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회소개 / 회원가입 / 분과연구실 / 도서실 / 회의실 / 사이트맵 / 자료회원연구실 / 자유게시판

                     

제   목

 21세기 대한민국의 <촛불문화제>

작성자

노마드

작성일자

2008-06-22

이메일

조회

9449


21세기 대한민국의 <촛불문화제>


I. 20세기의 대한민국과 21세기의 대한민국

지난 20세기의 대한민국과 오늘날의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수없이 많은 커다란 차이들이 존재한다. 그 차이들 중의 하나는 아마도 국가의 지배와 국민의 저항이 폭력적으로 이루어진 과거와 그 지배와 저항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의 차이일 것이다. 그렇다고 지난 20세기의 모든 지배와 저항이 폭력적으로 이루어졌고, 오늘날의 21세기 대한민국의 지배와 저항이 모두 평화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기륭전자, E-마트, 한국타이어 등등에 근무하고 있는 수없이 많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국가보안법의 수배와 조사를 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본과 국가의 가혹한 폭력에 신음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세기와 오늘날의 21세기 대한민국의 모습을 가장 두드러지게 차이나도록 만드는 것은 여전히 총칼과 최루탄으로 대표되는 지배에 저항하는 거리의 투석전과 시위가 촛불문화제의 행진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20세기에 저항의 행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촛불문화제의 행진이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상징하고 있는 현상은 지난 2002년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미순이ㆍ효순이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미순이ㆍ효순이 사건”으로 시작된 어린 학생들의 촛불문화제는 아리따운 어린 소녀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당한 슬픔을 애도하고 그들의 영혼을 달래려는 제의식의 문화제인 동시에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주한미군에 대한 저항의 문화제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미순이ㆍ효순이”가 2002년 6월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지난 20세기에 주한미군에 의하여 무참하게 짓밟혀 죽은 “미순이ㆍ효순이”는 수없이 많았지만 변변한 제의식이나 저항의 행위도 없이 잊혀져갔다. 그것이 20세기의 대한민국이었다. 따라서 2002년 6월에 이루어진 “미순이ㆍ효순이 사건”의 제의식과 저항의 문화제는 지난 20세기의 대한민국과 오늘날의 21세기 대한민국이 비록 동일한 대한민국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너무나도 다른 삶의 방식을 지닌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II. 21세기의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21세기는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시작되었다. 국민의 절대적 지지가 아니라 김종필 씨와 야합하여 우연히 대통령이 된 김대중 정부가 만든 <6.15 남북공동선언>은 영원히 적대적 관계에 있을 줄 알았던 코리아의 두 국가, 즉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지칭하는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함과 동시에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합의하는 선언을 하였다. “우리 민족끼리” 서로 싸우지 말고 평화적으로 “연합제”나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통일하자는 것이다. 너무나도 단순하면서도 지구촌의 말썽장이 분쟁지역이었던 코리아의 평화적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6.15 남북공동선언>은 20세기의 대한민국이 아닌 21세기의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는 희망이었던 동시에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자부심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2002년 6월의 “미순이ㆍ효순이 사건”의 촛불문화제는 대한민국 정부와 경찰이 미순이와 효순이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명백히 밝히고 그 죄인이 미군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미순이와 효순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순이ㆍ효순이 사건”은 “2002 한일 월드컵”의 응원열기 때문에 그 빛을 발한 것이 아니라 “월드컵 4강 신화”와 더불어 지구촌 시대의 당당한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자부심이었던 동시에 우리의 삶의 방식은 우리가 스스로 평화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한 열망의 “촛불”이었다. 그 자부심과 열망은 “2002 한일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도 시들지 않았고, 도저히 논리적으로 불가능했던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를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더더욱 얼토당토하지 않았던 2004년 3월과 4월의 “대통령 탄핵위기”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구해주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과 그의 참여 정부는 평화적인 대한민국도 만들지 못했고, 지난 20세기의 대한민국과 다른 자부심으로 가득 찬 대한민국도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그 대가는 너무나도 혹독했다.

따라서 2002년의 촛불문화제나 2004년의 촛불문화제와 2008년의 촛불문화제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촛불문화제라는 동일성을 지님과 동시에 서로 다른 명백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2002년의 촛불문화제와 2004년의 촛불문화제에는 아주 명백한 지도부가 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2008년의 촛불문화제에는 튼튼한 지도부에 의하여 결성된 것이 아니라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이 개인이거나 소규모의 집단으로 결합된 것이다. 더더욱 2002년과 2004년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촛불문화제의 희망이 보였지만 2008년의 촛불문화제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는 이제 100일을 갓 넘긴 갓난아기 정부이며, 광우병 소 수입뿐만 아니라 국가 정체성을 상실한 영어몰입교육으로 대변되는 미친 교육과 전근대의 수로사업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생태계를 파괴할 것이 뻔한 이명박 운하사업이 눈앞을 캄캄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은 조선일보나 한나라당의 수사학과 마찬가지로 촛불문화제를 촛불집회나 촛불시위라고 명명하면서 현실 정치의 저항이거나 시위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조선일보나 한나라당이 촛불문화제를 촛불집회나 촛불시위라고 명명하는 이유는 촛불문화제를 구성하고 있는 다수의 시민들을 지배나 통치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폭력적 저항으로 몰아서 그들에게 폭력적 억압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와 더불어 몇몇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촛불문화제를 촛불집회나 촛불시위라고 명명하는 이유는 촛불문화제의 다수를 지배나 통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이데올로기의 생산자들로 결합시키고자 하는 수단이다. 보수와 진보라는 서로 이름을 달리 하지만 이데올로기로 촛불문화제의 사람들을 매도하려는 시도는 서로 동일하다. 그런 측면에서 지난 87년 민주화 항쟁의 주체인 동시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구성하고 있는 진보주의자들이나 지난 87년 이전의 독재정권이나 파쇼정권의 향수에 젖어있는 보수주의자들은 여전히 지난 20세기의 지배/저항이라는 폭력의 이분법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2002년과 2004년의 촛불문화제가 보여주는 것처럼 21세기 대한민국의 촛불문화제는 20세기의 대한민국과 다른 지배/저항의 이분법을 극복한 대한민국이라는 자부심의 축제인 동시에 우리의 삶의 방식은 우리가 스스로 생명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 평화적이고 생태적인 삶의 방식으로 만들겠다는 문화적 주권의 선언이다.

III. 문화제의 힘, 촛불의 생명력

지난 20세기의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에 우리는 소위 진보 진영의 정부와 보수 진영의 정부를 모두 경험했다. 빨갱이나 간첩이라고 죽음을 넘나들거나 감옥을 들락거렸던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었었고, 남들처럼 뚜렷한 정치적 계보가 없는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되었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6.15 남북공동선언>이라는 뚜렷한 역사적 족적을 남긴 것 외에는 보수정권이나 진보정권의 정치나 경제의 이데올로기는 서로 동일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치나 경제가 지난 20세기와 별반 차이가 없을지라도 문화는 분명히 지난 20세기와 다른 21세기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있다. 정치와 경제와는 달리 문화에는 지배와 피지배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와 권력을 갖지 못한 자가 구별되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구별되지만 문화적으로 먹고 놀고 사는 방식에는 상하나 지배와 피지배의 서열이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21세기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하나 지배와 피지배의 서열을 구별하지 않는 문화로 판단하고 사유한다.

문화는 소비다. 먹는 문화는 음식을 소비하고, 노는 문화는 체력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삶의 문화는 생명을 소비한다. 그러나 정치적이거나 경제적 소비의 논리와는 달리 문화적 소비는 창조성과 생명성을 생산하는 생산력의 원천이다. 음식을 소비하는 문화는 건강을 생산하고, 에너지를 소비하는 놀이문화는 즐거움을 생산하고, 생명을 소비하는 삶의 문화는 창조력을 생산한다.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으로 판단하고자 하는 지난 20세기의 진보주의자들이나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문화적 생산성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저 촛불문화제의 사람들이 지칠 것이기 때문에 무시하거나 정치적으로 조직해야만 한다고 한다. 그러나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고 문화의 창조성을 경험하고 있는 촛불문화제의 사람들은 결코 지치거나 시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촛불문화제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먹고 놀고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촛불문화제 속에서 먹는 음식문화는 광우병 소와는 달리 나의 건강을 생산할 것이며, 그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덩실덩실 추는 놀이문화는 새로운 즐거움을 생산할 것이고, 그들과 더불어 문화적으로 사는 문화적 삶은 우리 대한민국의 문화를 창조적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그래서 촛불의 생명력은 길고도 길다. 그 길고도 긴 생명력을 지닌 촛불을 들고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리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예선전 남북축구 경기를 보지 못할 바에야 텔레비전 앞에 촛불을 켜놓고 남북축구 경기를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그리고 촛불문화제처럼 남북축구 경기에 흠뻑 빠지는 것이다. 대한민국 선수들을 일방적으로 응원하거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선수들을 일방적으로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북을 구분하지 않고 잘하는 선수를 응원하고 실수하는 선수들을 격려하면서 어느 쪽으로 골이 들어가든지 간에 즐거워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런 아름다운 21세기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있는 촛불문화제의 사람들, 그 원동력이 되었던 “미친 소, 미친 교육”을 부르짖으며 거리로 뛰쳐나온 중고등학생들과 끊임없이 촛불문화제에 창조적 힘을 부여하고 있는 대한민국 네티즌들에게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전달할 뿐이다. 21세기 대한민국 화이팅!

 

   관련글 제목

작성자

작성일자

조회

21세기 대한민국의 <촛불문화제> <- 현재글

노마드
2008-06-22
9449

 

 

 

연구회소개 | 회원 가입  |  분과 연구실  |  도서실  |  회의실  |  사이트맵  |  자료회원연구실 | 자유게시판

운영위  |  안과밖편집위  |  자료실편집위 |  영미문학연구 편집위 |  출판기획위번역평가위

Copyright 2001 All rights reserved SES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