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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유진에서 읽는 책과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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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길영

작성일자

2008-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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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667


- 경쟁과 교육

2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곧 3월이다. 한국에서는 곧 겨울방학이 끝나고 봄 학기의 시작이겠다. 이곳은 한창 학기 중이다. 지난 연말부터 연초까지 약 열흘정도의 짧은 겨울방학을 하고 개학해서 6월 중순까지 봄학기이다. 대신에 여름방학이 한국보다 한달정도 길다. 6월 중순부터 9월초까지 긴 여름방학이다. 아마도 좋은 계절을 즐기라는 뜻이리라. 지난 번 생활단상에도 썼지만, 학교생활에 큰 부담 없이 나름대로 재미있게 학교를 다니고, 방과 후에는 하고 싶은 운동도 하고 악기도 배우고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왜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저렇게 못할까 싶은 마음이 여전하다.

한국에서 학교는 이제 가고 싶은 곳, 즐거운 곳이 아니라 억압의 장소가 되었다. 여기서 아이들은 방과후 일주일에 며칠씩 운동을 한다. 지난봄부터 가을까지는 축구를 했다. 미식축구(football)가 아니라 우리가 아는 축구(soccer)이다. 이번 겨울은 둘다 농구를 한다. 주중 이틀은 연습이고 주말에는 다른 팀들과 시합이 있다. 12월부터 3월초까지 여기 아이들은 대개 농구나 수영, 혹은 실내 축구를 한다. 그리고 3월부터 가을까지는 미식 축구나 우리 아이들처럼 축구를 한다. 요새는 미국에서도 축구가 꽤 인기이다. 물론 여전히 가장 인기있는 종목은 미식축구나 농구이지만. 또 많은 아이들이 방과 후에 악기를 배운다. 기타든, 피아노든, 드럼이든, 클라리넷이든 입시를 위해서가 취미생활로 배운다. 아이들만이 아니다. 어른들, 특히 노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동호회 활동으로 악기를 배우고 연주를 한다.

이런 것들을 보며 우리도 예전에는 이런 여유가 있지 않았나 싶다. 이건 단지 미국이 한국보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 삶의 여유의 문제이다. 예전에는 한국사회에서도 그런 여유가 있었지 싶다. 나는 복고취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하지만 내 어린 시절만을 봐도 그때는 적어도 아이들에게는 여유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물질적으로 덜 풍족했어도, 그리고 미국 아이들이 즐기는 생활의 '여유'만큼은 아니었어도, 학교에 갔다 오면 아이들과 어울려 운동도 하고 동네를 휘저으며 놀기도 했다. 미국만큼의 좋은 시절과 잔디구장은 아니지만, 어쨌든 즐겁게 놀고 운동하고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입시공부가 예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건 고등학교 삼학년, 빨라야 2학년부터나 그런 ‘부담’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전에는 그래도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더욱이 초등학교 시절은 말해 뭘 하랴. 학교가 끝나면 일주일에 몇 번씩 하고 싶은 운동을 하고 여가활동을 즐기는 여기 아이들을 보면서, 그리고 그걸 낯설게 여기는 나 자신에 놀란다. 그만큼 너무나 당연한 일, 당연해야 하는 일들조차 나에게는 이제 낯설게 여겨지게 되었다는 사실에 말이다. 아이들이 놀고 운동하고 하는 것은 당연한데, 이제 그런 당연한 사실조차 한국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

이런 ‘여유’를 잃어버린 채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들, 물질적 성장과 ‘발전’을 이룬들 그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하기야 이런 말들조차 배부른 한탄으로 들린다는 걸 나도 잘 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로 고민해야 하고, 안정된 일자리가 태부족한 사회에서 이런 말들은 한가로운 담론이리라. 하지만 묻자. 그러면 예전에, 지금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했던 때에, 지금보다 더 나름대로의 생활과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 것,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아이답게 클 수 있었던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게 단지 한가한 복고취향일까? 한국사회도 미국처럼 물질적 풍요가 충족되기만 하면 그러 여유를 되찾을 수 있을까? 나름대로 즐겁게 공부하고 놀고 하면서, 아이답게 생활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경쟁이 적은 사회가 좋다고 생각하지만, ‘경쟁’이 전혀 필요 없다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사회를 바라지만, 내가 사는 사회가 자본주의 체제인한 그런 꿈은 유토피아아적 몽상에 그치기 쉽다. 경쟁의 필요성을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경쟁의 정도와 시기이다. 경쟁이 필요한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은 때가 있다. 나는 적어도 초등, 중등, 그리고 고등학교 저학년까지는 학교생활은 학교생활대로 하고, 읽고 싶은 책도 읽고, 하고 싶은 운동도 하고, 배우고 싶은 악기도 배우면서 성장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굳이 경쟁이 필요하다면 그건 대학에 가서 해도 늦지 않다. 더 나은 직장, 더 나은 일자리를 위한 경쟁 말이다. (그런 점에서 몇 번 말했지만, 나는 대학평준화론을 지지한다. 그게 지금으로서는 '백일몽'에 불과할지라도.)

왜 그런 경쟁을 아이들에게 요구해야하나? 그런 점에서 지난 10년간 폐지되었던 초등학교의 일제고사를 다시 시행한다는 말을 듣고 정말 속된 말로 꼭지가 돌았다. 이들이 정말 아이들의 입장에서 교육을 생각하는 교육자들인지, 아니면 아이들을 무슨 자기 마음대로 갖고 노는 실험쥐로 생각하는지, 분노가 치밀었다. 왜 초등학생들에게조차 점수를 매기는 시험을 봐야 하고 등수를 매겨야 하는가? 그게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과 교육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그저 어떻게든 줄을 세워야 ‘경쟁력’(sic!)이 높아진다는 근거 없는 믿음뿐이다. (그런 점에서 경쟁보다는 배려의 교육에 치중하는 핀란드 교육의 ‘힘’을 조명하는 어느 신문기사는 인상적이었다.)

나는 무조건적인 ‘친미론자’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고 피상적인 미국문화 관찰에 불과한 지적이지만, 어쨌든 스트레스 받지 않고 학교 다니고 하고 싶은 운동하면서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미국교육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곧 아이들이 한국에 돌아가 다니게 될 한국학교의 살벌한 현실이 걱정스럽다. 아이들이 아이답게 성장하는 교육, 그런 환경을 바라는 게 이리도 어려운건가? 이것도 사치스러운 불평에 불과한 건가? 그렇게 말하는 사림이라면 아마도 내 생각에 한국사회에서 아이를 키워보지 못했거나 그런 현실과는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리라.

- 2월, 유진

계속 음울하던 유진의 날씨도 한결 누그러지고 맑은 날이 많아 졌다. 물론 비 오고 흐린 날이 아직은 더 많지만, 그래도 날이 풀리니 마음도 풀린다. 사람은 역시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걸어서 학교에 갈 때 동네공원을 지나 Willamette 강다리를 가로 질러간다. 20분 거리이다. 한결 봄 냄새가 느껴진다. 문득, 한국에 돌아가면 지금 이 느낌이 그리워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유진의 맑은 공기와 푸르른 나무들이.

- 이명박 정권 출범

오늘이 이명박정권의 시작일이다. 나는 이 정권에 별로 기대하는 게 없다. 그러니 당근 설레는 마음이나 기대하는 마음도 없다. 대선 이후 약 두 달 동안 새로운 집권 세력이 보여준 황당한 작태들을 보면 내 싸늘한 마음이 그리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걸 새삼 확인한다. 많은 사람들이 새 정권이 다른 건 몰라도 경제는 살릴 것이라고 기대한다. 물론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건 내가 이 정권을 지지하고 안하고와는 상관없이 하는 기대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경제를 살린다고 할 때 그것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

나는 경제학이나 경제에는 대체로 문외한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 묻고 싶다. 새 정권은 기업만 잘되면 경제가 살아날 거라고 주장한다. 그럴까? 기업이 엄청난 이익을 얻는다 한들, 그게 그 기업의 소유자와 소수의 주식소유자들, 임직원들의 배만 불리게 되도 경제가 살아날까? 지금까지 그랬다. 엄청난 기업이익을 거둬도 그걸 사회에 재투자하지 않고 쌓아두거나 엉뚱한 땅 투기에나 써도 경제가 살아날까? 예컨대 삼성의 임직원들만 엄청난 기업수익을 나눠 가진다고 경제가 살아날까?

그 밖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안정된 직장을 얻지 못해 전전긍긍해도, 한창 일해야 할 젊은이들이 ‘88만원’세대로 남아도, 절반이 넘는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에서 언제 잘릴지 몰라 걱정하면서 생활해도, 경제가 살아날까? 새로운 정권이 이들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보장해줄 수 있을까? 그런 비전과 정책을 갖고 있을까? 나도 그러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그건 희망사항에 불과하리라는 불안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건 내가 세상을 너무 삐딱하게 보기 때문일까? 부디 내 판단이 틀렸기를 희망한다.

- 오바마 암살론

미국에서는 오바마 돌풍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이제는 ‘힐러리 대세’론에서 ‘오바마 대세’론으로 바뀌었다. 물론 남은 11월의 대선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았기에 어떻게 될지를 예측하기는 성급하다. 하지만, 나는 미국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어떤 변화의 흐름이 부럽다. 그 변화의 흐름을 오바마가 잘 파악해서 새로운 미국, 존경받는 미국의 지도자가 되기를 기대한다. '오바마 암살론'에서 드러나듯이 미국사회에도 변화의 기운을 두려워하는 수구집단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최초의 ‘흑인대통령’ 탄생을 거부하려는 인종주의의 위협도 있다. 그런 위협을 돌파하면서 새로운 미국을 이끌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도 이런 얘기들을 때마다 비슷한 개혁의 깃발을 내걸고 당선되었다가 암살된 케네디가 떠올라 불안한 마음도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미국에 필요한 변화의 기운을 되돌이킬 수는 없다. 오바마의 선전을 기대하는 이유는 그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미국의 변화가 전지구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 대학, 스포츠, 다양성

미국의 일상생활의 스케줄은 스포츠로 보인다. 여러 프로스포츠에 대한 관심은 그렇다고 쳐도, 특히 대학스포츠에 대한 관심은 놀랍다. 얼마 전까지는 대학미식축구로 법석이더니 이제는 대학농구시즌이다. 누구 말로는 프로경기보다 대학경기에 대한 관심의 열기가 더 뜨겁단다. 그 점에서 미국대학의 다양한 분화는 부럽다. 무슨 말이냐고? 잘은 모르지만, 미국에서도 아이비리그로 대표되는 소위 명문대학에 대한 관심이나 존경은 분명 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운동 잘하는 학교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그리고 운동을 통해 자신이 나온 학교에 대한 강한 애정을 표현한다. 졸업을 하고 나서도 자신이 나온 학교의 경기를 보고 열심히 응원한다.

소위 학문적으로 인정받는 ‘명문대’의 역할을 인정하지만, 그런 대학만이 좋은 대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이비 출신이 대단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렇지 않은 대학출신이 모든 면에서도 아이비출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대학교수를 나름대로 존중하지만, 그렇다고 대학교수가 특별난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비 출신이나 대학교수는 나름대로 공부에 학문이 관심이 있어 그걸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정도이다. 교수는 교육과 연구로 밥벌이는 하는 직업인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교수집단이 받는 지나친 사회적 우대와는 거리가 멀다.

공부나 연구에, 머리써서 밥벌이하는 일에 관심이 없으면 다른 일을 하며 살면 그뿐이다. 그것이 운동이든 무엇이든. 대학입학성적으로, 혹은 무슨 국가고시성적으로 일등부터 꼴등까지 대학의 줄을 세우고 서열을 매겨야 직성이 풀리고, 거기에서 자신이 나온 대학의 ‘등수’(sic!)를 확인하면서 자신의 우월한, 혹은 열등한 존재감을 확인해야 하는 한국대학의 서열주의, 학벌주의.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 이제는 좀 달라질 때도 된게 아닐까?

- [the Gospels]

Verso에서 고전적인 ‘혁명’적 저작들을 새롭게 편집해서 내고 있다. 모택동, 로베스피에르, 제퍼슨, 호치민, 예수, 트로츠키 등의 저작이 새로 편집되어 나왔다. 각 책의 머리글은 지금 활동하는 중요한 이론가들이 머리글을 쓴다. 지젝, 이글턴, 하트 등이 머리글 필자들이다. 그 시리즈 중에서 예수의 복음서를 새롭게 ‘혁명적’으로 해석한 [The Gospel] 을 읽고 있다. 이글턴이 머리글을 썼다. 머리글과 함께 가장 최근에 시도된 복음서의 영어번역을 싣고 이글턴이 정치적 해석을 시도한 각주를 달고 있다. 이글턴의 머리글은 기존에 나왔던 해방신학의 예수 해석과 많이 다르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해석도 적지 않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 머리글을 번역하고 싶다. 예수의 ‘혁명가’적 면모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몇 자 단상을 적고 싶다. 하지만, 요즘 이 책에 실린 복음서를 다시 읽으면서 요즘의 복잡한 내 마음을 달래게 된다. 특히 이런 대목.

> “Therefore I tell you, do not worry about your life what you will eat or what you will drink, or about your body, what you will wear. Is not life more than food, and the body more than clothing? Look at the birds of the air; they neither sow nor reap nor gather into barns, and yet your heavenly Father feeds them. Are you not of more value than they? And can any of you by worrying add a singly hour to your span of life? [...] So do not worry about tomorrow, for tomorrow will bring worries of its own. Today's trouble is enough for today"(Matthew 6:25-34)

내일의 걱정을 하지 않기는 쉽지 않다. 나도 그렇다. 몇 개월 후 한국에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내일 걱정을 지금 당겨한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 여기’에 충실하기. 쉽지 않지만 그렇게 생활하도록 예수는 권한다. 나는 “heavenly Father"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이지만, 복음서에 실린 예수의 사유는 놀라운 바가 적지 않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가 믿는다는 '예수'가 어떤 예수인지 문득 의문이 든다. 기독교신자가 아니더라도 가스펠은 꼭 읽어볼 만한 텍스트이다. 김규항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한 [예수전]을 준비 중이란다. 기대가 된다.

- [the Gnostic Gospels]

물론 신약의 텍스트만이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은 아니다. [다빈치 코드]가 새삼 불러일으킨 예수의 숨겨진 삶과 가르침에 나는 관심이 많다. 그래서 요즘 틈틈이 읽는 책이 프린스턴대의 종교학 교수인 Elaine Pagels가 쓴 [The Gnostic Gospels]이다. 1979년에 나온 책이다. 불과 160여 쪽에 안 되는 얄팍한 책이다. 하지만 20세기에 나온 가장 중요한 종교학, 기독교학 연구서 중의 하나로 꼽히는, 그만큼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저서이다. 이 책에서는 소위 ‘정통’ 기독교가 확립해온 기독교 정전, 특히 신약 복음서의 ‘정전화’ 과정을 새롭게 조명한다. 저자는 1946년에 이집트에서 발견된 ‘Naj Hammadi' 복음서들을 다시 읽으면서 정통기독교가 억압해온 예수의 가르침의 다른 면을 드러낸다. 이 책이 국내에 번역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꼭 번역되기를 바라는 책이다.

신약의 ’복음서‘가 하나님 혹은 예수의 말을 문자 그대로 적은 것이라고 믿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꼭 읽어볼 책이다. 물론 매우 마음이 불편하겠지만, 원래 좋은 책은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책이다. 문학계에서도 문학텍스트의 ’정전화‘는 이제 해체의 대상이다. 그런 정전비판과 해체 작업이 기독교 쪽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는 걸 확인하는 것은 흥미롭다. 현재 정전으로 인정되는 신약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도 놀랍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며, 다른 예수의 목소리가, 가르침이 존재한다는 걸 확인하는 것도 놀랍다. 종교텍스트든 문학텍스트든 모든 텍스트가 ’정통성‘과 ’권위‘를 획득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건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헤게머니 투쟁의 결과이다. 그노시스 신학에서는 예수의 가장 사랑받고 신뢰받는 수제자로 묘사되는 마리아 막달라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정통 기독교에서 배척된 것처럼.

- 영화 속의 폭력

틈틈이 영화를 본다. 며칠 전에는 [람보4]와 한국영화 [펀치레이디]를 보았다. 구성이나 스토리, 주제의식 등에서는 상투적인 영화들이다. 그런 '상투성'을 비판하기는 쉽다. 하지만 내가 이 두 영화에서 흥미롭게 본 것은 ‘폭력’의 문제이다. 거의 인간 말종에 가까운 개인이나 집단이 행사하는 폭력이 있다. 그런 구체적인 물리적 폭력 앞에서도 우리는 ‘사랑’과 ‘관용’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순간에도 사회구조적 문제, 제도적 해결, 법적 해결, 평화적 해결을 모색해야 하는가? 그래야 하는가? 아니면 그 폭력에 맞서 더 강한 ‘폭력’으로 맞서야 하는가? 정의로운 ‘폭력’은 가능한가? 내 머리는 전자를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내 감성은 후자 쪽으로 이끌렸다. 문득 벤야민이 쓴 ‘폭력론’을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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