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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이야기 5] 12세기 최고의 스캔들 (2)

작성자
  김현진
이메일
작성일자
2002-05-23
조회
14569


♡밤하늘에 별은 지고♥

"연인에게 필요한 일반적인 매력들을 일일이 따져본 후, 나는 엘로이즈를 잠자리로 유혹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쉽게 성공하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때 내게는 젊음과 뛰어난 외모가 있었고 나를 추켜세우는 높은 평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사랑을 받는 영광을 누리는 여인이 날 거절하리라는 두려움 따위는 갖지 않았다." 모든 것은 이처럼 아벨라르의 오만과 자아도취에서 비롯되었다. 적어도 그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시작이야 어떠했든 두 사람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달아올랐던 모양이다. 개인교수를 자청한 아벨라르는 곧 엘로이즈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후 두 사람은 엘로이즈의 삼촌이자 후견인인 풀베르의 눈을 피해 그야말로 뼈와 살이 타는 밤을 보내게 된다. 아벨라르의 고백을 들어보자. "그녀의 공부는 우리에게 은밀히 사랑을 나눌 기회를 주었다. 눈앞에 책을 펼쳐도 책의 내용보다는 사랑의 말들이 먼저 다가왔고, 가르침보다는 입맞춤이 더 절실했다. 내 손은 책장보다 그녀의 가슴에서 더 자주 방황했고, 사랑에 빠진 우리의 눈길은 책을 향하기보다는 서로를 향했다... 요컨대 우리는 욕망에 이끌려 모든 사랑의 행위를 시험해보았고, 사랑의 이름으로 고안한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환영했다." 男女相悅之詞. 朝三暮四(헉! 하루에 일곱 번?). 有口無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제 아벨라르는 학문을 버리고 제자를 멀리하며, 강의를 정형화하고 (유일) 강의록을 신성시하는 소위 중견교수 신드롬에 빠지기 시작한다. 어쩌면 대학의 역사를 얼룩지게 만든 이 무서운 병마를 처음 접하고 퍼뜨린 장본인이 바로 그인지도 모른다. "관심과 집중력이 떨어짐에 따라 내 강의는 영감을 잃고 단순히 반복적이 되어갔다. 나는 예전에 한 말들을 그냥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영감이 오는 것은 학문의 비밀을 설파할 때가 아니라 사랑의 노래를 지어 부를 때였다." 놀랍도록 현대적이고 실존적인 고백이 아닌가.

빠리는 온통 두 사람의 스캔들로 떠들썩했건만, 유독 '미련한' 풀베르만 한동안 똥오줌 분간을 못했던 것 같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그가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을 때 그들을 휘감은 감정의 불길은 이미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크게 번져있었다. 풀베르의 반대에 아랑곳없이 은밀한 만남은 계속되고, 급기야 엘로이즈가 임신을 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일이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했다고 할까.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몰래 자신의 고향 브레따뉴로 보내고, 엘로이즈는 거기서 남의 눈을 피해 출산을 한다. 풀베르의 분노를 피하고 학자로서 쌓아온 명성 또한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조카가 사라진 걸 알고 광분하는 풀베르 앞에서 아벨라르는 결국 엘로이즈와 결혼할 것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엘로이즈의 입장은 완강했다. 파멸에 이르는 결혼보다는 대가없는 '자유' 연애를 택하겠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의 학자적 평판이 결혼으로 인해 손상될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당신은 결혼보다 사랑을 원하고 속박보다 자유를 원하는 제 주장을 잠재우셨죠. 하느님께 증언컨대 설령 세계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저와 결혼하기를 바라고 제게 온 세상을 영원히 소유할 권한을 준다 해도 전 그의 황후가 되기보다는 당신의 창녀가 되는 편이 더 소중하고 영광스러울 겁니다." 당시 엘로이즈의 신념은 세월의 모진 풍파를 견뎌낸 어느 훗날 아벨라르에게 보낸 편지 속에 그대로 녹아있다.

결국 아벨라르의 설득이 엘로이즈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함께 빠리로 돌아온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다. 애초에 결혼을 비밀에 붙이겠다는 합의가 있었지만, '머리 나쁜' 풀베르는 이를 쉬이 잊고 이내 두 사람의 결합에 대해 떠벌리고 다니기 시작한다. 이에 격분한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빼돌려 빠리 근교의 한 수녀원에 은거시키는데, 이때 그의 마음에 엘로이즈를 정말 수녀로 만들 생각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훗날 엘로이즈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히듯이 엘로이즈를 면회하러 간 아벨라르는 수녀원 식당 한 귀퉁이에서 그녀와 뜨거운 정사를 나누는 불경스러움조차 서슴지 않는다. 욕정의 이름으로든 사랑의 이름으로든 두 사람의 관계는 여전히 식을 줄 몰랐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엘로이즈를 제거하려는 아벨라르의 계략이라 생각한 '단순무식한' 풀베르는 절치부심 끝에 야음을 틈타 함무라비 법전식의 복수혈전을 감행한다. 그의 사주를 받은 정체 불명의 사내들이 아벨라르의 숙소를 급습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그의 신체 일부를 강제로 도려내 버린 것이다. 피의 천백배 복수, 정적을 가르는 외마디 비명, 그리고 긴 침묵... 아벨라르는 그 밤 그렇게 남성을 잃었다. 빠리의 오만한 우상이자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삐에르 아벨라르. 남성적 매력에 대한 자부심 또한 남달랐기에 어쩌면 앞서 얘기한 윌리엄 월러스 못지 않은 마초였을 그는 이렇게 한 순간에 거세당하고, 육체의 일부와 성적 정체성이 동시에 잘려나가는 억겁의 고통을 맛보았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전해들은 빠리는 충격에 휩싸였고, 아벨라르의 제자들과 여성 추종자들은 그의 집 앞에 몰려와 울부짖으며 혼절했다. 그와 안면이 있는 한 수도원 부원장의 회고에 따르면 빠리의 여인들이 그를 잃은 슬픔에 절규하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보기 딱한 광경이었다고 한다. "내가 여인들의 흐느낌을 굳이 묘사할 필요가 있겠소. 이 소식을 들은 그들은 그들의 기사인 당신을 잃은 것이 슬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소. 마치 모두가 전투에서 남편이나 연인을 잃은 것 같더이다." '기사'라고 했다 그들에게 아벨라르는 학자이고 선생이기에 앞서 찬란한 수사의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변증법의 칼을 휘둘러 여성을 지키는, 아니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사. 그 기사가 막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쓰러진 것이다. '죄값'을 치른 대가로 목숨은 건졌지만, 그들의 하늘에서 아벨라르의 별은 이제 영영 떨어져 버렸다.

Adieu, mon amour!

운명적 만남에서 한 사람이 불구가 되기까지 모든 일은 불과 일년반 남짓한 기간에 일어났다.

오랜 침묵의 시간 동안 혹 졸고를 고대한 독자들이 계셨다면 이 자리를 빌어 머리 숙여 사죄 드린다. 필자의 사정 아닌 사정으로 인해 연재가 어처구니없이 늦어졌다. <12세기 최고의 스캔들> 마지막 편 [사랑의 길, 구원의 길, 여자의 길]은 제 때 여러분 앞에 선보일 것을 약속드린다.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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