이 지금도 어떤 호소력을 지닌 이유는 그의 글이 단지 "내면이나 문장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글에는 세상과 삶, 무엇보다 자기자신을 되돌아보는 깊은 성찰, "통찰과 논리"가 있다. 김우창이나 백낙청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들 사이에 "통찰과 논리" 그리고 "내면과 문장"에서 어떤 쪽이 더 우세하게 드러나는가에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그들의 글 모두에는 어떤 의미에서든 "통찰과 논리"가 있다. 그게 그들의 글을 지금도 살아있게 만든다. 문외한의 지적이지만, 내가 보기에 지금 평론의 문제점은 "내면과 문장"의 빈곤이 아니라 "통찰과 논리"의 빈곤이다.

문장을 가다듬고 유려하게 하는 거야 어느정도 훈련하면 가능하다. 글에 비평가의 "내면"을 좀더 드러나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좋은 평론을 만드는게 아니다. 되풀이 말하지만, 나도 이 두가지 비평의 덕목을 선택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평론은 "통찰과 논리"와 "내면과 문장"을 겸비해야 한다.

다만, 무엇이 더 중요한가? 그점에 대해 아래 글의 필자, 혹은 아래 글에서 다루는 평론집의 시각에 나는 유보없이 동의하기 힘들다. 어쨌든 읽히는 평론집이 출간되었다니 반갑다. "내면과 문장"이 뛰어나다니, 그만큼의 "통찰과 논리"도 갖춘 평론집인지는 읽어보고 판단할 일이겠다. 귀국 뒤에 읽어볼 책목록에 올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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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사인

어? 평론집이 술술 읽히네

영화평론은 영화가 될 수 없고 음악평론은 음악이 될 수 없지만 문학평론은 문학이 될 수 있다. 문학평론이 가장 위대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문학평론은 그만큼 특수하다는 얘기다. ‘뭔가’에 들러붙어서 바로 그 ‘뭔가’가 되는 유일한 글쓰기다. 이것은 축복받은 특수성 아닌가. 그렇다면 문학평론이 문학이 되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어떻게 하면 문학이 되는가. 정답은 내면과 문장이다. 진리를 대변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내면의 격랑을 드러내는 목소리, 무색무취의 보편 문장이 아니라 스타일에 대한 고집으로 충전된 문장을 갖추면 된다.

이 간단한 정답을 어떤 이는 모르고 또 어떤 이는 모른 척한다. ‘모르는’ 분이야 그렇다 쳐도 ‘모른 척하는’ 분이 많다는 것은 좀 문제다. 나는 문학평론만큼 보수적인 ‘글쓰기 제도’를 알지 못한다. 후자인 분들은 평론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내면이나 문장 따위가 아니라 통찰과 논리라고 점잖게 말씀하신다. 맞다. 좋은 글을 만드는 힘의 90%는 통찰과 논리가 감당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좋은 ‘글’일 뿐이다. 좋은 칼럼·보고서·논문과 다르지 않다. 나머지 10%에 해당하는 것이 내면과 문장이다. 바로 그 10%가 평론을 ‘글’이 아닌 ‘문학’으로 만든다.

오랜만에 ‘문학이 된 평론’의 사례가 있어 소개하려 한다. 문학평론가 정홍수의 첫 번째 평론집 <소설의 고독>(창비)이다. 문학평론집을 소개해도 될까 주저했다.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본래 작품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평론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동시대 한국 문학의 세부 주제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가 그 주제에 대한 추상적 논의를 따라가는 일 역시 어렵다. 이를 다 무릅쓰고라도 읽어보시라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억지다. 그러나 이 책은 읽어도 된다. 내면과 문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평론이기 이전에 고급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1부와 3부의 계간평과 월평 특히 좋아

먼저 문장. “이제 조금 이혜경 소설에 눈이 익어가는지, 어지간히 고단하고 아픈 이야기가 나와도 타박타박 따라가며 기다려보고 싶다. 어스름녘의 착잡함을 견뎌보자 싶다. 그냥 안타까움 속에 지칫거리며 고갯마루에 서 있어보자 싶은 것이다. 뭐, 크게 환해질 일이 있겠는가. 숨을 고르며. 욕하지 않으며. 말하지 않으며.” 예컨대 평론가 정홍수는 이렇게 글을 시작한다. 돌을 씹어 먹는 듯한 맛의 도입부 때문에 지레 읽기를 포기하게 되는 수많은 평론과는 뭔가 다른 출발 아닌가. 어떤 작가 혹은 어떤 주제를 다루건, 글의 도입부가 이러하다면 한번 따라가볼 만한 것이다.

다음으로 내면. 이인화가 독자를 계몽하려 하는 비장한 이야기꾼이 된 게 못내 불편했던 이 평론가는 본래 소설은 계몽하지 않음으로써 계몽한다고, 소설은 본래 그런 비장이나 독선과 싸우는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이런 문장을 적는다. “나는 아직도 이야기꾼으로 스스로를 격하시키지 못한 소설가들, 그들의 기억의 ‘외딴방’ 그 ‘외진 골목’에서 힘겹게 끄집어내 들려주는 그 내면의 고백들, 거기에서 출발한 ‘한국의 순수문학’을 사랑하니까.” 평론가의 이런 소박하지만 결연한 ‘내면의 고백’을 다른 평론집에서 만나기 쉽지 않고, 그 내면이 책 전체에 은은하면서도 완강하게 배어 있는 평론집을 만나기 또한 쉽지 않다.

이런 문장과 내면이 떠받치고 있어서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아주 드문 평론집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1부와 3부에 수록돼 있는 계간평과 월평이 좋다. 2004년과 2006년에 발표된 소설 중에서 뛰어난 것을 선별해 어떤 내용인지를 소개하고 왜 좋았는지를 다감하게 털어놓는다. 특히 3부의 앞부분에 수록돼 있는 서간체 평론 예닐곱 편은 이 책의 백미다. 절친했던 문우 고 김소진에게 바쳐진 글 두 편에서는 이 평론집의 심장이 뛰고 있으니 그것들은 각별히 아껴 읽어야 한다.

평론가 정홍수는 1963년에 태어나 1996년에 등단했다. 정확한 안목을 갖고 있어 평가에 헛다리를 짚는 일이 없고 냉철한 평형감각을 갖고 있어 제 흥에 취한 경박한 호들갑도 없다. 글쎄, 평론가라면 가끔은 무모한 베팅도 하고 세상의 취향과 독야청청 싸우기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대신 그는 다른 일을 해왔다. 발터 벤야민은 장터에서 ‘구라’를 푸는 과거의 이야기꾼과 골방에서 내면을 파먹는 근대의 소설가를 대조하면서, 소설은 고독한 개인의 작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이야기꾼과 소설가’). 이 평론집의 제목 ‘소설의 고독’이 거기에서 왔다. 그 고독과 소통하는 일이 지난 12년 동안 그의 일이었다. 사려 깊고 겸허하고 다정다감한 이 ‘한국의 순수문학’ 애호가 덕분에 많은 소설가가 잠시나마 고독을 잊었을 것이다.
(신형철_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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