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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객관성?: 김현의 [제강의 꿈]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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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길영

작성일자

2008-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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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057


[김현 문학 전집] 9권에 실린 [제강의 꿈]을 읽었다. 이 책은 김현 비평에 큰 영향을 미친 제네바 학파를 연구한 저서이다. 좀더 면밀히 검증되어야할 주장이지만, 나는 김현비평의 세가지 원천은 프로이트의 욕망 이론, 바슐라르의 이미지 연구와 객관화의 방법론, 그리고 세계와 의식/욕망의 관계를 탐구한 제네박 학파라고 생각한다.(지나가는 말이지만, 김현의 프로이트 이해는 의외로 소박한 데가 있다. 예컨대 이런 지적. “한 인간의 심리적 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가족 환경을 분석해보아야 한다. 심리적 억압은 가족 정황에서 생겨나, 무의식 깊숙이 가라앉는 법이기 때문이다”(182). 이런 소박함이 때로 지나치게 환원적인 시 읽기로 나타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이다.) 그들 세 원천들은 김현이라는 저수지에서 서로 섞여 새로운 흐름을 만든다.

제강은 중국의 신화서인 [산해경]에 나오는 전설에 나오는 신이다. “이곳의 어떤 신은 그 형상이 누런 자루 같은데 붉기가 빨간 불꽃 같고 여섯 개의 다리와 네 개의 날개를 갖고 있으며 얼굴이 전연 없다. 가무를 이해할 줄 아는 이 신이 바로 제강이다”(171). 왜 책 제목을 ‘제강의 꿈’이라 했을까? 문학은 상상력이라는 것이 하나의 답이겠다. 마지막 문장이 힌트를 제공한다. 제강은 “가무를 이해할 줄” 아는 신이다. “가무를 이해”한다는 부분을 “문학을 이해”한다는 표현으로 바꾸면 어떨까? 문학을 “이해”한다는 것을 무엇인가? 그런 이해의 ‘객관성’은 가능할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통상 현상학적 비평으로 간주되는 제네바 학파가 다양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 여기 있다.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하고 가치평가하는 행위는 무엇을 지향하는가? 그런 행위의 객관성은 어디까지 확보가능할가? 가능하다면 그것들의 준거점은 무엇일까? 다시 묻자. ‘문학의 이해’는 가능할까? 그런 이해에서 객관성은 가능할까? 김현 비평을 관류하는 질문들은 제네바 학파와 맞닿아있다.

제네바 학파는 “레이몽을 정점으로 하는 베겡, 풀레, 루세, 스타로벵스키, 리샤르의 제나바 그룹”(221)이다. 김현은 제네바 학파를 현상학적 비평으로 규정하는 입장에 거리를 둔다. 김현은 현상학적 비평보다는 ‘주제비평’으로 제네바 학파의 특장을 규정하는 쪽으로 기운다. 영미비평에서도 대략 합의된 정리지만, 현상학적 비평은 신비평이 목표로 했던 이른바 ‘객관주의’ 비평에 강하게 반기를 든다. 작품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신비평은 단호하다. 의미는 오직 작품 안에 있다. 저기 광맥에 묻혀 있는 석탄이나 다이아몬드을 캐내듯이 비평은 작품에 ‘객관적’으로 내재한 의미를 발굴하면 된다. 신비평의 ‘꼼꼼한 읽기’의 대상은 작품 자체이다. 작가와 독자의 위상을 신비평은 인정하지 않는다.

대상과 주체의 관계는 근대철학의 근본 관심사이다. 훗설이 제기한 현상학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저울추를 주체 쪽으로 기울게 한다. 대상의 의미는 대상 자체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작품의 의미도 작품 자체에 있지 않다. 대상의 의미는 대상을 대하는 주체에게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의식이란 언제나 대상을 갖고 있으며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202)이다. 강하게 말해 의식이 지향하거나 정립하지 않은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따라서 현상학적 비평에서 대상의 재현이나 반영은 중요하지 않다. 작품의 현실은 작가의 의식에 비춰진 현실이다. 따라서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의 세계는 작품 바깥의 세계와는 관련이 없다. 관련이 없다기보다는 작품의 세계와 ‘객관 현실’ 사이에 상응이나 재현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레이몽의 말대로 “본질적인 것은 불확실하며, 가장 찬란한 아름다움은 잴 수 없는 법이며, 가장 드높은 진리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다”(209).

작품의 진리는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이 점에서 제네바 학파는 작품 바깥의 현실을 작품 평가의 준거점으로 삼는 맑스주의 비평과 날카롭게 갈라진다. “그[풀레]가 보기에 문학이란 저자의 사유가 말로 표현된 어떤 것이었다”(218). 비평이 밝혀야 할 대상은 작품에 “말로 표현된”“저자의 사유”이다. 이때 저자의 사유는 실제 작가가 갖고 있는, 혹은 그렇다고 여겨지는 작가의 세계관이나 의식이 아니다. 전기적 비평은 금지된다.

제네바 학파의 문제의식은 이렇게 요약된다. “제네바학파의 구성원들이 폭넓게 합의하고 있는 것은 i) 문학은 경험이다; ii) 장르 구분은 문학적 경험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iii) 작가의 작품은 작가의 문학적 경험의 단편들이다; iv) 비평이 탐구해야 하는 것은 문학 작품 내의 주제와 충동의 내적 유형이다”(229-230). 김현의 요약을 좀더 살펴보자. 문학은 경험이다. 경험은 작가의 경험이다. 다시 말해 작품의 세계는 작가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세계의 변형된 형태이다. 따라서 세번 째 규정이 가능하다. “작가의 작품은 작가의 문학적 경험의 단편들이다.”

그러나 "문학적 경험의 단편들"은 흩어진 단편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으로 통일성을 이룬 단편들이다. 비평은 작품에 표현된 작가의 “경험”, 작가의 주관적 경험으로 창조된 작품내 세계의 “조리정연함”을 따진다. 그 구체적 방법론이 작품에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이미지, 모티프, 주제의 분석이다. “주제 분석의 주관적 성격에 대해 비난할 수 있으나, 모든 이해는 언제나 주관적이며, 내부에서 작업해야 동화될 수 있다는 반론을 제시할 수 있다. 문학에서의 객관성이란 내적 조리정연함일 뿐이다”(253). 이해의 주관성에서 비평가도 벗어날 수 없다. 작가가 세계를 주관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면, 작가의 경험이 표현된 작품을 읽는 비평가의 읽기도 역시 주관적이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 어떻게 작품에 표현된 작품 안으로 들어가 “내부에서 작업”하고 “동화”할 수 있는가? 어떻게 비평가는 작가의 의식에 공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흔히 ‘공감의 비평’으로 정리되는 김현 비평의 문제의식은 이 지점에서 제네바 학파의 문제의식과 통한다. (예컨대 소설쓰기와 읽기가 어떤 메커니즘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다룬 소설원론에 해당하는 글인 ‘소설은 왜 읽는가’가 좋은 예이다) “장르 구분은 문학적 경험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두번 째 정의는 주제비평과 관련된다.

“리샤르의 질문적이고 전체적인 방법론의 핵심은 주제라는 개념이다. 제네바학파의 등록 상표가 되다시피 한 주제라는 개념은 매우 막연하고 모호한 개념이다. 리샤르가 사용하고 있는 주제는, 말라르메가 사용하고 있는 말-뿌리에 가까운 개념이다. 말들이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뼈와 힘줄로 축소되어, 그들의 비밀한 친족 관계를 보여주는 문자나 자음의 집합이라고 말라르메는 뿌리를 규정하고 있는데, 리샤르는 그 규정을 이어받아 세계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구성 원칙, 고정적인 도식이나 대상을 주제라 규정한다”(252)

모든 작품은 작가가 변형시킨 세계의 구성이다. 그런데 그런 구성은 언제나 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주제는 일종의 “말-뿌리”이다. 그 말-뿌리는 소설에서는 “구체적인 구성 원칙, 고정적인 도식이나 대상”으로 나타나며, 시에서는 전체 시를 이끄는 몇 개의 반복되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따라서 “비평이 탐구해야 하는 것은 문학 작품 내의 주제와 충동의 내적 유형이” 된다. 시 비평에서 김현이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이미지 분석은 단순히 형식탐구가 아니라 제네바 학파가 부각시킨 주제비평과 이어진다. 그에게도 내용과 형식은 분리될 수 없다.

프루스트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시공간의 문제, 특히 시간의 공간화라는 ‘주제’로 그의 작품을 분석하는 풀레의 비평이 좋은 예이다. “모든 사물들은 존재하며 서로의 곁에서 생존을 영위하는 걸로 만족한다. 그것들은 밀어내지도 끌어당기지도 않는다. 그런 사물들의 나란히 놓기를 실현하는 것은 한 사람의 행위자 혹은 한 사람의 저자이다. 프루스트의 나란히 놓기는 ‘같은 행위자와 같은 저자의 현존에 의해 통합된 다양성이지, 어떤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벽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그림들의 나란히 놓기가 아니다”(241). 주제비평에서 작가는 작품을 주관하는 주체이다. 따라서 비평가는 겉으로 다양하고 산만하게 드러나는 이미지들이나 주제들을 묶어주는 작가의 의식이 드러내는, 혹은 감추는“통합된 다양성”의 양상을 해명해야 한다. 그리고 통일성을 부여하는 작가의 의식, 혹은 김현 식으로 표현하면 작가의 욕망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비평은 작가의 의식과 비평가/독자의 의식의 만남이다. 의미는 그 만남에서 언제나 주관적으로 생성되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말 그대로 “저자의 사유와 비평가의 사유가 창조적으로 부딪쳐 새로운 내적 세계를 이루는 것”(218)이다. 제기되는 질문. 내적 세계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그것은 평가가 가능한가? 두 개의 사유가 “창조적으로 부딪”친다고 할 때 그 창조성은 어떤 기준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 깊은 주관주의로 요약되는 제네바 학파의 문제의식에 십분 공감이 가면서도, 자칫 이런 식의 주관주의가 비평의 상대주의로 이어질 수 있겠다는 의문도 남는다.

제네바 학파를 대표했던 비평가였던 풀레의 고민도 여기 있다. “비평은 불완전하고 인상주의적인 것으로 그[풀레]에게 나타났다. 그렇다면 작품을 작품의 흐름에 따라 이해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사유에 의해 인위적인 질서를 부여해야 할 것인가? ... 그 계기를 이뤄준 사람들이 제네바학파의 대분들이라 할 수 있는 레이몽, 베갱 둥이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저자의 사유와 비평가의 사유가 창조적으로 부딪쳐 새로운 내적 세계를 이루는 것을 직관적으로 체득한 것이었다”(218) 작품읽기의 객관적 척도가 없다면 모든 읽기와 비평은 “불완전하고 인상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비평이 감상과 다른 점이 좀더 섬세한 읽기나 논리의 구사여부에만 있는 것일까? 그런 논리의 '객관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비평가가 자신을 자극하는 어떤 작품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물론 비평가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작품 읽기에서 깊은 공감이나 충격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공감이나 충격은 주관적이다. 비평가의 주관적 읽기가 다른 독자들에게 ‘객관적’인 설득력을 발휘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예컨대 김현 비평의 한 정점이라 할만한 글인 ‘속꽃 핀 열매의 꿈’이 나를 비롯한 독자들에게 발휘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김현은 김지하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 만들어낸 시 안의 세계에 그려진 무의식을 밝히고 싶어한다. 그런 해명을 통해 시에 드러난 시인의 의식, 혹은 욕망을 분석한다. 결론적으로 시인의 욕망을 분석하고 싶어 하고, 시의 어떤 대목에 불편해하거나 공감하는 김현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그의 분석은 정치하고 설득력이 있다. 그렇게 이 글에는 “저자의 사유와 비평가의 사유가 창조적으로 부딪쳐 새로운 내적 세계를 이루”는 장관이 펼쳐진다.

그래도 질문은 남는다. 두 개의 의식이 부딪쳐 만드는 “내적 세계”가 읽기의 객관성이라는 문제와 어떻게 연결가능한가? 아니, 어떤 점에서 모든 읽기와 비평은, 제네바 학파의 날카로운 지적대로 언제나 주관적이다. 세계는 언제나 특정한 주체, 예컨대 작가나 비평가가 해석한 세계이다. 객관세계는 알 수 없다. 의식이 지향하지 않는 그 주체에게는 존재하지 않느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럴 때 수많은 읽기에서 표현되는 해석된 세계들 사이의 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강하게 표현하면, 제네바 학파로 대표되는 현상학적 비평은 무비판적이고 비평가적인 분석방식이다. 비평은 텍스트의 수동적인 수용, 그 정신적 본질들을 순수하게 옮겨 적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분석은 있으나 가치평가는 쉽지 않다. 평가는 평가의 척도가 있어야 하는데, 해석의 주관성을 전제로 하는 현상학적 비평 혹은 제네바 학파식의 주제비평에서 그런 객관적 척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평의 주관성이라는 문제는, 김현 비평의 다른 준거점인 바슐라르가 제기한 객관성의 탐구라는 문제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객관적인 것은 단박에 주어지지 않으며 오직 객관화의 방법만이 있을 뿐이라는 통찰을 바슐라르에게서 김현은 배운다. 주어진 정답을 가르치려는 이른바 ‘주도비평’에 김현이 매우 불편해한 이유가 여기 있다. 하지만 김현 자신도 비평 행위에 있어서 주관성과 객관화의 방법을 좀더 명료하게 해명하지는 못했다. 후기 김현 비평이 보여주는 몇편의 빛나는 작품 분석은 그런 가능성을 드러내주긴 하지만.

손쉽게 심리주의 비평으로 간주되는 김현 비평의 위상을 비판하면서 김현은 자신의 비평을 분석적 해체주의고 규정했다. “분석적 해체주의란 문학이 우리가 익히 하는 경험적 현실의 구조 뒤에 숨어 있는, 안 보이는 현실의 구조를 밝히는 자리라고 믿는 세계관을 뜻한다”([비평의 유형학을 향하여]). 다시 질문을 제기한다. "안 보이는 현실의 구조”는 객관적으로 해명될 수 있을까? 우리는 오직 “경험적 현실”을 알 수밖에 없다면 말이다. (곁다리. 나는 요즘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를 인상 깊게 읽고 있다. 지젝은 이 책에서 이런 나의 주장을 통렬하게 반박한다고 느꼈다. 현실 혹은 상징계는 언제나 미완성이다. 균열이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적 현실”의 틈새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 거기에서 행동과 실천과 혁명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을 지젝은 강조한다.)

김현의 지적대로, 그가 시도한 연구외에 제네바 학파에 대한 깊이 있는 후속 연구는 찾기 힘들다. 후학들이 부끄러워할 일이다. 유행따라 이론을 좇는 이론수용의 문제점은 여기서도 발견된다. 과문한 생각에 불과하지만, 제네바 학파는 더 깊이 있게 연구될 필요가 있다. 김현 비평의 면모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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