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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귀신이야기(2)

작성자

장시기

작성일자

2002-09-30

이메일

조회

4134


귀신 이야기(2): 나 자신이 귀신이다.

관계를 맺는 모든 존재에서 귀신이 생겨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도 무서운 귀신은 나 자신이다. 나는 일정한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따라서 그 관계를 파괴하거나 생산하는 귀신이 된다. 어렷을 적, 어머니에게 돈 잡아먹는 귀신의 역할을 하면서도, 어머니가 즐겁게 그 귀신을 키운 것은 내가 어느 정도의 즐거움과 미래의 생산성을 어머니에게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자식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내가 조그마한 꼬마 귀신을 키우고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자식을 키우면서 내가 얼마나 위험한 귀신이었는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방학이면 항상 구들장귀신이 되기도 하고, 한 동안 돈만 있으면 영화를 보는 영화귀신이 되기도 하였고, 대학원 시절엔 술이 취해서도 논문만 생각하는 논문귀신이 되기도 하였다. 이성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여러 여성들에게 남자 귀신의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그들에게 나는 생산적인 귀신이었을가, 아니면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처럼 파괴적이고 괴물의 모습을 가진 귀신이었을까?

역사적으로 "나 자신이 귀신이다"라는 생각은 서구의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듯 하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은 귀신의 목소리로 연극이 시작한다. 주인공 햄릿은 귀신의 목소리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지고 연극이 끝날 때까지 고민한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오필리아를 비롯한 많은 주변 인물들에게 귀신의 역할을 한다. 세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의 많은 사람들은 중세적인 "(귀)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사유에서 벗어나 "인간이 (귀)신을 만들었다"는 근대적 사유에 접근한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 귀신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귀)신/인간의 이분법에서 인간(귀신)/물질의 이분법으로 도치된 것이다. 그래서 근대 인문학의 역사는 "인간이 (귀)신이다"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정신을 탐구한 역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근대 철학의 어머니(창시자)라고 불리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정신적 귀신의 코기토를 세계를 움직이는 힘으로 간주했으며, 19세기 근대 철학의 아버지(정신적 지배자)라고 불리는 헤겔은 "독일 정신이 곧 세계 정신이다"라는 파시즘의 귀신철학에 도달한다.

영화 <디 아더스>는 서구의 르네상스로부터 시작하는 "나 자신이 귀신이다"라는 생각의 근대적 종착점을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영국의 자그마한 섬에 있는 대저택에서 일어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정신적 인간, 혹은 죽은 인간)과 눈에 보이는 귀신(육체적 인간, 혹은 살아있는 인간)의 이야기는 정신적 인간이 (귀)신의 위치로 격상되어 마침내 삶의 세계에서 육체적 인간을 내좇아버리는 근대의 형이상학을 완결시킨다. 영화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은 눈에 보이는 귀신 때문에 두려워하고 안달을 한다. 그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눈에 보이는 귀신(육체적 인간)을 내쫓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한다. 마침내 살아있는 인간은 죽은 인간을 위하여 집을 버리고 떠난다. 이것이 바로 유럽식으로 인간이 (귀)신이 된 결과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산 자의 입장과 죽은 자의 입장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중세의 신 중심적인 세계관과 근대의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만이 있을 뿐이다. "(귀)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시각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는 시각만이 있을 뿐이다.

"나 자신이 귀신이다"라는 말은 나와 귀신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서구의 르네상스적 사고방식은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라는 인식이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라는 인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귀)신을 만들고, 그 (귀)신이 인간을 만든다"는 인간과 귀신의 동시적인 사유방식이다. 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 산 자와 죽은 자의 동시적인 사유가 가시적인 것/불가시적인 것, 혹은 산 자/죽은 자의 이분법적 사유방식으로 전환된 것은 데카르트의 정신/몸의 이분법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근대의 과정이 마침내 불가시적인 것(정신문명)을 위하여 가시적인 것(자연문화)을 제거하고, 죽은 자를 위하여 산 자가 떠나야만 하는 삶의 세계를 만든 것이다. 이러한 대립은 단지 근대의 정신적 사유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디 아더스>에서 보여주는 죽은 자를 위하여 산 자가 떠나야만 하는 상황은 근대의 정신에서 가시적이고 명료하게 인식되었던 서구·백인·남성이 비가시적이며 불명료하게 인식되었던 비서구·유색인·여성 때문에 자기 자신의 삶의 터전을 침식당하고 있다는 인식으로 확대된다. 데카르트적인 정신(서구·백인·남성)/물질(비서구·유색인·여성)의 이분법이 새로운 후기 근대적 정신(비서구·유색인·여성)/물질(서구·백인·남성)의 이분법으로 전환되어 더욱 더 폭력적이고 대립적인 상황을 생산한다.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나와 귀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며, 정신과 몸, 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를 동시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이분법으로 분리하여 사유하는 <디 아더스>와는 달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인간과 자연, 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을 동시에 사유하고 있다. 따라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나 자신이 귀신이다"라는 명제 뿐만 아니라 귀신을 사유하는 우리의 정신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귀신을 사유하는 우리의 정신이 "어린이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고, 어린이 중에서 "어린 소년(little boys)이 아니라 어린 소녀(little girls)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린 소녀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어린 소년보다 어린 소녀가 더 많은 가능성과 무색무취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귀신을 생산하는 개인적 관계이든지 혹은 사회적 관계이든지간에 어떤 색깔을 지니기 보다 아무런 색깔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 더 많은 가능성을 낳는다. 어떤 정치적 목적을 지니는 것보다 아무런 정치적 목적을 지니지 않는 것이 더 많은 정치적 가능성을 낳는다. 어떤 여성이나 남성을 만날 때, 그 여성이나 남성에 대한 사적인 목적을 지니는 것보다 아무런 목적을 지니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관계와 사랑의 가능성을 낳는다.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의 다른 애니메이션에서 뿐만 아니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어린 소녀가 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시작되는 이사가는 날, 치히로와 그의 부모가 이상한 동굴을 지나서 만나는 세계는 그들이 이사를 가는 마을일 수도 있다. 새로운 마을은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터전이며, 새로운 관계는 이전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나라는 귀신이 새로운 귀신으로 거듭나는 하나의 계기이다. 이러한 새로운 계기에서 어린 소녀인 치히로는 동네를 뛰어다니며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터전을 탐색한다. 그러한 탐색의 과정에서 치히로는 새로운 관계의 의미를 생성하는 "하쿠"를 만난다. 이와 반대로 치히로의 부모는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터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직 먹고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렇다. 치히로는 내 딸이다. 나는 매일 저녁, 나의 10살 된 딸에게 이웃집 이야기와 동네 이야기를 듣는다. 치히로가 이상한 동네라는 것을 발견하고 돌아왔을 때, 그의 부모는 새로운 관계가 아니라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돼지로 변신한 상태이다. (아, 그래서 우리의 부모들은 이사를 갈 때마다 떡을 해서 이웃집에 돌렸던 것일까?)

하쿠의 조언처럼 치히로는 비생성적인 세계, 즉음의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부모를 돼지에서 인간으로 다시 변신시키기 위하여 죽음의 세계에 더욱 깊숙히 빠져들어야만 했다. 우리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우리 어른들을 위하여 살아주는 것이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보다 아이들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더욱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로운 관계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의미를 항상 자본주의적 사고나 기존의 관념으로 재단한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이나 새로운 귀신을 생성시킬 수 있는 아이들을 죽음의 관계나 자본주의적 돼지의 귀신이 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섭고 두렵기는 하지만, 치히로라는 어린 소녀가 되어 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귀신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면, 그리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어린 소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면, 우리는 귀신과 인간이 공생하고 있는 자연으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치히로의 모험, 혹은 정말 재미있는 자연의 귀신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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