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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이후: 삶 혹은 다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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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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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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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8


이론 이후—삶 혹은 다시 이론
데리다 외 저, 강우성․정소영 옮김 󰡔이론 이후 삶󰡕(민음사 2007)

김성호
金成鎬 서울여대 교수.

데리다는 읽을 때마다 도전이 된다. 이해가 안되면 안되는 대로, 되면 되는 대로 그렇다. 이해가 될 때의 도전이란 적어도 내게는 저항하기보다 수긍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도전이다. 수많은 논제를 다루면서 보여주는 틀에 박히지 않은 사고, 그러나 바로 그 ‘틀에 박히지 않음’의 동일함, 그 ‘데리다스러움’에 나는 매력을 느낀다. 그 동일함이 데리다의 사유에 ‘이론’이라는 이름을 안겨준다면 그 ‘이론’의 핵심에는 (특정 이론에서 훼절이라기보다는) “이론적인 것으로부터의 훼절”(‘옮긴이의 말’ 231면)이 있다. 그리고 여러 저작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일관된 주제 중 하나는 바로 사유의 동일함과 훼절의 연관성, 이 책에 반복해 등장하는 표현을 빌면 ‘아콜루싸’(추종)와 ‘아나콜루톤’(추종하지 않음, 파격)의 긴밀한 연관이 아닐까 싶다. “충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배반해야만 합니다.”(25면) 이 배반의 역설은 다름 아닌 삶의 역설이요 그런 점에서 데리다는 내내 그 나름대로 ‘삶의 이론’을 펼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충절 없이는 배반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 달리 말하면 동일성을 간단히 무시해버리는 변신, 또는 유한한 삶을 단숨에 초월해버리는 무한의 사유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해왔다는 점에서 데리다는 일종의 역사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에 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지만, 󰡔이론 이후 삶󰡕은 사실 그가 직접 쓴 책이 아니다. 편집자에 따르면 데리다 대목은 2001년 11월 러프버러 대학에서 열린 ‘이론․이후․삶’(여기서 각 단어 사이의 점이 특별한 의미를 띠도록 의도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데, 번역본의 표지에는 점이 있는 제목과 없는 제목이 둘 다 보인다)이라는 행사에 패널로 참여한 데리다가 몇몇 학자와 청중의 질문에 즉석에서 답변한 것을 질문과 함께 옮겨 적은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의 4분의 3가량은 데리다가 아니라 프랭크 커모드와 크리스토퍼 노리스가 편집자인 마이클 페인과 존 샤드 및 청중과 한 대담, 토릴 모이가 마이클 페인과 한 대담, 그리고 샤드의 글로 채워져 있는데, 이 책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대서양의 양편에서 진행된 여러번의 인터뷰를 묶은”(‘옮긴이의 말’ 229면) 것이라고 하니 데리다의 경우를 제외한 대담 중 일부는 데리다와는 물론 ‘이론․이후․삶’의 행사와도 상관없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책 전체에는 데리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데리다는 ‘이론․이후․삶’이라는 주제에 들어 있는 ‘이론’이라는 단어가 자신이 써온 의미와 다르게 쓰이고 있음을 지적하지만(21면), 이 주제를 내세운 측에서는 지난 3, 40년 동안 서구 지성계를 지배하다가 권좌에서 밀려날 조짐을 보이는 ‘이론’을 무엇보다 데리다의 이름과 연관짓고 있음이 분명하고, 이는 커모드, 노리스, 모이 등 다른 쟁쟁한 ‘이론가’들의 대담에 데리다가 거명되는 방식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니까 ‘이론 이후의 삶’이란 그 전부는 아니어도 핵심에서는 ‘해체 이후의 삶’을 의미하는 셈이다.

자신의 ‘이론’이 ‘이전’의 시간대로 밀려나고 있다는 암시를 주는 주제를 놓고 데리다가 벌이는 ‘아콜루싸’와 ‘아나콜루톤’의 논의는 실로 절묘하다. ‘이후’(after)란 낱말이 지닌 상반된 의미―‘좇아서’(추종)와 ‘그 다음’(단절)―를 환기시키면서 그는 자기 식으로 쓰면 ‘철학 이후’나 ‘해체 이후’ ‘문학 이후’ 등이 될 ‘이론 이후’의 삶에 대해 “원칙적으로 내 삶을 단순히 내가 말한 것의 적용이나 결과로 만들지 않으며, 내가 말한 것, 내가 쓴 것, 혹은 내가 철학자로서 그리고 해체철학자로서 가르친 것에 충실함으로써 이 모든 것들 이후의 내 삶을 살려는 것”(21면, 강조는 원문)이라고 말한다. 삶은 언제나 여하한 종류의 ‘이론’ 또는 ‘철학’에 미달하거나 그것을 넘어서 있다는 고백,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다름 아닌 ‘해체’를 실천하는 과정이라는 주장이 그의 말에는 동시에 담겨 있다. 여기에 작동하는 추종과 단절의 논리 아닌 논리는 ‘아콜루싸’와 ‘아나콜루톤’, 맹세와 거짓 맹세, 고백과 은폐, 문법과 탈문법, 이해/진실과 오해/거짓, 유한함과 무한함 등 다른 짝개념들의 설명에서 변주된다. 결국 데리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삶의 역설들 혹은 “아포리아적 구조들”이며, 나아가 확정된 법칙이 아닌 아포리아로 인해 발생하는 책임, 특히 아포리아에 반응해서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낼 지식인들의 책임이 아닐까?

“서로 다르며 양립할 수 없는 두 명령에 응답해야 하는 이런 아포리아적 구조들이 존재한다는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책임이 시작됩니다. … 보험에 들어 있는 윤리라면, 그리고 잘못했을 때 보험이 댓가를 지불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건 윤리가 아닙니다. 윤리는 위험한 것입니다.”(47면) 반성적으로 사는 삶은 위험한 삶이며, 그 위험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데 윤리가 있다는 통찰은 유럽 통합, 이민자 문제, 아르헨티나 사태 등 현실의 여러 쟁점에 정치인이나 정치평론가와는 또다른 방식으로 개입하곤 했던 그의 삶의 이력과 함께 ‘학자 데리다’가 아닌 ‘지성인 데리다’의 모습을 부각시켜준다. 아직 데리다의 시대가 갔다고 말하기도, ‘이론 이후’가 도래했다고 말하기도 한참 이르지만, 그의 통찰을 널리 공유하지 못한 채 그를 망각 속으로 떠나보낸다면 그건 이후 세대의 손실일 터이다.

‘이론 이후’가 데리다에게 현재를, 즉 현재진행형으로서 ‘해체적 삶’ 또는 ‘삶으로서 해체’를 뜻한다면, 다른 대담자들과 책의 기획자들은 그것을 과거나 미래의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가 이론적 문학연구의 대부이기도 한 커모드에게서는 삶으로서 이론에 대한 자긍심보다 이론에 밀려 사라진 ‘삶’이나 ‘문학성’에 대한 아쉬움, 혹은 곧 귀환할 ‘삶’이나 ‘문학성’에 대한 은근한 기대감이 느껴진다. 그는 이론이 문학의 이론이 아니라 “대문자 이론(Theory)이 되어 철학과 정치학을 비롯한 모든 것과 결부”된 결과 “문학텍스트와 밀착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망이 의미를 상실하게” 된 사태를 비판적으로 본다(76면). 하지만 그는 “이론적 관점이 모든 형태의 사유에 제국주의적 방식으로 확산되어 나가는 것을 그냥 두며 아주 평온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 추세가 실제로 무한정 계속될 수는 없다고, 다시 말해 문학분야에서는 어떤 것도 그렇게 되지 못한다고 강하게 확신하기 때문”이다(77면).

어디서 그런 확신이 오는가. 그에게 문학은 ‘해체=삶’이 펼쳐지는 장인 ‘텍스트’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는 ‘유기적 전체’로서의 속성을 띤 ‘동물적’ 존재이다. “예술작품은 생물학적 기관과 흡사한 어떤 것으로 구성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식별 표지 가운데 하나일 수 있고 가치의 지표일 수 있습니다”(82면). 커모드가 자각하고 있듯이 대단히 ‘고전적’인 이 진술에서 문학예술은 ‘해체적 삶’이 아니라 ‘해체’를 포함한 (대문자) ‘이론’과 뚜렷이 구별되는 영역으로서의 ‘삶’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문학을 소외시키는 ‘이론’은 삶을 소외시키는 이론이며 문자 그대로의 (‘아나콜루톤’이 강조된) ‘이론 이후의 삶’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론 일반, 대문자 ‘이론’ ‘해체’ 문학, 그리고 삶을 서로 어떻게 구별하고 연관짓느냐 하는 문제는 길고 긴, 어쩌면 끝나지 않을 논쟁을 함축하고 있고, 커모드도 예술유기체론으로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되었다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이 책에서 마이클 페인 등이 그에게 던지는 질문들의 무게에 비해 그의 답변이 좀 부실한 감은 있지만, 그의 말은 문학주의로 쉽게 치부해버릴 수 없는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으며 이 통찰에는 데리다와 통하는 지점도 적지 않다. 두 가지만 짚어보자. 하나는 커모드의 이론혐오증을 지적하는 페인에게 답하면서 제기하는 ‘이론적 무임승차’론이다. 이론이 문학연구를 통제하게 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당장 유행하는 전문용어를 씀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이론에 편승하려는” 경향, “전문 용어의 어떤 측면에 무임승차하려는 경향”(85면)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반성할 일이지만, 이런 행위가 “진지한 사유와는 실제로 무관”(같은 면)하다는 커모드의 지적은 크게 공감이 간다. 얼핏 보면 이론적 무임승차는 이론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듯하지만 실은 이론을 죽이는 지름길이다. 사유되지 않은 전문용어의 반복이 가져오는 최면효과는 이론을 자기충족적으로 만들고 이론이 더이상 현실로 육박해 들어가지 못하게 하며 이론에서 생생한 긴장감을 박탈한다. 1960년대, 70년대에 이론을 제도에 대한 저항의 방법으로 추구했던 커모드이기에 이제는 자기복제를 하여 하나의 제국을 이룬 이론에 ‘문학’이나 ‘삶’의 깃발을 들고 저항하는 모습이 그럴 듯하게 보인다. 그에게서 배울 또하나의 문제의식은 대중적 소통의 필요에 대한 강조이다.

제도권에서 무슨 문학적 가치를 논하든 “제도와 교양있는 대중 간에 소통을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79면)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대문자 ‘이론’이 문제가 되는 또하나의 이유가 여기 있는데, ‘이론’은 문학을 주변화했을 뿐 아니라 제도권의 문학연구와 문학에 관심이 있는 ‘교양있는 대중’ 사이의 소통을 효과적으로 가로막아온 게 사실이다. 물론 ‘이론’의 편에서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교양있는 대중’이 그간 원했던 건 문학연구가 아니라 이론이고 이론은 나름대로 (강연이나 대중강좌를 통해서든 잡지를 통해서든) 대중과 만나왔다고. (특히 영미 사회보다는 우리 사회에서) 일리가 있는 지적이지만, ‘이론’이 문학과 문학연구에 끼친 부정적 영향이 ‘이론의 대중화’로 상쇄되지 않을뿐더러 이론의 대중화라는 것도 실상 특정 국면의 맑시즘과 페미니즘을 제외하면 이론이 대중의 필요에 호응해서 구체적 상황에 대한 적실한 설명을 펼치거나,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 자신을 다듬고 변화시켜 가거나, 하다못해(?) 적지 않은 수의 대중을 사로잡고 그들 사이에 열정적 학습의 대상이 되는 지경에는 턱없이 모자랐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요컨대 커모드는 이론 일반에 대해 문학의 가치를 대립시킨다기보다 ‘이론’에 대해 그리 하는 것이며, 그런 만큼 문학과 삶의 요구에 충실한 이론을 희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데리다에 대해서는 조심스런 태도를 보이지만 ‘해체’를 온당한 ‘문학의 이론’으로 보는 것 같지는 않다. 텍스트 읽기가 항상 규칙을 ‘발명’하는 행위라는 데리다의 인식이 커모드의 비평관과 소통할 여지가 없지 않은 상황에서 ‘이론’과 ‘해체’를 구별하고 ‘해체’와 문학비평 사이의 관계를 가늠할 일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노리스는 커모드보다 좀더 명시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데리다를 논의 대상으로 삼는데, 이 와중에 커모드가 비판하는 ‘문학의 철학화(이론화)’ 대신 ‘철학의 문학화’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에게 ‘이론 이후의 삶’이란 데리다와 ‘이론’을 넘어서서 문학으로 나아감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리처드 로티와 후기 데리다에서 초기 데리다로 복귀하는 것, 즉 표준적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반실재론과 구성주의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후설, 레비스트로스 및 다른 사상가들”(103면)이 발전시켜온 실재적 ‘진리’ 개념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동시에 데리다를 ‘포스트모더니즘적’으로 전유하는 ‘문학적’ 논평자들에서 데리다를 떼어내어 그의 ‘철학적’ 면모를 부각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노리스는 문학에 종사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영문과 교수에서 철학과 교수로 변신한 ‘변절자’이고, 이른바 ‘후기 데리다’나 로티에 관한 그의 적대적 발언은 일견 ‘글쓰기’를 들먹이는 데리다에 대한 철학자들의 일반적 반감을 대변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커모드가 ‘이론’을 통째로 비판할 때처럼 노리스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싸잡아 공격할 때에도 이론에 약이 될 만한 내용은 일단 취할 만큼 취하는 게 현명할 것이다.

가령 “진리에 관한 어떠한 호소도 강압적이거나 전체주의적 책략의 일종”으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포스트모더니스트들” 내에 있다든지(110면), 철학은 일종의 글쓰기이고 추론은 수사법이라는 식의 접근이 “철학, 역사, 문학을 포함하는 모든 ‘담론들’”을 “텍스트주의적으로 평준화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주장(113면)은 새겨둘 만하다.

그러나 노리스가 데리다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전유와 데리다의 후기 저작에서의 ‘문학적’ 스타일의 글쓰기에 맞서 ‘초기 데리다’의 ‘철학적’ 사유를 복원하고자 할 때, 나는 데리다에게 핵심적인 뭔가가 그의 시야에서는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데리다의 ‘후기’ 저작이 ‘초기’ 저작보다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구분이 가능한지도 모르겠고 가능하더라도 내 관심사는 아니다) ‘초기’든 ‘후기’든 데리다가 지속적으로 펼치는 아포리아의 사유가 (그리고 그 ‘해체의 윤리’가) 본디 로티나 보드리야르 식의 반실재주의와 “플라톤 등”의 실재주의와 현상학적 존재론과 대립각을 세우며 진행되지 않나 싶은 것이다. 이론이나 철학 또는 문학의 진리성이라 할지 실천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여러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을 텐데, 노리스의 경우는 ‘해체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 책의 마지막 대담자인 토릴 모이가 ‘이론 이후 삶’이라는 주제와 맺는 관계는 커모드나 노리스의 경우와는 사뭇 다른 데가 있다. 그녀에게서는 문학연구를 장악한 데리다의 ‘해체’와 ‘이론’에 대한 문제의식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두드러지지 않고, 독자는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학적 풍토 속에서도 그녀가 이제까지 해왔던 이론적 작업을 (보부아르와 관련해서든 크리스떼바와 관련해서든, 아니면 이번 대담에서 가장 강조하는 ‘여성의 보편에의 접근권’ 문제를 다룰 다른 어떤 길을 개척해서든) 계속해가리라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모이가 자신에게는 이론 이전의 삶이 없었다, 자신을 포함해 1950년대에 태어난 세대는 ‘이론’이라는 운동과 관련해 뒤늦은 세대였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지만(167면), 그녀의 ‘삶’은 언제나 이미 (이론의 궤적을 따라 산다는 의미, 즉 ‘아콜루싸’의 의미에서) ‘이론 이후’였고 앞으로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도 그녀가 ‘이론 이후 삶’에 대한 논의의 주체로 선정된 데 대해 모이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명목상의 여성이 되어 이런 맥락의 도의적 정당성을 보장해주리라 기대하는 거죠. 이렇게 해서 여기 참여한 남성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이론’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계속해서 남성들에 관한 논의를 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이론은 남성들이 하는 것이고 페미니즘 이론은 여성들이 하는 것이라는 인상이 생겨납니다.”(162면)

이 말은 낯 뜨거운 진실을 담고 있지만 ‘이론’을 해온 남성들 입장에서 할 말이 전혀 없지는 않을 듯하다. 이론의 미래에 관한 논의에 자신과 자신이 해온 페미니즘이 ‘구색 맞추기’ 식으로 동원되었고, 이런 식의 동원이 페미니즘의 게토화를 부추긴다는 모이의 판단은 옳다. 한편 남성들이 하는 이론적 논의는 곧 “남성들에 관한 논의”라는 단정, 다시 말해 여성적 주체성이 각인된 보편성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 남성적 보편성이라는 가정―보편성은 항상 성차화되어 있다는 가정―은 보편적인 것을 사회적 권력과 무관한 고정불변의 가치로 보지 않는 입장에서도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여성적 체험이 부당하게도 보편성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 모이의 표현으로는 “여성에게 보편에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는”(160면) 상황이 분명 존재하지만, ‘여성적’이지 않은 보편성(혹은 이론)에 성급하게 ‘남성적’이라는 딱지를 붙인다면 여성의 ‘보편에의 접근’을 오히려 차단하는 결과를 불러오지 않을까.

모이를 페미니즘 이론의 대표 격으로 선정한 대담 주최측의 의도 혹은 전제야 어찌 됐든, 또 그에 반발하는 모이의 판단이야 어찌 됐든, 모이가 이론의 변화 내지 변질에 대하여 커모드와 유사한 증언을 하는 점은 흥미롭다. “지난 10년간의 이론들 중 엄청 많은 부분이 헛도는 언어였다”(172면)라든가, 처음 이론작업에 나선 사람들은 한 분야의 편협한 전문가로 남지 않고 ‘지식인’이 되고자 했고 따라서 폭넓은 지적 훈련을 거쳤지만 “지금은 벌써 한 세대에 걸쳐 단순한 이론가들이 배출되고 있”(173면)다든가, 혹은 요즘 지식인들은 대중매체에 등장해서 자신을 팔아먹는다는 소리를 듣는데 “오늘날 진정한 공적 지식인이 되기란 분명 매우 어렵”(같은 면)다는 지적은 지금까지 이론에 매달려온 사람이든 아니든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경험을 넘어선 곳에서 이론이 시작된다면 무엇을 사유하거나 탐구하는 데 이론이 없을 수 없다. 이론종말론은 또하나의 이론일 뿐이다. ‘이론 이후’란 하나의 은유, 그것도 모종의 이론적 삶에 대한 은유이다. 󰡔이론 이후 삶󰡕의 대담자들은 그 삶을 각기 ‘해체’ ‘문학(비평)’ ‘철학’ ‘페미니즘적 실천’으로 이해한다. 이처럼 ‘이론 이후 삶’의 내용은 다르지만, 그 삶을 관통하는 이론이 전문용어의 폐쇄회로를 벗어나 현실과 생생한 접전을 벌임으로써 윤리적 혹은 정치적 차원을 회복하는 상황을 꿈꾸는 점에서 대담자들은 서로 통한다. 사고 내용을 제공하기보다 사고 규칙을 바꾸는 이론, 아니 규칙을 바꾸는 행위 자체로서의 (‘이론’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린) 이론이 이들이 희구하는 이론이 아닐까. 이들의 대담이 우리말로 읽히는 것은 아주 기쁜 일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론의 주검들이 즐비하다. 쉽게 태어나 (혹은 들어와) 쉽게 죽는 이론들. 이도 대문자 ‘이론’의 시대의 한 징후일 터이다. 유전자가 다른 이론, 잘 죽지 않는 이론, 삶과 밀착된 긴장감있는 이론의 탄생과 장수가 아쉽다. 자기복제의 덫에 갇히지 않고 삶의 경험과 사회적 쟁점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계속 새롭게 ‘발명’하는 이론, 그런 다수의 이론들 사이의 접전이 아쉽다.□
([안과밖] 24호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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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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