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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르는 강물처럼 -- <디 아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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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기

작성일자

200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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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8


순수의 시간과 생성의 시간: 소설 『댈러웨이 부인Mrs. Dalloway』과 영화 <디 아워즈The Hours>

그런데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댈러웨이 부인』과 스티브 댈드리(Stephen Daldry) 감독의 영화 <디 아워즈>를 보기 위하여 우리는 서구의 근대성으로 길들여진 두 개의 전제조건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는 남성/여성의 이분법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현재/미래라는 구분을 통한 일직선상의 시간관이다. 남성과 여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존재하는 것이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분리된 시간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흐름으로 존재하는 시간만이 있다. 따라서 남성/여성의 이분법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기 위한 폭력의 수단이고,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구분은 오직 만들어진 신화의 과거만을 지속시키는 것으로 만족하는 마조히스트들의 자기기만이다.

존재론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이라는 종(種)이 존재한다. 이것은 마치 참나무, 소나무, 느티나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무라는 종이 존재하고, 다이아몬드, 금, 은, 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돌이라는 종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어떤 나무와 또 다른 나무가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는 소나무가 되고, 다른 하나는 참나무가 된다. 어떤 돌이 다른 돌과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는 다이아몬드가 되고, 다른 하나는 에머랄드가 된다. 그러나 소나무와 참나무, 다이아몬드와 에머랄드는 자신이 소나무인지 참나무인지, 아니면 다이아몬드인지 에머랄드인지 모른다. 그들을 소나무, 참나무, 다이아몬드, 에머랄드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은 나무와 돌의 가치를 매기기 위하여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소나무가 소나무가 되고, 다이아몬드가 다이아몬드가 된 것은 우연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과 다른 사람이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는 남성이 될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여성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누가 남성이 되거나 여성이 되는 것은 아주 우연이다. 아주 우연히 어느 누구를 남성이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을 여성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러한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사람은 마치 다이아몬드, 금, 은 등등을 구분하여 그것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처럼,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여 그들을 소유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 자신이나 어느 누구를 남성이나 여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소나무나 다이아몬드가 스스로 자신이나 어느 누구를 소나무나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으로 불러서, 그들로 하여금 목수에게 대패질을 당하게 하거나 세공업자에게 다림질을 당하게 하는 것과 같다.

창조에서 종말로 이어지는 기독교적인 과거-현재-미래라는 일직선상의 시간관은 어떤 나무가 소나무가 되고, 어떤 돌이 다이아몬드가 되고, 어떤 사람이 여성이 되는 생성을 사유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이러한 시간관은 현재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그러나 언어는 결코 고정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언어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된다. 언어와 시간의 관계는 시간에 대한 영어와 우리말의 표현에서 가장 극적으로 대별되어 나타난다. 영어는 "10일들(10 days)"이라고 표현하지만, 우리말은 "10일"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과학적 논리와 예술적 감각의 차이이다. "10일들"이라는 표현은 "하루+하루+하루+··· =10일들"이라는 시간의 양적인 논리의 합이고, "10일"이라는 표현은 하나의 질적인 감각 덩어리에 대한 인식이다. 그러나 어느 하루가 다른 하루보다 크거나 작기도 한 것처럼 매 하루의 24시간이 모두 동일한 양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사흘은 집에서 글을 쓰고, 사흘은 여행을 하고, 나흘은 사람들을 만나서 공무를 하는 등등의 차이처럼 10일이 모두 하나의 질적인 감각의 덩어리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직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0일과 1l일들이라는 표현의 결합, 즉 시간의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측면의 결합이라는 수많은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의 질적인 측면을 크로노스의 시간이라고 말한다면, 시간의 양적인 측면을 에이온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현재는 항상 그 무엇으로 생성되기 이전, 즉 수많은 생성의 에너지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영원한 현재의 흐름이다. 우리는 이러한 순수한 흐름의 시간을 예술적 감각으로 느낄 수 있을 뿐이지 과학적인 단위로 측정할 수 없다. 사건을 통하여 크로노스의 시간을 깨트리는 에이온의 시간은 그 무엇으로 생성되는 시간이기 때문에 감각의 느낌으로 존재하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어떤 생성의 양으로 계열화 한다. 그러나 사건이 곧 생성은 아니다. 예를 들어, "바람이 분다"라는 말은 하나의 사건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은 크로노스의 시간에 있는 순수의 사건이지 에이온의 시간에 있는 생성의 사건은 아니다. 순수의 사건이 생성의 사건이 되기 위해선, "바람이 분다. 그래서 나는 슬프다."라는 문장의 연결처럼 하나의 사건과 또 다른 사건이 계열화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미 계열화 된 사건의 의미를 인식하는 것은 아직 생성되지 않은 무한한 잠재적 가능성의 감각들, n-1개의 의미를 희생시키고서야 비로소 가능하다.

『댈러웨이 부인』과 <디 아워즈>는 우리들에게 순수의 시간, 즉 순수의 사건들이 지니는 언어화할 수 없는 감각의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꽃의 이미지. 케익이나 음식을 만드는 이미지와 소리. 계란이 톡톡 깨어지는 이미지와 소리. 어떤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펄썩 주저앉아 울컥하고 소리내어 우는 사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자살하기 위하여 가는 어머니를 보내며 불안과 공포에 떠는 아이. 소설과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순수의 시간은 순수의 욕망과 마찬가지로 오직 흐름으로 존재한다. 소설의 언어와 영상의 이미지들, 그리고 대화들 사이에는 이미지와 감각들만이 떠다닌다. 그 이미지와 감각들은 이해와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의미를 찾으려고 하거나 해석을 하려고 하면 금방 실패한다. 필요한 것은 오직 느낌 뿐이다. 우리는 숲 속에 들어가거나 산 위에 올라가서 나무나 풀, 혹은 돌이나 바람을 이해하거나 해석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연적으로 나무나 풀, 혹은 돌이나 바람이 되어 그것들의 감각을 받아들인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소설과 영화의 순수 시간들이 보여주는 감각들을 느끼기 위하여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셉티머스가 되거나, 혹은 마이클 커닝햄, 로라 브라운, 클라리사 본, 혹은 리처드 브라운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버지니아 울프가 되거나, 로라 브라운이 되거나, 혹은 리처드 브라운이 되어 수많은 이미지들의 감각 덩어리가 된다는 것은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사건을 거쳐서 생성의 시간에 돌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자나 관객이 순수의 시간을 거쳐 생성의 시간에 돌입하는 것처럼 생성의 시간 없이 순수의 시간만 존재하거나 순수의 시간 없이 생성의 시간만 존재할 수는 없다. 순수의 욕망이 만남이나 사랑을 향한 욕망의 흐름이듯이 순수의 시간은 사건이라는 생성의 시간을 향한 흐름이다. 따라서 생성의 시간은 아직 생성되지 않은 과거의 감각 덩어리들을 아우르고 있는 미래의 시간이다. 따라서 생성의 시간이 없는 순수의 시간은 남편에게 "삶의 투쟁이 없는 평화는 죽음과 같다"라고 말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영원한 현재라는 죽음의 정적과 같은 것이고, 순수의 시간이 없는 생성의 시간은 삶과 죽음의 영역을 넘나들며 만든 로라 브라운의 생일 케익을 보며 "내가 바라던 것이 바로 이것이야"라고 말하는 남편처럼 아직 생성되지 않은 감각들을 마구 유린하는 폭력과 같다.

이미 고정되어 있는 남성과 대비되는 여성(로라 브라운), 정상인과 대비되는 정신병자(버지니아 울프), 사랑의 관계를 차단당한 에이즈환자(리처드 브라운)라는 이름으로 생성이 거부되었을 때, 이들의 유일한 생성은 영원한 현재라는 기념비를 세우기 위한 죽음 밖에 없다. 죽음이외의 방법은 탈주이다.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와 리처드 브라운은 죽음을 선택한다. 생성적 관계의 상실 때문에... 이미 고정되어 있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성의 시간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자의식 때문에... 따라서 버지니아 울프를 죽인 사람은 정신과 의사이고, 리처드 브라운을 죽인 사람은 에이지를 공포의 대상으로 선전하는 이성애자(異性愛者)들이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탈주이다. 로라 브라운만이 탈주의 길을 선택한다. 로라 브라운이라는 『댈러웨이 부인』의 독자가 탈주를 할 수 있었던 힘은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을 쓰는 순수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의 시간을 사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탈주는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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