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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헐리웃의 똥' <매트릭스>?: <매트릭스> 논쟁 단상

작성자

오길영

작성일자

2003-06-23

이메일

조회

5546


1.

요즘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매트릭스2: 리로디드>를 둘러싸고 논쟁이 한창인가 보다. 여기 게시판에서도 이 영화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영화평이 올라와 있다. 내 입장? 나는 이 영화가 무슨 대단한 철학영화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과연 이 영화가 이런저런 종교적 상징과 문화적 코드들을 짜깁기한 영화, 심지어는 "헐리우드의 똥"(도정일)이라고도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학부비평수업에서 영화를 이론공부의 유효성을 점검하는 서사 텍스트로 종종 사용한다. 그 텍스트중의 하나가 <매트릭스>다. 만약에 <매트릭스>가 진짜 "헐리우드의 똥"이라면 나는 여태 학생들에게 똥을 먹여온 셈이니 이거 참 못할 짓을 한 것 아닌가. 한마디로 선생으로서의 자격미달일 게다. 그런데 정말 이 영화가 그런가?

하기야, 문학작품이든 예술작품이든 그것에 대한 선호는 다 다르다. 심하게 말해 남들이 다 좋다고 해도 내가 싫으면 그만이다. 요는 왜 자기가 그것을 좋아하는가, 혹은 싫어하는가를 가능한 객관적으로 혹은 설득력 있게 자신에게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게 문학/영화를 아우른 예술교육공부나 비평의 역할이겠다. 그냥 '나는 저거 싫어'하고 욕이나 할게 아니라.

2.

이 영화에 대한 몇 편의 영화평들에 대한 짧은 단상 몇 개를 적는다. 먼저 도정일 교수의 글에 대해. 도교수는 <매트릭스>에 대해 매우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않는다. 요지는 이 영화의 서사가 어떤 독창성도 없는 혼성모방, 짬뽕이라는 것이다.

"매트릭스는 미국 오락영화의 제작공식과 문법에 아주 충실하다. 가장 눈부신 부분은 기술과 오락의 탁월한 결합이다. ‘기술’은 새롭고 충격적인 특수촬영 기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질요소들의 조합과 혼합도 기술이라면 기술이다. 디즈니 영화의 ‘괴물’처럼, 그 영화는 세계의 여러 다른 문화와 종교, 장르들로부터 따온 상징들을 갈등 없이 혼합하는 전형적인 얼치기기법을 자랑한다. ...

가장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것은 한 사람의 남성 구세주(The One)가 시스템(매트릭스)을 격파하고 ‘틀린 세계’로부터 인간을 구원한다는 마르고 닳도록 낡아빠진 서사 얼개이다"(도정일, <경향신문> 칼럼).

글쎄, 나도 이 <매트릭스>가 "기술과 오락의 탁월한 결합"이라는 점, 부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재미있으니까 다들 열심히 보러 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이 영화의 매력 모두일까? 그리고 과연 이 영화의 힘이 그냥 그런 "기술과 오락의 탁월한 결합"에만 있는 것일까? 물론 이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의 "제작공식과 문법"에 "충실"한도 면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교활'하게도 그 "제작공식과 문법"을 위반하려고 한다.

만약에 이 영화가 그냥 "기술과 오락의 탁월한 결합"에 그친 수준의 영화였다면 이 영화가 끼친 반향이 과연 그렇게 컸을까? 단지 탁월한 오락성, 특히 특수효과만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 버금가는 영화도 많지 않은가. 따라서 이런 평가에는 헐리우드 영화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선입견이 작용한다. 이렇게.

"가장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것은 한 사람의 남성 구세주(The One)가 시스템(매트릭스)을 격파하고 ‘틀린 세계’로부터 인간을 구원한다는 마르고 닳도록 낡아빠진 서사 얼개이다"?

왜 이런 서사구조가 "가장 보수적이고 반동적"인가? 그러면 어디 각성한 페미니스트 여전사가 주인공으로 나서야 하는가? 도교수도 지적하듯이 이 영화가 차용한 텍스트 중 하나는 신약의 예수 모티프이다. 그 차용이 잘못된 것이라면 왜 그런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남성 구세주"가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 정말 "낡아빠진 서사 얼개"인가? 그렇다면 서구근대문명을 지배해온 기독교 문명의 힘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건가? 그게 단지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기독교 이데올로기에 놀아난 탓인가?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해야 '정치적으로 정당'(politically correct)한 건가? 집단의 힘? 대중의 힘? 그러면 그 대중에게는 그들을 지도할 지도자가 없는가? 지도자 없는 대중?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매트릭스 리로디드>가 말하는 초점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대중과 지도자, 혹은 대중과 구세주의 관계.

<리로디드>에는 인상적인 장면에 관한 논평하나. "니오가 시온에 돌아왔을 때 한 청년이 “당신이 나를 구했어요”라고 외친다. 그러나 니오는 퉁명스럽게 답하기를 “아니요, 당신 자신이 스스로를 구한 겁니다.” 그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너를 구한 것은 네 믿음”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사람들은 누군가 “다른” 이가 “나를” 구해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더 원’이 필요한 이유이다. 허나 니오도 인간 밖의 수퍼맨이 구원자라고는 믿지 않는다"(현각스님, <한겨레> 문화평).

이렇게 매트릭스의 구원자로 제시되는 니오는 예수의 이미지를 반복하면서 또한 전복한다. 물론 <리로디드>에서 구원자로서의 니오의 내적 고민이 좀더 깊이 있게 다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쉽다. (따라서 나는 여전히 3편을 기다리고 있고 흔쾌히 보려고 한다. 니오는 어떤 길을 갈 것인가. 그 점이 궁금해서라도). 그러나 미흡하지만 <리로디드>에서도 니오는 구원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불편해하며 혼란스러워 한다.

3.

이 영화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란한 기법과 오락성과 함께 뭔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그 점에서 나는 도교수와는 다른 입장이다. 단지 기존 영화관습이나 문화적 코드들의 얼치기 조합은 아니라는 것. 이 지점에서 도교수의 태도는 매우 단호하나 그러나 또한 허전하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할리우드의 똥들이 심오성을 가장하면서 사람들의 감성을 마비시키고, 자유무역의 논리로 세계 문화시장을 지배하는 사태에 대한 비판적 개입의 필요성이다. ‘매트릭스’ 같은 영화로 세계 약소 문화권들을 초토화시키는 영화자본이 바로 우리가 비판하고 거부해야 할 ‘시스템’이다. 이는 스크린 쿼터가 다시 문제되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가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도정일).

스크린 쿼터 문제, 물론 중요하고 따로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게 과연 이 영화에 대한 영화 내적 평가와 직접 연결될 수 있는 건가? 물론 헐리우드 영화의 가공할 배급력으로 이 영화가 확보한 상영관 점유율을 문화제국주의의 한 예로 비판적으로 논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걸 과연 이 영화 자체에 대한 엄정한 평가와 동일시될 수 있는 건가?

과연 이 영화가 과연 단지 "할리우드의 똥"인 주제에 "심오성을 가장하면서 사람들의 감성을 마비시키"는 쓰레기 영화에 불과한가? 나는 이런 식의 근거가 미약한 감정적 비판이 오히려 이 영화에 대한 좀더 온당한 평가를 가로막고 도교수가 강조하는 미국식 "영화자본"의 힘에 제대로 대처하는 것을 막는다고 본다. 도교수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어떤 헐리우드 영화도 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닌가?

4.

많은 사람들이 <리로디드>에 불만스러워 하는 이유. 그 중 하나는 이 영화에서 기법과 서사구조가 전편과는 달리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현란한 액션과 특수효과가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주제와 따로 논다는 것. 나도 그런 점이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평가도 조심스럽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리로디드>는 전편과는 다른 이야기 구조를 갖는다. 그렇게 된 데는 이 영화가 독립적인 완결성을 지닌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을 불만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그래서 나는 영화가 끝나면서 나오는 '다음 편에 완결'이라는 선전에 별로 아쉬움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관객들은 꽤나 그것에 불만스러워한다. 왜 그럴까?) 따라서 나는 <매트릭스>에 대한 전체적 평가는 연말에 나온다는 3편과 1.5편 격이라 할 <애니매트릭스>을 아울러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애니매트릭스>는 기법과 현란한 액션에 <리로디드>보다 덜 짓눌려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신선한 느낌을 준다. 내가 보기에도 <리로디드>의 문제점 중 하나는 감독이 전편의 '성공'을 지나치게 의식하면서 그 성취를 기술적으로나 서사적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벗지 못한 데 있다고 본다. 한마디로 좀 힘이 들어 간거다.

따라서 나는 이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매트릭스>의 진정한 가치, 이 영화가 혁신한 블록버스터의 이야기구조, 끊임없이 반사되는 이미지 속에서 드러나는 분열증적인 주체에 대한 사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시공간과 가시거리의 한계를 돌파한 <매트릭스>의 황홀한 액션의 유혹 등에 대한 언급"(심영섭 <씨네 21>영화평).

누가 "분열증적인 주체"인가? 니오가? 멋있으나 공허한 개념. "황홀한 액션의 유혹"? 물론 그런 거 있고 아마 그거 보려고 영화관을 찾는 이도 많을 게다. 그리고 이런 "액션의 유혹"을 그냥 헐리우드 영화의 상투적 상업논리로 치부해버리는 '엘리뜨주의' 영화비평에 대한 반격으로서도 의미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것들이 이 영화의 "진정한 가치"인가? 생각해볼 일이다.

5.

<리로디드>는 <매트릭스>의 전체 이야기 구도에서 중간 부분에 위치한다. 그래서 전편과는 다른 주제가 제시된다. 구세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니오의 고민과 그의 선택에 맡겨진 시온의 운명. 이게 단지 허접한 얼치기 주제인가? 내가 보기에, 비록 씨나리오의 완결성이나 배우의 연기에서 아쉬운 점은 있지만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특히 뒷부분에서 그려지는 니오의 자의식이다.

니오는 자신이 갈 길을 고민하고 결국은 선택한다. 프로그램의 논리를 거부하면서. 아니 이런 식의 '선택'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는 니오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일종의 결정론, 혹은 불교적인 표현을 쓰자면 인연론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

요원 스미스는 네오에게 자신은 자유를 얻었다며 ‘우린 목적 없이 태어날 수 없다. 목적은 존재의 이유’라고 주장한다. 태어난 데는 다 까닭이 있는 법.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

그러나 영화는 또한 이런 식의 손쉬운 인연론, 혹은 매트릭스의 프로그램 논리를 거부하는 장면들을 배치한다. 자신의 믿음을 굳게 믿었던 모피어스는 이제 ‘내가 꿈을 꾸었도다’라며 자신의 믿음을 회의한다. 그리고 예지자 오러클은 매트릭스의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심지어는 구세주 니오조차도 프로그램의 예정된 결과였다.

그래서 니오는 모피어스에게 말한다. 예언은 거짓이었다. 구세주 니오(Neo가 the One의 철자를 뒤바꾼 것임은 금방 눈에 띈다)의 지적. 목적은 그 어떤 것도 끝내는 게 아니며 또 다른 통제 시스템에 불과했다고. 이렇게 영화는 미흡하게나마 어떤 결정론적 세계관이나 프로그램의 논리를 넘어서는 것을 제기한다.

그것은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대한 탐색에서도 드러난다. <애니매트릭스>가 실감나게 보여주듯이 과연 기계, 그리고 그 기계의 최첨단형태인 매트릭스의 세계는 파괴되어야만 할 대상인가? 매트릭스의 세계는 단지 인간의 적에 불과한가? 애초에 그 매트릭스를 만들고 인간과 다름없는 기계들을 억압하고 학살했던 쪽은 인간들이 아니던가?

인간들은 기계들을 없애기 위해 "하늘을 불태웠다." 인간은 전편에서 요원 스미스가 모피어스에 냉소적으로 지적하듯이 지구를 파괴하는 '바이러스'에 불과한 것은 혹시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인간과 기계의 조화로운 관계는 불가능한가? 시온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위원회 의원은 니오에게 지적한다. 기계에 저항하는 시온조차도 사실은 기계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그렇다면 과연 기계와 인간의 대립만을 강조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타당한가? <리로디드>는 전편에서는 제기되지 못한 주제를 제기한다. 이 점에서도 <리로디드>는 <애니매트릭스>와 함께, 그리고 앞으로 나올 완결편과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주어진 이분번적 선택의 논리를 니오는 거부한다. 그게 그가 바로 구세주인 이유이고 이른바 대중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문 저편의 세계는 열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고, 설사 전혀 엉뚱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또 다른 문으로 들어가 결국 나를 만들어낸 소스와 대면해야 한다. 근원과 대면하는 일"(심영섭).

그 대면을 니오는 거부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이분법적 구도를 거부한다. 구원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선택에서 온다. 남이, 구세주가 혹은 프로그램이 알려주는 선택이 아니라 내가 하는 선택에 의해서.

6.

현각스님의 이 영화에 대한 호평에는 바로 이 '구원'의 문제에 대한 성찰이 깔려 있다.

"니오는 예언으로부터 자유롭게 행동하기를 선택하고 트리니티를 구함으로써 설계자에 맞선다. 예언의 계획 대신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을 따름으로써, 궁극적인 힘은 설계자가 아닌 바로 인간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인과법칙을 넘어서고 매트릭스 시스템의 설계자와도 대결한 니오는 홀로 서있다. 인간의 도덕적 조건에 대한 책임은 오직 인간 자신에게 있을 뿐, 개인의 자유의지보다 더 큰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 니오의 말처럼 선택, 문제는 선택이다"(현각).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자신이 크게 기대는 기독교 혹은 유대교적 논리를 넘어선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구원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를 옥죄는 이 강력한 시스템, 내 안에 스며있는 온갖 종교적, 문화적 편견, 선입견, 독단의 매트릭스를 넘어서 대상을 대상으로 제대로 볼 것인가? 요즘 유행하는 들뢰즈식 표현을 쓰자면 '자율적' 삶을 살 것인가?

구세주는 우리를 구원해주는 존재가 아니다. 불교철학에서 누차 가르치는 것처럼. 니오는 우리의 구세주가 아니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구원은 언제나 자기구원이라는 것, 나의 선택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부처는, 니오는, the One은 그 길을 제시할 뿐이다. 따라서 "미몽에 빠진 중생을 제도하는" 이는 우리의 구세주가 아니다.

그는 우리가 빠져있는 "미몽"의 정체가 무엇인지, 매트릭스의 논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바로 자신을 만들어낸 시스템의 논리를 거부해야 한다.

"만물이 유전하므로 우주 또한 끊임없이 변하고 이윽고 쇠하여 적멸한다.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고 따라서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태어나고 다시 또 태어나고 - 나는 중생들 가운데 다시 태어날 것이다"(현각). 그래서 니오는 한 개인이기도 하지만 우리들 자신이기도 하다.

7.

이 영화를 그냥 멋진 액션과 특수효과가 넘쳐나는 재미있는 오락영화로 보든, 아니면 미국의 문화제국주의를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실천하는 "헐리우드의 똥"으로 보든, 아니면 개인/시스템의 관계, 인간과 기계의 관계, 자아의 성격에 대한 탐색을 다룬 심오한 영화로 보든 다 각자의 선택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른바 '심오한' 주제를 다룬다는 것을 전면에 내세운 '예술영화'의 폼을 잡지 않으면서 이런 다양한 논의를 촉발시킨다는 점이 이 영화의 힘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현각스님처럼 <매트릭스>광은 아니지만 여전히 설레는 마음으로 연말에 개봉될 <매트릭스> 완결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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