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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이야기 1] 피와 장미의 볼레로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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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2001-12-18
조회
3744


"세상이 반천 년 더 젊었을 때 만물은 지금보다 더 뚜렷하게 윤곽 지어져 있었다. 고통과 환희, 역경과 행복 사이의 대비는 더욱 두드러졌고, 모든 경험이 인간의 마음에 아직 유년기의 기쁨과 고통처럼 직접적이고 절대적인 의미로 다가왔다...

정적과 소리, 암흑과 빛의 대비는 마치 여름과 겨울의 차이처럼 우리의 삶에서보다 훨씬 더 강하게 아로새겨졌다. 현대의 마을은 순수한 의미의 정적과 암흑을 모르고, 외줄기 빛, 외마디 먼 탄성의 효과 또한 모른다...

삶은 너무 격렬하고 이질적이어서 피와 장미가 뒤섞인 냄새를 띠었다. 사람들은 늘 지옥의 공포와 가장 천진난만한 기쁨, 잔인함과 부드러움, 가혹한 금욕주의와 세속의 쾌락에 대한 광적인 집착, 증오와 선함 사이에서 흔들리며 극단을 향해 달렸다."

네덜란드 역사가 요한 호이징가의 <중세의 가을>(1924) 첫 장(章)의 몇 구절이다.

고통과 환희, 암흑과 빛, 피와 장미가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며 공존하는 곳, 단조로운 흑백 화면 한 구석에 현란하고 사치스런 축제와 의식(儀式)이 색의 향연을 벌이는 기이한 미의 공간, "현실의 고통스런 결함을 잊기 위해 귀족들이 끊임없이 고상하고 영웅적인 삶을 꿈꾸고, 란슬롯과 트리스트람의 가면을 쓴" 비장하리만치 영웅적이고, 몸서리치게 데까당한 시대... 이 강렬한 이미지들의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향기에 취해 무턱대고 길을 떠난 나는 지금 중세전공자가 되어 있다.

이제 호이징가의 그림이 화려하고 힘있는 만큼 구도가 잘못된 곳 또한 많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아직도 이 책을 펼치면 내 가슴이 뛴다. 그 속에는 낡았지만 살아 숨쉬는 역사가 있고, 호이징가란 한번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고, 내가 있고, 또 현재의 나를 과거, 미래의 나와 연결해 주는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문이 있기 때문이다.

중세는 일반적으로 동ㆍ서로마 제국의 분리(395년)와 동로마 제국 멸망(1453년) 사이의 시기, 즉 5세기초에서 15세기말에 이르는 1100여 년간을 일컫는다. 이는 로마문명이 쇠퇴하기 시작한 후 절대왕정, 종교개혁, 문예부흥, 자본주의 같은 소위 초기 근대사회의 징후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전까지의 기간이다. 하지만 우리가 막연히 상상으로 아는 중세는 이보다 훨씬 더 짧기도 하고, 또 길기도 하다.

강철 갑옷을 입은 기사, 정수리를 삭발한 수도사, 우뚝 솟은 고성(古城), 교회의 고딕 첨탑, 마상시합, 십자군 원정... 우리에게 친숙한 이 중세적 이미지들은 사실 중세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초기 중세(5세기∼11세기)와는 무관한 것들이며, 대부분 성기(盛期) 중세(12∼13세기)와 후기 중세(14∼15세기)를 합한 400여 년간의 비교적 짧은 역사의 산물이다. 따라서 14, 15세기 '중세의 가을'을 소재로 한 호이징가의 책은 중세사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주는 셈이며, 이 책을 읽고 중세에 매료된 나 같은 사람은 꼬리만 만져보고 공룡의 거대한 몸을 상상했던 셈이다.

우리 마음속의 중세는 이렇듯 실제보다 좁게 정의되기도 하지만, 한편 천년이란 길디긴 시간의 경계를 아주 쉽게 뛰어넘기도 한다. 현대인에겐 모든 오래된 것, 신비한 것, 이국적인 것을 중세적 가치와 연결하려는 충동이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머스키티어>의 신문 광고에 "홍콩 무협 액션과 중세검술의 화려한 조화"란 야릇한 문구가 있었다. 17세기초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중세'라니? 그리고 쫄바지에 깃털 달린 모자 쓰고 펜싱용 칼을 한 손으로 휘두르는 걸 보고 '중세검술'이라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중무장하고 땀 찔찔 흘리며 돌덩이 같은 칼을 두 손으로 들고 내려쳐야 했던 중세기사들이 들으면 상당히 자존심 상할 얘기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우리 마음속의 중세는 먼 만큼 또 가깝기도 한 것을...

내가 할 중세이야기는 주로 좁게 본 중세, 즉 12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중세의 여름과 가을에 대한 것들이다. 그것이 내가 익숙하고 잘 아는 중세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굳이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독자를 더 낯선 시대로 인도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이 '피와 장미의 볼레로'엔 피비린내나 장미향기가 코를 찌르진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사람 사는 얘기와 사람 사는 냄새가 있을 것이고, 그 얘기가 책에서 책으로 전해온 것이기에 낡은 양피지와 빛바랜 종이 냄새가 있을 것이고, 또 그 책들이 상당부분 문학이거나 문학적인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허구의 향이 배어있을 것이다.

내 이야기엔 특별한 순서가 없다. 꼭 해야할 이야기도 해서는 안될 이야기도 없다. 그냥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아니 아마 하고싶은 이야기를 다 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이 두서없는 이야기엔 <허클베리 핀의 모험> 책머리에 붙인 마크 트웨인의 경고문이 딱 맞는 면죄부가 될 것 같다.

"이 이야기에서 동기를 찾으려는 자는 기소될 것이고, 교훈을 찾으려는 자는 추방될 것이며, 줄거리를 찾으려는 자는 총살될 것이다."

다음 이야기는 <중세의 화장실>.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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