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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허무주의와 현실주의: 한영애의 새 노래집을 들으며

작성자

오길영

작성일자

200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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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7439


영화감상은 아니지만 여기가 올리기에 적당한 듯해 올린다. '내게 너무 좋은 영화'만이 아니라 '내게 너무 좋은 노래'도 있으니까^^


1.

며칠 전에 한영애의 새 음반 을 구입해 듣고 있다.

나이 지긋한 분들이 즐겨 부르는 옛 노래들을 다시 부른 노래모음이다. 아직 나이도 젊은(?) 사람이 뭐 그런 노래를 듣냐고? 그냥 듣고 싶어 듣고, 듣고 보니 좋아서 이렇게 추천하는 잡글을 쓰고 있으니 무슨 심오한 이유가 있으랴. 그냥 좋은 거지. 이런 게 나이 먹어 가는 징조인가 싶어 우울(?)해지도 하지만 말이다.

한영애의 노래솜씨야 '최고'니까 노래가 모두 좋다. 특히 그 유명한 윤심덕의 노래인 <사의 찬미>를 듣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대해 몇 마디 적고 싶다.

(이 앨범의 상세한 소개는 아래 덧붙인 앨범 해설기사를 참조하시라. 그런데 왜 노래집 제목을 굳이 이상한 영어로 썼을까? 그냥 차라리 '시간의 뒤편'에서 정도로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니면 한영애가 쓴 앨범 후기제목처럼 '시간, 그 뒷모습'이라고 하거나... )

가수 한영애가 누구인지 모르시는 분 있으려나? 좋아하는 작가, 가수야 각자의 기호 따라 다르겠지만 그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자가수이다. (좋아하는 남자가수와 밴드도 있지만 그런 얘기를 여기서 시시콜콜히 늘어놓기는 뭐하니 접겠다). 왜 좋아하냐고? 물론 노래를 잘 하니까 좋아한다.

노래로 먹고사는 가수가 노래 잘 하는 거 당연한 거 아니냐고 물으신다면 나보다 더 구세대 분이거나 요새 대중음악을 전혀 듣지 않는 분임에 틀림없다. 요새 대중음악판, 진짜 웃긴다. 한마디로 가수라는 이름은 붙였는데 뻔뻔하게 자기는 노래 못한다는 걸 사람들 앞에서 떠들어대도 흠이 안 되는 세상이다.

하기야 어디 가요판만 그러겠는가. 이름과 실질이 같이 어울리는 곳을 찾기가 힘든 곳이 이 나라 문화판, 정치판의 모습이니까 이렇게 말하면 공연히 대중음악가수들에게 욕먹게 생겼다.

최근에는 조금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하지만 요새 가수 중에 진짜 '노래를 할 줄 아는 사람' 별로 없다. 굳이 입만 뻥긋대는 '립씽크' 가수가 아니더라도 정말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 부르고, 자기의 감성으로 곡을 해석하고 그걸 자신의 노래로 부를 줄 아는 가수 진짜 찾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서태지 이후의 가수들 노래는 거의 듣지 않다가 요새 다시 듣기 시작했다.


2.

내가 보기에 한영애는 그런 흔치 않게 노래 잘 부르는 진짜 가수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어떤 노래를 부르건 그걸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가수의 카리스마는 아마 이런 능력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남자가수 중에는 아마도 조용필 정도가 이 정도의 카리스마를 갖고 있으려나?)

그녀의 새 노래집은 1920년대에서 50년대까지의 대중가요, 특히 통칭 트로트 혹은 뽕짝으로 불리는 노래들, 식민지 시대 일본에서 들여온 양식의 노래들, 그리고 트로트와는 다르게 발전된 일제 시대 만들어진 신민요를 추려 모은 것이다.

이 노래들이 걸치는 시간대에 떠오르는 역사적 단어들. 일제시대, 6·25, 빨치산 등. 때로 생각하기 싫지만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을 고스란히 품어 안고 있는 수십년 대중음악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한영애는 지난 시대에 불렸던 대중음악과 그 대중음악에서 위안을 얻었던 사람들의 애환을 복각하려 한다.

(이 노래집에 '단상'을 적은 대중음악평론가 이영미의 설명에 따르면 트로트가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초부터란다. 그리고 1935년 즈음에 이르러 4박자의 단조 트로트라는 일제시대의 대표적인 양식이 자리를 잡는다고 한다.)

대중음악이든 고전음악이든 음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음악이론이니 역사니 하는 것들에는 거의 생짜 무식에 가까운 나 같은 사람이 이 앨범에 무슨 평을 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다. 그러나 한영애팬으로서 소감 몇마디야 어디 못적으랴.

몇 번에 걸쳐 앨범을 들은 소감. 좋다, 매우 좋다는 것이다. 왜 좋을까? 그 정체를 조금 해명하고 싶어 몇 자 끄적인다. 그게 이제 점점 나이를 먹어 가는 내 감성의 변화 때문일지도 모른다.(대표적인 블루스 가수로 꼽히는 한영애가 '변절'(?)하여 이런 트로트 음악을 다시 부른 것도 어쩌면 그런 비슷한 감성의 변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짐작에 불과하지만. 참고로 그녀는 나보다 몇 살 위인 동세대(?) 사람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다른 가수들이 부른 트로트 음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뭔가 낡고 촌스럽다는 느낌은 여전하다. 그러나 요새 조용필이나 한영애의 음악을 다시 들으면서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왜 그럴까? 한영애 자신도 비슷한 느낌을 후기에서 털어놓는다.

"일제 시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의 대중음악은 무력함과 자괴감, 탄식의 눈물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그 노래들은 철저하게 사람과 만나고 소통했던 삶의 절실함 자체였다."

트로트 음악의 주조를 이루는 애상이나 무력감, 자괴감은 물론 아직은 '젊은 피(?)'인 내 정서에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요새는 그런 것들에 대해 조금 다른 느낌이 온다. 이것도 나이 먹어 가는 징조인가? (아, 나보다 더 연장자이신 연구회 여러 선생님들은 이런 '노인네 티'에 공연히 불쾌해하실 필요 없겠다^^ 그냥 내 주관적인 내 정서의 토로이니까).


3.

특히 <사의 찬미>를 몇 번 들으면서는 어떤 전율을 느꼈다. (나는 윤심덕의 원곡은 아직 듣지 못했다. 혹시 원곡을 찾아 들을 수 있는 방도가 있으며 알려주시라). 이영미의 해설에 따르면 "원곡의 나른한 낭만성을 제거하고 극적으로 죽음에 다가가는 절망의 비장함으로 정리해낸 한영애의 <사의 찬미>는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말이야 간단하다. 직접 들어보시라고 할 밖에. 한영애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런 전율을 느낄 때가 적지 않다. 한참 전에 김현식이 죽었을 때 그를 기리는 추모음반에 실은 그녀의 노래, 김현식의 곡을 그녀가 다시 부른 노래도 그 중 하나다. (아, 그런데 노래 제목이 생각이 안난다. 죄송^^).

아래 덧붙인 소개기사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사의 찬미>를 비롯한 옛날 대중가요들의 가사는 지금까지 잘못 전해져 왔다. 그런데 이번 앨범에서 한영애가 다시 부르면서 그것을 가능한 바로 잡아 놓았다. <사의 찬미>도 그렇다. 한영애가 부른 원가사는 이렇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가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그 뒤 변형되어 지금까지 알려진 가사는 아래와 같다. 왜 이런 변모가 생겼는지 나로서야 알 수 없지만 이 가사의 변화를 통해 애초 노래가 전달하려던 의미의 깊이가 많이 얕아졌다는 인상은 가시지 않는다.

가사가 바뀐 노래에서는 깊이 없는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노래라는 느낌이 너무 강하다. 물론 원곡도 그런 면은 있지만 그 정서의 깊이의 차이는 분명해 보인다.

바뀐 가사: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너는 무엇을 찾으러 왔느냐/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녹수청산은 변함이 없건만/우리인생은 나날이 변했다/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평생/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윤심덕은 일본의 음악학교를 나와 서울여자고보에서 성악을 가르쳤던 엘리트요 신여성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잘나가던 신여성 성악가의 길을 접고 대중가수이자 연극배우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윤심덕 자신의 설명은 이렇다.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녀의 설명.

"금번 내 생활의 전환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우연히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일찍부터 생각해오던 바가 이번에 실현되었을 뿐입니다. 물론 아직 우리사회에서는 여자란 배워서 가정으로 돌아가 현모양처가 되거나 교사가 되고 간호부, 사무원 같은 것이 되어 말썽 없이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특히 배우라는 것은 부량무식한 타락자나 하는 일로 알아 온 이상 나의 이번 길은 갈 곳까지 다 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는 대단한 각오를 가지고 나섰습니다. 오로지 힘을 다하여 새로워지려는 당돌한 발걸음이 이에 이르게 되었을 뿐입니다." (인터넷 검색 자료)

이 정도로 잘나가는 '깨인' 여성의 삶이 식민지 시대에 처할 운명에 대해 페미니즘적 분석을 하긴 손쉽다. 그녀 같은 신여성이 살려는 삶의 구도가 전통 사회, 특히 억압적인 식민지 시대의 한가운데서 어떤 굴곡을 겪었을지, 어떤 파국으로 이어졌을지는 눈에 보이듯 뻔하다.

(1991년인가 장미희 주연으로 윤심덕의 삶을 다룬 영화 <사의 찬미>가 만들어졌단다. 애석하게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어떻게 구해서 한번 봐야겠다.) 그런 억압에서 택한 탈출구가 죽음이라는 설명. 그것도 연인과의 정사라는 쇼킹한 죽음이라는 설명. 설득렸있지만 진부하다.

오히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노래의 가사가 보여주는 어떤 깊이다. (곡자체는 러시아에서 들여온 외래 곡이라고 알고 있다). 이번 한영애의 노래를 들으면서 느낀 것 하나. 옛노래들에서는 트로트의 단조로운 리듬이 보여주듯이 리듬이나 비트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핵심은 곡조 혹은 멜로디, 그리고 가사였다.

그런데 요새 노래들에서는 이게 뒤집혔다. 이제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을 즉각적으로 흥분시키고 자극하는 리듬과 비트다. 그러니 가사는 중요하지 않고 잘 들리지도 않는다. 쉽게 말해 멜로디에서 리듬으로 강조점이 달라진 것. 사정이 이러니 요새는 노래를 못 부르는 자칭 가수들이 나와서 활개칠 수 있다.

그리고 한영애 같은 진짜 가수들은 티브 등에 나오지도 못한다. 이런 변모를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음악사회학하는 분들이나 대중음악평론하는 전문가들이 이런 문제에 어떤 답을 혹시 내놓았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4.

<사의 찬미>가 지닌 어떤 허무적 정서의 깊이가 나에게 주는 충격. 그게 내가 한영애만의 <사의 찬미>를 들으면서 느낀 전율의 정체가 아닐까?

그러니 문득 이인성 산문집 <식물성의 저항>에 붙인 고종석의 '작가소묘'에서 읽은 인상깊은 대목이 생각난다. (이인성의 이 산문집에 대해서도 언젠가 몇 자 끄적이고 싶다. 우리 시대 문학과 문화의 운명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하는 좋은 책이다. )

"겉으로 떠벌리지는 않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삶은 무의미다. 있는 것은 유전자의 욕망, 널리 퍼지고 싶은 욕망뿐이다. 그러나 그 유전자의 확산 욕망, 그 날것의 욕망은 치부를 감추기 위해 의미 부여의 욕망을 낳고, 그 의미 부여의 욕망 가운데 가장 세련된 옷을 걸친 것이 예술일 것이다."

삶의 목표? 무상하다. 그러니 삶의 목표란 없고 단지 그 과정만이 존재할 뿐. 애써 정한 삶의 목표가 알고 보면 무상하기에, 라깡식으로 표현하면 메울 수 없는 근원적 결핍(primary lack)을 우리는 살면서 결코 메울 수 없기에, 그 삶의 목표는 다양한 종류의 '베일', 우리를 현혹할 베일을 걸친다. (라깡의 little object a?)

그 뒤에 무엇이 있는가? 라깡식으로 표현하면 해골, 죽음, 허무, 무가 있다. 아무 것도 없다. 어느 라깡 해설 책에서 읽은 설명에 따르면 라깡의 그 유명한 '실재계'는 해골의 경험이다. 뭔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아무 것도 아닌 것. 죽음이 있다. 허무가 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그 헛된 삶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다람쥐처럼 난리를 치는가? 그렇게 해야 살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건가? 우리가 세운 삶의 목표가 어차피 헛된 것이라면 중요한 것은 목표가 아니라 삶의 과정이리라.

그러나 그 삶의 과정조차 덧없고 허무해 보인다면 어쩔 건가? 신여성 윤심덕이 택한 죽음의 길, 그녀가 남긴 노래 <사의 찬미>는 이 질문에 그녀가 제출한 답이 혹시 아닐까.

아니 윤심덕이 걸어간 길을 따라 걷지 않더라도--그러기에 우리는, 나는 너무 나약하다, 혹은 너무 강퍅하다--고종석의 표현대로, 아니 많은 인류의 '현인'들이 가르쳤듯이, "삶은 무의미"하다는 걸 우리는 '직감'으로 안다.

그러나 그 무의미한 삶을, 그 삶의 과정마저 그저 무의미하다고 느낀다면 우리가 택할 길은 윤심덕이 택한 길, 때 이른 죽음의 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각자 삶의 (헛된)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베일을 씌우고 가치를 부여하려는 "의미 부여의 욕망"을 품게 된다. 그중 "가장 세련된 옷을 걸친 것이 예술"이리라. 나도 동의한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예술을 무슨 현실의 재현이니 모방이나 인식이니 하는 식으로 틀지우려는 입장들에 비판적이다. 예술은 내 삶의 무의미함, 이 세계의 무의미함을 견딜 수 있게 하고 살 만한 것으로 만들려는, 우리들의 안간힘, 혹은 욕망의 산물이다.

우리가 예술을 즐기는 이유? 내가 아래 진중권의 예술론에서도 언급했듯이, 내가 모르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물론 그런 점도 있겠다--내 (무상한) 삶을 지탱해줄 어떤 삶의 모습을 따라 배우고 닮기 위한 것이다.


5.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듣고 그거 어느 한가로운 유한여성의 과잉자의식의 산물이요,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사로잡힌 퇴폐적인 노래라고 욕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을 김훈이 마침 대신 해주고 있어 옮겨 적는다.

"그리고 부도덕하다는 것과 다른 차원의 얘기지만 난 스스로 도덕적 존재라는 확신은 안한다. 그리고 도덕적 존재라는 신념에 찬 자를 경멸한다. 이런 자는 필시 누군가를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 속내를 감추고 있기 마련이다.

나는 도덕적 존재도 아니지만 부도덕한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가난뱅이가 도덕적이고 부자가 악인건 아니다. 악한 부자가 있는 거지."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나도 동의한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사의 찬미>는 허무주의적인가? 퇴폐적인가? 그렇다면 왜 내가 보기에 이 시대 가장 노래 잘 부르는 가수 중 한 명인 한영애는 이런 노래를 다시 부르는 건가? 혹시 진짜 허무주의는 오히려 제대로 된 현실주의와 만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김훈의 다음 지적에도 동의한다. "오히려 헛된 희망이 인간을 타락시킨다. 인간은 헛된 욕망 때문에 무지몽매해진다. 결정적으로 인간이 무지몽매해지는 것은 어설픈 희망 때문이다"

이게 과연 허무주의인가? 아니면 진정한 현실주의인가? 우리는 혹시 여전히 허무주의니 퇴폐주의니 하는 딱지를 남발하면서 내가 품고 있는 내 안의 근거 없는 자신감과 낙관이 혹시 "헛된 욕망"이라는 것은 모르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볼 일이다.

<사의 찬미>에 대한 쓰잘 데 없는 감상이 길어졌다. 이 곡말고도 실린 다른 노래들도 모두 좋다. 특히 일제시대 동요로 지금도 불린다는 <따오기>, 지리산 빨치산들이 널리 불렀다는 <부용산>, 그리고 무반주로 부르는 마지막 곡 <타향살이(원제: 타향)>이 참 좋았다.

한영애를 좋아하는 분들은 꼭, 그렇지 않더라도 옛날 노래들, 트로트에 편견을 가진 분들은 그 편견의 타당성을 검증해보기 위해서라도 들어보기를 강추한다. 아래 관련 소개기사를 첨부한다.


6.

<소개기사>

한영애의 파격, <비하인드 타임(BEHIND TIME)>
제대로 '알기'와 과감하게 '깨기'의 균형
이준희 기자

예전에는 노래 잘하는 가수의 목소리를 형용할 때 흔히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꾀꼬리 같은’소리라고들 했다. 거기에 비추어 보면 가수 한영애의 목소리는 거칠고 텁텁하기만 하니, 아마 반세기 전 같았으면 가수로 명함조차 내밀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런 한영애가 그 옛날 꾀꼬리 같은 목소리의 가수들이 불렀던 노래들을 모아 다시 불렀다.

최근 발매된 앨범 <비하인드 타임(BEHIND TIME)>에 한영애가 담아 놓은 곡들은 보면, 모두가 고전 중에 고전으로 꼽힐 만한 옛 가요들이다(<따오기>와 <부용산>을 제외한다면).

지난 1999년에 발표한 5집 앨범에서 선보여 뜻밖에 좋은 반응을 얻었던 <봄날은 간다>(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는, 그러고 보면 일종의 맛보기였던 셈이다.

사실 옛 노래 다시 부르기가 그 자체로 무슨 파격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영애가 아니라 어떤 의외의 가수가 부른다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파격은 원형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과감한 해체 및 재구성이 모두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법이다.

그럼 한영애의 파격은 제대로 ‘알기’와 과감하게 ‘깨기’ 두 가지를 얼마나 충분히 소화해 내고 있는 걸까?

제대로 알기라는 면에서 볼 때 <비하인드 타임>에서 우선 주목하게 되는 것은 원래 가사에 상당히 충실하다는 점이다. 가사대로 정확하게 부르기는 어쩌면 기본 중에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까지 나왔던 대부분의 다시 부르기는 이 기본조차 지키지를 못했다.

<선창>(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1941년) 3절은 처음 불렀던 가수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노라고 실토했을 만큼 잊혀져 있었고, 4절까지 불러야 작품 전체의 의미가 보다 선명하게 살아나는 <타향살이>(원제 <타향>, 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1934년)에서도 3절, 4절은 생략되기 일쑤였다.

<황성(荒城) 옛터>(원제 <황성의 적(跡)>,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1932년)는 1절과 2절이 뒤섞인 채 불려졌고, <사(死)의 찬미>(윤심덕 작사, 이바노비치 작곡, 1926년)는 원래 형태와 전혀 다른 가사가 붙고 후렴은 또 빠지는 식으로 망가지곤 했다.

세세하게 보면 역시 몇몇 단어를 원형대로 살리지 못한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한영애의 다시 부르기는 일단 기본조차 지키지 못하는 그러한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다. <외로운 가로등>(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 1939년)이 유독 가사가 엉망인 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아쉬움이 있지만, 대체로 고증에 신경을 쓴 흔적이 뚜렷하다.

고증면에서 볼 때 <꽃을 잡고>(김안서 작사, 이면상 작곡, 1934년)는 가장 눈길이 가는 작품이다. 원래 가사를 되살린다는 차원의 다른 곡들과는 달리 <꽃을 잡고>는 이제는 많이 잊혀져 버린 작품 자체를 되살린 경우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유행가의 격조 높은 한 일면을 느끼기에 충분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알기와 대비해서 과감하게 깨기를 보면, 무엇보다 새로운 느낌을 주는 편곡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 번째 수록곡인 <목포의 눈물>(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1935년)은 원래 전주를 그대로 살리고 있지만, 다른 작품들은 모두 상당히 과감한 손질을 거쳤다.

<애수의 소야곡>(이노홍 작사, 박시춘 작곡, 1938년)이나 <굳세어라 금순아>(강해인 작사, 박시춘 작곡, 1953년)처럼 전주가 본곡조 못지않게 널리 알려져 있는 경우에는 듣기에 따라 다소 아쉬움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한영애풍’으로 이해하고 듣기에는 큰 손색이 없다.

가요사 초창기의 작품으로 곡조 전개가 소박한 편인 <강남달>(원제 <낙화유수>, 김서정 작사, 작곡, 1929년)과 <오동나무>(이규송 작사, 강윤석 편곡, 1930년)는 적극적인 편곡의 효과가 가장 뚜렷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강남달>에서는 어어부프로젝트의 일원인 백진이, <오동나무>에서는 버블시스터즈가 목소리를 더하고 있는 것도 앨범의 여타 수록곡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맛을 전해 준다.

<비하인드 타임>에서 한영애가 시도한 파격은 알기와 깨기에서 전체적으로 후한 점수를 받을 만하다. 간혹 고증이 철저하지 못하거나 재구성이 어색한 경우가 있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관자놀이를 콕콕 찌르는 듯한 방정맞은 ‘뽕짝메들리’가 넘쳐나는 가운데 이런 다시 부르기를 만나기가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끝으로 사족(蛇足) 한 마디. <비하인드 타임>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다소 번거롭더라도 원곡을 찾아 들어보는 수고를 마다 하지 말아야 한다. 제대로 알기와 과감하게 깨기는 부르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다.
2003/07/17 오후 1:10
ⓒ 2003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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