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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신들린 아이? 산의 아이?: <모노노케 히메>를 보고

작성자

오길영

작성일자

2003-05-09

이메일

조회

4852


1.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노노케 히메>를 보았다. 영화를 보고 떠오른 생각 하나. 이번호 <안과밖> 14호에 실린 생태비평에 관한 흥미로운 글의 한 대목. "신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고 어떠한 인간의 형태로 헌신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조직화의 전 우주적 역동성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안과밖> 14호, 203쪽).

무슨 말일까? 여기에 대한 필자의 설명. "생명은 모종의 실체가 아니며 마음 역시 물질로부터 독립된 실체가 아니다. 생명과 마음, 그리고 물질은 자기조직화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일련의 체계적 성질들의 발현인 것이다"(같은 쪽).

그 "체계적 성질"을 우주라 하든 아니면 자연이라 하든 그것은 그 체계 안에 놓인 인간, 혹은 식물, 동물 등의 모든 다른 존재, 어떤 특정한 종을 넘어서는 것이겠다. 그리고 인간은 그 체계 안에 놓인 다양한 존재들 중의 하나일뿐이지 감히 그 체계를 지배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말이리라.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 물질, 생명 등은 바로 자연, 혹은 우주가 드러내는 "우주적 역동성"의 표현이겠다. 현대문명의 비극은 인간이 자신을 낳은 이 세계의 "우주적 역동성"에 무지할 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능멸하고 파괴하는 데서 가장 잘 나타난다. 아마 그게 생태비평의 가르침 중 하나가 아닐까.

2.
<모모노케 히메>를 보고 든 생각 둘. 나는 기독교신자는 아니지만 성경에서 가장 인상깊은 대목 중의 하나는 창세기의 한 대목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는 대목.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창세기 2장 7절). 이 대목을 읽으면 신자가 아니어도 공연히 마음이 짠하다.

인간은 "땅의 흙으로" 만든 존재이다. 그러니 그를 낳은 어머니가 바로 자연이다. 대지/어머니의 비유. 그리고 인간이 다른 존재와 다른 이유는 그에게 신의 영혼으로 "생명의 기운"을 받았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이란 바로 인간이 애초에 신에게 받은 이 "생명의 기운"을 말하는 것이고 그 기운을 신이 불어넣은 것이니 인간에게는 모두 영성이 있다는 말씀이 아닐까.

그리고 아마 그렇게 인간이 신이 부여한 "생명의 기운"을 느끼고 있을 때 그는 다른 존재들, 그것이 동물이든, 식물이든간에, 다른 존재들과 서로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이고 짓밟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서 히메/산이 그렇게 하듯이.

아마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타락은 바로 이런 "생명의 기운"을 잃어버린 것, 그럼으로써 자신을 낳은 땅과 다른 존재들과 소통하는 능력을 읽어버리게 된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생명의 기운"을 어찌 인간만이 가졌을까? 이또한 인간의 오만함의 표현이리라.


3.
환경운동이니 생태학이니 생태비평이니 하는 운동이나 담론들은 아직은 미약한 소수의 목소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들이 호소력을 지니는 이유도 바로 애초에 인간이 부여받은 이 "생명의 기운"이 점점 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절박함 때문이겠다.

과연 인간이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이렇게 다른 인간, 다른 존재들을 능멸하고 살아도 온전하게 살 수 있는가? 이런 절박함의 느낌이 '잘난' 인간들의 무/의식 속에 조금씩 떠오르게 된 것이 아닐까.

4.
환경운동을 이론으로 말하기 전에 실제 자기 눈앞에서 숲이 처참하게 뭉개지는 것을 볼 때 느끼는 참담함. 그 참담함을 느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노노케 히메>에서 들리는 숲의 울음을 느낄 수 있겠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내가 다녔던 모대학은 산밑에 위치해 있다. 학교를 다니면서 여러 가지로 마음이 울적할 때나 아니면 그냥 운동 삼아서 학교 뒤편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산중턱에 위치한 자그마한 암자까지 올라가곤 했다.

그 암자앞에는 계절 따라 변하는 계곡의 숲들이 펼쳐져 있었다. 여러 가지 일들로 마음이 울적하다가도 가만히 그렇게 변해가는 숲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울창한 숲이 완전히 뭉개진 꼴을 목격했다.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그 자리에는 현재 한국의 대학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공학관, '산업발전'을 위한 연구를 위한 거대한 모습의 철제 건물/흉물이 올라섰다.

아마 그 안에서 연구한다는 공학도들이나 그 자리에 그런 건물을 세운 자들은 자신들의 연구나 개발안이 그렇게 뭉개버린 숲의 가치 따위보다는 훨씬 큰 가치를 지니리라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그 무지몽매한 '자부심'과는 다르게 그렇게 뭉개져버린 숲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참담함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렇게 하는게 과연 발전인가? 그게 발전이면 도대체 무엇을 위한 발전인가? 그런 질문들.

4.
영화 <모모노케 히메>는 이렇게 뭉개져 가는 숲의 이야기고 자연의 이야기이다. 물론 거기에는 죽음과 사랑과 삶의 운명에 관한 좀더 철학적인 주제들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는 인류의 '발전'(sic!)속에서 인간이 무엇을 잃어버렸는가를 묻는다.

인간은 숲/자연을 파괴하고 철/문명을 얻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철은 다시 더 넓은 숲을 파괴할 수단으로, 다른 사람들과 동물들과 나무를 죽일 칼과 총으로 변화한다.

5.
얼마전 개봉되었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주인공은 두 개의 이름을 갖는다. 자연과 그 자연의 신들과 맞서는 타타라 마을의 에보시같은 '문명인'들이에게 그녀는 '모노노케 히메'이다. 나는 일본어를 전혀 모르지만, '모노노케'는 어떤 원혼에 들린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쉽게 말해 귀신들린 아이란 말이다. 어떤 귀신? 들개귀신?

인간들이 보기에 그녀는 인간이 아닌 들개같은 존재다. 그리고 그녀를 키워준 것이 바로 들개 모로이다. 모로는 말한다. 그 잘난 인간들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모로의 공격에 그녀를 재물로 던졌다고. 그러나 모로는 그녀를 죽이지 않고 자신의 딸로 키운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라 들개의 자식이다. 들개의 원혼이 들린 들개공주.

그러나 그런 인간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자연의 시선, 그리고 그녀가 속한 세계를 이해하려는 아시타카가 볼 때 그녀의 이름은 '산'이다. 원령공주와 산. 과연 어느 쪽이 그녀에게 합당한 이름일까?

6.
히메는 신령한 존재들, 즉 외견상 멧돼지로 보이는 동물들과도 대화할 수 있는 존재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이든 신령한 존재들이든 그들이 영성을 잃는 순간 그들은 다른 존재들과 대화할 수 없게 되거나 아니면 재앙신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비극적인 것은 그런 재앙의 시작을 인간이 제공했다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마을을 공격하는 재앙신은 자신의 몸뚱이에 에보시가 박아 넣은 쇠붙이/총탄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총탄/쇠붙이의 저주는 아시타카에게 죽음의 저주를 내린다. 그리고 그 총탄은 모든 것을 포용할 것 같은 시시신의 몸통을 관통한다. 쇠붙이의 승리. 자연의 죽음. 인류의 '발전'.

7.
이 영화는 인간과 자연, 자연과 문명간의 조화로운 관계가 과연 가능한가를 되묻는다. 그 물음에 손쉬운 답을 하지 않은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산을 구할 수 있냐”라고 모로는 아시타카에게 묻는다. 아시타카의 답변.“내가 구할 순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함께 살 순 있어.” 인간과 자연의 공생. 그러나 과연 그게 손쉬운 일일까? 인간이 마음에서 "생명의 기운"을 잃어버렸는데 그런 공생이 가능할까?

시시신의 죽음으로 숲은 다시 살아난다. 그러나 히메가 지적하듯이 그 숲은 예전의 숲이 아니다. 신들이 사라지고 인간들이 영성을 잃어버린 숲이다. 히메/산은 말한다.“아시타카는 좋지만 인간은 싫어”라며 숲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서 감독은, 그 숲에서 그 많던 숲의 정령들은 다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정령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어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게 희망의 메시지이기는 한 걸까?

8.
흥미로운 점 하나. 이 영화에서 산에 맞서는 존재들인 타타라 마을의 여성들과 그 마을의 여성지도자인 에보시의 존재는 이채롭다. 물론 이들은 시시신의 목을 베어 영생을 얻으려는 왕과 그의 부하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위협하는 히메와 늑대들에 맞서 싸울뿐이다. 물로 그 싸움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그들은 모른다. 그들이 '산'을 계속 '원령공주'라고 악의적으로 부르는데서도 드러나듯이.

그런데 이 마을에서 쇠/무기/문명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은 모두 여성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인 에보시도 역시 여성이다. 왜 그랬을까? 굳이 쇠붙이들의 생산자들을 여성으로 설정한데는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우리를 낳은 대지인 자연의 어머니다움을 여성들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비판일까? 도저한 비관주의의 표현?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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