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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의 11월, 한국의 5월: <기차는 8시에 떠나네>들으며

작성자

오길영

작성일자

2003-11-25

이메일

조회

8972


영화평은 아니고 노래평 하나.

얼마 전에 내가 구독하는 모주간지에서 인상 깊은 글을 하나 읽었다. 그리스 주재 통신원이 보내온 기사였다. 1973년에 있었던 11월 17일 그리스 학생 민주화 봉기에 대한 소개기사였다. 아마도 11월을 맞아 한국의 5월을 상기시키는 그리스의 11월을 전하고 싶은 통신원의 마음이 담겨있지 싶었다.

기사의 제목은 <아테네는 광주처럼 피흘렸다>. 한국에서 5월이라는 달이 그냥 무심하게 넘어가지 못하는 때이듯이, 그리스에서는 11월이 그런가 보다. 기사의 내용은 이렇다. 당시 아테네의 산업대학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학생봉기와 그리스 민주화운동의 소개, 그리고 군부세력의 가혹한 무력진압의 과정이 당시 학생봉기의 주역이었던 사람의 말로 전해진다.

"군부독재정권(훈타)의 탱크가 아테네 산업대학의 철교 문을 부수고 들어온 1973년 11월17일은 그리스의 현대사를 뒤바꾼 날이었다. 7년간 그리스 국민들의 숨통을 조였던 군부독재의 압제를 깨뜨린 날이었다. 비록 그곳에서 민주를 열망하던 학생과 민중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군부독재정권은 무너졌다.

지금 그리스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바로 1973년 11월17일 아테네 산업대학의 학생봉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미국과 영국의 외교관들을 비롯해 그리스 정치가와 기업가들을 28년 동안 암살하면서 악명을 날린 ‘11월17일단’도 이날을 기념해 조직됐다"(<한겨레 21>에서)

한국을 비롯한 어디나 그렇듯이, 그리스의 경우도 1967년에 발생한 군부 쿠데타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군부엘리트들이 미국을 등에 업고 벌인 짓이었다. 당시 총선 투표일 이틀 전, 총선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반대하던 좌파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지자 군부가 판을 엎은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보던 짓이 아닌가.

나는 그리스의 현대사에 대해서는 거의 깡무식이다. 하지만 이 기사를 읽고 관심이 생겨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 본 그리스의 현대사는 우리의 경우와 흡사하다.

2차 대전 당시 나찌의 그리스 침공과 점령, 그에 맞선 좌파를 중심으로 한 게릴라 투쟁, 전후 좌우익의 갈등과 공화정과 군주정의 대립으로 인한 내전의 경험, 터키와의 뿌리깊은 적대관계, 군부 쿠테타, 그에 맞선 민주화 운동. 이런 단어들은 우리에게도 친숙하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왜 여기서 뜬금없이 그리스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그리스의 11월 기사를 읽고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그리스 노래 하나를 들었다. 그런데 그 노래가 마음에 콱 와닿았다.

그래서 나처럼 아직 이 노래를 들어보지 못한 분들께 들어보시라고, 노래 하나 추천하려고 이러는 거다. 그런데 십중팔구는 이 노래들, 이미 다 들어보셨을 가능성이 높아 찜찜하기는 하다. 워낙 이쪽으로 내 감수성이 둔하니까 말이다. 그 노래는 조수미가 부른 <기차는 8시에 떠나네>라는 노래이다.

나는 성악은 잘 모르고 더욱이 조수미 노래는 잘 모르면서도 그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성악곡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불편함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래에 약간 더 쓰겠다.) 그런데 그녀가 부른 이 노래를 우연히 듣고서는 기분이 묘해졌다.

그리고 어떤 노래인가 싶어 그 배경을 알아본 결과, 이 노래가 그리스에서 불려진 일종의 '민중가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곡자인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원곡을 부른 아그네스 발차라는 성악가(메조 소프라노)에 대해서도 그래서 조금 알게 되었다.

이런 경우가 텍스트(노래) 읽기/노래 듣기가 텍스트를 만들어낸 상황/컨텍스트로 독자/감상자의 관심을 끌고 간 좋은 사례이리라.

작곡자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1925년 생. 독일에 맞선 레지스탕스 투쟁에 가담. 1960대 군부독재에 저항한 이유로 그리스 전역에서 그가 작곡한 모든 노래의 연주 금지. 1967년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970년까지 복역.

안쏘니 퀸이 열연했던 <그리스인 조르바>, 멜리나 메르쿠니와 안소니 퍼킨스 주연의 <페드라>, 그밖에 <형사 세르피코>, <제3의 사나이> 등의 영화주제곡을 만들기도 했단다. (그 유명한 영화 <페드라>의 마지막 씬에서 흘러나오는 비장한 음악이 바로 테오도라키스의 작품이란다.) 원곡을 부른 아그네스 발차는 그리스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는 성악가이다.
테오도라키스가 만든 이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네>는 그리스 민요에 기반을 두고 만든 그의 걸작 중 하나란다.

이 노래에는 시대적 배경이 있다. 2차 대전시 나찌가 그리스를 침략했을 때, 테오도라키스의 절친했던 친구가 레지스탕스로 싸우다 죽는다. 테오도라키스는 이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 노래를 만들었단다.

노래 가사는 이렇다. (조수미가 부른 노래 가사가 얼마나 원곡의 가사에 충실한지는 그리스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니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당신은 오지 못하리
비밀은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남긴 채 앉아만 있네
가슴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가사로 짐작해본 이 짧은 노래의 맥락은 이렇다. 11월 어느 날 밤 8시, 그리스의 소도시 카타리니로 가는 기차가 (이 노래를 부르는 나의 애인인) 그를 싣고 떠났다. 그는 무슨 "비밀을 품"고 떠났다.

언제나 8시면 출발하는 카타리니행 기차는 매번 다시 내가 있는 이곳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비밀을 품"고 떠난 그는 카타리니에 지금도 남아 있다.

아마도 그는 그 "비밀"스러운 일을 마치기 전까지는 내가 있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설사 그 일을 마칠지라도 그는 역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비밀"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그는 내 가슴에, 혹은 그의 가슴에 "이 아픔을 남긴 채" 그곳에 "홀로" 머물러 있다. 언제 돌아올 줄 모르는 그를 기다리러 나는 역으로 나간다. 그러나 그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 노래가 전하는 "아픔"의 "11월"에서, 내가 읽었던 기사의 11월, 1973년 그리스 민주화 운동의 그 11월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물론 작곡자는 그리스 군부 쿠테타와 민주화 항쟁 훨씬 이전에 이 노래를 만들었지만, 이 노래의 11월을 그리스 현대사의 맥락에 넣고 들어 보면 범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마치 5월이 우리에게 그렇듯이.

그래서 드는 삐딱한 생각. 우리의 5월에 우리에게는, 군부독재에 맞서 '아니오'라고 말한 테오도라키스가 있었던가? 우리의 '고명하신' 성악가 중에 아그네스 발차 같은 강한 정치의식을 지닌 성악가가 있었던가.

여기서 또 가당치 않은 정치와 예술의 분리 운운하는 '순수예술론'을 들먹이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글쎄, 그런 논리의 가당치않음에 대해 또 이런저런 지적을 해야 한다면 그것 또한 피곤하고 씁쓸한 일이다.

하기야 이 나라에서는 바로 이런 철지난 정치-예술의 분리논리로 그저그런 시인을 한국 현대시사 최고의 거목(sic!)으로 이미지 메이킹하고 있으니 이 문제가 그렇게 손쉽게 '웃기는군' 하고 넘어갈 일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도 이 나라 '문학전문가'들의 미적 감수성의 깊이를 세밀히 분석해볼 가치가 있겠다. 그 '정치적 무의식'의 정체를 말이다.

정치-예술의 분리를 주장하는 '문학전문가'들이 지닌 '정치적 무의식'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기왕에도 많은 글들이 있다. 그 중 하나로 요새 내가 읽고 있는 에드워드 싸이드의 Reflections in Exile에 실린 "Opponents, Audiences, Constituencies, and Community"를 읽어보기를 권하겠다.

그래도 한국의 5월, 소수의 '딴따라 가수'들은 군부정권에 맞선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 그런데 그때 '고명하신' 전문음악가, 작곡가, 성악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렇게 묻고 보니 마음이 편치 않다.

이 노래의 시대적 맥락을 떠나서도 이 노래는 좋다. 아, 물론 내 생각일 뿐이다. 자꾸 나 혼자 뒷북치는 느낌이 들어 꺼림칙하지만 혹여 아직 노래 들어보지 못한 분은 아래 주소로 가서 들어보시기 바란다. (영미연 홈피에는 몇 가지 이유로 음악파일 첨부가 안 되는 걸로 안다.)

노래 들을 수 있는 주소:
http://a10neuro.com/technote/read.cgi?board=5&y_number=34&nnew=1

신경숙의 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가 이 노래에서 모티브를 얻어 창작되었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기회가 되면 이 소설도 한번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역시 기차역을 배경으로 한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과 그 시에서 영감을 얻어 창작된 임철우의 <사평역>을 문득 다시 읽어 싶어진다. 이게 다 쓸쓸한 계절, 11월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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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11월, 한국의 5월: <기차는 8시에 떠나네>들으며 <- 현재글

오길영
2003-11-25
8972

멀리~~ 기적이 우네

성은애
2003-11-26
5436

되는대로 답변^^

오길영
2003-11-26
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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