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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것은 고구려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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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m

작성일자

2008-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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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1


[한겨레21]에 연재중인 '박노자의 고대사 다시 읽기'를 재미있게 읽는다. 특히 이번호 글이 눈길을 끌었다.

요즘은 좀 시들해졌지만, 한때 한국과 중국이 고구려사를 비롯한 한반도과 만주연변의 고대사의 영유권을 갖고 싸운 적이 있다. 나는 그 논쟁을 보면서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말이 떠올랐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이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고구려의 것은 고구려에게로.'

과연 고구려인들의 역사는 한국 혹은 중국의 고대사에 그렇게 손쉽게 편입될 수 있을까? 고구려인들이 '우리'의 선조, 혹은 중국 소수민족의 선조일까? 그게 왜 그리 중요할까? 그들은 자신들을 '한민족' 혹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고 간주했을까? 그들에게 '민족'이라는 개념이 있기나 했을까? 더 나아가 삼국시대인들은 서로를 하나의 '민족'으로 인식하고 '통일'을 갈망했을까? 혹시 이런 모든 것들은 근대 이후 만들어진 '한민족' 혹은 근대민족국가라는 허구적 공동체의 이미지를 과거에 투사한 결과는 아닐까? 박노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 "궁극적으로 한반도 주민들의 종족적 정체성을 통일시킨 것은 고려 말∼조선 초 성리학 보급으로 인한 지방 엘리트들의 교육·가치관·생활양식의 동질화와 임진왜란과 같은 ‘우리 모두’에게 가해진 처참한 공동의 역사적 시련이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조선인’이라는 종족적 정체성이 이미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사뭇 공고했기에 조선이 근대의 자장(磁場)으로 흡인되자마자 근대적 민족의 형성도 매우 빨리 이루어졌다. 그래서일까, 전근대의 역사에서도 ‘단일민족 주체’가 있었던 것처럼 인식돼 전근대사까지도 ‘민족화’돼버리고 말았다."

역사는 결국 현재의 역사 만들기의 산물이다. 프로이트의 표현을 빌리면 사후성의 원리가 역사만들기에 작동한다. 과거는 사후적으로 지금의 시점에서 재구성된다. 중립적인 역사기술은 없다. 그렇게 고구려인들의 역사는 한민족의 역사로, 혹은 중국의 소수민족의 '민족사'로 재구성된다. 굳이 그래야 할까? 고구려인들, 혹은 다른 고대인들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우연히 특정한 공간에서 살다가 갔다. 혹시 그들에게 '부족'의 개념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민족'의 개념은 없었다. 그들이 남긴 어떤 몸의 유전자가 지금의 한민족, 혹은 중국의 소수민족의 몸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그리 중요한가? 그런 유전자를 갖고 그들이 우리의 '선조'라고 떠들 이유가 있을까?

단일한 민족의 신화만들기. 이런 근대의 신화를 해체하고 이제 고구려의 것은 고구려에게로 되돌려줘야할 때가 아닐까? 아무데나 민족과 민족주의의 잣대를 들이대는 짓. 이제 그만할 때가 된 게 아닐까? 고구려의 역사, 고대의 역사는 그들의 것이다. 한국(한민족)이나 중국(한족이나 소수민족)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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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21

통일신라 시대에 ‘우리’란 [2008.11.07 제734호]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 고대국가는 종족적 정체성을 지녔을까…
백제는 계층별로 언어가 달랐고 두 번의 통일 뒤에도 부흥운동은 계속되었네

“우리 민족은 반만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단일민족 국가로서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고등학교 국사> 2002, 13쪽) 고교에서 ‘국사’를 배워본 사람이라면 이 문구를 기억할 것이다. 국내 외국인 인구가 벌써 2%나 넘었기에 적어도 현재에 대해서는 단일민족이란 말을 더 이상 쓰지 않지만, 고조선 이후로 한국사의 주체로서 어떤 단일적 민족집단이 고정불변하게 존재해왔다는 인식은 아직도 한국인에게 지배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국사 교과서들이, 예컨대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민족적 단일성’을 무리하게 주장하지는 않는다. 사실, 삼국의 통치체제나 문화에 대한 교과서 서술만 봐도 그들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현저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

» 진표율사가 세운 금산사 미륵전. 과연 진표와 같은 백제 유민출신들이 신라의 관등을 형식적으로 받았다고 해도 자신들을 신라인이라는 종족과 십분 동일시했을까? 아마도 ‘신라인’이라는 단순한 자의식보다는 훨씬 더 복합적·중첩적 정체성을 가졌을 것이다. 한겨레 자료

근대적 개념 ‘민족’ 대신 ‘종족’의 입장에서

그럼에도 북쪽의 부여부터 남쪽의 가야까지 ‘고대 한민족’이 공통의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은 ‘한민족’을 역사 주체로 등장시키는 국사 교과서의 기본 전제다. 북한은 역사 주체의 단일성에 대한 강조의 정도가 훨씬 더 높다. 북한 지도자 김정일부터 “조선 민족은 각이한 기원을 가진 사람들의 그 어떤 혼혈 집단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조선 땅에서 기원하여 하나의 핏줄을 가지고 하나의 언어를 쓰면서 살아온 단일민족입니다”라고 ‘교시’하지 않았던가?

고조선 이후로는 조선인들이 단일민족이 다 됐다는 오늘날 북한 사학의 입장에서는 가령 고구려와 신라의 종족적 정체성이 서로 꽤나 달랐다는 이야기는 원천적으로 성립이 불가능하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북한 사학이야말로 조선사 전체를 단일 혈연집단인 ‘신성한 부여족’의 ‘족보’로 본 신채호 사학의 혈통주의적 정신을 가장 충실히 따른다고 봐야 한다.

과연 고대사회에도 오늘날과 같은 ‘우리’의 정체성이 존재했을까? 물론 ‘민족’(nation)이라는 근대적 개념을 처음부터 쓰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민족’이란 정치의식이나 문화, 언어 형태상 동질화된 집단을 의미하는데, 조선시대의 양반과 노비 사이에, 아니면 함경도와 제주도의 주민 사이에 과연 어느 정도의 사회·문화·언어적 동질성이 있었겠는가? 언어적 동질성을 이야기하자면, 엘리트들의 민족의식이 비로소 형성된 개화기 이후에도 무수한 방언들을 썼던 조선인 사이는 우리 생각만큼 말이 쉽게 통하지 않았다.

나중에 유명한 언어학자가 되어 북한 국어학을 이끌게 된 경남 의령군 출신 이극로(1893~1978) 선생은 1912년 평북 창성을 지나가는 길에 한 집에서 주인에게 고추장을 청하자 그 주인이 알아듣지 못해 애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평북 사람들은 ‘댕가지장’은 알아도 서울말인 ‘고추장’은 몰랐다. 근대적 민족의 성립 조건인 ‘모든 구성원들이 구사할 수 있는 표준언어’는 의무 교육과 텔레비전 시대 이전까지 대다수에게 보급되지 못했다.

그런데 전근대에 ‘민족’이 없었다 해도 ‘종족’(ethnic group)은 얼마든지 형성될 수 있었다. ‘민족’이란 높은 수준의 근대적 동질성을 전제로 하지만, ‘종족’은- 막스 베버가 강조한 대로- 공동 기원에 대한 집단적 인식이나 공동의 종교나 가치 등을 기반으로 한다. 또 무엇보다 외부적 타자에 의해 ‘단일 종족’으로 규정되는 것, 즉 집단적 타자화의 경험이 종족 형성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16세기 중반의 정복 이후 영국인에 의한 타자화가 아일랜드나 웨일스의 종족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말이다.

부여계·마한계·신라인이 섞여 산 백제

고대 한반도 주민들에게 과연 고을 단위를 넘는 ‘우리’는 무엇이었을까? 역외의 타자- 예컨대 중국인- 의 시선에서 본다면 부여부터 왜인까지 각종의 ‘동이’(東夷)들은 상당한 정도로 서로 흡사해 보였다. 한반도 삼국을 서술할 때 중국 사서(史書)들이 늘 그 공통점들을 부각했다. 예를 들어 <양서>가 백제의 언어와 복장을 “고구려와 같다”고 했는가 하면, <수서>와 <위서>는 “복장이 고구려식이다”라고 하고, <북사>는 “음식과 의복이 고구려와 같다”고 했다. “우리와 고구려는 똑같이 부여 계통”이라고 백제 개로왕(455~475 재위)이 위나라에 보낸 편지 문장을 부연 설명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고구려와 백제가 같은 종족이었던가? 백제 지배층의 건국 신화가 고구려 주몽 신화와 연결돼 있었다는 측면에서 적어도 지배층에 한해 그렇게 볼 수 있는 여지도 있지만, 중국 사서의 설명대로라면 백제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언어부터 사뭇 달랐다. <주서>에 따르면, 백제 왕을 지배층은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르고 백성은 ‘건길지’(鞬吉支 )라고 불렀다. ‘길지’란 신라의 길사(吉士), 길지지(吉之智) 등 제14관등의 명칭과 통하는 용어로서, 아마도 진한과 마한 등 한(韓) 계통의 언어에서 ‘높은 사람’을 지칭한 말이었을 것이다. ‘건’(큰)길지라면 마한 언어로 ‘임금’이었던 셈인데, 이는 마한 소국들을 정복 내지 포섭해 백제를 세운 부여 계통 귀족들의 언어와 달랐다는 것이다. 마치 영국을 정복한 노르만 귀족들의 언어가 13세기까지 토착 평민들의 색슨 언어와 통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또 백제에서는 부여계와 마한계만 사는 것도 아니었다. <북사>에 따르면, 고구려인과 신라인, 왜인까지도 함께 섞여 살았던 것이다. 과연 그들 모두에게 같은 종족 의식이 존재했을까? 660년에 당나라와 신라로부터 치명적 타격을 입은 뒤 꾸준히 부흥운동을 전개한 것이나, 663년에 부흥운동이 좌절됐을 때 망국의 땅에서 사는 것보다 일본으로의 망명을 택한 많은 백제인들의 태도로 봐서는 그들에게는 그 종족 성분과 무관하게 강력한 국가 의식이 존재했다. 그런데 국가의식이 강했던 만큼 정치적 차원의 우방인 일본이 ‘친척 나라’로, 적국인 고구려나 신라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중국인이 신라를 설명하는 방식도 백제를 서술하는 태도와 같았다. <북사> <수서> <구당서>는 하나같이 신라의 풍속, 형벌, 복식 등을 “고구려나 백제와 마찬가지”라고 기술했다. 즉, 외부 타자인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삼국의 공통 종족적 정체성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인들이 보기에는 고구려인, 백제인, 신라인 사이의 경계선도 공고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북사>나 <수서>가 신라에 “신라인 외에 고구려인과 백제인들도 많이 섞여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겠는가?

중국인의 입장에서야 ‘신라인’들은 다 하나의 통일된 범주로 보였지만 과연 신라인 입장에서 본 그들의 소속의식과 정체성은 어떤 것이었던가?

신라의 서울 사람과 시골 출신들

» 국보 242호 울진봉평신라비는 6세기 초반의 신라 6부 귀족과 통치 대상인 지방민들의 철저하게 불평등한 관계, 그리고 왕경인과 지방민으로 이원화돼 있던 당시 신라 사회의 구성을 잘 보여준다. KBS <역사스페셜> 캡처 화면

6세기 초·중반, 고대국가로서의 도약을 막 시작하는 신라에서 ‘신라인’이란 일차적으로 서라벌, 즉 경주의 6부에 속하는 ‘왕경인’(王京人)을 의미했다. 냉수비(冷水碑·503년)나 봉평비(鳳坪碑·524년) 등 당시 금석문들을 보면 왕경 귀족의 이름 앞에 꼭 그가 소속한 왕경의 부 이름이 붙여져 있는가 하면, 왕경 귀족의 공론(共論)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된 지방 실력자들은 왕경인과 달리 지방민에게만 수여됐던 외위(外位)를 지니고 있었다. 중앙귀족으로 받아들여져 결국 김유신(595~673)이라는 위인을 낳은 옛 가야(김해) 왕족과 같은 다소의 예외도 있었지만, 7세기 중반 이전까지 신라의 ‘서울 사람’들은 ‘시골 출신’들을 동질적인 존재로 쳐주지 않았다.

예를 들어 554년의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523~554 재위)의 목을 쳐 큰 전공을 세운 도도(都刀)라는 이는 고간(高干)이라는 외위를 지녔던 삼년산군(현 충북 보은군) 출신의 지방 유력자였지만,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 군인들이 그를 ‘천한 노복’이라고 불렀다. 왕경인과 철저히 구별됐던 지방민들은, 비록 정치적으로 신라에 복속됐다 해도 과연 문화나 사회의식 차원에서 왕경인과 어느 정도의 공통 정체성을 가졌을까? 물론 신라라는 국가 속에서 오랫동안 살수록 왕경인 집단의 지배적 문화에 조금씩 동화돼갔겠지만, 신라의 영토 안에서 산다고 해서 다 똑같은 신라인이 아니었다는 걸 기억해두어야 한다.

백제·고구려와의 전쟁이 가열됐던 7세기 중반, 지방민까지도 정상적인 경위(京位)를 받게 되는 등 차별이 어느 정도 완화돼 신라 내부의 통합이 강화됐다. 그러나 완화됐을 뿐, 왕경인과 지방민 사이의 근본적 구별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지방민 중에서 비교적 지위가 높은 촌주(村主)들은 왕경의 5두품에 해당되는 대우를 받았다지만 경주인들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외부인’이었다. 신라에 새롭게 편입된 백제인들은 형식적으로는 신라의 관등 체제에 포섭됐지만 실제적으로는 차별받는 이질적 존재로 남았다.

백제 최고 귀족인 좌평의 경우 신라에 귀순해서 받을 수 있는 등급은 고작 7등급인 일길찬(一吉粲)이었다. 달솔(達率), 즉 백제의 2등 관료들에게는 대나마(大奈麻), 즉 신라의 10등급 정도만 줄 뿐이었다. 신라에 정착한 고구려 유민들도 본국에서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일길찬 이상의 경위를 받지 못했다. 백제 유민은 672년부터, 고구려 유민과 말갈들은 683년부터 신라 군대에서 복무하게 됐지만, 신라 본토인과 섞이지 않고 별도로 편성된 부대에서만 복무했다.

과연 이와 같은 철저한 구별법이 적용되는 가운데에서 피정복민까지도 아우르는 공고한 공통의 종족적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었을까? 신라가 약해졌을 때 궁예와 견훤 등 반신라 반란군 지도자들이 옛 고구려민과 백제민들의 본래 정체성에 효율적으로 호소할 수 있었다는 것은 통일신라의 사회·문화적 통합력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물론 국가가 이뤄낼 수 없는 공통 정체성의 형성을, 그 대신에 유교적 교육과 불교가 상당 부분 이뤄냈다. 신라의 국립대학인 국학에는 관위가 없는 지방민까지도 입학이 가능했는가 하면, 신흥 선종은 물론 왕경인 집단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화엄종까지도 그 주요 사찰들은 전국적으로 분포돼 있었다. 전주 벽골군, 즉 옛 백제 땅 출신인 진표율사(眞表律師·8세기)의 경우에서 보듯이 피정복민 출신 승려까지도 왕경까지 그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다양한 언어를 쓰고, 서로 상반되는 집단 기억을 갖고, 정치·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다른 세습 집단으로 구별되는 통일신라의 주민들은 불교, 특히 정토의 가르침을 공통적으로 신앙했던 차원에서 적어도 종교적인 최소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이 하나의 종족으로 되는 길에 서 있었다고는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 과정은 신라의 망국 이전에 완료됐다고 볼 수 있겠는가?

민족도 종족도 역사적 과정의 산물

‘우리가 하나’라는 것은 지금의 우리에게야 당연지사지만 종족적으로 ‘하나’가 되는 과정은 길고 복잡했다. 두 차례의 ‘통일’, 즉 신라 통일과 고려의 통일이 있은 뒤에도 1202~04년 경주에서 신라를 부흥시키자는 반란이 일어났는가 하면, 1236~37년에는 담양 지역에서 백제를 부흥시키겠다는 반란도 일어났다. 그만큼 ‘한반도 공통의 정체성’보다는 각 지역의 옛 국가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방적 정체성이 더 일차적이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한반도 주민들의 종족적 정체성을 통일시킨 것은 고려 말∼조선 초 성리학 보급으로 인한 지방 엘리트들의 교육·가치관·생활양식의 동질화와 임진왜란과 같은 ‘우리 모두’에게 가해진 처참한 공동의 역사적 시련이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조선인’이라는 종족적 정체성이 이미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사뭇 공고했기에 조선이 근대의 자장(磁場)으로 흡인되자마자 근대적 민족의 형성도 매우 빨리 이루어졌다. 그래서일까, 전근대의 역사에서도 ‘단일민족 주체’가 있었던 것처럼 인식돼 전근대사까지도 ‘민족화’돼버리고 말았다.

민족도 종족도 애당초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남한과 북한을 하나의 민족이라고 보지만, 서로의 유기적 관계가 결여되는 분단 상황이 2~3세대에 걸쳐서 더 연장되면 ‘하나의 민족’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언어·문화적으로도 서로 철저히 이질화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참고 문헌

1. ‘고려 중기 삼국 부흥운동의 역사적 의미’ 민현구, <한국사 시민강좌>, 제5집, 1989, 82∼109쪽
2. <신라사상사 연구> 이기백, 일조각, 1986, 265∼277쪽
3. <신라 집권 관료제 연구> 하일식, 혜안, 2006, 157∼273쪽
4. <古代東アジアの民族と国家> 李成市, 도쿄: 이와나미, 1998, 133∼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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