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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힘과 창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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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오[자료실]

작성일자

2008-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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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전통’의 힘과 창조성
프랭크 레이먼드 리비스 저, 김영희 옮김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나남 2007)

김재오
金載五 영남대 교수.

정기적으로 배달되는 학술지들에 실린 소설 관련 논문들을 보면 ‘타자’니 ‘억압’이니 ‘봉쇄’니 ‘균열’이니 하는 단어가 상당수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유행하는 철학적 담론이 열어준 지평에서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공통된 비평적 흐름이 눈에 띄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작업의 의의를 충분히 인정한다고 해도 뭔가가 누락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작품이 얼마나 창조적이고 탁월한 성취를 이룩했는가의 여부에서 나온다. 이러한 평가는 작품과 작품, 그리고 작품 내에서 잘된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가려주는 일일 것이고, 엄밀히 말하면 이것이 ‘비평’의 본령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평정신의 부재는 하나의 지적 풍토로서 다수의 견해에 대해 지적 관용성을 주장하는 상대주의의 영향 탓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현대의 비평적 흐름을 적극적으로 사주어 비평의 민주화로 볼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긍정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제까지의 문학‘전통’에 대한 근거와 기준이 허물어지고 그런 전통을 부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또한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을 확립하려는 리비스(F. R. Leavis)는 계승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청산의 대상이 되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나 리비스의 작업 자체가 기존의 비평전통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고, 그가 세우려는 ‘전통’이 작품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에 기반을 두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손쉬운 청산대상이 되기는 힘들 것이라고 판단된다. 리비스는 근자의 정전논쟁에 스며 있는 문제의식을 선구적으로 보여주되 전통에 대한 새로운 근거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문학비평이 새삼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거와 기준의 제시가 작품 읽기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특정 담론에 기대어 리비스를 비판해도 큰 소득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리비스의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작품 읽기에 소홀했는지를 반성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런 점에서 ‘반철학자로서의 비평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이 책은 ‘이론’의 적용이나 ‘입장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에게는 좋은 해독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리비스의 말처럼 “습관에 얽매어 장님이 된 어리석은 자신의 모습”(59면)을 교정하기 위해서도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은 일독을 권할 만하다. 특히 끊임없이 사유를 자극하고 때로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이해할 수 있는 리비스의 까다로운 문장을 자연스런 우리말 번역으로 읽는 기쁨도 만만치 않다.

제인 오스틴(Jane Austen), 조지 엘리어트(George Eliot), 헨리 제임스(Henry James),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 등의 작가를 선별하여 하나의 전통으로 확립하려는 리비스의 시도에서 개별 작가들의 관계는 단순한 ‘영향관계’가 아니라 ‘창조적인’ 관계이다. 오스틴에 대한 언급에서처럼 한 작가는 자신을 낳는 전통을 스스로 창조해서 제시한다. 즉 이전 작가의 작업들이 지니는 잠재적 가능성과 의미를 작품을 통해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작가들 사이의 가장 깊은 영향관계는 유사성에서 나타나지 않고 ‘다름의 깨달음’에서 비롯된다고 리비스는 주장한다. 물론 이런 깨달음은 근본적인 인간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라는 공통점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리비스는 제인 오스틴과 조지 엘리어트의 차이를 규명하려고 할 때 두 작가의 도덕적 열정과 지성, 그리고 주제와 관심에 촛점을 맞추기보다 조지 엘리어트 소설의 특징과 발전을 중심으로 이 두 작가의 ‘다름’을 ‘자리매김’한다.

조지 엘리어트의 소설을 평가할 때 두드러지는 바지만, 이 책에서 하나의 비평원리가 살아 숨쉬고 있다면 그것은 명시적으로는 언급된 적이 없지만 ‘감수성의 통합’이라는 기준이다. 이 개념은 주지하다시피 T. S. 엘리어트(T. S. Eliot)의 것이지만 리비스는 작품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가운데 이를 내재적으로 적용시키고 있다. 이 기준은 작품을 “하나의 살아있는 전체로 빚어내는 유기적인 원칙”(57면)으로서 개별 작가의 작품들과 작품 속의 대목들을 평가하는 데도 활용된다. 조지 엘리어트의 인물묘사에 드러난 치명적인 결점을 지적하는 대목이 전형적이다. 가령 조지 엘리어트가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The Mill on the Floss)의 여주인공 매기 털리버(Maggie Tulliver)와 자신을 지나치게 동일시함으로써 생겨나는 부조화와 괴리가 이 작품에서 의미심장한 실패이며, 이를 극복하느냐가 작가의 성숙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런 리비스의 주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리비스도 매기의 미성숙을 부드럽고 공감어린 필치로 그리는 것 자체야 탓할 일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리비스는 매기의 이런 측면이 비평의 부재 속에서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경향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며, 이는 비평가를 비롯한 독자의 독법에 대한 문제제기인 것이다.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이런저런 인물에 공감과 반감을 표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소설을 읽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럴 경우 작품 전체를 시야에서 놓치게 되고 작품의 일면을 지나치게 부각시킬 우려가 있으며, 이는 인물에 독자를 투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겠다. 리비스가 보기에 진정한 공감이란 이해에 기초하는바, “미성숙을 이해함이란 미묘한 점을 십분 배려하면서도 그것을 성숙한 경험과 관련지음으로써 ‘자리매김’하는 일”(81면)이다.

이런 대목에서도 드러나지만 리비스는 작품, 작가, 독자에게 동시에 적용되는 비평적 기준을 제시하는바, 그것은 통합된 감수성과 짝을 이루는 탈개인성(impersonality)의 성취 여부이다. 작가의 경우 이러한 성취는 원숙한 예술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리비스가 󰡔필릭스 홀트󰡕(Felix Holt)의 한 대목을 분석하면서 조지 엘리어트의 성숙을 논할 때 이 점이 특히 부각된다. 조지 엘리어트의 빼어난 예술이 가능했던 것은 “오랜 깊은 경험―성찰적 사유를 통해 반추되고 그래서 집중이 가능해진 경험―에 집중함으로써 그만큼 더 명료하고 깊어진 지각력”(99면)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지각하느냐는 지각에 무엇을 동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조지 엘리어트는 최고의 지성을 동원하였”(같은 면)다는 것이다. 이런 통합된 감수성이 발휘될 때 ‘정서’는 외부에 개방적이되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사심 없는 반응이 되며 지성의 활동과 구별되지 않는다. 바로 이런 기준으로 볼 때 󰡔미들마치󰡕(Middle March)에서 도러시아(Dorothea)의 경험은 자기탐닉적 백일몽에 가까워 실감도 없고 객관성도 결여된 실패한 인물묘사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대목을 보면 리비스가 등장인물에 대해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생각도 들 법하다. 도러시아의 경험을 이상은 드높으나 실현할 토대는 없는, 시대의 한계에 갇힌 인물 특유의 감수성의 산물로 바라보고 작가도 바로 그런 도러시아에 공감할 여지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비스가 엘리어트의 성숙을 전제로 하는 비판인 만큼 적어도 엘리어트 전체 소설을 놓고 볼 때 이러한 비판은 일정한 설득력을 지닌다.

통합된 성숙한 감수성이라는 기준은 󰡔대니엘 디론다󰡕(Daniel Deronda)에서 잘된 부분을 󰡔그웬덜린 할레스󰡕(Gwendolen Harleth)라고 따로 선별하여 그 성취를 높이 평가하는 데도 적용된다. 특히 이 작품을 분석하고 평가하면서 리비스는 이 작품에 영감을 받아 헨리 제임스가 집필한 󰡔어느 여인의 초상󰡕(The Portrait of a Lady)을 비교하는데, 이 대목은 이 책 전체에서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작가들간의 상대평가를 전제로 이루어지며, 그 평가의 촛점은 이 두 소설의 여주인공인 그웬덜린 할레스(Gwendolen Harleth)와 이자벨 아처(Isabel Archer)의 인물묘사에 맞춰진다. 물론 이 여주인공들을 따로 떼어내서 유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등장배경이 되는 세계에 대한 작가의 현실감각과 복합적 이해 등 작품 전체를 염두에 두고 두 인물의 차이를 설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런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헨리 제임스가 조지 엘리어트의 소설을 나름대로 훌륭하게 계승하고 있지만 다분히 편향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이 드러난다. 조지 엘리어트의 경우 생생한 가치의식과 심오한 도덕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인물묘사에서 복합적인 구체성을 보여주는 반면, 제임스는 ‘예술’을 성취하겠다는 생각이 앞서 배제와 단순화가 동반된다는 것이다. 리비스는 그웬덜린의 이기주의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감을 통해 소설의 극적 긴장과 대화의 생동감을 높이고 도덕적 선택과 경제적 필요의 연계성을 부각시킨 조지 엘리어트의 인물묘사를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이런 인물묘사를 통해 작가는 독자에게 도덕적 성찰과 가치판단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이자벨과 관련하여 리비스는 제임스의 ‘경이로운 예술’이 이자벨의 내면을 구현해 보여주는 데 관심이 없고 독자로 하여금 일종의 심리추리에 몰두하도록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이자벨의 심리란 ‘삶’의 테스트를 거치지 않는 것이며, 도덕적 치열함과 불가분의 관련성을 지니는 예술적 치열함이 인간적 관심사의 실질적 측면과 괴리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비교를 통해 다다른 암묵적 결론은 ‘예술적’ 성취에서도 오히려 조지 엘리어트가 헨리 제임스보다 앞선다는 점이다. 특히 제임스의 장기인 상징구사도 조지 엘리어트에 비하면 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작품의 일부로 등장인물의 행위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그 의미가 작품 전체를 통해 필연적이고 자연스럽게 발전해가는 조지 엘리어트의 상징에 비해 제임스의 상징은 행동과 별도로 구상되고 차후에 도입된 것으로서 “억지로 짜맞춘 느낌이 역력하다”(185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3장에서 리비스는 제임스 소설의 특징과 성취를 다루면서 조지 엘리어트와의 상대평가에서 가려진 제임스의 진면목을 되살리려고 노력한다. 제임스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호손과 영국소설가들의 영향, 제임스 특유의 문명과 국제 주제에 대한 관심을 거론한 뒤에 이러한 “다양한 경향과 충동들의 활기찬 균형”(228면)에 도달한 작품으로 󰡔어느 여인의 초상󰡕을 예시한다. 물론 이전의 비판을 의식한 듯 리비스는 이자벨의 이상화된 인물묘사에 비판적 평가를 내리지만 “신빙성이 있는 인상적 인물”(같은 면)이라는 식으로 재조명한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주변 인물들의 묘사에서 제임스는 그들이 속한 세계에 대한 암묵적 비판을 가함으로써 이자벨의 선택이 갖는 의미를 구체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리비스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제임스의 성취에 대한 리비스의 평가는 조지 엘리어트에 대한 평가와 비교할 때 뭔가 구체성을 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리비스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적 성취를 적극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비평적 기준을 찾지 못한 것인가. 실제로 통합된 감수성이나 탈개성성 등 조지 엘리어트를 평가할 때 사용했던 비평적 기준들이 헨리 제임스를 논의할 때는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호손을 거론하면서 잠깐 언급한 바 있는 미국 특유의 소설 전통과 제임스의 연관관계에 대한 구체적 탐색이 누락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제임스의 성취를 디킨스(Charles Dickens)와 연결시키는 데서 보이듯 리비스는 제임스를 영국소설의 전통으로 자리매김하려고 함으로써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제임스의 성취를 미국소설의 전통과 관련해서 파악할 때 이 책의 성격과 문제점이 잘 드러날 것으로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인데 제임스를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필자로서는 그런 작업을 유관 전공자가 수행했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할 따름이다.

리비스가 제임스의 성취보다는 약점을 지적할 때 조지 엘리어트를 평가할 때 사용한 비평적 척도가 부활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는 이 책의 성격을 가늠하는 중요한 실마리라 할 수 있다. 제임스 후기작의 과도한 미묘함과 작품으로서의 미진함이 섬세한 도덕감각, 즉 “인생과 인성에 대한 섬세한 분별력”(246면)의 부재와 관련된다는 비판은 처음에 리비스가 위대한 영국소설가의 특징을 거론할 때부터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 리비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관심이 “삶에 대한 유별나게 발달된 관심이자 집중적 탐색”(30면)이라는 점이며 이것이야말로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탐구가 예술적 성취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관점에서 볼 때 제임스의 후기작이 낮게 평가되고, 조지프 콘래드 소설의 성취가 제임스의 약점을 극복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가령 󰡔노스트로모󰡕(Nostromo)의 형식을 논하면서 이 작품이 시종일관 생생한 실감과 강렬한 인상을 동반하는 “풍요롭고 포착하기 힘드나 고도로 구성된 패턴”(293면)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나, 󰡔비밀요원󰡕(The Secret Agent)의 미묘한 어조나 복잡한 구조가 도덕적 관심을 통제원리 삼아 주제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탁월한 예술적 성취를 거두었다는 판단 등은 “복잡함과 끝없는 섬세함을 보여주며 직접성에는 무능력한”(255면) 제임스의 후기 문체에 대한 비판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이런 대조적인 평가를 통해 암시되는 것은 ‘현대소설’에 대한 리비스의 견해이다. 어떤 작품이 독특한 기법들을 사용해서 특정 주제를 다루더라도 이것이 예의 삶에 대한 깊은 관심과 결합하지 않으면 예술 자체로서도 실패한 작품이 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리비스가 󰡔노스트로모󰡕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선 리비스는 이 작품에는 “나날이 이어지는 사회적 삶의 친근한 느낌”(307면)이 없으며 콘래드에게 다분히 현대소설적 특징인 ‘고독’의 주제가 반복된다는 점을 들어 조지 엘리어트의 소설이 구현한 삶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콘래드 특유의 감수성이 “고립된 의식의 긴장과 굶주림을 매우 뼈저리게 알고 있으며, 현실이 일종의 협동 속에 유지되는 사회적인 것이라는 점을 매우 깊이 인식하고 있는 작가의 감수성”(319면)이라는 것이다. 즉 콘래드의 최선의 작품에서 삶의 활력이 충분히 살아있다는 평가이다.

이런 평가는 디킨즈를 다루는 5장에서 분명해지듯이 소설가의 언어적 활력이 ‘문체’보다는 “삶에 대한 비상한 감응력”(375면)에서 비롯된다는 리비스의 지론과 맥이 닿아 있다. 실제로 리비스는 콘래드가 ‘비전과 인물 설정’에서 디킨즈를 이어받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리고 콘래드와 디킨스 모두 셰익스피어의 영향이 두드러진 극(시)적 창조력의 소유자임을 지적한다.

리비스의 이러한 지론에 따르면 현대소설적 주제를 다루는 소설들이라도 그 소설들이 삶을 제대로 구현했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상대평가가 가능해지는 셈이다. 사실 이 책의 1장에서 로런스(D. H. Lawrence)와 조이스(James Joyce)를 비교할 때 ‘현대소설’에 대한 리비스의 견해가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리비스는 로런스를 “기법의 발명가, 혁신가, 언어의 달인이라는 측면에서 훨씬 창조적인 작가”(57면)라고 높이 평가하고, 반면 조이스의 󰡔율리시즈󰡕(Ulysses)가 보여준 대담한 형식실험을 유기적인 원칙이 결여된 “막다른 궁지거나 해체의 조짐”(같은 면)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조이스의 영향을 받은 일련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자유주의적 이상주의에 대한 그릇된 형태의 반발”이야말로 ‘해체’의 증거가 된다. 이런 비판이 유효하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리비스의 주장에서 그가 헨리 제임스에게서 발견한 어떤 편향이 조이스에게서도 느껴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리비스는 로런스의 후예가 없음을 개탄하지만, 이는 처음에 그가 상정한 ‘위대한 전통’의 폭이 협소해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영국소설에 국한된다고 해도 몇몇 작가들 위주로 전통을 세우려다 보니 토마스 하디의 평가에서 두드러지듯이 그외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다채로운 면모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되었다. 따라서 ‘전통’에 속하는 작가들과 속하지 않는 작가들 간의 관계가 수직적 위계의 관점에서만 언급되지, 상호영향의 관점에서는 논의되지 않았다. 또한 로런스의 형식과 기법상의 혁신을 거론하는 과정에서 그 혁신의 출발점으로 지목한 “삶에 대한 가장 진지하고 긴박한 관심”(55면)은 바로 리비스의 비평적 태도를 형성하는 핵심사항이 되는바, 이 때문인지 소설 장르에 대한 다른 고려들이 봉쇄되는 느낌이다. 작가의 ‘책임감’이나 ‘도덕의식’이 강조되는 까닭에 소설에서 느끼는 ‘재미’도 항상 이와 관련되어 다루어지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느낀 ‘갑갑함’도 여기에서 연유한지 모르겠다.

소설이 ‘잡탕’ 장르인 만큼 때로 다양한 형식실험을 통해 심지어 유기적 구조에 어긋나는 요소들까지 도입함으로써 ‘삶’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양한 형식의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요즘 시대에 리비스의 문제의식을 새롭게 재구성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고, 이는 최신의 이론들이 리비스를 동지로 삼든 적으로 삼든 어떻게든 담론의 싸움터로 끌어들이는 일이 될 것이다.□
([안과밖] 24호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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