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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랑말랑한 개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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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길영

작성일자

2008-01-20

이메일

조회

2732


밖에 나와 있으니 우리말 책을 구해 읽기기 힘들다. 대신에 귀국하면 읽어보려고 읽을 만한 책들이 있나 싶어 신문서평기사를 찾아 읽는다. 최근 읽은 신문 서평에서 인상 깊게 읽은 두 대목.

하나는 ‘성인’으로 추앙받는 테레사 수녀에 대한 책의 서평기사이다.


>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라고 했고 1984년 미국 다국적기업 유니언 카바이드의 인도 보팔 공장에서 수천 명이 즉사한 유독가스 참사가 일어났을 때 분노한 유족들에게 말했다.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히친스는 결국 세계의 구조적 모순에 눈감고 지배자들 위주의 질서를 긍정하며 현상유지를 꾀하는 종교 세력을 문제 삼고 있으며, ‘자비를 파는’ 마더 테레사야말로 그 첨병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소위 ‘코뮨주의’를 내세우는 이진경과 그의 ‘친구들’이 새로 낸 책의 서평이다.

> “옛 ‘동지들’처럼 사유화와 자본주의 화폐 경제에 반대하고 혁명을 꿈꾸지만 궁극적 목표로 가는 길은 다르다. 이 책의 부제인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이 이를 극명히 보여준다. 기존 마르크스 정치학은 모든 차이와 대립을 계급 적대로 환원했다는 점에서 ‘적대의 정치학’이었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대신 어감상 정반대인 ‘우정의 정치학’을 내세운다. 적이 아니라 친구에서 시작해야 하며, 부정적 방법이 아니라 긍정적 방법으로 사유하자는 것이다. “긍정적 감응이 발생하고 지속된다면 경제적 이해관계나 정치적 적대 관계를 가로질러 우정의 관계가 형성된다”고 했다. 경제적 대립이나 정치적 적대조차도 우정을 막는 결정적인 경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두 책의 서평에서 눈길을 끄는 개념들. “용서”, “우정.” “기쁨”등의 듣기 좋은 말들이다. 그것들은 “부정적 방법”이 아니라 긍정적 방법으로 사유“하는 새로운 코뮨주의’의 도구들이다. 그것들은 맑스가 내세웠던 ”적대의 정치학“과 대비된다. 예컨대 '즉은 개' 취급을 당하다 요새 조금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맑스가 주장한 ”적대“나 ‘투쟁’등에 비해 이런 말랑말랑한 개념들은 얼마나 듣기 좋은가? 나도 이런 부드러운 개념들 좋아한다. 그리고 가능한 그렇게 살기를 희망한다. 용서니, 우정이니, 기쁨이니 하는 말들이 내 삶이나 나를 둘러싼 현실에서 ‘현실화’되는 걸 보면서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들도 많다. 사랑이니 화해니 관용이니 하는 말들.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 듣기 좋은 개념들을 들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마치 입에는 달콤하지만 뭔가 속에서 불편한 싸구려 초콜릿 같은 느낌.(그래서 나는 밀크초콜릿보다는 씁쓸한 블랙초콜릿을 좋아한다) 그리고 떠오르는 것은 사회적 적대를 단호하게 주장했던 맑스의 ‘철지난 개념’이다. 그의 “적대의 정치학”이다. 그리고 맑스와 라캉 사이의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비역질’을 시도하는 지젝이 맑스에 기대 여전히 옹호하는 사회적 적대로서의 실재개념이다. 그리고 나는 부드러운 ‘코뮨주의’자들보다 듣기에 거북한 딱딱한 말들을 버리지 않는 맑스와 지젝이 더 현실을 제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의 구조적 모순에 눈감고 지배자들 위주의 질서를 긍정하며 현상유지를 꾀하는“ 사회적 적대와 착취, 비대칭적인 사회적 역학 관계가 여전히 현존하고, 다수 대중이 그런 사회적 적대관계에서 ‘역설적으로’--이번 한국대선이 보여주듯이--자신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세력을 지지하는 기이한 현실에서, ”용서“, ”우정“, ”기쁨“은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개념들일까? 문득 드는 질문이다.

대개 대중은 말랑말랑한 것을 좋아한다. 나도 그렇다. 말랑말랑한 게 당장 먹기 좋고, 듣기 좋으니까 말이다. 블랙 초콜릿보다 밀크 초콜릿이 인기가 있듯이. 정치인이나 종교인 같은 이들이 그런 말랑말랑한 말을 쓰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그런 말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인은 다르다. 그는 대중이 듣기 좋아하는 말랑말랑한 말이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의 정체를 가능한 정직하게 전달해야 한다. 그게 듣기 거북한 딱딱한 진실일지라도. 그래서 쉴러가 그랬던가. 지식인은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말이 아니라 대중이 들어야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과연 우리가 사는 지금의 사회,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무자비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득세하는 시대, 사회적 연대나 배려가 아니라 무자비한 경쟁과 승자독식이 ‘진리’로 용인되는 시대에, ”용서“니 "우정”이니 “기쁨”이니 하는 새로운 ‘코뮨주의’의 개념들이 씨알이 먹힐까? 이런 말랑말랑한 말들을 나도 좋아하고 내가 사는 사회에서 그런 말들이 현실로 느껴지는 사회가 되기를 누구보다 나도 바란다. 하지만 내가 판단하기에 불행히도 '지금, 여기'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이런 부드러우나 입에만 달콤한 말들을 새로운 사유의 비전으로 내세우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설득력이 없게 들린다.

이게 내가 너무 세상을 강퍅하게 바라보기 때문일까? 그게 사실이라면 나로서는 차라리 다행이다. 내가 세상을 잘못 보고 있고, 세상이 “용서”, “우정”, “기쁨” 같은 “긍정적 감응”으로 지금 돌아가고 있거나, 조만간 그렇게 된다면 그건 잘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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