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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굿 바이, 레닌!]DDR을 아십니까?

작성자

성은애

작성일자

2003-11-16

이메일

easung@yahoo.com

조회

4674


진실은 너무 끔찍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 진실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있다면, 당신은 진실을 감추고 듣기 좋은 거짓말을 할 것인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하는 편을 택할 것이다.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자주 '선의의 거짓말'을 하면서 그것이 오히려 삶을 조금 더 편안하고 부드럽게 만들어준다고 여기고 있으니까 말이다. 단, 거짓말 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거짓말 하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고, 또한 그 거짓말이 언제라도 들통날 우려가 있다면? 그렇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게다가 그 거짓말이라는 것이, 분단되어 있던 독일이 통일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상황 자체를 감춰야 하는 일이라면!

서독출신의 감독 볼프강 베커(Wolfgang Becker)의 [굿 바이, 레닌!](Good Bye, Lenin!, 2002)은 마치 산속에서 술먹고 자다 내려왔더니 그 사이에 미국이 독립이 되었더라...하는 립 반 윙클의 이야기처럼, 잠시 정신을 잃은 사이 통일이 되어버린 황당한 상황을 감당할 수 없을만큼 쇠약해진 어머니를 지키려는 아들의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재미로는 열성당원이었던 어머니에게 충격을 주지 않으려고 이미 구하기도 어려워진 동독 물건들로 방을 채우고, 모든 상황을 통일 이전인 척하느라 애쓰는 아들의 좌충우돌하는 행동이 유발하는 웃음을 꼽아야겠다. 수퍼의 선반에선 이미 없어진 동독제 '스프리발 피클'이며 '모카셰인' 같은 식품들, 위성 TV 회사에서 알게 된 서독출신 직장 동료 -- 자칭 '시네 아티스트'인데, 그가 패러디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우주선 장면은 정말 웃긴다 -- 의 도움으로 적절하게(?) 편집한 뉴스 필름, 파란 색 스카프 두른 소년 합창단의 구닥다리 노래, 볼보나 벤츠, BMW 등에 밀려 이제는 인기도 없는 동독제 자동차...이런 것들을 아들은 부지런히도 구해댄다.

코카콜라가 실은 50년대 동독에서 개발되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든가, 서독 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서 동독에서 살겠다고 난리를 치는 중이라든가, 알렉스가 존경하던 소유즈호의 우주 비행사 지그문트 옌이 동독 사회통일당의 당수가 되었다든가, 드디어 동독이 서독을 흡수 통일했다든가, 하는 황당무계한 뉴스를 편집하여 보여드리는 지경에 이르면 도대체 이 모든 거짓말이 어머니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통일로 갈팡질팡하는 알렉스 자신을 위한 것인지 그 경계가 흐려진다.

어쩌면 이 모든 거짓말은 어머니가 한때 꿈꾸었던 사회주의 조국, 그러나 현실에서는 단 한순간도 실현된 적이 없었던 유토피아적인 갈망을 집약한 것인지도 모른다. 통일된 독일에서, 통일 이전보다 딱이 나아진 상황인지 어쩐지도 잘 모르는채 살아가야 하는 아들은, 사회주의 동독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가지고 있었던 아들은, 이제 통일과 동시에 현실의 주변부로 떠밀려나갈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세대에게 자신이 바칠 수 있는 가장 정성스런 존경과 아쉬움의 작별인사를 바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선의의 거짓말로 어머니를 보호하려는 아들의 노력은 새로운 통일 독일 세대가 구동독 세대에게 바치는 만가(晩歌)로 비쳐진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1주년 되는 날, 아들이 편집해서 보여주는 황당무계한 뉴스필름을 보면서, 마침내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통일 조국이 실현되었다며 기뻐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우스꽝스럽다기보다는 뭔가 애절하고 가슴 뭉클한 바가 있다.

(영화 광고에 나온 정도 이상의 내용을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그냥 마지막에서 두번째 단락쯤으로 바로 건너뛰실 것... -.-;;)

그러나 영화의 묘미는 비단 아들의 거짓말이 자아내는 유쾌한 감동만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의 가장 큰 반전은 서독의 자본주의에 현혹되어 서독 여자를 만나 귀순해버린 남편때문에 열성적인 애국자가 되었다고 다들 알고 있었던 그 어머니가, 사실은 평생 남편의 편지를 받으며 남편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그저 평범한 '이산가족'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녀는 아이들때문에, 오로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살지 못할 것이 두려워 동독에 남았으며, 아이들을 위해서 열성 당원 노릇을 해왔던 것이다. 결국 아무리 한쪽 체제에 충실한 '애국자'라 할지라도, 따지고 보면 결국 그의 마음 속에는 '분단'이 안겨준 상처가 자리잡고 있다는 진실을, 체제와 이데올로기는 제껴놓더라도 일단은 가족을 갈라놓는 이 비인간적인 상황이 사실은 제일 문제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영화의 묘한 구석은 또 있다. 내가 눈썰미라고는 없기도 하거니와, 자막으로 처리된 대사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한 것인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짐작만 할 뿐이긴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의 한두 장면에선 이 어머니가 아들의 거짓말을 이미 간파해버린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워지는 대목이 있다.

우선, 병상에서 기적적으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 어머니가 잠옷 위에 헐렁한 코트만 하나 걸치고 거리로 나가보는 장면이다. 이 영화의 제목과 걸맞게도, 마침 동베를린에선 레닌의 동상이 철거되는 중이었고, 어머니가 서 있는 길가로 철거된 레닌의 상반신을 밧줄에 매단 헬기가 요란스럽게 지나간다. 한 손을 치켜들고 있는 레닌의 상반신이 대롱대롱 매달려 저쪽으로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는 어머니의 멍한 표정, 그리고 건물 사이로 마치 '안녕!'이라고 말하는 듯 유유히 사라져가는 레닌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다. 이것을 본 어머니, 아마도 모든 것을 한순간에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아들은 코카콜라 현수막이나 길거리를 오가는 서독제 자동차에 대해선 변명을 늘어놓지만, 레닌 동상에 대해선 아무 변명도 하지 못한다. 아니, 하지 못한다.

또 하나는, 헤어졌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재회하기 직전, 병실에서 간호사 라라가 어머니에게 '장벽이 무너졌는데' 어쩌구 하는 대사를 하는 장면이다. 알렉스의 연인이기도 한 라라는, 애초부터 알렉스가 어머니를 위해 사람들에게 동독 시절의 구닥다리 의상을 입히고 마치 여전히 분단시대인 양 연극을 하게 만드는 데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병실의 유리문을 통해서 잠깐 엿보인 장면이지만, 아무튼 라라는 어머니에게 뭔가 '장벽이 무너진' 상황을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혹시 라라는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불어버린 것이 아닐까?

만약 어머니가 이 시점에서 아들의 거짓말을 알아차리고 모든 상황을 간파했다면, 그 이후 어머니가 보이는 모든 행동은 결국 아들의 정성을 깨뜨리기 싫어서, 아들이 어머니에게 바치는 마지막 선물을 차마 망가뜨리기 싫어서, 아들을 끝까지 배려하는 눈물겨운 모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좀 무리한 것일 수도 있고, 결국 어머니는 아들(그리고 이 영화의 나레이터)의 말대로 끝까지 현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한 채, 자신의 꿈꾸던 아름다운 조국의 모습을 가슴에 품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을 수도 있다. 어머니의 마지막 표정을 보면 이러한 해석도 꽤 타당하게 보인다.

그러나 어머니가 알렉스의 거짓말을 알아차리고 있었든 아니든, 이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는 특별히 감동적인 구석이 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어렵사리 살아온 모자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눈물겨운 애정이기도 하지만, 또한 분단을 당연시하고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세대와, 더이상 분단이 자신의 현실이 아닌 젊은 세대와의 간극을 메꿔 나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통일된 독일의 현실을 살아가는 아들이 그저 동독이 현실의 전부이며 판단의 유일한 기준인 줄만 알고 있는 윗세대에게 건네는 화해와 애정의 손길은 그 유쾌함만큼이나 절절하고 감동적이기도 하다. 10여년간 잊혀져 있었다던 동독 출신의 스타, 카트린 사스의 절제되고 섬세한 연기가 아니었더라면 그만큼의 감동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DDR(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은 이제 지구상에 없다. 그들이 세웠던 사회주의 체제와, 스프리발 피클과 푸른 스카프의 소년단도 같이 없어졌다. 대학생이던 누이는 버거킹의 점원이 되고, TV 수리공이던 알렉스는 위성 TV의 판촉사원이 되었다. 교장 선생은 퇴직하여 알콜 중독자가 되고, 알렉스의 영웅 지그문트 옌은 택시 운전사가 되었다. 이들은 어머니의 유해를 로켓에 담아 쏘아올리고, 로켓은 마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주년을 기념하는 폭죽처럼 찬란한 빛을 뿜으며 터진다. 그렇게 동독은 지구상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갔다. 그러니 이제 와서는, DDR을 '동독'이라고 이해하는 세대와, 'Dance Dance Revolution'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과, DDR Memory RAM 을 떠올리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은 적지 않을 터.....(아, 좀 윗 세대들은 DDR을 "딴따라"의 약자라고 알고 계시기도 하더라....^^;;;)

독일에서는 이 영화 때문에 동독에 대한 향수(일명 Ostalgie)의 열풍이 거세게 몰아쳤다고도 하지만, 여전히 분단된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언제나 우리도 이런 '통일 이후'의 영화를 한번 구경해보나...하는 부러움이 반, 통일된 나라는 마치 알렉스가 어머니에게 이상적으로 그려보여주었듯이 남북한 국민 모두에게 '더 나아진 조국'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반이다. 조금 리듬이 느린 듯도 하지만, 시종일관 흐뭇한 웃음 머금게 만드는 산뜻하고 재미나고 감동적인 영화. 분단된 한반도의 국민으로서, 꼭 챙겨보셨으면 한다.

* 옥의 티: 독일 영화는 재미없다는 편견을 가진 내게, [굿 바이, 레닌!]은 꽤나 재미있는 영화였지만, 동시 녹음용 마이크가 장면의 프레임 안으로 쑤욱 들어오는 '사고'가 몇 번 있어서 몰입을 방해하기도 했다. 설마...브레히트의 이론에 충실한 결과.....? ^^;;; 내가 헤아려 본 것만 네 번인데, 이거 어떻게 편집을 좀 잘해서 잘라낼 수 없었을라나...?-.-;;;


http://finchin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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