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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여러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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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혜준[자료실]

작성일자

2008-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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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6


‘영어’의 여러 얼굴
윤지관 책임편집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당대 2007)

윤혜준
尹惠浚 연세대 교수.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를 받아들고 처음 든 느낌은 반가움이었다. 필진에 다수의 친숙한 이름들이 등장한 게 가장 큰 이유이겠으나, 영어를 전공해서 영어로 먹고 사는 사람의 하나로서 한국사회에서 영어가 갖는 정치적․사회적․역사적․문화적․심리적 의미를 다각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솔하게 다뤘다는 사실 그 자체가 매우 반길 만했다.

책을 읽어보니 비록 다른 지면에 수록된 글들을 다시 모아놓은 재수록의 형태이긴 해도 이 책 출판의 의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우리에게 영어는 무엇인가’라는 소제목 하에 일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영어가 하나의 ‘문화자본’으로서 행세하는 형국을 규명한다. 2부 ‘영어, 어떻게 배우고 가르쳐야 하나’는 좀더 실무적인 문제에 눈을 돌린다. 한국에서의 영어교육, 특히 대학 영어교육의 문제에 대해 전현직 영문학 교수들의 목소리가 생생히 담겨 있다. 3부 ‘영어의 지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영어공용화 문제 및 영어‘제국주의’에 대한 글들을 모아놓았다. 지금 싯점에서는 다소 시의성이 떨어지는 감이 없지 않으나 국내외에서 영어의 헤게모니가 날로 거세어지는 형편이니 3부의 글들도 여전히 의미있는 발언들임이 틀림없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서평자는 1부의 글들, 특히 강내희와 최샛별의 글이 신선해 보였다. 일본의 경우를 다룬 두 글, 더글라스 루미스와 이연숙의 글도 이웃 나라의 사정과 우리의 처지를 비교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이 책이 자칫 잘못하면 ‘교양영어’시대에 호의호식하던 영문학 전공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이 축소되는 데 대한 불평을 늘어놓은 책으로 오해될 소지가 없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언어학자들인 이병민과 채희락의 글들도 매우 요긴한 균형추 역을 톡톡히 했다. 나머지 꼭지들은 영문학자들이 영어교육현장에서 겪은 체험에 기초한 논설들과 영어 자체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일반론으로 다룬 글들로 크게 나뉜다. 이 중에서도 실증적 조사에 기초한 엄용희나 송승철의 글들이 가장 돋보였으나 다양한 개인 체험을 부각시키는 글이라든지 정반대로 우리 현실과는 거리가 먼 아프리카나 인도 얘기를 하는 글들도 모두 나름대로 흥미로웠다.

이와같은 독후감 차원에 머물 수만 있다면 오죽 좋을까!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는 조선시대의 영어교육에서부터 아프리카 식민지 출신지역에서의 영어까지, 원로 영문학자의 자전적 수필에서 사회학자의 실증적인 논문까지, 매우 다양한 글들을 모아놓았다. 이렇듯 다양한 글들이 섞여 있고 필자들의 전제나 진단이나 처방이 서로 전적으로 같지만은 않으니 이 책 전체에 대한 서평을 하는 일은 몹시 곤혹스럽다. 오랜만에 󰡔안과밖󰡕에서 들어온 청탁이라 반가운 마음에 별 생각 없이 덥석 승낙부터 한 게 못내 후회스럽다. 하지만 말의 책임을 져야 할 나이가 되었으니 어찌하리. 어차피 지면이 주어진 바에 책의 세부적인 주장들과 이런저런 대화나 해보기로 하자.

제목부터 시작하자.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사뭇 인상적인 제목이다. 그렇긴 해도 개념적인 명증성은 부족해 보인다. 편자의 서문이나 그가 기고한 글 두 개를 읽어보면 문제가 단순히 ‘마음’이 아니라 ‘심리’적인 억압과 욕망까지 포용하는 것임을 알 수 있으니, 이 ‘마음’이란 말은 다소 부적절해 보인다. ‘식민주의’는 어떠한가. 이 말을 들으면 분명히 집단적․역사적․사회적 문제를 이 책이 파헤칠 것으로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내 마음의 식민주의”란 어떤 ‘식민주의’인지 그 의미가 잘 다가오지 않는다. 제목 그대로만 보면 내면화된 주관적인 문제로 축소시키는 느낌을 주니 더욱 그러하다. 처음에 제목을 이끈 ‘영어’란 말은 어떠한가.

이 말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다. 일반인들에게 강요되는 영어, 대학의 교양 내지는 ‘실용’영어, 중등학교의 영어, 공인 영어시험의 영어, 식민지 시절의 영어와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영어, 그것도 ‘세계화’시대 이전과 이후의 영어, 이 모든 것들이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영어’임을 이 책이 밝혀주고 있기에 제목에 제시하는 ‘영어’의 실체에 대한 물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경우이든 문제가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영어’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이 ‘영어’가 미국영어, 그것도 특수한 형태의 ‘교육용’ 미국영어라는 게 문제이다. 대영제국의 일부였거나 영국의 영향권에 있던 나라들과는 달리 대한민국에서 ‘영어’는 ‘미국영어’를 의미하며, 미국영어가 영어의 표준으로 인정되어왔다. 그것이 단지 미국인들이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 내내 한국인들에게 서구문명 및 종교의 ‘전도자’ 역을 맡았던 인연 때문만은 아니다. 해방 이후 미군정시대에 미국영어는 그야말로 일본인들의 자리를 이어받은 새로운 외국인 상전들의 힘있고 멋진 언어로 자리잡는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는 한반도에서 이제껏 겪어본 적이 전혀 없던 강력한 무력을 구사하며 민족과 개인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바다 멀리 대국의 언어로 미국영어가 부상하지 않았던가. 전후시대가 열리며, 이제 미국 영어를 배운 뒤 미국의 자비로운 지원금이나 장학금 덕에 광대한 미국 땅에서 공부하고 온 이들이 대한민국의 엘리뜨로 자리잡았으니, 이 책의 편역자가 주장하듯, “우리 근대사에 대한 미국의 결정적인 개입이 준 영어의 권력화 현상”(28면)이 한국에서의 영어의 위상과 역할을 논의함에 있어 어찌 보면 가장 먼저 규명해야 할 문제이다.

이 점에서 󰡔영어, 내 마음의 식민지󰡕는 분명히 의미있는 작업이다. 하지만 좀더 이 문제를 파고들었으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가령 그야말로 식민지적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던 미군정하에서의 영어의 ‘권력화’나 대한민국의 미국유학 역사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이 책에 포함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영어의 ‘권력화’는 영어 및 영문학을 가르치는 사람들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어를 당연한 전제로 삼는, 영어를 객관적 학문과 사유의 정도로 받드는 미국유학 출신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엘리뜨들의 손에서 이루어진다고 해야 더 옳다. 일반대중들에게까지 퍼져 나가는 영어의 “물신숭배”(399면)와 영어 앞에서 겪는 “한국인의 주눅”(401면)의 진원지는 원어민 교사들이나 영어장사꾼이 아니다. 미국영어가 경제와 국제교류와 과학기술의 언어로, 다시 말해 대한민국 권력층과 기득권층의 언어로 자리잡았기에, 헌법이 보장한 평등권과 행복추구권에 의거하여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대한민국 시민이면 누구나 영어를 떠받들고 섬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영어의 문제를 제국과 식민지의 논리로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고 또한 적절한가. 이러한 미국 및 미국영어의 절대적 영향력이 “과거 일본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101면)이요, 이것이 미군정 때는 물론이요 ‘세계화’를 외치며 ‘영어공용화론’까지 나온 바 있는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한가. 분명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문화적․정치적 영향력과 미국에서 교육받은 엘리뜨층의 권력 및 이권 독점을 감안하면 그런 주장을 할 만한 형편으로 보이긴 한다. 하지만 분명히 오늘의 대한민국이 일제치하의 조선과는 같지 않다. 일본 및 일본어에 대한 관계도 미국 및 미국영어에 대한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없다. 미국은 우리를 직접 지배하는 제국이 아니고 우리는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다. 따라서 미국은 “탈영토화된” 제국으로 미국영어를 통해 자발성을 창출하고, “이 땅을 군사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점령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이곳에 있는 미국이라는 제국의 존재를 드러내주는 지표”(269~70면) 정도로 정리하는 게 무난해 보이긴 하다.

그러나 여전히 미진한 감이 있다. 그 이유는 이 땅에서 영어가 하는 일과 위상이 복합적이요 다면적이요 고질적으로 ‘토착화된’ 독특성을 띠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일단 권력의 언어로서 영어는 사회경제적 이권을 차등적으로 분배하고 유지하는 투쟁에서 요긴한 무기로 사용된다. 사회경제적 차등을 은폐하고 합리화하는 데 영어가 한몫을 톡톡히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교육의 평등주의와 사교육의 불평등주의 간의 모순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부모의 사회경제적인 배경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영어실력은 영어실력자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을 통하여 부모의 사회경제적인 배경과 관계없는 개개인의 능력으로 전환”(122면)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공교육에서 영어교육의 비중이 “지난 60년 동안 근본적인 틀에 있어서 거의 달라진 것이 없”(174면)다 보니 절대적으로 부족한 학교에서의 영어교육시간을 사교육으로 보완하게 된 구조와 직결된다. 개인 과외와 학원에서 해외연수와 유학까지 광범위하게 확대되어 있는 영어 사교육시장은 공공성의 명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며 거기에서는 순수한 시장논리가 작동하기에 사회경제적 이권의 불공정한 분배에 톡톡히 기여한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단순화의 위험이 없지 않다. ‘영어실력’이 곧 ‘문화자본’의 소유와 직결되는가. 또한 이때의 ‘영어실력’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사실상 한국에서 상대적인 빈부의 차이를 촘촘히 구별하는 잣대는 부동산 등 소유자산의 차이 아닌가. 영어를 잘한다고 값나가는 부동산을 소유한다는 보장은 없다. 물론 값나가는 부동산을 소유한 사람이 소득의 상당부분을 자식의 영어교육에 사용할 수는 있겠으나, 이미 물려받을 재산이 확실한 젊은이가 영어공부에 매진할 동기는 많을 것 같지 않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개인의 능력과 상관관계가 많은 편인 근로소득은 어떠한가. 유망 직종인 의사나 한의사가 되는 데 영어실력은 중요할 수는 있어도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또한 사법고시에서 공인중개사 시험까지 각종 국가시험에서 영어는 (심지어 ‘대입수학능력시험’에서조차!) 처음에 이것이 철저한 ‘수험용 영어’라는 점에서 실제 영어구사력과는 무관한 것은 물론이요, 다른 시험과목에 비해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다. 영어가 한국사회의 계급 및 계층 구분에 기여하는 점은 분명하지만 둘의 상관관계는 그 어떤 통계로도 선명하게 잡아낼 수 없는 복잡성을 특징으로 한다.

지정학적 차원에서의 (미국)영어의 역할이나 사회학적 문제로서 ‘영어실력’이나 영어정책과는 다른 차원에서 영어는 이 책의 제목에 함축되어 있듯이 “내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심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영어는 “내 마음의 식민주의”를 만들어내는가. 미국영어를 배우고 미국 유학을 하고 오는 것이 그야말로 미국적인 ‘아비투스’, 즉 미국(영어)적인 정서와 태도를 만들어낼까? 대한민국에서 영어를 익히고 영어에 주눅이 드는 모든 사람들은 말하자면 영어일기를 쓰는 윤치호의 후예인가. 영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한국인이 영어와 맺는 관계는 그렇게 간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윤치호의 경우 “그의 자존심에 상처내는 서양 선교사들의 오만에 분개 … 하면서도 적장 내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영어로 적어내는 정신적 곤경”(134면)에 물론 시달렸을 법하다. 워낙 당시의 구한말 조선과 미국 간의 괴리와 격차가 컸던 만큼 문화적인 충격의 강도는 엄청났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시대에도 해방과 전쟁을 겪은 세대가 미국을 다녀왔거나 미국에서 거주하거나 미국인을 만날 때 분명히 윤치호의 후예다운 “정신적 곤경”을 어느정도는 겪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 사람들, 특히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마음’속에서 미국과 미국영어가 ‘식민주의’적인 증상의 원인은 아닌 것 같다. 유럽 배낭여행을 다니고 서구인들과의 신장 격차도 많이 줄어들었으며 “대―한민국”을 외치며 월드컵 응원을 신나게 해봤고 미국뿐 아니라 뉴질랜드, 호주, 캐나다, 영국 등에서 거주한 체험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딱히 처량하거나 궁상스런 시대를 산 적이 없는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영어는 좀더 중립적인 ‘세계어’로 다가온다는 것이 이들을 그간 가르치며 느낀 바이다. 게다가 처음에 ‘우리말’ 속에 들어와 있는 중국(어) 식민주의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마당에 중국(어)의 위세가 날로 커지고만 있으니, 미국 및 영어에 대한 경각심만으로는 우리 민족적 주체성을 지켜내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젊은 세대를 얘기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직업의 현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에 기고한 대부분의 필자들은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니 대학의 영어교육문제가 이 책 전반에 걸쳐 꾸준히 언급되고 있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한국 대학에서의 “실용영어의 추구이자 교양영어 개념의 포기”(213면)로 요약된다. 그 명분은 세계화시대의 무한경쟁으로 “살벌해진 국내외 생활환경이 우리가 영어를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요, 이에 “빛바랜 영어문헌을 암호책을 해독하듯 읽는 능력이 아니라 장사를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른바 ‘실용영어’를 가르치고 배워야 하고, 듣고 말하는 회화연습이 영어교육의 ‘알파와 오메가’가 돼야 한다는 주장”(157면)이 정설이자 정통으로 굳어졌다.

이에 대해 교양영어에 함축된 인문적 가치가 배제되는 데 대한 아쉬움을 토로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실무적인 차원에서도 외국인과 “같은 발음, 그들과 같은 어법, 그들과 같은 관용구, 그들과 같은 욕을 하는 것”(234면)을 가르치는 것이 옳지도 않고 가능치도 않다고 역설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이나 질타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그것은 이 책 전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땅에서 영어가 하고 있는 짓거리에 대해 적절하고 당연한 문제제기를 이 책은 하고 있으나, 과연 영어가 여전히 권력과 자본과 권위와 물신과 교육대상으로 행세하고 있는 현실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것인가. 물론 문제제기는 그 자체로도 의미있는 행위일 수 있다. 하지만 사안을 감안할 때 영어를 가르치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이 책의 대부분 필자들과 본 서평자 및 󰡔안과밖󰡕의 대부분 독자들로서는 문제제기와 비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우리가 곧 당사자 아니던가. 누구를 탓하겠나. 영어교육의 식민주의적 요소와 영어의 권력화․물신화, 그 무익한 실용화에 맞설 실천적 대안이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의 편집자는 “주체적인 영문학 연구의 노력”이 “영어의 정치에 대응하는 힘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41면)를 피력한다. 물론 공감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가 근거 없는 기대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다시 말해 “주체적인 영문학 연구”와 대학 강의실 간의 깊어만 가는 골을 좁히는 일은 우리 각자의 교육현장에서의 실천적 과제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안과밖] 23호에 실린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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