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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그냥 지날 수 없다! - <조용한 미국인>

작성자

성은애

작성일자

2003-03-31

이메일

easung@yahoo.com

조회

5868


최근의 정세 때문에 가장 '손해 본', 즉 가장 과소평가된 영화를 꼽으라면 나는 당연히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필립 노이스(Phillip Noyce) 감독이 만든 <조용한 미국인>(The Quiet American, 2002)을 꼽겠다.

그레엄 그린(Graham Greene)의 동명 소설(1955년 작)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할리우드의 대규모 자본(미라맥스)이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감독에 미국과 영국, 그리고 베트남 출신 배우를 동원하여 베트남 현지에서 촬영한, 특이한 영화다. 원래 이 영화는 9.11 무렵에 개봉될 예정이었으나,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우여곡절끝에 겨우 작년 말에 개봉되었다. 미국 정부가 UN과 국내 여론을 '개무시'하고 이라크 침략이 이라크 해방이라며 벅벅 우기던 상황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거보란 듯이 흥행 성적이 썩 신통치 않았다. 오스카상 시상식에서는 마이클 케인이 이름값 하느라고 남자 주연상 후보에 올랐을 뿐이었다.

원작 소설의 작가인 그레엄 그린(1904-1991)은 한때 공산당원이었고 가톨릭 교도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가 무엇보다도 단호한 '반미'주의자였으며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나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와 친분이 두터웠다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반미' 성향을 지닌 유명인사들의 행적을 수십년간 추적한 FBI의 파일에 그레엄 그린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의 행적을 시시콜콜 기록한 FBI의 파일들이 최근에서야 공개 되었다는 사실 또한 썩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영문학과 학부 시절의 강의 시간에 그레엄 그린은 개종한 가톨릭 교도이며, 정치적인 문제나 이국적인 배경들을 인간의 선과 악, 죄와 구원같은 종교적 문제와 결부시켜 다루는 작가로 소개되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있긴 있다. 사실 그의 <사물의 핵심>(The Heart of the Matter)이나 <권력과 영광>(The Power and the Glory)같은 작품들이 수업시간에 딱이 재미나게 소개되질 않아서 그랬던지, 나는 그레엄 그린의 소설을 더이상 읽지 않았었고, 당연히 <조용한 미국인>의 원작도 읽지 않았다.-.-;;

아무튼 이런저런 정황으로 미루어 그레엄 그린의 원작이 결코 미국의 외교 정책에 호의적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정도만 짐작하고, 영화로 걍 들어가보기로 하자. 이 영화가 개봉을 미루고 미뤘던 이유는? 일단은 사이공 시내의 끔찍한 대규모 폭탄 테러를 실감나게 묘사한 이 영화의 장면들이 9.11로 뒤숭숭한 미국인들의 심기에 매우 불편할 것이라는 여론이 있었다. 폭발 직후 불바다로 난장판이 된 시내, 팔다리가 잘려나간 사람들, 그 와중에도 아이를 온몸으로 감싸는 어머니, 피투성이가 된 가장을 붙들고 울부짖으며 도움을 청하는 가족들, 미국 관객들에게는 이것이 9.11을 연상케 할 것이다. (테러를 소재로 다룬 영화 가운데 이런 운명을 맞이한 경우가 적지 않다고 들었다. 가령 뉴욕을 무대로 테러와 관련된 스토리를 담은 <공중전화>(Phone Booth)도 예고편만 숱하게 나돌고 정작 개봉은 아직 안 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9.11의 상처가 대충 수습된 이후에도 이 영화의 개봉은 계속 미뤄졌는데, 그 이유는 그 끔찍한 테러 장면이 실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부 세력의 자작극이라는 암시때문이다. 공산주의자의 테러로 위장된 사이공의 폭탄 테러는 결국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에 대한 반감을 조성하는 계기로 활용되고, 미국의 개입과 미국이 수행한 베트남 전쟁을 정당화해주는 구실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거 굉장히 낯익은 얘기 아닌가? 그러니 이 영화는 한마디로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 전야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린 '반미' 성향의 영화인 셈이다.

미국이 계속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이라크와 전쟁을 벌여나가자 더더욱 개봉은 어렵게 되었고, 급기야 미라맥스에서 깍듯이 모신다는 주연배우 마이클 케인이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래도 이거 당장 개봉해야뒤야! 이게 월매나 중요한 영화라고!"라며 방방 뜬 덕분에 겨우 개봉되었다는 소문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러한 정치적 성향 때문에 <조용한 미국인>은 그 완성도와는 별개로, 부시의 이라크 침략을 70% 이상이 찬성한다는 미국의 관객들에게 냉대를 받는다.

이 영화는 1952년의 사이공을 배경으로 영국인 기자 토마스 파울러(마이클 케인 분)와 '조용한 미국인' 올든 파일(브렌단 프레이저 분)이 푸엉(도 티 하이 엔 분)이라는 베트남 여성을 두고 벌이는 삼각관계와 그에서 비롯된(?) 살인 사건을 다룬 일종의 스릴러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의 관계에 배경으로 깔리는 것은 바로 미국이 베트남의 정치적 상황에 개입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냉정한 풍경화이다. (물론 이런 정치적 내용은 광고에 별로 유리하지 않으므로, "전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유혹!" 이런 따위의 허접한 카피로 선전이 되는 모양이다.)

환멸과 냉소가 몸에 익은 중년의 영국인 저널리스트와, 젊고 활기차고 건전+활발+명랑 그 자체인 미국인, 그리고 팍팍한 식민지의 삶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 젊고 예쁜 베트남 여성 사이의 애정행각은 그냥 일반적인 연애 소설의 소재로서도 무리가 없다. 영국에 이혼을 거부하는 가톨릭 교도 아내를 둔 파울러는 일종의 심심풀이(!)로 아편을 피우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 푸엉을 '정부'로 두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조용한 미국인' 파일의 진지하고도 현실성 있는(그러니까 실제로 푸엉과 결혼을 해서 미국 시민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에 푸엉이 홀랑 넘어가버림으로써 위기가 고조된다.

문제는 파일이 푸엉을 차지하는 방식이다. 그는 비신사적으로 푸엉을 가로채는 것이 아니라, 푸엉에게 첫눈에 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푸엉과 파울러가 어떤 관계인가를 당사자에게 확인하고, 만약에 파울러가 푸엉과 결혼하여 그녀를 영국으로 데려갈 생각이면 자신이 그 사이에 끼어들 의사가 없음을 밝힌다. 그리고 파울러가 어쨌든 부인과 이혼할 의사가 없음이 만인 앞에 확인된 후에야 푸엉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인다. 즉, 최소한 겉으로는 자신이 푸엉을 비신사적으로 야비하게 뺏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러니 나이도 있고, 파일과 이미 친분을 맺기도 했고, 아무튼 체면상 막나갈 수가 없는 영국인 파울러는 속이 탈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냉소적이고 쿨하게 틱틱거리는 게 멋있는 줄알고 그런 척했는데, 막상 여자를 뺏기는 상황이 되니까 맘이 다급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파울러가 냉정하게 모든 상황에서 거리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은 비단 여자 문제 뿐만이 아니다. 파울러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연애 뿐만 아니라, 그와 연루된 정치적 상황이기도 하다. 프랑스가 베트남의 식민 지배에서 물러나게 되고, 북쪽에서는 호치민이 이끄는 세력이 날로 커지고, 이 상황에서 미국이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남베트남의 특정한 세력(영화에서는 '테'라는 장군으로 묘사되는데, 말하자면 프랑스에도 반대하고 공산주의에도 반대한다는 군부독재형의 지도자이다. 꼭 박정희같이 생겼다...-.-;;)에게 무기와 경제적 지원을 보내고, 급기야 테러 자작극까지 벌이게 되는 급박한 상황인 것이다.

선량하고 널널하며 사람좋아 보이는 파일은 사실 알고보니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아주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로 드러나는데, 아름다운 베트남 여성을 차지하는 파일의 행보와 베트남을 '공산주의'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베트남의 정치적 상황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미국의 행보는 묘한 평행선을 그리며 진행된다.

<일곱가지 유혹>(Bedazzled)이나 <미이라>(Mummy)같은 황당무계한 코미디에서 줏가를 올린 브렌단 프레이저는 이언 맥캘런(Ian McKellen)과 팽팽한 연기 대결을 벌였던 <갓 앤 몬스터>(Gods and Monsters, 1998)에서 "엑...이런 것도 할 줄 아네?"하는 감탄사를 내뱉게 했었다. 그런데 이제 <조용한 미국인>에서는 건전하고 사람좋은 미국인, 이상주의자이며 진지하고 심지어 낭만주의적이기까지 한 미국인, 그러나 바로 그 고귀한 '자유민주주의'의 신념과 이상 때문에 다른 주권국가를 침략하고 엄청나게 잔혹한 행위까지 서슴지 않는 미국인의 이중성을 탁월하게 형상화해낸다.

항상 못 생긴 애완견을 끌고 다니는 파일이 사이공 시내의 폭탄 테러 현장에서 부상자들의 울부짖는 소리로 아비규환인 와중에 흰 손수건을 꺼내어 바지 끝자락과 구두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장면은 소름이 끼치도록 잔인한 느낌을 준다. 순진무구(!)한 '자유의 수호자'와 '잔혹한 학살자'는 늘 종이한 장 차이, 아니 동전의 양면이었던 셈이다.

내내 파울러의 시선과 파울러의 내레이션을 따라가는 (그리하여 마이클 케인의 고단위 연기 내공을 흠뻑 맛볼 수 있게 해주는) <조용한 미국인>은 베트남의 정치적 상황에 미국이 개입하는 과정이 바로 푸엉을 가로채는 파일의 행각과 같은 것임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처음에는 의료 지원을 나왔다던 파일이 알고보니 베트남의 군부 세력에게 폭발물과 무기류를 공급하여 프랑스와 북베트남의 호치민 세력을 동시에 견제하는 미국 외교의 첨병이었음을, 또한 그 미국의 '외교'란 다름 아닌 사이공 시내에서 테러 자작극을 벌여 수많은 시민들을 죽이고 그 상황을 빌미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위기 의식을 고조시켜 결국엔 '전쟁'을 정당화하는 수순에 불과함을,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무도한 개입이 '조용한 미국인'의 넉살좋은 웃음, 깔끔한 태도, 활달한 성품과 사이좋게 손잡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이후 미국이 54년의 제네바 협약으로 분단된 베트남의 상황에 억지로 개입하여 남베트남의 고딘디엠 정권을 지원하고 60년대 초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내내 남북 베트남에 엄청난 양의 폭탄을 퍼붓고 연인원 260만의 군대를 파병하였던 것, 그리고 그 와중에 대한민국의 젊은이들까지 끌려들어갔던 것 등등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 <조용한 미국인>의 테러 장면을 촬영하는 데 사지가 잘려나간 엑스트라들을 현지에서 쉽사리 구할 수 있을 정도로 베트남인들을 여러 세대에 걸쳐 골고루 처참하게 망가뜨린 것이 미국의 무차별 폭격이요, 고엽제의 후유증이다.

이 기막힌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차근차근, 그리고 냉정하게 보여주는 <조용한 미국인>이 이라크 침략으로 뒤숭숭한 미국 극장가에서 인기를 끌리가 만무하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전쟁의 후유증을 돌아볼 여유를 가졌던 미국인들은 <디어 헌터>나 <지옥의 묵시록>같은 영화들을 통해 전쟁이 처참하게 망가뜨린 '조용한 미국인'들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도/대/체/ 미국인들이 베트남에 가서 무슨 일을 했던 것인지에 대해 한번도 정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제 <조용한 미국인>을 통해서, 사람좋게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인도적인 지원의 명분으로, 민주주의의 얼굴로 베트남에 다가갔던 '조용한 미국인'의 비밀이, 베트남 전쟁의 기원이 조금씩 벗겨진다.

혹자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Vietnam War: Redux"라고도 표현한다. 미국인들은 <조용한 미국인>을 보며 그 교묘한(?) '반미' 정서에 기분나빠 해야할 것이 아니라, 깊이 반성해야 한다. 지금 자신들이 이라크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70%의 찬성 여론으로 지지하는 이 침략 전쟁의 와중에 왜 베트남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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