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세미나들

 *영미연 안팎 소식

 *이달의 학술행사

 *문화 리뷰

 *다른 집 가기

 *책읽기,세상읽기

연구회소개 / 회원가입 / 분과연구실 / 도서실 / 회의실 / 사이트맵 / 자료회원연구실 / 자유게시판

                     

제   목

 귀신 이야기(3): 귀신들이 사는 자연의 휴식 공간

작성자

장시기

작성일자

2002-10-21

이메일

조회

4506


귀신 이야기(3): 귀신들이 사는 자연의 휴식 공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는 마침내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는 팔백 만의 수호신들이 휴식을 취하는 온천장 내부로 들어간다. 이곳은 자연 귀신들의 삶의 터전이 아니라 휴식의 공간이다. 그들의 삶의 공간은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장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휴식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곳은 인간에게 불가시적인 곳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곳이 불가시적인 장소가 아니라 이곳에서 인간은 나무나 돌, 혹은 개나 고양이처럼 불가시적이고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잘못된 판단은 유바바가 운영하는 온천장이 인간 사회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사성의 측면에서 바라보더라도 인간 사회가 자연의 세계를 닮은 것이지, 자연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를 닮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세계는 자연의 세계를 닮은 것을 떠나서 자연 속에 내포되어 있고, 자연의 속성을 스스로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치히로가 유바바가 운영하는 온천장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자연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인 동시에 그러한 자연의 속성을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치히로가 온천장이라는 자연의 세계, 혹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맺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는 원칙을 어기고, "먹고 사는 것에 환장한" 나머지 돼지가 된 엄마와 아빠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치히로가 제일 먼저 도움을 받는 존재는 가마 할아범이다. 가마 할아범은 수십 개의 팔과 다리를 가지고 온천장의 온도를 조절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그러나 온천장의 운영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는 장인(노동자, 혹은 예술가)의 전형이다. 자연이라는 세계, 혹은 사회라는 세계는 가마 할아범처럼 묵묵히 쌀, 빵, 가방, 고기, 책, 건물 등등을 만드는 땅과 바다, 그리고 바람이나 하늘과 똑같은 노동자와 농민의 장인들에 의하여 유지된다. 그러나 이러한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는 치히로처럼 이 세계의 완전한 이방인이거나 아무런 이해타산 없이 그것을 하나의 경치로 구경하고 있는 영화의 관객들 뿐이다. 따라서 나의 모습이나 우리의 모습은 나나 우리가 파악하는 세계가 아니라 나나 우리가 아닌 이방인에 의해서 파악된다. 어느 날 갑자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혹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나와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마 할아범의 도움을 받은 치히로는 온천장의 주인 유바바에게 간다. 유바바는 온천장의 꼭대기에서 온천장을 운영하는 주인이다. 우리는 이 주인을 사장, 재벌, 이사장, 총장, 혹은 국무총리나 대통령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이름들은 오늘날의 우리 사회가 부르는 이름들이다. 예전에 유바바는 왕이나 황제, 사제나 장군, 혹은 여러 신들의 이름으로 불렸었다. 그는 온천장을 운영하는 굉장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능력은 온천장을 운영하기 위하여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원칙을 가지고 각각의 구성원들의 이름을 빼앗는 힘에서 나온다. 그래서 치히로는 "치히로"라는 이름을 빼앗기고 "센"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는다. "센"이라는 이름과 "치히로"라는 이름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단지 열 살 된 주인공 소녀를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치히로"는 돌과 나무, 혹은 토끼나 다람쥐 같은 자연인 치히로의 이름이고, "센"은 온천장의 주인인 유바바의 하인으로 일하는 자의 이름이다. 온천장의 주인 유바바가 "치히로"의 이름을 뺏고 "센"이라는 이름을 주듯이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들 개개인의 자연적인 이름을 빼앗고 과장, 총무, 의사, 서기, 교수, 학생 등등의 이름을 부여한다. 우리는 영희, 철수라는 이름을 잃어버리고 과장이나 총무의 이름으로 행세한다. 영희나 철수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연인과 친구의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교수나 국회의원, 혹은 변호사의 이름으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연인과 친구의 관계를 상실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이 유바바와 같은 잔인하고 폭력적인 자본가나 지식인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바바와 같이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그녀의 언니, 제니바는 온천장을 운영하지도 않고, 수많은 존재들의 이름을 빼앗지도 않으며, 사회적 관계와 동떨어진 숲 속의 세계에 은거하면서 모든 존재와 친구들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유바바의 명령을 받고 그의 도장을 훔치려고 한 하쿠를 죽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치히로와 하쿠의 친구가 된다. 그래서 그녀는 치히로와 하쿠가 사랑하는 관계이고, 그러한 관계의 기억을 통하여 치히로가 하쿠의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도록 만들어주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러한 계기는 마치 우리가 여행이나 휴식을 통하여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처럼 치히로와 하쿠가 그들의 일터인 유바바의 온천장에서 벗어났을 때에 이루어진다. 치히로와 하쿠를 지배하고 명령할 수 있는 힘과 지식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동일한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유바바와 제니바의 차이는 지배와 권력을 지향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가 된다. 우리는 유바바처럼 노동자, 농민, 여성 등등의 소수자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지식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그들의 친구나 연인이 되어 그들의 자연적인 이름과 관계를 되찾도록 도움을 주는 지식을 추구하는가!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서민적이고 친구나, 혹은 동네 아저씨같은 같은 지도자를 원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하쿠의 모습에서 우리는 유바바와 닮은 권력 지향의 권위주의와 엘리트주의를 읽을 수 있다. 치히로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가 "할 일이 남아있다"고 말하면서 유바바의 온천장으로 되돌아 가는 것은 그곳을 친구들의 세계로 만들려는 참다운 서민적인 지도자의 모습이 아닐까?

유바바의 지배와 통치에도 불구하고 온천장의 일꾼들이 매료되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 그것은 얼굴 없는 귀신 "가오나시"이다. 얼굴, 즉 안면성(faciality)은 "나"라는 주체를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교수, 학생, 아빠, 남편, 아들, 오빠, 연인, 친구 등등의 수많은 얼굴을 지니고 있다. 내가 교수의 얼굴을 지니고 있어야 할 시간과 장소에서 아빠나 연인의 얼굴을 지니고 있거나, 남편과 친구의 얼굴을 지니고 있어야할 장소에서 교수나 오빠의 얼굴을 지니게 된다면, 상대방은 나를 아주 낯선 귀신으로 인식하게 된다. 나의 안면성은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과 장소의 이동에 따라서 변화한다. 따라서 절대적인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오나시"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화하는 얼굴마저도 없다. 각각의 고정된 안면성이 없다는 측면에서 "나"라는 주체와 마찬가지로 "가오나시"는 그 어떤 존재의 표현이다. 그러면서도 차이가 나는 것은 각각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지니게 되는 "안면성"을 가오나시는 지니고 있지 않다. 이러한 측면에서 가오나시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나 사물의 존재가 아니다. 우리 인간이나 사물의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존재, 그것이 가오나시 귀신이다.

오늘날, 가오나시 귀신의 특성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은 "자본(돈)"과 "권력", 그리고 "예술"이다. 자본과 권력, 그리고 예술은 안면성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과 권력, 그리고 예술은 안면성을 지니고 있는 우리들 인간을 매개로 하여 스스로를 표현한다. 우리가 자본을 좇을 때, 우리의 인간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안면성은 사라지고 자본이 그것을 대체한다. 권력과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가오나시는 자신을 좇는 모든 존재를 먹어치운다. 자본을 좇기 때문에 아들은 아들의 안면성을 잃고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민다. 권력을 좇기 때문에 어제의 친구나 연인이 오늘의 적이 된다(이런 사람들은 신림동 고시촌에 가면 수없이 많다. 그리고 최근에 우리는 권력을 좇아서 자신의 안면성을 상실한 김민석 국회의원을 보았다). 예술이라는 얼굴 없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가상의 세계에서 헤매는 영혼이 된다. 그러나 치히로처럼 "가오나시"를 무시할 때, 가오나시는 스스로 와서 치히로에게 애정을 구걸한다. 오늘날 우리가 어린 소녀의 감각과 정서가 되었을 때, 자본이 스스로 와서 돈을 벌게 만들어주고, 권력이 스스로 와서 우리에게 힘을 주고, 그리고 예술이 스스로 와서 위대한 기념비를 만들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두가 자본을 좇는 시대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만들어지는 교수, 학생, 남편, 친구, 연인의 안면성을 상실하고 자본이 그 모든 안면성을 대체하고 있는 시대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본을 무시하고 자본이 우리들 곁으로 스스로 와서 구걸을 할 때, 자본주의는 스스로 극복될 것이다. 권력과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자본주의와 같은 사회, 혹은 예술처럼 사회를 이끌어 가는 정신은 가오나시와 같은 얼굴 없는 귀신이다. 이러한 얼굴 없는 귀신에 집착하면 우리는 우리의 관계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자연스러운 안면성을 상실한다. 얼굴 없는 귀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우리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면 된다. 집착에서 벗어나면 얼굴 없는 귀신은 스스로 와서 우리의 생산적 관계의 안면성을 지니게 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보여주는 것처럼 귀신들이 사는 자연의 휴식공간은 인간이 만든 문명의 공간이다. 따라서 자연의 귀신들은 우리들의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우리와 더불어 함께 살고, 함께 노닌다. 자연의 귀신들이 노니는 사회나 문명의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관련글 제목

작성자

작성일자

조회

귀신 이야기(3): 귀신들이 사는 자연의 휴식 공간 <- 현재글

장시기
2002-10-21
4506

 

 

 

연구회소개 | 회원 가입  |  분과 연구실  |  도서실  |  회의실  |  사이트맵  |  자료회원연구실 | 자유게시판

운영위  |  안과밖편집위  |  자료실편집위 |  영미문학연구 편집위 |  출판기획위번역평가위

Copyright 2001 All rights reserved SES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