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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뭘 바라는데? <007 다이 어나더 데이>

작성자

성은애

작성일자

2002-12-04

이메일

easung@yahoo.com

조회

4349


겨우 인터넷으로나 서울 소식 접하는 처지이지만, 요새 여간한 배짱 아니면 [007 Die Another Day] 볼 거라고 공공연히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인 듯하다. 허나, IMF 때도 미제 영화 안 본다며 [Titanic] 안 보기 운동도 하고 그랬던 모양이지만, 우찌 미국 영화를 아예 안 보고 살 수야 있것나. 게다가 나는 지금 미국에 있다. 미국에서 미국 영화 안 보고 어쩌라고....?

영화 싸이트들마다 이 [Die Another Day]라는 영화에서 북한이나 남한이 월매나 우스꽝스럽게 그려져 있으며, 이 영화가 월매나 역겨운 '양키' 영화인가에 관한 설전으로 뜨겁다. 악역인 문대령 역을 거절한 차인표가 다시 '뜨고' 있으며, 홍보차 내한했던 자오 역의 릭 윤은 아침 프로 출연이 취소된 데 이어, 자기는 개인적으로 별 관계도 없는 미군 장갑차에 치여 죽은 여중생에 관한 질문까지 받아야 했다.

"도대체 뭐가 어쨌길래?"라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면, 이 '거지같은 남북한 묘사'에 관한 소문들은 더없이 좋은 마케팅이었다! 마침내, 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조조할인으로 이 황당무계한 [007 Die Another Day]를 나까지 달랑 4명뿐인 극장에서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영화 관람기를 올려, 강호제현의 관람 여부 결정 및 관람시 마음의 준비를 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고저 하니, 여느때와 다름없이 지루하고 기나긴 글이지만 인내심을 발휘하여 읽어주시길 앙망하는 바이다.

1. 007 영화를 좋아하시는가?

만약 평소에 007 시리즈의 왕팬이었다면, 이 영화에 대한 평은 엇갈릴 수 있겠다. [Die Another Day]로써 피어스 브로스넌이 완전히 자기 나름의 21세기형 007의 인물형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겠고, 반면에 전작들에 비해 보아도 허술하고 황당무계한 플롯이 어이없을 수도 있겠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완전히 잡쳐버린 졸작은 아니라도, 007 시리즈 중에선 좀 시시한 편이지, 그리 뛰어나게 재미있는 편은 아니다.

2. 한국이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한가?

그걸 기대하는 분들에게는 대단히 실망스럽게도, 이 영화의 단 한 장면도 한국에서 촬영되지 않았고,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배우는 단 한명도 기용되지 않았다. 영화에 나오는 한반도의 장면은 남북한 통털어 북한의 군부대와 DMZ가 전부다. 막판에 자동차가 처박힌 들판과 본드와 본드걸이 시시덕거리며 희롱하는 사찰 장면이 '한국'일 것이라고 추측되지만, 이 역시 실제의 한국이 아닌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네티즌들은 이 마지막 장면을 놓고 너무 낙후되어 보인다느니, 사찰에서 어떻게 정사를 벌이냐느니, 하고 열을 받는 모양인데, 벌판 장면은 농부들이 동남아에서나 보이는 물소를 끌고 배회하는 게 좀 눈에 생소할 뿐이다. 머, 경운기를 끌고 가는 것으로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다고 뭐가 크게 달라보이는 것도 아닐 거다. 게다가 이 영화가 PG-13인 관계로 사찰 바닥에 누워 시시덕거릴 뿐이지 '정사'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또한 그게 사찰인지 뭔지도 분명치 않다. 다만 이게 말하자면 성당 고해소에 들어가서 남녀가 희롱하는 꼴이어서, 불교 신자들은 좀 불쾌할 수 있겠다.

3. 그래도 북한군이 악역인데?

그렇다. 소련이 망한 후로 러시아 마피아나 아랍계가 악역을 독점했더랬는데, 요새는 아랍계 테러리스트 다루면 얘기가 정말로 심각해지니까 한발 비껴서기로 했나보다. 그래서 점지된 것이 '악의 축'의 하나인 북한이다. 이 영화에서 북한의 '체제'가 어떤지는 별 문제가 아니다. 북한은 막강한 군사력과 첨단 시설, 무기 개발 능력을 갖춘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 북한의 엘리뜨인 문대령(Will Yune Lee 분)은 옥스포드와 하바드에서 공부한 만능 스포츠맨이고, 자동차광이다. 한마디로 엄청 잘빠진 넘이다. (악역을 멋지게 만드는 것은 이제 액션 영화의 정석이 되어버렸다.) 근데 내가 보기엔 차인표가 이 역을 했더라면 얘보단 좀 더 멋있었을 것같다.^^;;;

그런데, 요넘과 더불어 릭 윤과 나머지 북한군 역을 맡은 배우들이 구사하는 한국어, 이거 정말 코미디 중의 코미디다. 나는 보다가 웃겨서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뭔가 떠들긴 하는데, 표정 연기와 대사가 완전히 따로 노는 것은 물론, 심지어 아래 나오는 영어 자막을 보고 나서야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정도다. 내 참, 명색이 한국어 '네이티브 스피커'인 내가 히어링이 안 되어서 고생을 하다뉘....쩝.

장면장면마다 나오는 조선말 표지판들은 수시로 틀린 글자가 나와서 실소를 자아내고, DMZ의 지뢰밭 앞에는 친절하게도 "지뢰출몰"이라는 표지도 붙어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벌이는 비행기 액션에서는 브로스넌과 본드걸 할리 베리가 위장하느라 북한 군복을 입고 나오는데, 너무나도 친밀한(!) 개구리 무늬 '야비군복'에 왼쪽 가슴에 "청천1동대"라고 어설프게 쓴 한글이 보인다. 정말 웃긴다. 웃기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었을 텐데 이리도 웃기니 이거 좀 문제가 있다.

한국 배우들 캐스팅 하려다 안 된 건 알겠는데, 그래도 한국 시장에 이 영화 팔아먹을 생각이 있으면 최소한 한국말 제대로 구사하는 스태프 구해서 대사 처리며 세트 고증이라도 제대로 하면 어디가 덧나나? 그냥 아무렇게나 만들어도 한국 사람들은 그냥 히히거리고 볼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 제작사, 머리는 쪼금 모자라는 모양이다. 그런 면에선 항의받아도 싸다. 뭐 그렇다고 영화사 측에서 미군 장갑차에 치어 죽은 여중생 문제나 SOFA 개정문제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건 아니다.

4. 북한은 악의 축?

그런 정치적인 입장과 별 상관이 없게 보이려고 애를 쓴 흔적은 있다. 왜냐면 007이 비록 냉전구도의 산물이긴 하나, 어디까지나 그냥 황당한 오락영화지 심각한 정치 다루는 영화는 아니기 때문에, 굳이 그런 이슈를 끌어들일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냥 007과 악당, 이 단순소박무식한 두 축이면 족하다.

이 영화의 악역이 '북한'이라는 나라의 공식적인 입장과 별 상관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요기부터 약간의 스포일러...) 초장에 죽은 줄 알았던 문대령은 쿠바의 최첨단 의료 기술의 도움을 얻어 구스타프 그레이브즈라는 북구 계열의 금발 청년으로 '환생'하고, 이렇듯 노랑머리의 백인 남자로 변신한 악당은 원래 국적이 북한이라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하게 만든다. 게다가 '자오'라는 국적 불명의 이름을 가진 북한군 릭 윤은 007과의 초반 액션에서 입은 부상으로 얼굴을 황당하게 바꿔서 나온다. ('다이아몬드 상감'이라고 들어봤나?) 거의 '괴물'같이 보이는 릭윤의 얼굴에서 '한국인'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게다가 문대령의 아버지인 문장군은 첨단 무기를 개발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아들의 집념을 비난하며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북한의 현 군부 고위층에서도 두 손 들어버리고 "넌 내 아들 아니다"고 포기할 정도로 막나가는 악당이 문대령이라는 것이다.

이정도야 뭐....<쉬리>같은 데서도 드러나는 정도 아닌가. 흠....<쉬리>는 한국 영화의 신기원이네 어쩌네 떠들면서, <쉬리>의 북한군 묘사가 적절했는가를 따져보지 않는다면, <007>의 북한 묘사에 대해서도 별 할 말 없는 거 아닐지?

5. 남한은 '븅신'으로 나오나?

이러고 저러고 간에, 남한 자체가 나오질 않는다. 자동차가 추락한 곳이 딱이 남한이라는 법도 없거니와, 마지막의 사찰 장면이 남한이라는 증거도 없다. 일본일 수도 있고, 중국일 수도 있다. 사찰 자체는 동남아 풍이지만, 경치 하나는 끝내준다. 우리나라엔 그런 데 없거니와, 관객들이 그걸 '남한'이라고 생각한다 치더라도, 남한을 특별히 '비하'한다고 보긴 힘들다. 뭐 그럼, 포항제철이라도 보여주리?

처음에 포로 교환을 하는 장면에서 한국군 헌병이 몇명 등장하는 게 남한 등장의 전부다. 그러니까 아예 남한이라는 공간은 제작진의 안중에 없었던 거고, 그러니 남한이 식민지로 묘사되었다 어떻다 말할 건더기도 별로 없다. 게다가 '븅신'으로 나오는 건 미군에게 작전권 맡기고 있는 남한뿐만이 아니라(대치 상황이 기본적으로 북한 vs. 미국으로 설정되어 있는 건 사실이다. 그게 제작진의 시각인 듯하지만, 또 그건 북한의 시각이기도 하다. 007 제작진은 주사파?^^;;;;), DMZ 지뢰밭이 다 터져나가고 미군 기지가 다 박살나게 생겼는데도 달랑 영국출신 정보원 007이 모든 상황을 해결해줄 걸로 믿고 멍하니 앉아 있어야 하는 미군들이다.

뭐, 어차피 007 영화에선 007하고 그를 받쳐주는 MI6만 빼고 다 '븅신'들 아니냐.

6. 그럼 뭘 보라는 거냐?

에.....여느 007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격한 액션을 치뤄도 언제나 산뜻한 모습의 제임스 본드, 그리고 본드 걸 할리 베리의 눈부신 몸매, 아름다운 여성의 몸이 흐느적대는 전형적인 오프닝, 나날이 발전하는 컴퓨터 그래픽 (너무 황당하여 쬐금 어설픈 장면도 있더라만....), 숨쉴 틈없는 액션, 깜짝 출연하는 마돈나, 맨날 새로운 기계 발명하느라 숨찬 Q의 삐까번쩍한 새 장비들, 뭐 그런 거지.

더 이상 뭘 바라냐? 007인데.....!!!

7. 사족

문대령(혹은 구스타프)은 자신의 첨단 무기로 비무장 지대의 지뢰를 몽땅 날려버린다. 지뢰밭 없애면 그길로 남한으로 군대 이끌고 쳐들어갈 거라고 희희락락하더라. 지뢰 제거하면 북한이 쳐내려 오는 건가? 미군이 쳐올라가는 게 아니고? 오호...남북 교류에 딴죽거는 007? 요새 철도 연결 사업의 일환으로 비무장지대 지뢰 제거하다 중단했느니 재개하느니 시끄럽던데, 지뢰를 저렇게 그냥 단추 한번 눌러서 한방에 다 날려버리는 방법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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