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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명적인 시, 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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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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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21

치명적인 시, 용산

신경민 앵커의 클로징 멘트와 다급한 경찰 교신, 망루에 타오른 불 속에 있었던 ‘없는 존재들’


강압적 일제고사 시행에 반대하는 교사들을 해임해버리자, 정부 정책을 냉소하고 미래를 함부로 예측하는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를 잡아들이자, 낙하산 사장 취임에 반대한 한국방송 직원들은 취임 직후에 잘라버리자, 그리고 이제는, 생존권을 주장하며 저항하는 철거민들은 특공대를 투입해 진압하자… 라는 생각을 할 수는 있다 치자. 놀라운 것은 그들이 ‘한번 생각해보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실행에, 옮긴다.

이 사태는 이제 정치학이 아니라 정신병리학의 소관처럼 보인다. 이 정권은 환자다. 그들에게는 초자아(Super Ego)가 없는가. 민주화 이후 그토록 더디게 우리 내면에 겨우 자리잡은, ‘이런 일은 이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는, 그 초자아가 그들에게는 없는가.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죄의식도 없는 것이다. 이드(Id)만 있는 권력이라니. 꿈이 곧 현실이고 소망인 곧 실천인, 그런 권력이라니. 지난 1월20일 우리가 목격한 것은 이드가 다스리는 나라의 진상이다. 열흘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죄하는 사람은 없다. 본래 이드는 사죄하지 않는다.

시를 읽는 일이 한가롭다는 생각 때문에 용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좋은 시는 절박하고 또 정치적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랑시에르는 정치와 예술이 ‘근본적으로’ 연동돼 있다고 주장한다. 보이지 않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을 보이고 들리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라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던 존재들이 나타나서 그간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로 무언가를 주장할 때 시작되는 것이 정치다. 그러니 ‘보이고 들리는 것’들을 둘러싼 완강한 질서를 재조직한다는 측면에서 예술과 정치는 하나다. 그렇다 해도 새해 벽두에 가장 참혹하고 치명적인 시는 시집이 아니라 용산에 있었다. 그래서 시가 아니지만 시이기도 한 문장들을 읽는다.

첫 번째 문장. “용산의 아침 작전은 서둘러 무리했고, 소방차 한 대 없이 무대비였습니다. 시너에 대한 정보 준비도 없어 무지하고, 좁은 데 병력을 밀어넣어 무모했습니다. 용산에서 벌어진 컨테이너형 트로이 목마 기습작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졸속 그 자체였습니다. 법과 질서라는 목표에만 쫓긴 나머지 실행 프로그램이 없었고, 특히 철거민이건 경찰이건 사람이라는 요소가 송두리째 빠져 있었습니다.”(문화방송 <뉴스데스크>, 2009년 1월20일, 클로징 멘트)

신경민 앵커가 직접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멘트를 옮겨 적었다. 나는 이 문장들에서 시를 봤다. 맨 앞의 두 문장은 거의 비문(非文)이라고 해도 될 만큼 문법적으로 위태롭다. 그러나 이 위태로움 속에는 어떤 에너지가 있어서 흠을 잡을 수가 없다. 이 두 문장을 실어나르는 팽팽한 대구법에서는 분노를 다스리기 위한 안간힘 같은 게 느껴진다. “말을 한다는 것은 총을 쏜다는 것이다”라고 사르트르는 말한 적이 있거니와, ‘무리’ ‘무대비’ ‘무지’ ‘무모’로 이어지는 네 단어는 네 발의 총성처럼 들린다. ‘트로이 목마 기습작전’이라는 비유 역시 시적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마지막 문장이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요소”라는 말은 ‘과격시위’ ‘진상조사’ ‘책임자 처벌’ 등등의 삭막한 단어들을 단숨에 뜨겁게 관통해버린다.

두 번째 문장. “이게 기름이기 때문에 물로는 소화가 안 됩니다. 소방이 지원을 해야 합니다. 이거는 물로 소화가 안 됩니다.”(1월20일 오전 7시26분 경찰 교신 중에서) 이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진저리쳤다. 참사의 현장에서 하염없이 퍼부어지던 물대포는 망루의 사람들을 쓸어버려야 할 한낱 해충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해충이 아니라 생과 사의 극한에서 발화(發火)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경찰은 시너에 붙은 불에다 무의미한 물대포를 15분 동안 쏘아댔고 그동안 철거민과 경찰이 타 죽었다. ‘물로는 소화가 안 된다’라는 저 문장 속에 이 참혹한 부조리의 핵심이 응축되어 있다. 서민들의 희생을 딛고 힘있는 자들의 배를 불리는 재개발 사업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그저 힘으로 밀어붙이는 일이 부조리이고, 그들의 저항이 진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핵심이다. 저 다급한 목소리의 본의와는 무관하게 저 문장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진짜 시는 그날 망루에 타오른 불 자체일 것이다. 앞에서 보이지 않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을 보이고 들리게 만드는 것이 정치이자 예술이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실상 언젠가부터 철거민들은 대다수의 일반 국민들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존재였다. 철거현장에서 철거민들과 함께 용역깡패와 맞서 싸우던 한 시절의 386세대들도 이제는 뉴타운 개발이익에 마음을 빼앗긴다. 철거민들은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 그들이 던진 화염병은 우리가 여기 있다고, 우리는 유령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농성자들과 경찰의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현재까지 검찰은 발화 원인이 불명확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 화인(火因)이 진실로 불명확하다면, 그건 그 불이 목숨을 걸고 씌어진 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덧붙이자. 화염병은 시가 될 수 있지만 시는 화염병이 될 수 없다. 이 긴장을 포기하면 시는 사라지고 만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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