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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선택] 자유를 선택하다...

작성자

성은애

작성일자

2003-10-17

이메일

easung@dku.edu

조회

5385


25세에 체포되어 7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출소한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의 일대기를 다룬 홍기선 감독의 [선택](2003)은 인권영화제 및 2003년 부산영화제 등에 소개되어 호평을 받았으나, 선뜻 이 가을의 여가시간에 '선택'하게 되는 영화는 아니다. [스캔들]도 있고 [황산벌]도 있고, 산뜻하게 즐길 수 있는 [이탈리안 잡]도 있는데.....^^;;

가뜩이나 기분도 꾸리꾸리한데, 장기수 스토리.....? 45년의 감옥 생활, 그 중 21년은 독방 생활, 추위, 전향서를 쓰라는 회유, 압력, 고문, 구타, 이에 저항하는 단식 투쟁, 세월의 흐름...그리고 출소. 무대는 주로 감방, 그중에서도 0.75평 독방, 비전향수 전담반 반장 사무실, 칸막이 쳐진 운동장, 의상은 내내 푸른 색 수의, 헤어스타일 전원 똑같음. 소품은 밥그릇, 검정고무신, 젓가락, 수건...휴....이게 영화가 될까?

그렇다. [선택]을 '선택'하는 건 다소간의 '의무감'에서다. 큰 신념이든 조그만 양심이든 눈앞의 실익이나 위협에 너무나 쉽사리 포기하고 마는 스스로에 대한 반성,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세계 기록의 최장기수로 남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호기심, 반세기 분단의 역사를 한몸에 고스란히 체현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과 연민, '전향'이라는 제도의 폭력성과 반인권적 속성에 대한 비판 의식, 대강 이런 것들이 [선택]이라는 영화를 보도록 만드는 동인이다.

(물론 이건 좀 거창하게 한 얘기고, 내가 오늘 이 영화를 보게된 건 순전히 '타의'에 의해서다. 책상 앞에서 꾸벅꾸벅 졸며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느닷없이 시사회 일정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왔고, 마침 시간도 어정쩡한 것이 딱 내 일정과 맞았는데다가, 오랜만에 후배 얼굴도 보고, 음...무엇보다 '공짜'고...옳다꾸나 하고 얼렁 뛰어나가지 않을 수 없는 거 아닌가. ^^)

시사회장에서 관객들에게 인사를 한 홍기선 감독은 마침 그 자신이 방금 출소한 비전향 장기수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거니와, 그는 이 영화가 '엔터테인먼트'라기보다는 말하자면 역사의 기록에 가깝다고 전제했다. 도대체 재미같은 것은 기대하지 말라는 거 아냐, 이거. 가뜩이나 며칠 동안 잠이 좀 부족했던데다가 아주 편안한 극장의 의자 때문에 나는 더럭 걱정이 되었다.

한국 현대사의 장면들을 찍은 매우 낯익은 흑백사진들이 흔들거리며 지나가는 타이틀 위로 음악이 흐른다. 오홍, 조금 '촌스럽지만'(!) 그런대로 특이하고 괜찮다. 나는 영화에서 '소리'가 괜찮으면 일단 기본점수를 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나는 끝까지 졸지 않고 영화를 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영상의 지루함을 견디는 내공이 그리 깊질 못한 나는 [젠틀맨 리그]의 베니스 불바다 장면을 보면서도 졸았고, [나크]는 줄거리가 잘 파악 안 될 정도로 졸았으며, [25시]는 간신히 줄거리를 파악할 정도로만 졸았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초반에 묘사된 비전향 장기수들의 감옥살이는 매번 심각하고 비장하고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서로 '동지'라 부르며 어려움을 나누기도 하고, 보기에 끔찍하긴 하지만 '영양식'(생포하여 껍질을 벗긴 '쥐'를 말한다. [빠삐용]의 바퀴벌레 장면은 여기다 대면 귀여울 정도다.-.-;;)도 먹고, 노래 자랑도 하고, 옆방의 장기수들과 벽을 톡톡 두드려 가며 통신도 한다. 통신의 내용은 바깥 세상의 동향, 정치 얘기같은 심각한 것도 있지만, "소지가 사탕 다섯개를 떼어먹었다.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같은 내용도 종종 끼어있어 객석을 가벼운 웃음으로 일렁이게 한다.

10월 유신이 선포되고난 후, 정치범에 대한 '전향'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이들은 누구에게 호소할 데도 없이 무차별로 짐승같은 폭력에 노출된다. 매일매일 번갈아 불려나가 죽지만않을 정도로 얻어맞고, 협박 당한다. 그렇게 당하다가 개죽음을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며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공포감이 이들을 짓누른다. 그래도 이들은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 그냥 지장 하나만 찍으면 될 일을, 이들은 죽어라 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버티도록 만들었을까? 분명한 것은 주인공 김선명이 처음부터 '죽어도 전향서를 안 쓰고 버티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통일이 곧 오리라 믿었고, 7.4 공동성명은 이들의 기대감을 한껏 부풀리기도 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일단은 버틴다'는 생각으로 45년을 보냈을 것이다. 나중엔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버티는지도 가물가물해진채,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을 것이다.

그렇게 선택한 길이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김선명의 일생은 전혀 달라졌을 텐데. 장가도 가고 자식들 낳아 기르며 알콩달콩 잘 살았을 수도 있는데. 그 조그만 양심을 위해서 온 인생을 내거는 게 좀 바보같은 짓 아닐까? 나중에는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지금 와서 출소해봐야 딱이 적응도 안 되겠고...하는 생각으로 버틴 거 아닐까? 아무튼 그래도 김선명은 평생을 그 전향서 한장을 내지 않겠다고 버텼다.

전향을 권유하는 사람들이 매번 내놓는 논리지만, 전향서라는 게 별 거 아니다. 그냥 잠시 쪽팔리면서 지장 하나 찍으면 그뿐. 그건 그냥 종이조각에 불과하다. 마음 속을 까뒤집어 정말 전향을 한 것인지 어쩐지 알아볼 수도 없으니, 그저 요식행위로 한 장 제출하고 그담에 맘대로 살아도 그만이다. 그런가? 그렇다면, 거꾸로 이렇게 말하면 어떤가? 도대체 그 종이 한 장이 뭐라고, 그거 하나를 받아내야 한다고 사람을 두들겨패고 수십년을 가둬놓는가? 정말 별 거 아니라면, 안 받아도 그만 아닌가? 그거 한 장 냈다고 뭐가 그리 그렇게 달라진다는 말인가? 그거 한 장 내고나면 정말 빨갱이가 자유대한의 충실한 국민으로 돌변하기라도 하나?

이런 질문들을 던져가며 영화는 서서히 결말로 치달아간다. 주인공은 점점 늙어가고, 동료들은 죽거나 전향하거나 하여 하나둘씩 곁을 떠나간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유명인사'가 된다. 왜냐면,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이유로 너무나 오래 감옥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둑질을 하거나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그냥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북한'을 자신의 조국으로 생각한다는 이유로 그렇게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에게 관심이 쏟아지고, 장기수로서 대접도 좀 달라진다. 세상이 달라진 덕분에 갑자기 영치금도 들어오고, 인권단체들이 그의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하다못해 과자며 먹을 것도 쏠쏠히 들어온다. 그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95년 출소한다. 그러나 이미 그는 칠십 노인이 되었다. '별 게 다 세계 신기록이네'하고 툴툴대면서 그에게 형집행정지를 알리는 젊은이는 그의 아들뻘도 채 안 된다. 감옥을 빠져나온 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해피엔딩'일까?

영화는 여기서 끝이다. 영화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현실'만큼의 감동을 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는지, 눈부신 햇살 받으며 출소한 장면을 끝으로 영화는 '다큐멘터리'로 바뀐다. 출소, 환영인파, 그리고 94세의 노모와의 뭉클한 상봉. 아기처럼 쪼그라든 이 어머니는 단연 이 영화의 '여주인공'이다.

장면 연결은 종종 어색하고, 어쩔 수 없이 화면은 대체로 후줄그레하며, 대사는 때로 너무 관념적이어서 뻑뻑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그러나 수감번호의 명패, 식기, 수저 같은 자질구레한 소품의 변화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세심함, 간간이 영화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적절히 일렁이는 웃음, 역사적 사실들의 배치, 감미롭고 애잔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주는 음악, 조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눈여겨 볼만했다. 오태식 역의 안석환은 기본기가 뛰어난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선 너무 '카리스마'를 의식한 나머지 좀 힘이 너무 들어간 편이어서 다소 실망스러웠고, 젊은 시절을 연기하면서는 너무 '먹물' 티가 나서 다소 어색했던 김선명 역의 김중기는 독방에 들어가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늘어가는 주름살과 흰머리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연기를 보여주어 초반의 뻣뻣함을 만회했다.

[선택]은 24일 극장 개봉한다는데, 실은 어디어디서 개봉하는지 잘 모른다. 아마 잘 찾아보셔야 할 것이다. 그래도 '관용'을 아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리고 시대착오적인 '전향' 절차가 낳은 안타까운 삶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시려면, 좀 더 민주적인 나라를 위해서 과거사에 대한 기록과 반성이 필수적이라고 느끼신다면, '시민된 도리'로 한번 챙겨보실만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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