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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이론, 새 것 콤플렉스, 감싸기: 김현 [행복의 시학] 읽기
첨부
작성자

오길영

작성일자

2008-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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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094


틈틈이 그간 읽지 못한 몇권의 한국문학평론집을 읽었다. 그 중 한 평론집에서 저자는 지금 한국문학평론계에 외국문학전공 비평가가 '씨가 말랐다'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김현, 김우창, 백낙청, 유종호, 염무웅 등을 비롯한 주요한 4.19세대 비평가들이 외국문학전공 비평가였음을 상기시킨다. 나는 지금 외국문학전공자들이 왜 한국문학에 관심이 없는지, 그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고 관심도 없다.

다만, 이런 생각은 든다. 국문학 전공자나 외국문학 전공자 모두 자신이 하는 공부의 ‘안과 밖’을 사유할 때 깊이 있는 연구나 비평이 가능하다는 생각. 들뢰즈의 표현대로 낯선 것과의 마주침이 없는 새로운 사유는 불가능하다. 자기 전공의 ‘밖’을 사유할 때만이 자기 전공의 ‘안’이 지닌 의미와 한계가 드러난다. 외부와 마주치지 않으면 생기 있는 새로운 사유는 가능하지 않다. 안팎의 경계에 선 연구에서 생기있고 깊이 있는 연구나 비평이 가능하다.

글을 하나 쓰기 위해 김현의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다. 그에게 그의 ‘전공’이었던 프랑스 문학이나 비평이론들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좀더 깊이 따져볼 문제이지만, 김현에게 이론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기보다는 그가 애정을 갖고 힘을 쏟았던 한국문학과 문화공간의 여러 문제들을 성찰하기 위한 일종의 '이론-기계'였다. 김현 자신의 지적대로, 그가 외국문학이나 비평이론을 수용하는 태도에서도, 스스로 극구 경계했던 ‘새 것 콤플렉스’는 간간히 발견된다. 어쩌면 그것은 외국문학이나 이론을 공부하는 이들의 숙명이리라. 그러나 적어도 김현에게 이론은 단지 “밖에서 주어지는 체계”가 아니었다. 문제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이론을 대하는 “분석정신”이다. 한국문학비평가이자 프랑스 문학자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지닌 김현에게서 돋보이는 점이다.

> "그런 비평계의 모습과 관련하여 내 생각으로 제일 중요하게 제기돼야 할 문제는 분석 정신의 해이이다. 분석 정신이란 자료를 모아 그것을 분석 정리하는 정신을 뜻한다. 이론은 그 분석 정신의 자료 이해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론은 자료의 밖에서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료를 이해하고 분석 종합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이론이다. 이론을 밖에서 주어지는 체계라고 생각할 때 자료는 그 이론의 연습장에 지나지 않게 된다. 새 이론에 대한 맹목적 추수가 생겨나는 것은 바로 그때이다. 그러나 자료를 모으고, 그것을 분석 종합하는 과정 자체가 이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료밖에 있는 이론이란 참고사항이지, 절대적인 설명체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자료를 모으고 그것을 분석 정리하는 것은 단순 노동적인 작업이 아니라, 바로 그 이론 자체이기 때문에 자료를 모으고 그것을 정리하는 데 게으른 정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실과 동떨어진 이론을 내세우기가 쉽다." (김현 「문학은 소비상품일 수 없다」(1982), 『김현문학전집 14: 우리시대의 문학/두꺼운 삶과 얇은 삶』, 문학과지성사 1993, 291쪽).

김현이 한국문학이론이나 서구비평이론 수용사에 남긴 중요한 기여 중 하나. 그가 유럽비평 “이론”들과 한국문학의 “자료”사이에 벌어지는 긴장관계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드러내놓고 ‘주체적’ 외국문학연구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주체성은 단지 말로 하는 주체성이 아니라 밖에서 주어진 “이론”과 한국문학 안의 “자료”사이의 긴장된 마주침을 응시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분석 정신”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한국문학읽기와 밖에서 주어지는 비평이론 수용은 뗄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 과정의 길항관계에서 김현은 이론을 하나의 “절대적인 설명체계”로 보는 “사실과 동떨어진” 이론주의나 “게으른 정신”을 넘어설 실마리를 찾는다. 한국문학은 그에게 유럽 “이론의 연습장”아니라 그 이론의 타당성을 구체적으로 시험해보고 사유하게 해주는 터전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더 중요한 것은 발을 딛고 선 터전이다. 따라서 그에게 의미 있는 이론은 이론 자체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훈고학적으로 이론의 내적 의미를 탐구하는 것은 그의 본질적 관심사가 아니었다.

물론 그는 누구보다 이론 자체의 훈고학적 주석 달기나 실증주의적 텍스트 읽기에 충실했다. 그는 성실하고 치밀한 프랑스 문학/이론의 소개자이자 연구자였다. 김현은 소개와 수용의 단계를 넘어서 이론과 자료분석이 하나가 되는 단계, “자료를 모으고, 그것을 분석 종합하는 과정 자체가 이론”이라는 통찰로 나아갔다. 요는 “분석종합하는” 정신이다.

한국에서 출간된 바슐라르 연구 중 빼놓을 수 없는 김현의 [행복의 시학: 바슐라르의 원형론 연구]는 김현이 목표로 한 “분석종합하는 정신”이 드러나는 한 예이다. 바슐라르라는 낯선 타자와 만남에서 김현은 그의 비평작업을 이끌어갈 실마리를 찾는다. 그 작업은 어느 ‘대가’의 이론을 한국문학이라는 ‘자료’에 적용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가 바슐라르에게서 배우는 것은 비평행위의 기본적 전제들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몇가지 대목을 읽어본다.

1. 과학적 지식의 한계

> “과학적, 객관적 지식이라고 알려진 것이 항상 교정되듯이, 철학적 주장 역시 항상 교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나 철학자는 그들이 제시하는 것이 항상 옳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세계에 의해 모든 것이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그 체계 밖에 위치하는, 체계를 벗어나는 어떤 것이 있기 마련이고,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행복의시학/제강의 꿈: 김현문학전집 9], 문학과지성사, 1991, 16-17면).

바슐라르가 문제삼는 것은 과학의 객관성이다. 현대 물리학이나 자연과학이 밝혀주고 있듯이 과학성이나 객관성은 이미 주어진 체계를 전제로 한다. 체계는 그 체계를 구성하는 주체를 전제한다. 객관성은 언제나 이미 주어진 체계 안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객관성이다. 인식은 체계를 구성하려고 시도하나 “항상 그 체계 밖에 위치하는, 체계를 벗어나는 어떤 것이 있기 마련”이다. 알튀세르의 지적대로, 과학철학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그런 체계의 위기가 오는 때이다.

위기가 올 때 과학은 자신의 한계를 성찰하고 자신 밖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사유한다. 그런 사유를 통해 기존의 체계는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체계에 의해, 바슐라르의 표현을 빌리면, “감싸여진다.” 바슐라르의 주요 개념중 하나인 ‘인식의 단절’은 날카로운 절단의 칼질이 아니다. 그것은 이전의 것을 새로운 것 안으로 끌어들여 변용시키는 연속과 단절의 이중 작용을 가리킨다.

김현의 한국문학비평에서 종종 드러나는 “감싸안기”나 “오류의 교정” 등의 개념은 바슐라르에 빚진 것이다. 더 나아가 김현은 이런 개념들을 통해 한국문학의 오래된 이분법, 즉 주로 유럽에서 주어진 ‘새 것 콤플렉스’와 한국문학/문화의 ‘전통’ 사이에 생산적인 대화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내가 한참 전에 인상깊게 읽었던 어느 임화 연구논문의 제목을 빌리면, ‘이식과 창조의 변증법’을 김현은 시도한다. 한국문학의 ‘전통’과 외부에서 주어진 ‘새 것’은 대립되지 않는다. 전통의 가치는 새로운 것과의 만남을 통해 확장된다. 새 것은 한국문학의 지형에 수용되면서 전통을 감싼다. 또한 전통은 새 것을 역으로 감싼다. “바슐라르의 이성은 데카르트적 이성의 활성화인 것이다. 바슐라르의 비데카르트적 인식론이 데카르트 인식론의 ‘감싸기’라는 것이 거기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41).

바슐라르의 인식론은 과거의 것을 반대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고 감싸 안는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새로운 것에 의해 감싸일 것이다. 따라서 객관성은 단숨에 주어지지 않는다. 객관화의 끝없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김현이 어떤 주어진 객관성이나 답을 전제한 비평적 태도에 거부감을 보인 이유가 여기 있다. 비평의 객관성은 자임한다고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비평은 의견의 ‘개진’이다. 그 개진은 다른 의견들에 의해 감싸일 것이다. 그런 감싸이는 과정을 통해 더 깊어진 객관성의 지평이 열린다. 따라서 문제는 객관성이 아니라 객관화이다. “객관화의 방법이 없는 한 객관성에 도달할 수는 없다”(48).

문학연구나 비평은 정답의 제시가 아니라 오류를 안에 품고 있는 의견의 개진이다. 개진된 의견에서 드러나는 오류를 교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개진이다. 그런 점에서 오류는 객관성의 대립항이 아니라 객관성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이다. “어떤 생각의 객관성은 그것이 오류를 바탕으로 나타나는 그만큼 더 명백하고 분명하게 될 것이다. 도달하려면 방황해야 한다” (50) 김현이 바슐라르에게 기대는 분석정신의 요체이다.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비평가가 가장 많이 틀린다. 그는 오류의 교정에 닫혀 있다. “오류의 교정은 그[바슐라르]를 심리주의로 이끌어간다. 그에 의하면 주체의 정신적 활동의 가장 근본적 기능은 틀리는 것이다. 그 틀림은 그의 경험을 보다 더 풍부하게 해준다. 자기는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틀리는 것이다”(51). 우리는 틀리도록 만들어졌다. 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그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고 틀림을 통해 우리의 삶과 인식이 “더 풍부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경로이다. 김현에게 비평은 그 경로를 좀더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드러내는 정신의 양상이다.

2. 일반화와 구체적 분석

하나의 입장을 절대화해서는 안되는 이유? 입장은 언제나 관계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지적대로 정체성은 언제나 관계나 맥락 안에서만 성립된다. 관계가 없으면 정체성도 없다. 미리 주어진 정답은 없다. “그[바슐라르]의 가능성의 수학은 무엇보다도 미리 주어지는 결정론적 이유를 싫어한다. 우연의 작용이야말로 그가 유물론적 변증법과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변증법인 것이다”(37). 대상들, 특히 인간의 사회적 관계들이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는 까닭이 여기 있다. 관계에서 한 대상을 떼어내어 보면 그것의 정체성이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드러난 정체성은 그 정체성이 드러나는 수많은 관계들의 일면에 불과하다.

인식은 언제나 일면적이고 불투명하다. 전체를 한번에 꿰뚫는 인식은 없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에서는 따로 하나의 요소를 제시하는 것은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않는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인지되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서 인지된다는 것은 동시에 그것이 직접적으로 인지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것을 고립시켜 인지할 수 없는 한, 모든 것은 간접적으로 인지될 수밖에 없다”(39).

따라서 좋은 독자나 비평가는 대상의 진리, 혹은 작품의 진리를 언제나 “관계 속에서 인지”한다. 그리고 자신의 읽기가 불투명하다는 걸 성찰하다. 왜냐하면 작품을 “고립시켜 인지할 수 없는 한, 모든 것은 간접적으로 인지될 수밖에 없다.” 김현이 비평행위를 둘러싼 다양한 측면들, 독자-작가-작품-현실 등을 가능한 입체적으로 사유하고, 그것들을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묶으려고 시도했던 것도 인식의 필연적인 간접성을 돌파하려는 시도이다.

작품의 의미는 단번에 파악되지 않는다. 의미는 작품을 둘러싼 수많은 관계들을 최대한 종합적으로 사유하려는 노력에 의해서만, 그런 객관화의 노력을 통해서만 조금씩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문학은 객관화의 방법론을 가장 깊이 있게 배우는 장이다. 문학은 자기를 되돌아보게 하고, 자기를 둘러싼 관계를 되돌아보게 하고, 결국은 “이미 만들어진 생각”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바슐라르]가 대중의 의견과 학교의 산물인 잘 만들어진 머리를 공격하고 있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그들은 다 같이 생각하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생각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 그것이 기본적으로 오류의 교정을 막는다”(60).

따라서 문학에서 필요한 것은 날카로운 비판정신이다. “감시의 결여”가 굳은 정신을 만든다. 비판정신은 손쉬운 “일반화”가 아니라 구체적 상황의 구체적 분석을 목표로 한다. 하나의 텍스트에 설득력 있게 적용된 읽기의 ‘방법’을 손쉽게 일반화해서는 안된다. 다른 텍스트는 또 다른 읽기의 방법을 요구한다. “원초적 경험, 일반적 인식, 단일적 실용주의 인식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것은 비판, 다시 말해서 감시의 결여이다. 비판의 결여는 모든 것을 쉽게 판단하게 만든다. 전과학적 정신, 다시 말해서 비객관적 정신은 쉬운 판단에 근거한 일반화의 희생물이다”(62). 바슐라르는 “모든 것을 쉽게 판단하게 만드는 전과학적 정신이나 비객관적 정신을 비판”한다. 문학은, 비평이론이 가장 큰 적수가 이것들이다.

3. 사유, 이미지, 즐거움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김현의 시 비평은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하다. 특히 시의 이미지 분석에서 날카로움과 섬세함은 돋보인다. 그러나 김현에게 이미지 분석은 단지 작품의 형식적이고 기교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과정이 아니다. 이미지는 사유의 표현이다. 그가 굳은 이미지와 “힘있는 이미지”를 되풀이해서 구분하는 것도 좋은 이미지는 역동적 심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 “역동적인 성격이 창조적이라는 것은 형태적인 성격은 곧 습관과 결부 되어 그 독창성을 잃기 때문이다. 습관은 상상하여 창조하려는 심리적 힘을 막아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지를 형태로 만들어버리는데 그 형태란 시적 개념이지, 독자들에게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힘있는 이미지가 아닌 것이다”(79)

“형태”로 굳어진 이미지는 시적 이미지가 아니라 “개념”이 된다. 힘있는 이미지는 시인이 갖고 있는 “습관”의 표현이 아니다. 좋은 이미지는 시인 자신의 “습관”적 사유에 충격을 가한다. 좋은 시인은 “상상하여 창조하려는 심리적 힘”과 자신의 “습관” 사이에서 투쟁한다. 앞의 것이 이길 때 좋은 이미지가 생산되고 그런 이미지는 “독자들”을 충격한다. 김현 비평의 표제어가 된 ‘공감의 비평’은 이런 충격과 만남의 과정을 잘 표현한다.

시의 리듬도 단지 시의 형식적 장치가 아니다. 좋은 시는 주어진 리듬이나 “균형”을 해체한다. “질이 리듬 속에서, 리듬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은 균형을 전제로 한 생각이다. 균형은 대상의 부정적 성격보다는 긍정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 얻어진다”(81). 좋은 시는 굳은 리듬을 파괴하고 주어진 “균형”을 무너뜨린다. 굳은 리듬은 “습관”적 사유의 표현이다. 내가 보기에 김현이 쓴 가장 뛰어난 비평 중의 하나가 김지하의 시 ‘무화과’를 분석한 ‘속꽃 핀 열매의 꿈’이다. 이 글에서 김현은 시의 의미론적 리듬과 음악적 리듬의 길항관계가 어떻게 작품의 깊은 의미를 낳는가를 섬세하게 분석한다.

길항하는 이 시의 이중적 리듬은 단지 형식적 장치가 아니라 “상상하여 창조하려는 심리적 힘”의 표현이다. “시인에게는, 대상은 벌써 이미지이며, 대상은 상상력의 가치이다. 실제 대상은 그것이 원형에서 받아들이는 정열적인 관심에 의해서만 시적 힘을 갖는다”(122). 좋은 시인은 "정열적인 관심“을 가진 이이고, 그런 관심에서만 대상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시인에게 대상은 곧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대상의 재현이 아니다. 오히려 시인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통해 대상의 가치가 드러난다. ”대상은 상상력의 가치“라는 바슐라르의 통찰은 작품의 의미와 독자의 의미부여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제네바 학파에 대한 관심으로 김현을 이끈다.

그렇다면 “상상하여 창조하려는 심리적 힘”은 어디서 나올까? 그것은 즐거움에서 나온다. [한국문학의 위상]에서 깊이 있게 개진된 김현 비평의 몇가지 핵심적 ‘주제’들은 바슐라르의 문제의식을 수용한 것이다. 문학은 유용하지 않기에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 없는 사회를 꿈꾸게 해준다. 작가나 비평가는 몽상가이다. 즐거움을 상상하는 몽상가. 엄숙주의가 지배했던 한국문학판에서 몽상이나 즐거움은 한 때 금기어였다. 세상이 살벌한데 무슨 몽상이고 즐거움인가?

김현의 답변은 이렇다. 문학은 몽상과 즐거움을 편하게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의 억압성을 추문으로 만든다. 왜 우리는 몽상과 즐거움을 말하면 안 되는가? 문학이 던지는 질문은 그것이다. “몽상가의 상상력은, 그러나 그가 되풀이 하여 표현하고 있듯이, 필요성 · 유용성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결부되어 있다”(80). 따라서 다음의 발언은 김현자신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그[바슐라르]가 사회적인 것을 비판한 것은 그것에 의해 결정된 개인의 심리적 반응이 부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잘 숨쉴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고통은 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91). 인간은 행복하게 살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왜 인간은 불행하고 고통스러울까? 그것이 단지 심리적인 원인일까? 바슐라르나 김현이 “개인의 심리적 반응”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그곳에서 억압적인 “사회적인 것”이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은 그런 드러남의 좋은 장이다.

문학은 “개인적 상처”에 관심을 기울인다. 개인적 상처에서 사회적인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개인적 상처는 언제나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비평은 그런 의미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바슐라르와 융의 콤플렉스는 프로이트의 결정주의적이고 비관적인 콤플렉스를 문화적이고 낙관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콤플렉스를 이미지를 산출하는 힘, 상징력으로까지 높인다. 그래서 개인적 상처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한다”(112).

저명한 바슐라르 연구자인 망슈이의 설명을 빌면, “그[바슐라르]는 영향을 받되,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에게 압도되지 않는다. 그는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을 슬쩍 비켜가며 그의 사상 체계를 새롭게 세운다. 소위 열린 정신이다. 그가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이 원래의 그것과 많이 상충된다는 연구가들의 지적은 그의 열린 정신을 역으로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암중 모색 · 주저 · 과장· 강탄· 감동은 그의 오류의 역동적 표현이다.”(139)

이 문장의 주어를 김현으로 바꿔도 크게 무리가 없다. 그는 “열린 정신”을 지닌 드문 비평가였다. 나는 김현에게서 “오류의 역동적 표현”이 무엇인가를 배웠다. 김현은 자신은 그걸 바슐라르에게서 배웠다고 하리라. 하지만, 그 배움은 일방적인 수용이 아니라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을 슬쩍 비켜가며 그의 사상 체계를 새롭게 세”우는 배움이다. 김현이 쓴 몇 권의 프랑스문학/비평이론 연구서를 읽으면서 새삼 외국문학과 이론을 공부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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