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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온 글: 스스로를 위한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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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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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게가 넘 조용하네요. 개학 앞두고 마음들이 분주하신 탓인지, 아니면 개학이 아니더라도 이리 저리 넘 어수선해서 그러한지,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요.

소위 인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글을 쓰다가, 개학을 준비하다가 드는 생각이, 요즘 시절에 대학에 그나마 '운좋게' 걸쳐져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저의 모습이 대학에서 요구하는 어떤 형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가에 대한 자각입니다. 그 자각을 뼈있는 언어로 제대로 풀어내지도 못하고 그 갭만을 아프게 아프게 느끼면서 저도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렇다고 사표를 쓸 수 있는 용기는 없고, 가랑이 찢어질 각오로 이 시대를 쫓아갈 수는 더더욱 없고요, 다만 한 템포 더 느리게 걷자, 다짐하는데요.

아, 답답한 마음 말고 좀 숨통 터지는 말을, 생각을 하고 싶은데, 오늘도 아끼는 제자의 진로 상담을 '맥없이' 하다가 돌아오는 길... 문학에 대한 사랑, 가르치는 업, 직업에 대한 소명감도, 시가 구원이 될 수 있었던 나날에 대한 기억, 이런 모든 것들이, 학비 때문에 대학원을 휴학하고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이 학원에서의 일을 구하는 글 잘 쓰는 이쁜 제자의 '유예된 꿈' 앞에서 더듬더듬 할 말을 잃은, 참 쓸쓸한 겨울저녁입니다. '유예된 꿈'이 비단 이 아이의 것 뿐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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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독일 마인츠 대학의 신학부 마리우스 라이저 교수가 겨울학기만 마치고 사직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얼마 전에는 사임 이유를 설명한 에세이가 프랑크푸르트의 한 신문에 실렸다.

라이저 교수가 사임하려는 것은 지금 독일과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학 개혁에 항의하는 뜻에서이다. 유럽 연합의 교육부 장관과 교육 관계자들은 1999년 볼로냐에서 소위 ‘볼로냐 과정’이라고 불리게 된 협약을 맺었다. 이것은 지역 안에서의 여러 대학을 묶어 유럽을 하나의 ‘고등교육 공간’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2010년까지 완성될 이 계획은 각 지역 대학들의 교과과정, 학생과 교수들의 왕래, 학점 교환 제도의 새로운 정비를 요구한다. 라이저 교수가 이 협약의 진행에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대학들의 자율성과 학문의 자유를 제약하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지역 통합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대학 간의 교류가 용이해지려면, 일정한 형식에 맞추어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수업 연한의 조정, 수업 과정과 방법의 규격화 등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외면적 형식의 부과는 내면적 충실을 어렵게 한다. 그리하여 독자적이고 고유한 학문이 자리를 찾기 어렵게 된다. 표준화된 과정의 수업은 개인으로서의 고유한 인격과 온축(蘊蓄)이 있는 교수보다는 일정하게 훈련된 강사에 의하여 더 능률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그리고 제도적 정비 속에서 대학은 규격 상품을 주문 생산하는 ‘공부 공장’ 또는 직업 훈련소가 된다.

안타까운 학문의 순수성 소멸

이러한 변화는 넓은 범위의 제도적 통합, 그리고 그에 따른 관료화에서 오는 불가피한 결과라고만 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이 되었든 실용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시대의 정신이다. 볼로냐 협약에 따라 열린 2004년의 대학 총장 회의에서 나온 문서는 그것을 잘 드러내 준다. 라이저 교수가 언급하고 있는 이 문서의 표제어들, ‘시장 전략, 경쟁력, 범유럽 교수 모집과 채용, 대학 경영, 과학기반 경제, 품질, 능률, 시너지 효과, 혁신 능력, 사회적, 경제적 발전 잠재력’ 등등의 말은 대학의 이념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물질주의와 공리주의라는 것을 말한다. 개인적으로도 대학은 오로지 특정 직업을 위한 훈련장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대학생에게 대학의 의미는 부와 귀-물질적 보상과 명예를 얻기 위하여 거쳐야 하는 통로일 뿐이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대하여 라이저 교수는 대학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실용적 의미를 가진 기구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대학은, 존 헨리 뉴먼의 말을 빌려, “눈에 띄게 번쩍이는 상품들의 장터”도 아니고 인적 자원으로 상품을 제조하는 “공장”도 아니다. 대학의 사명은 학문을 학문 자체로서 추구하는 것이다. 지식 전달도 반드시 학문의 핵심 기능이라 할 수 없다. 지식만의 전달은 ‘스스로의 피상성을 알지 못하는 피상성’을 길러낸다. 교육의 핵심은 정신의 도야이다. 앎과 인식과 지혜는 여기에서 나와야 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의 의미를 갖는다. 정신이 중요하다고 해서, 그것이 일정한 도덕적 가르침을 주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정신과학의 분야에서도 대학의 기능은 독단적 확신을 심어주고 지식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라이저 교수의 전공 분야인 신학에서까지도, 그 목적이 종교 교육 또는 설교가 되면, 신학은 학문이기를 그치게 된다. 핵심은 자유로운 정신이다. 위대한 학문적 업적은 자율과 자유의 정신에서만 이루어진다.

대학은 사회에 봉사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자유로운 정신을 통하여 높은 학문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대학의 사회적 기여라고 라이저 교수는 생각한다.

새로 규격화되는 교과 과정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가 열거하는 바 경제와 경영의 관점에서 대학을 파악하는 유럽 대학 총장들의 용어들은 그대로 한국의 대학과 정신생활의 기본 철학을 나타내는 말들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전시대의 사상가들을 인용하여 말하는 학문의 이상도 우리 전통에서의 그에 대한 인식과 비슷하다. 다만 그것을 우리는 더 철저하게 잊었을 뿐이다. 가장 간단하게 말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이란 말은 바로 비슷한 학문의 이상을 나타낸다. 이것은 학문이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학문-다른 사람의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스스로 얻어질 깨달음의 수업이라는 것을 말한다. 물론 사회와 정치는 유학의 핵심적인 관심사이다. (이에 대한 지나친 관심, 그것이 문제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론과 이상에 있어서 학문의 목적은 학문 자체에 있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러한 순수한 학문의 연수야말로 공적인 책임을 바르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이었다. 물론 현실에 있어서는 학문을 국가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개인적으로 그것은 과거나 출세-거의 전적으로 세간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이러한 학문의 이상은 존재했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학문과 정신적 추구의 이상까지도 완전히 소멸된 것이 오늘의 우리 현실이다. 지금 학문은 개인적으로는 부귀의 수단이다. 그러면서 명분상 학문적 수행은 국가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경제 위주의 경우가 아니라도, 학문은 다른 명분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 (오늘날 사실 학문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일 자체의 존귀함은 사라져 버렸다. 하나의 일에 대한 헌신은 삶의 협소화를 뜻하지 않는다. 하나를 위한 정진은 정신을 다른 정진에로 열리게 한다. 자유로운 정신의 선물의 하나가 이 열림의 자세이다.)

대학 학문연구의 토대는 소명감

학문에서의 순수성 소멸은 세계적 추세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특히 두드러진 것일 뿐이다. 미국의 저명한 문학이론가 스탠리 피시는 최근에 자신과 같은 사람은 순수한 인문학자로서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토로한 바 있다. 그는 이것을 불가항력의 시대적 추이로 받아들인다. 라이저 교수는 독일의 대학에서 대학의 새로운 변화에 대하여 불평은 있지만, 저항도 비판도 없다고 말한다. 프로젝트 연구비, 업적에 따른 급료, 자의적인 기준의 평가 등의 제도가 교수들을 옭아매고 있다. 대학의 교원들은 관료제 속에서 완전히 무력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라이저 교수는 자기를 희생하여 비판의 소리를 내려는 것이다. 그는 ‘모집’에 응하여 교수로 채용된 것이 아니라, ‘부름’에 답하여 교수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 ‘부름’이란 독일어에서 ‘직업’이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소명감이 직업의 토대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것은 특히 대학의 학문 연구에서 그러하고 공직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모든 직업은 일단 그 자체로 존귀한 것의 부름에 답하는 행위이다. 라이저 교수는 이제 대학의 교수직은 부름의 직책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사직을 결심했다. 겨울학기가 끝나는 지금까지 대학에서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는 소식은 없다. 라이저 교수의 사임 선언이 작은 사건이라면 작은 사건이지만, 우리에게도 깊은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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