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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예모와 이안, 그리고 <와호장룡>과 <영웅>

작성자

장시기

작성일자

2003-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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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712


장예모와 이안, 그리고 <와호장룡>과 <영웅>

중국이 자랑하는 장예모 감독이 대만 출신의 이안 감독이 만든 <와호장룡>에 대적하기 위하여 <영웅>을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와호장룡>에 대한 찬사는 미국을 비롯하여 서구의 언론에서 굉장한 것이었다. "서구인들이 모르는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의 극치라고..." 그러나 <와호장룡>의 중국 공연은 참패였다. <영웅>은 성공했을까? 아직 모른다. 그러나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웅>이 <와호장룡>을 능가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와호장룡>은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미국을 비롯하여 서구에서 박수를 칠려고 손을 들기만 하여도 우루루 몰려들어 마구 박수를 쳐대던 우리들이 드디어 "모두가 Yes라고 말할 때, No라고 말하"는 용기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No라고 대답한 사람들은 지식인들이 아니다. 그러한 용기를 지닌 사람들은 중국과 한국에서 영화를 보는 일반 관객들이었다. 일반 관객들을 따라 갈 것인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런 영화감독들이 있다.

이러한 일반 관객들의 용기에 힘입어 서구의 영화미학에 대한 도전을 한 것은 단지 장예모 감독만이 아니다. 한국의 대표(?) 영화감독이라고 말하는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도 어쩌면 모차르트의 일생을 담은 <아마데우스>에 버금가는 천재화가를 다루려는 야망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기 시작한 <쉬리>는 헐리웃영화에 대항한, 그래서 그에 버금가는 스펙터클의 성공이 아니었는가? 이것이 한국영화, 혹은 중국영화가 살아남는 길일까? 지금은 그렇게 보인다. 대중들이 그런 영화를 기다리니까... 그러나 더 적은 자본을 들이고 성공한 <집으로>도 있다.

그러나 이안의 <와호장룡>과 장예모의 <영웅>은 조금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이안은 대만출신이면서 헐리웃에서 성공한 감독이다. 그래서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에 대한 서구의 찬사는 서구 근대(영화)의 미학에 대한 새로운 미학의 출현을 환영하는 것이다. 새로운 미학을 보여주는 것은 <와호장룡>만이 아니다. 할리웃에서 만들어진 <아메리칸 뷰티>가 그렇고, <오! 수정>을 비롯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 그렇고, <내 친구 집은 어디에?>를 비롯한 이란의 영화들이 그렇다. 장예모는 마치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할리웃의 감독들처럼 이러한 새로운 미학에 도전하고 있다.

<와호장룡>과 <영웅>은 모두 "영웅적 인물들"을 다룬다. 그러나 <와호장룡>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국적과 신분이 없는 노마드의 인물들이지만, <영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국적(혹은 대항국적)이 나 신분을 지니고 있는 국가적 인물들이다. <와호장룡>의 인물들은 국적이나 신분이 없기 때문에 근대적으로 해석불가능한 인물들이지만, <영웅>의 인물들은 비록 고대의 진나라 시대의 사람들이지만 근대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인물들이다. 이것은 마치 헐리웃의 영웅에 관한 영화들이 고대 그리스인이나 히브리인, 혹은 고대 영국인, 로마제국의 국민, 중세의 기독교인, 혹은 근대의 영국인이나 미국인을 다루기 때문에 근대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와호장룡>과 <영웅>의 인물들이 국적이나 신분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영화의 공간이 보여주는 공간들의 차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와호장룡>에서 보여주는 공간은 성(혹은 국가)라는 하나의 점과 그 점을 에워싸고 있는 도시라는 하나의 원, 그리고 도시라는 원을 에워싸고 있는 더 커다란 강호의 세계가 있다. 도시는 성(국가나 왕이라는 신분 서열체계)에 속해 있는 동시에 강호(점으로 구성되어 있는 노마드의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보통사람들, 즉 민중들이 살고 있는 세계이다. <와호장룡>의 주인공들은 강호의 세계에서 도시의 세계로(영웅의 세계에서 민중의 세계로) 들어갔다가 다시 도시의 세계에서 강호의 세계로(민중의 세계에서 영웅의 세계로) 나온다. 영화의 시작에서 끝날 때까지 국적과 신분으로 구성된 성의 세계는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영웅>에서 보여주는 공간은 성의 세계와 강호의 세계이다. 성과 강호가 1:1로 병치되어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강호도 사실은 강호가 아니라 자그마한 성이다. 일반인들이 사는 도시는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으며, 마치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신하나 하인은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왕이나 주인의 수족이다. 따라서 세상의 싸움은 왕과 주인의 싸움이다. 영웅들은 오직 두 개의 계열들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는 진시왕의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진시왕을 암살하고자 하는 계열이다. 그의 신하가 되느냐, 아니면 그를 암살하고 새로운 영웅이 되느냐의 두 길 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신하가 되는 것도 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그를 암살하는 것도 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두 길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의 길이다. 왕-신하, 혹은 국가-국민이라는 하나의 길 밖에 없다.

이안 감독의 노마드 세계와 장예모 감독의 국가철학적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이것은 색깔로 드러난다. <와호장룡>의 영상이미지는 흑백의 무색이거나 자연의 색깔이다. 그러나 <영웅>은 빨간 색, 파란 색, 그리고 하얀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근대의 이상들인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를 상징하는 세 개의 색깔은 다섯 명의 영웅들을 표시하는 색깔들이다. 이안의 영화가 보여주는 무색이나 자연의 색깔에 대항하여 장예모가 보여주는 삼색의 미학은 무엇인가? 그것은 서구 근대의 미학이다. 삼 색은 한 때, 이안의 고향인 <대만>을 일궈낸 장개석이 추구했던 색깔이 아닌가? 장개석이 서구의 힘을 빌려서 중국을 천하통일하고자 했을 때, 그는 서구와 마찬가지로 빨강, 파랑, 그리고 하양의 삼색기를 하늘 높히 치켜올리지 않았는가? 그리고 서구의 근대에 저항하고자 했던 모택동은 무색이거나 자연의 색깔을 가지고 <대장정>의 길에 오르지 않았는가?

<영웅>에서 색깔은 다섯 명의 영웅들을 표시한다. 강호의 영웅들은 모두 빨강에서 파랑으로, 그리고 파랑에서 하양으로 이동한다. 가장 먼저 빨강과 파랑을 거쳐 하양으로 이동하는 사람은 "파검"이다. 두 번째로 하양의 색깔에 도달한 사람은 진시왕이다. 그러나 그는 수천과 수만으로 이루어진 국가장치에 의하여 다시 빨강으로 되돌아온다. 이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그의 파랑은 국가라는 허구의 그늘 아래에 속한 평등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하양에 도달한 사람은 "무명"이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가 "비설"과 "장천"이다. 최초로 "하양"에 도달한 "파검"은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하양"에 도달하는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죽음을 대가로 치룬다. 죽음의 대가는 "비설"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무명"의 깨달음은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했고, "비설"의 깨달음은 사랑하는 연인(파검)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대가로 지불한 이후이다. 오직 "장천"만이 살아서 "검을 버린다(破劍)."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하양은 인위적인 것이고 자연적인 것은 무색이다. 따라서 <영웅>의 모든 인물들이 하양에 도달했다는 것은 <와호장룡>의 전체가 보여주는 무색과 자연의 색깔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 영화가 보여주는 무협영화의 진수인 결투장면에서 드러난다. <와호장룡>의 결투장면은 도시의 집들과 어우러지는 흑백의 무색화면과 자연의 대나무들과 어우러지는 자연의 색깔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영웅>의 결투장면은 노랑의 은행나무 잎들을 빨강으로 물들이듯이 호수의 물위를 제비처럼 방울방울 튀기거나 날아오르는 인위적인 상상의 색깔로 이루어져 있다. 문제는 무색과 자연의 색깔이 자연과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도달하는데, 인위적인 색깔은 단지 인간적 상상력의 기교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근대적인 빨강과 파랑을 아우르고 있는 하양은 무색이며 자연이다. 인위적(국가철학적인 계몽이나 이에 대한 저항적 조직)으로 하양을 칠하려고 할 때, 하양은 항상 진시왕처럼 거대한 국가장치에 의하여 빨강과 파랑으로 되돌아 간다. 빨강과 파랑으로 되돌아 가는 하양은 항상 신비주의로 색칠된다. <영웅>의 시나리오는 종교적 신비주의가 살아있었던 고대의 설화를 토대로 한다. 그러나 <와호장룡>의 시나리오는 고대(중세)의 성의 세계와 강호의 세계가 도시에서 만나 서로 어우러진 근대의 세속적 소설을 토대로 한다. <영웅>의 "장천"이 마침내 하양에 도달하여 살고 있는 곳이 성의 세계일까, 아니면 강호의 세계일까? 그는 아마도 도시의 어느 구석으로 숨어들었을 것이다. 이름없는 민중(무명)이 진시왕을 살려주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듯이...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이 무겁다. 근대의 서구를 닮아서 그들처럼 온전한 국가를 만들어 그들과 대항하고자 하는 중국과 북한, 혹은 장예모와 임권택 등등... 그리고 완전히 서구를 닮지도 못하거나 일부의 그들처럼 근대의 색깔에 질려서 무색과 자연의 색깔로 들어가고자 하는 홍상수와 이안... 그 사이에 있는 우리는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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