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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다른 것에 말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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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형중[자료실]

작성일자

2008-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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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8


완전히 다른 것에 말걸기
새러 하라쉼 편집, 이경순 옮김 󰡔스피박의 대담󰡕(갈무리 2007)

김형중
金亨中 조선대 교수.

2007년 즈음의 한국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던 1990년대 초엽부터였을까? 아니면 맑스주의를 대신할 대안 사유를 찾아 적지 않은 지식수입상들이 ‘포스트’(post)란 접두어 붙은 이러저러한 지식상품들을 대거 수입해 들여오던 1990년대 중엽부터였을까? 우리가 세계를 텍스트로, 그것도 항상 탈구축(deconstruction)되어야 할 텍스트로 대하기 시작했던 싯점 말이다. 그 시작이야 어찌되었든,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제 너나 할 것 없이 다소간은 해체주의자이고, 다소간은 라깡주의자이면서, 또 다소간은 푸꼬주의자이자 종종 탈식민주의 지식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2007년 즈음 한국의 지식인들은 “텍스트를 벗어나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인간이란 것도 “마치 해변의 모래사장에 그려진 얼굴이 파도에 씻기듯 이내 지워지게” 될 것이란 사실, 그리고 심지어 “인간의 무의식조차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이며, “동양이란 고작해야 서양의 상상”이었단 사실에 대해 (비록 어떤 단서 조항을 달 수는 있다 하더라도) ‘대체적으로’(라도) 동의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지식인 소리 듣기 어려운 싯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말들의 진리가에 한없이 공감하면서도 어딘가 미심쩍은 느낌은 남는다. 종종 포스트구조주의 사조의 그와같은 언사들에서는 고도로 정치적인 비정치성의 낌새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데리다(Derrida)의 해체작업은 어떠한 해방담론에 대해서도(지배담론에 대해서와 똑같은 정도로) 적대적이다. 푸꼬(Foucault)의 에피스테메(épistemé)나 라깡(Lacan)의 상징계(the Symbolic)는 언어로 이루어진 감옥과 같아서 그 바깥을 꿈꾸기란 좀체 묘연해 보인다. 그렇다고 구조주의 이후 현대사상가들이 이룩해놓은 그 빛나는 회의주의를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구조주의 이후 현대사상이 이룩한 성과들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언어 너머를 언어화할 수 있을 것인가. 타자에 대한 동일자적 점유를 피하면서 어떻게 표상체계 너머의 존재들을 표상할 수 있을 것인가. 또다른 본질주의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어떻게 지배담론의 본질주의적 폭력에 대한 저항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해답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 역설적인 질문들에 대해 답하기, 그것이야말로 21세기 벽두를 경과하고 있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사실은 세계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난제가 아닐까 싶다.

이 난제가 반드시 사상사적 맥락에서만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우리 문학이 경과해온 발자취 또한 여기서 그리 멀지 않다. 김춘수가 ‘무의미 시’를 쓰겠다고 했을 때나, 혹은 이승훈이 ‘비대상시’를 논할 때(사실 이들 역시 그러한 시도의 정치적․윤리적 함의에 대해서는 온전한 이해가 없었다)와 같은 예외적인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한국문학이 언어 너머를 꿈꾸어본 적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사정은 변해서 우리는 지난 십수년 동안 문학이 자신의 운명인 언어를 회의하는 예를 적지 않게 보아왔다. 맑스주의의 쇠퇴와 포스트구조주의적 문제제기의 영향하에서 한국문학에서도 이제 ‘언어는 사실을 기록할 수 있는가, 작가는 투명한 주체일 수 있는가,

그리고 언어는 혹시라도 언어 너머를 언어화할 수 있는가’와 같은 주제들이 그리 낯설지 않게 되었다(특별히 나는 지금 명민한 두 작가 김연수와 전성태의 최근 작업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고 강영숙과 배수아와 천운영과 김재영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초국적 타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말하자면 앞서의 난제는 한국문학이 지금 다다른 곳에서 해결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난제는 한국사회 전체의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김영삼 정권의 노동시장 개방 이후 한국사회는 이제 더이상 ‘단일민족’사회가 아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 결혼이민 여성, 외국인 유학생 인구 등을 포함해 이주민 1백만 시대에 접어든 것이 작금의 한국사회다. 사실은 김수로가 인도 여인 황옥을 왕비로 취할 때부터, 혹은 탈해가 신라인들에 의해 ‘환대’받을 때부터 이미 단일민족은 아니었던 ‘한’민족이, 이제야 진지하게 다문화사회로의 이행을 고려해야 할 싯점에 이른 것이다. 한번도 ‘우리’ 안에 포함되어본 적이 없던 이방인들, 왜놈이나 뙤놈, 양놈이나 오랑캐로서 배제되거나 수용(사실 이 말은 동일자적 점유의 다른 말일 텐데)되었던 타자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단순히 사회학이나 인류학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한국인(이런 게 있다면)의 표상체계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손질을 요청한다. 다시 한번 ‘우리의 표상체계 너머에 있는 존재들을, 배제하거나 수용하거나 동정하거나 연민하지 않고 어떻게 표상할 것인가’가 문제다.


아뻴라 뚜또뜨르(appel a tout-autre)

󰡔스피박과의 대담󰡕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스피박(Spivak)이야말로 이 난제의 해결에 가장 근접해 있는(그러나 도달해 있지는 않은) 사상가이기 때문이고, 그의 (의도적으로) 난해한 사상에 접근하기에 가장 유용한 문서가 바로 이 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스피박보다 먼저 이 난제에 대해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들에 대해 들은 바 있다. 가령 그런 예들 중 하나가 레비나스(Levinas)와 데리다의 ‘환대’(hospitality) 개념이다. 그러나 ‘타자의 부름에 대한 절대적 호응’으로서의 환대가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레비나스의 언어들이 종종 신학적으로 비치는 이유, 그리고 데리다의 언어들이 종종 시학적으로 비치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터인데, 그들의 해답은 매력적인 만큼 (신학과 시학이 그렇듯이) 실제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환대의 주체는 항상 특정한 역사․사회․이데올로기적 구성체 내에 어쩔 수 없이 위치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사심 없음이 환대일진대, 그 ‘사심’은 처음부터 주체에 대해 본질구성적(constitutive)이다. 누구도 자신을 주체로서 구성한 이러저러한 담론들 외부에서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사심은 버리기 불가능한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스피박이 지적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스피박 역시 ‘타자의 흔적에 대한 책임’이라는 데리다의 명제를 따라 ‘완전히 다른 것에 말걸기’(「전략, 정체성, 글쓰기」 124~25면)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말걸기 자체보다는 그 말걸기가 불러올 위험에 관해서이다.

“도시의 준프로레타리아, 주변부에 가까운 여성, 토착민의 구성에 대해서 말할 때의 여러 담론 말이죠. 그것들은 매우 견고하고 고전적인 맑스주의, 원리주의 이야기이거나 일종의 타자의 찬미에 그치고 말지요.” (「비평, 페미니즘, 제도」 54면)

“제가 시사하는 것은 타자가 피해를 받고 있는 형태가 아니라, 우리들이 그것을 산출하는 형태, 합리주의적 기획에까지 관찰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기획이 여러 기획보다 훨씬 커다란 텍스트성의 내부에서 산출되고 있다는 것을 보도록 하는, 검증하는 주체를 위한 권유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인간은 끊임없이 관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합리주의적 기획은 그같은 시선에서 자유로워서는 안됩니다.” (「포스트모던 상황: 정치의 종언?」 90면)

“정신분석이나 반정신분석은 페미니즘이라는 명분으로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선물이 되기가 쉽겠지요.” (「문화적 자기재현의 문제」 145면)

“타자를 단지 지식의 대상으로 구축하고 타자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시대 풍조 따위를 위해 공적 장소에 나오는 사람들 때문에 참된 타자가 제외되어 버립니다.” (「다문화주의의 문제점」 157면)

그가 맑스주의의 타자 찬미를 비판하고 ‘위기관리’론에 입각한 전세계적 노동분업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합리주의적 기획의 온정주의를 비판하고 그 기획 자체의 반성을 요구할 때, 정신분석페미니즘의 보편주의 대신 제3세계 여성노동을 포함한 ‘전지구적 페미니즘’(global feminism)을 주장할 때, 타자에 대한 재현/대표 정치에 대해 비판의 강도를 늦추지 않을 때 스피박은 사실 ‘환대’의 어려움, 곧 ‘완전히 다른 것(tout-autre)에 말걸기’의 위험을 반복해서 환기시키고 있다.

뼛속까지 자기반성적이지 않고서는 타자에 대한 동일자적 전유를 피하기란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때 스피박이 내세우는 전략이 바로 “특권을 상실로 여기고 버린다(unlearning one’s privilege as one’s loss)고 하는 신중한 기획”이다(「비평, 페미니즘, 제도」 51면). 타자에 대해 말을 걸고, 타자의 해방을 논할 때 주체가 항상 자신이 속해 있는 위치의 특권에 대해 반성하고, 그 특권(배움)을 버림(unlearning)으로써 타자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힘쓰지 않는다면 타자는 레비나스에게서처럼 신학의 대상이 되거나, 데리다에게서처럼 시학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럴 때 실제적인 의미에서의 타자와의 소통 가능성은 차단된다.

여러 대담에서 스피박이 자주 언급하는 ‘전략적 본질주의’(strategic essentialism)나 ‘열린 결말/목적의 실천정치’(practical politics of the open end)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저는 전략적으로, 보편적 담론이 아니라 본질적 담론을 또다시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들이 페미니스트 실천이나, 이론에 대한 실천의 권리만을 말할 때도 우리들은 보편화하고 있습니다―일반화뿐만 아니라 보편화하고 있지요. 본질화, 보편화, 존재-현상학적 질문에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계기는 환원 불가능한 것이므로, 적어도 현재로는 그것으로 자리매김해두면 안될까요? 그것을 거부한다고 하는, 전면적으로 반-생산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것보다는, 될 수 있는 한 우리들이 자신의 실천에 대해 신중하게 그것을 사용토록 해보지 않으시렵니까? 거기에서 야기되는 문제는 사람이란 이론가로서 스스로의 순수성을 포기해버리는 것입니다. … 그렇게 할 때 내던져버린 것은 이론적인 순수성입니다.” (「비평, 페미니즘, 제도」 54~56면)

예를 들어 우리가 실제로 이를 닦거나 매일 몸을 깨끗이 한다든지, 운동을 하거나 뭔가를 할 때 우리는 죽어야 할 운명에 지는 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실은 이러한 모든 노력은 우리가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갈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것을 다른 도리 없이 운명지어진 되풀이되는 노력보다는 유지와 보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행위를 수술로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운명을 타고난 신체의 일상적인 보존을 위해 수술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 이 유추는 그 자체로 견강부회 같지만, 우리가 열린 결말/목적의 실천 정치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는 어떤 종류의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행위(외과 수술)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열린 결말/목적의 실천정치」 245면)

(유행에 따라 저급하게 이해된) 해체론을 포함해서 현대사상 특유의 반본질주의는 어떠한 긍정적 정치기획에 대해서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용문에서 보듯 스피박이 보기에 그것은 허황된 이론적 순수주의다. 왜냐하면 현실정치에 있어 유의미한 기획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본질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은 스스로를 반본질주의자라고 말할 때조차 본질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이론적 순수주의를 지키는 대신 스피박은 기꺼이 전략적 본질주의를 택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즉 억압적 현실과의 전투에 있어 객관적인 거리를 차갑게 유지하면서 사태를 회의하고 조롱하기보다는 본질주의자로서 싸우고 개입하기, 그럼으로써 나날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것이 스피박의 전략이다.

그러나 그의 전략적 본질주의는 전통적인 본질주의와는 궤를 달리한다. 그것은 마치 이 닦기와 같아서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외과수술과는 달리 나날의 삶에서 실현되는 정치에 ‘실제적으로’ 개입한다. 결말이자 목적인 죽음 앞에서 매번의 이 닦기는 항상 실패이거나 패배이지만, 그렇다고 이 닦기를 수술로 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제대로 닦느냐 하는 데 있다. 그가 ‘열린 결말/목적의 실천정치’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현실 앞에서 본질의 부재만을 한없이 되뇌면서 무력하게 유희하는 대신 이론적 순수주의를 벗어던지고 현실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스피박의 요지는 앞서 타자를 신학이나 시학의 영역에 두는 대신 주체의 특권 버리기를 통해 그들과 소통하고자 했던 ‘완전히 다른 것에 말걸기’ 시도에 상응한다.

스피박이 2007년 즈음을 경과하고 있는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다른 어떤 사상가보다도 중요하게 읽혀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의 표상체계 너머에 있는 타자들의 공간을 대표하거나 재현한다는 이유로 점유하지 말 것, 그들을 동정하거나 연민함으로써 안전이 보장된 게토에 구속하지 말 것, 그들을 신으로 만들거나 시로 만들어 소통 불가능한 영역에 성스럽게 내버려두지 말 것, 대신 끝없는 자기반성과 특권 버리기를 통해 그들의 말을 배우고 소통하려고 시도할 것, 이론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조롱과 유희만을 일삼지 말고 매번의 전투를 본질주의자처럼(그러나 반본질주의자인 우리는 얼마나 오래 본질주의자처럼 행세할 수 있을까? 혹은 본질주의자 흉내를 낼 수 있을까? 스피박은 이 문제에 답해야 할 테지만) 치를 것, 이 모든 것들이 󰡔스피박과의 대담󰡕을 읽는 독자들에게 스피박이 상기시켜주는 가르침이다.□
([안과밖] 23호에 실린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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