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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기나긴 혁명]: 왜 윌리엄스로 돌아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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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승철[자료실]

작성일자

2008-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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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7


󰡔기나긴 혁명󰡕: 왜 윌리엄스로 돌아가야 하는가
레이먼드 윌리엄스 저, 성은애 옮김 󰡔기나긴 혁명󰡕(문학동네 2007)

송승철
宋承哲 한림대 교수.

작년 말 성은애 교수가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의 󰡔기나긴 혁명󰡕(The Long Revolution)을 번역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조금 황당했고, 꽤 송구했고, 무척 반가웠다. 조금 황당했던 이유는 이 저작이 1961년에 출간되었으니 근 반세기가 지나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문화연구를 정초한 고전으로 종종 언급되지만 요즘 문화연구자들이 굳이 이 저작을 찾아 읽으려 하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나는 윌리엄스의 글을 악필의 한 표본으로 생각한다.

이 저작에 대한 비판 가운데 하나가 “육체 없는” (disembodied) 문체라는 것인데, 단순히 문체에 관한 지적이라기보다 핵심적 발언이 나와야 할 순간에 저자가 매우 애매하고 추상적인 목소리로 말한다는 비판을 담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흔히 리비스적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이를 사회주의적 전망으로 극복하려고 했고, 그러면서도 맑스주의적 색채를 띤 용어는 피하려 했던 그의 특이한―‘고독한’―위치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흔히 말해진다. 예를 들면 이 책에는 경제․정치․문화․가족과 같은 용어가 부양․결정․의사전달․생식과 양육 따위의 생경한 어휘로 왕왕 대체되어 있다. 따라서 처음 읽으면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 어쨌든 이로 인해 번역자도 고심하며 번역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훑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공을 적지 않게 들였다. 윌리엄스를 읽은 사람으로 꽤 송구했던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제 무척 반가웠던 이유를 설명해야겠다. 우선은 고전급 저작이 번역되었다는 점 때문이지만, 실은 그보다도 이론 영역에서 윌리엄스를 다르게 대접할 계기가 생길까 싶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까놓고 말하자. 이론 영역에서 윌리엄스는 거의 죽은 개에 해당한다. 이미 1995년에 프렌다거스트(Christopher Prendagast)가 지적한 바처럼 Christopher Prendagast, ed., Cultural Materialism: On Raymond Williams (Minneapolis: U of Minnesota P 1995) 2면. 탈구조주의 시대의 이론가 가운데 그의 유산을 물려받으려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다들 적당히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매장하고 있다. 그러니 이 번역본을 제대로 대접하려면 현 단계 비평이론의 대세 속에서 반세기 전에 나온 이 저작의 의의를 검토해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저작에 대한 저간의 평가를 들어보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겠다.

󰡔기나긴 혁명󰡕은 출간 당시 우파와 좌파에게 동시에 비판을 받았다. 우선, 말콤 피톡(Malcolm Pittock) Malcolm Pittock, “The Optimistic Revolution,” Essays in Criticism 12 (1962) 82~91면; John Higgins, Raymond Williams: Literature, Marxism, and Cultural Materialism (Routledge 1999) 49~50면 참조.과 같은 보수적 논객들은 저자가 자신의 소망(즉 사회주의적 전망)을 현실적 가능성으로 포장했다고 비판했는데, 이것은 이 저작에 대한 우파 논객들의 상투적 비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비판이라기보다 힐난이고 이제는 역사적 일화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히긴스(John Higgins)가 말한 바처럼 이
러한 상황을 알아야 이 저작이 지닌 당대적 급진성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윌리엄스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좌파 내에서 오히려 생산적 비판이 많았다. 가장 파문이 컸던 것 가운데 하나가 윌리엄스가 속했던 신좌파 내부에서 E. P. 톰슨(E. P. Thomson)이 제기했던 신랄한 공격이다. 이 저작의 제목이 ‘기나긴 혁명’이듯, 윌리엄스는 의사전달의 기회를 넓히는 방식으로 사회의 각 부분들을 연결하여 공통의 문화를 만들 것을 주장하는데, 즉 윌리엄스는 혁명을 거치지 않고도 기존 사회를 민주적으로 개혁할 수 있다는 전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윌리엄스에게 문화연구는 ‘삶의 전체적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의 주장은 요즘도 개량주의로 비판받을 여지가 많은데, 톰슨이 비판한 요체는 사회의 근본적 작동원리가 ‘삶의 전체적 방식’이 아니라 ‘투쟁’이라는 점이었다. 요컨대 역사의 핵심은 의사전달이 아니라 계급투쟁이라는 점을 윌리엄스의 글이 감추고 있다는 비판이다. 실제로 이 저작 2부에 실린 글들은 문화제도의 성격과 변화과정을 다루면서도 그 제도 속에서 움직이는 집단관계나 권력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영국노동계급의 형성󰡕(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을 읽어본 독자라면 톰슨이 장인들의 문화정치학적 투쟁을 꼼꼼히 기록한 것과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나중에 이 지적을 어느정도 받아들인다. 예를 들면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 편집진과 인터뷰하면서 대중언론의 성장을 다루는 대목에서 자신이 1840년대 말까지 신문의 역사가 투쟁의 역사라는 사실을 놓쳤다고 자아비판을 한다. 다만 여기서 ‘어느정도’라고 말한 이유는 윌리엄스는 이 저작이 1950년대의 산물이라는 역사적 특정성을 들어 자기변호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계급갈등과 계급투쟁의 개념을 분리한 다음, 계급갈등의 모순이 계급투쟁의 방식으로만 해소되지 않는 때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950년대 영국사회가 전후 자본주의가 다시 부흥하면서 복지국가 체제가 도입되고, 이때가 영국 내에서 국가와 노동과 자본이 일종의 담합을 했던 조합주의적 시대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런 주장도 이 저작이 당대적 산물이라는 점을 한 번 더 일깨워준다. Raymond Williams, Politics and Letters: Interviews with New Left Review (Verso 1979) 134~36면.

하지만 󰡔기나긴 혁명󰡕에 대한 평가 중에서 현재 가장 세를 얻고 있는 것은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이 주장한 (윌리엄스 자신은 부정했지만) ‘좌파적 리비스’론이다. 그러니까 앞서 언급한 대로 5, 60년대의 윌리엄스는 문화의 사회적 성격과 능동적 역할에 대해서는 (속류 맑스주의가 아니라) 리비스에게서 물려받았으며, 리비스가 지닌 엘리뜨주의와 고급문화론의 적폐를 1세대 신좌파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극복하려고 했다는 평가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윌리엄스가 문화연구에 공헌한 바는 문화에 대한 속류 맑스주의의 경제환원론과 부르주아 미학의 관념론을 극복한 것이고, 그 결과 당대의 고급문화에 대항하여 문화의 일상성과 민주성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윌리엄스가 궁극적으로 문화주의(culturalism)로 통칭하는 인식론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 늘 따라다닌다. 여기서 리비스적 유산은 보통 두 가지가 언급된다.

하나는 현재 문화연구의 실권자인 스튜어트 홀(Staurt Hall)이 주장한바, 윌리엄스가 ‘경험’을 통해 대상의 본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경험주의적 오류에 침윤되어 있다는 것이다. 윌리엄스의 이론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감정의 구조’―이 저작의 1부 「문화의 분석」에서 상세하게 논의되고 있다―일 터인데, 윌리엄스는 리비스의 예를 따라 체험의 직접성은 추상화되면 진실에서 멀어진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탈구조주의 이론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윌리엄스의 편향은 경험이 구조화되어 있으며 세계체제는 경험을 통해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즉 체험을 재현에 앞선 진리의 인도자로 오해한 탓이며, 이런 점을 윌리엄스가 일정한 성과에도 리비스적 딱지를 떼지 못한 증거로 해석한다. 이는 그뒤 윌리엄스에 대한 비판으로 대세가 되었지만, 나로서는 이런 점이 오히려 윌리엄스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는 점도 말해야 할 것 같다.

즉 윌리엄스나 알뛰쎄 모두 역사에 침묵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만 침묵을 해석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 알뛰쎄에게 침묵은 구조화된 것이기에 깰 수 없는 것이다(물론 ‘이론’을 통하면 가능하다는 말을 하고는 있지만). 윌리엄스는 이 침묵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진짜 문제는 이 침묵을 들을 수 있는 학문적 방법론을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 방점을 찍는다. 저작의 2부 「대중독자의 성장」을 예로 들자.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독서대중의 증가로 문학의 질이 떨어진다는 리비스 식의 주장이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 하위계층 독자들이 기존 독자들의 영역으로 틈입할 때 기존의 특권화된 독자들이 보이는 계급적 태도의 은밀한 표현이라는 점이다. 또 「교육과 영국사회」를 논하면서 저자가 부각하는 바는 현재의 교육제도 속에 계급적 질서가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는 점이다. 윌리엄스의 결론은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진정한 원천인데, 이런 사유가 지금은 교육을 구별하기와 차이 만들기로 이해하는 세력과 타협했다는 것이다. 6세기부터 현대까지 교육제도의 변화를 추적하고 있는 이 글에 대해 번역자도 「옮긴이의 말」에서 “실증적 연구라는 기준에서 보면… 그저 아주 거칠게 서술된 개괄적 설명” 레이먼드 윌리엄스 󰡔기나긴 혁명󰡕(문학동네 2007) 529면.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학교체제와 성담론의 관계를 다루면서 ‘수장문고’의 온갖 자료들을 다 동원하여 정교한 논지를 펼치는 푸꼬의 글을 읽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당연한 지적이다. 그런데도 자본주의에 모든 것이 포획당했다고 주장하는 푸꼬나 제임슨에게는 윌리엄스 식으로 교육을 통해 타자를 이해하고 공통의 문화를 형성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게 이 책의 근본 의도에 해당한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또다른 리비스적 유산은 이 저작에서 반복해서 강조되는 공통의 문화․공동체․의사전달․삶의 전체적인 방식과 같은 개념들이다. 윌리엄스는 문화를 사회와 분리시키거나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에 선행시키는―그러므로 하나가 다른 하나의 ‘배경’이 되는―위계적 사고방식을 늘 비판하는 한편, 문화적 실천을 다른 사회적 실천들과 분리시킬 수 없으며 문화적 실천의 온전한 이해는 사회활동 전체와 연관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했다. 그런데 리비스적 체취가 가득 찬 ‘공통의 문화’와 ‘감정의 구조’ 개념에 대해 오늘날 문화연구 전공자들은 윌리엄스가 사회의 모든 부분을 관통하는 동질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서, 그가 상동구조 내지 표현적 총체성의 오류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Stuart Hall, “Cultural Studies: Two Paradigms”, John Storey, ed., What Is Cultural Studies? (London: Arnold 1996) 44면. 다른 예를 들면 Lawrence Grossberg, Bringing It All Back Home: Essays on Cultural Studies (Durham: Duke UP 1997) 152면.

그런데 윌리엄스가 비판받은 이런 지점을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다행히 우리 학계에서 리비스의 위상은 서구 학계에서만큼 영락하지 않은 것 같은데, 리비스를 읽어보면 이 ‘공통의 문화’ 개념이 표현적 총체성에 걸려 넘어졌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살아있는 원칙󰡕(The Living Principle)에서 리비스는 객관성은 늘 가치판단을 이미 내포하고 있는 것이며, 판단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면서 공동체적이라 주장한 바 있다. 즉 의미있는 판단은 반드시 개인적 판단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이건 이렇지, 그렇지 않은가”(This is so, isn’t it)라고 공동체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F. R. Leavis, The Living Principle (London: Chatto and Windus 1977) 35면. 페리 앤더슨은 여기서 부가의문문을 일종의 강압적 요구로 읽었지만, 리비스의 원래 의의가 어디까지 인간관계의 진정한 만남에 대한 요구라는 점을 가볍게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 개인적 창조성을 살리면서도 공동체적 속성을 강조하는 이런 결합은 그뒤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적 사고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이 저작의 첫 대목 「창조적 정신」을 읽어보자. 윌리엄스에 대해 서구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합의된 지적은 윌리엄스 문화개념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창조’로서의 문화 개념과 ‘삶의 전체적 방식’으로의 문화 개념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윌리엄스는 생물학자 J. Z. 영의 주장―우리의 인식행위 자체가 이미 창조적 활동이다―을 원용하여, 창조는 특정한 예술활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활동에 적용되는 일반원리라는 주장으로 이 개념적 이질성을 해결하며, 여기서 예술활동으로서의 문화 개념은 ‘문화는 일상적이다’라는 주장으로 넘어가게 된다.

󰡔기나긴 혁명󰡕 전에 발표한 󰡔문화와 사회󰡕(Culture and Society)에서 윌리엄스는 중산계급 지식인들로 구성된 ‘문화와 사회의 전통’을 제시했는데, 과거의 노동계급이 괄목할 만한 예술적․문화적 성취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이 전통을 넘어 사회주의적 노동문화를 정초하려면 리비스 식의 문화개념과 다른 새로운 개념 설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윌리엄스의 주장은 이후 문화연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를 들면 딕 헵디지(Dick Hebdige)는 󰡔하위문화󰡕(Subculture: The Meaning of style)에서 ‘문화의 일상성’ 개념을 한층 밀고 나가서 고급문화를 일종의 ‘주물화된 상위 권력’(high fetishistic power)으로 정의하여 고급문화와 하위문화의 위계질서를 전복한다. 폴 윌리스(Paul Willis)는 󰡔인종기술학적 상상력󰡕(The Ethnographic Imagination)에서 ‘삶=예술’의 등식으로 나아가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의미생성적 활동’은 그 자체가 예술이 된다고 주장한다. Dick Hebdige, Subculture: The Meaning of Style (London: Methuen 1979) 129 및 Paul Willis, The Ethnographic Imagination (Polity 2000) xiv면.


그런데 이처럼 인식활동을 창조활동과 등치시키면 김영희 교수가 지적한 바대로 ‘현실이 무엇이고, 해석이 어디인지 불투명해지’고, 또 ‘무엇이 더 참된 해석인가를 해명하기 힘들어’진다는 점에서 이미 상대주의 위험 김영희 「레이먼드 윌리엄스: 그의 문화적 유물론에 대하여」, 󰡔이론󰡕 4를 볼 것.에 노출되어 있다. 「창조적 정신」에서 다다른 문화의 일상성 개념은 낭만주의와 현대예술의 개인주의 성향과 자폐성, 그리고 중산층 지식인 중심의 문화를 극복한 공통의 문화를 건설하려는 윌리엄스의 시도였으나, 이론 전개과정에 반드시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것이라는 리비스의 의식이 오히려 약화되는 순간이다. 지금도 우리 시대 탈구조주의 이론이 다다른 어떤 막다른 골목을 보면서 리비스의 진정한 극복이 필요하다고 믿는 연구자들도 있을 터이다.

윌리엄스의 이런 행보는 공동체를 향한 행보와 진정한 창조성이 아직 서로 얽히고 갈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행하게도 「창조적 정신」의 결말은 탈구조주의에 의해 포획된 오늘날의 이론과 문화연구를 극복할 수 있는 한 가능성이 무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그 갈림길에 이 논문이 있다는 점이 내게는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안과밖] 24호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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