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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썰렁찝찌름한 가족 - <로얄 테넌바움>

작성자

성은애

작성일자

2002-04-01

이메일

easung@yahoo.com

조회

3559


유난히 가족간의 끈끈함(!)을 강조하는 한국인으로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얘기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족이란 서로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가족이다. 말하자면, 집안 말아먹지 않고 서로 이갈면서 해코지만 안 하면 그걸로 큰 축복이라는 거다.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심지어는 희생하고, 그래서 눈물겹고, 생각만해도 가슴이 따땃해지는 가족이란 그냥 머릿 속에나 있는 거라고,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든다.

유유상종이라고 주위에 비슷한 인간들만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말로는 엄청나게 끈적거리는 가족애를 자랑하는 한국인들이면서도, 실제로 그 단란함의 꺼풀을 슬쩍 들춰보면 크고작은 상처와 애증의 자국들이 이리저리 엉켜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왜 아니겠는가. 가족도 인간관계의 하나일진대. 과도한 기대와 집착과 지배욕과 반발이 가장 격렬하게 충돌하는 장이 가족이다보니, 우리 모두의 집안에는 평상시에는 얘기도 꺼내기 싫은 어둡고 착잡한 사연 한둘씩은 다 도사리고 있다.

<아이스 스톰><아메리칸 뷰티>에서 <심슨 가족>에 이르기까지, 미국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의 모습은 대개 우리 나라의 가족보다 한층 더 '콩가루'라고 여겨지는 것이 보통이다. 애들이 싸가지 없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냉랭하고 썰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기껏해야 <보통사람들>이나 <마빈의 방><매그놀리아>처럼 서로 냉랭한 가족들이 어떤 계기로 '화해'를 하게 되면서 신파조의 눈물을 짜내는 경우가 고작이다. 정말 그럴까...?

얼떨결에 -- 오로지 애들 보여주려고 점찍은 <위대한 비상>과 같은 시간에 시작한다는 이유로 선택함. 최근 들어 맘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음. -.-;;; -- 보게된 <로얄 테넌바움>(The Royal Tenenbaums, 2001)은 아주 특이한 미국의 한 가족을 소재로 한, 아주 특이한 스타일의 영화다.

잘나가던 변호사이면서 가족을 전혀 돌보지 않아 이혼과 다름없는 별거중인 로얄(Gene Hackman 분)은 파산하여 숙박중이던 호텔에서 내쫒기게 되자, 말기암이라는 뻔뻔스런 거짓말을 이용해 아무도 반기지 않는 집으로 밀고 들어온다.

큰아들 채스(Ben Stiller 분)는 천재적인 금융가였으나 비행기 사고로 아내를 잃고 안전강박증에 시달린 끝에 두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온다. 입양된 딸 마고(Gwyneth Paltrow 분)는 천재소녀 작가로 명성을 떨치다가 더 이상 작품을 쓰지 못하고, 욕실에 하루 6시간씩 처박혀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소일하다가 가방을 싸들고 친정으로 향한다. 막내 리치(Luke Wilson 분)는 20대 중반에 화려한 테니스 선수의 경력을 접고 배를 타고 세계를 돌며 빌빌거리다 집으로 들어온다. 게다가 그는 남몰래 입양된 누나인 마고를 사랑하고 있다.

이 천재 남매들과 같이 놀지 못해 안달하던 옆집의 꼽사리 일라이(Owen Wilson 분)는 작가로서 약간의 대중적 인기를 끌긴 했으나 마약에 쩔어서 산다. 이 모든 상황을 그럭저럭 감당해왔던 어머니 에슬라인(Anjelica Houston 분)은 썰렁하기 짝이 없는 흑인 회계사 헨리(Danny Glover 분)과 늦바람이 나서 정신을 못 차린다.

테넌바움 가족은 도저히 화해불가능이다. 다들 약간씩 맛이 간 표정에, 뻣뻣하기 그지 없는 자세로 포즈 취한 영화 포스터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시답잖은 감동이나 눈물 따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조숙한 천재 남매들의 뒤틀린 유년기로 시작하여, 아버지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 영화, 생각만해도 시금털털하고 갑갑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이 씁쓸한 가족의 초상을 감독은 실실 웃으면서, 쿡쿡 쑤시면서, 꽤 재미있고 아기자기(?)하게 풀어낸다. 이거 참 신기한 노릇이다. 뒤로 넘어갈 정도로 폭소 터뜨릴 장면은 없지만, 계속 키득거리며 가볍게 웃게 만드는 이 영화의 매력은 심지어 아버지의 장례식 장면에서조차 불경스럽게도 '푸할할..'하고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세상에...-.-;;;

웃음을 유발하는 장치는 주로 등장인물의 엉뚱한 행동이나 복장들이다. 365일 내내 빨간색 아디다스 트레이닝복만 입는 닮은 꼴 채스 3부자도 그렇고, 라코스테 줄무늬 원피스에 모피코트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패션을 고집하는 마고나, 비욘 보리가 즐겨입던 테니스용 T-셔츠와 머리 밴드를 고집하는 리치는 그냥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게다가 우디 앨런 영화를 방불케하는 살살 돌려치는 대사의 감칠 맛이나, 한두명만 등장해도 화면이 꽉차보이는 스타급 배우들의 연기 조화도 영화를 보는 재미중의 하나다. 멋진 애들은 잔뜩 왔다갔다 해서 정신을 쏙 빼놓긴 했지만 결국 금고를 털어서 돈을 왕창 빼내고 여자도 되찾았다...는 거 말고는 뭔 소린지 잘 생각도 나지 않던 <오션스 일레븐>이 화려한 뷔페라면, <로얄 테넌바움>은 그에 못지않게 유명한 배우들이 각자 뚜렷한 개성을 자랑하면서 다소 산만한 줄거리의 곳곳에서 보석처럼 빛을 내는, 맛깔스런 정식같다. 아,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주옥같은 영화 음악이다. 비틀즈, 밥 딜런, 니코, 클래쉬 등의 고전적인(?) 음악들이 오래된 뉴욕의 거리와 잘 어울려서 썰렁한 인물들의 찝찌름한 관계들을 따뜻하게 감싸준다.

가족 간에 그저 상대방의 인생을 말아먹지나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무심하다보니, 혹은 상대방의 인생을 내 입맛대로 맞추려고 집요하게 굴다보니, 혹은 똑똑하고 능력있는 애들로 키우겠다고 지나치게 열과 성을 다하다 보니, 결국 서로 별로 행복하지도 못하면서 그나마 최소한의 의사소통도 영 불가능해진 이런 상황... 이걸 정공법으로 다루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껄렁한 아버지 진 해크만이 결국은 약간의 '수습'을 하고 떠나가지만, 사실 그런 결말은 싸늘하고 우울한 결말을 원치 않는, 그리고 영화보던 내내 웃음을 머금던 관객들에 대한 서비스일 뿐이다. 그 정도로 수습할 능력이 있었던 아버지라면, 애초에 집안 꼴이 그 모양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말이 안되기도 하지만, 이 영화 보면서는 그런 거 꼬치꼬치 따지지 말자. 블랙(혹은 컬트?) 코미디라잖아.

열 개의 챕터로 구성된 책 스타일을 틀거리로 삼음으로써, 산만한 이야기를 그런대로 재치있게 풀어낸 이 영화는 딱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수성에 어울리는 영화는 아닐 듯싶다. 같이 본 친구는 아마 1주일 안에 막을 내릴 거라고 예고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냉소적인 사람들과 오래된 뉴욕 거리, 그리고 테넌바움 집안의 낡은 나무 계단과 벽지의 따뜻함이 묘하게도 불협화음 속의 조화를 이루는 색다름을 경험하고 싶다면, 그리고 가족이 도대체 뭐 길래 이렇게 내 골머리를 썩게 하는 것이냐며 투덜거리고 있는 분들이라면, 별 기대 없이 한번쯤 보시길 권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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