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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로운 세계] 밟아라, 밟히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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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작성일자

2008-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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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


- 출처: finching.net


[자유로운 세계] 밟아라, 밟히지 않으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시장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복음을 치켜들고 모든 이들을 '자유 시장'으로 내몬다. 우리는 이른바 '자유로운 시장'에서 자유롭게 일하고 자유롭게 착취하고 자유롭게 굶고 자유롭게 밟히고 자유롭게 자살한다. 강한 자는 살아남고 못난 놈들은 도태된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놈을 가차없이 밟아라, 네가 밟히기 전에, 라고 시장은 말한다.

켄 로치(Ken Loach) 감독의 [자유로운 세계](It's a Free World, 2007)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전쟁통같은 세상의 이야기다. 이 거대한 시스템의 밑바닥에서 늘 당하고 좌절하고 반항하고 꺾이는 블루 칼라 노동자들의 세계를 그려왔던 감독은,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자본주의의 가혹한 먹이사슬을 한단계씩 올라가는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금발로 염색한 머리에 차림새며 말투는 다소 저렴(?)해보이지만 나름 섹시하고 매력적인 앤지(Kierston Wareing 분)는 동구권 노동자들을 영국으로 데려오는 인력송출회사의 계약직 직원이다. 첫 장면에서 폴란드인들과 통역을 사이에 두고 인터뷰를 하는 그녀는 사람들을 대하는 데 능숙하고 꽤 야무지게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 앤지 스스로도 자신의 능력과 성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앤지같은 사람을 직원으로 쓰고 싶을 것만 같다. 물론 상사들은 유능한 일처리 이상(!)을 요구한다. 일과 후의 술자리에서 상사가 엉덩이를 더듬자 앤지는 그의 얼굴에 술을 끼얹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멋지다, 앤지, 딱 거기까지만. 폴란드에서 귀국한 직후, 회사에서 바로 잘린다. 본부에서 그렇게 통보받았다는 것이 유일한 설명이다.

알고보니 앤지의 처지도 나름 꽤 꿀꿀하다. 1만 2천 파운드의 빚이 있고, 신용카드 대금도 밀렸으며, 남편은 어디로 갔는지, 친정 부모가 돌보는 11살짜리 아들 제이미는 원래 나쁜 놈은 아니지만 ('원래' 나쁜 놈이란 참 드물다) 사춘기를 앞두고 학교에서 내내 말썽이다. 서른 세살이 되도록 모아놓은 것도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룸메이트 로즈(Juliet Ellits 분)와 함께 사는 작은 아파트 뿐이다. 앞날이 막막해진 앤지는, 풀칠하기도 버거운 콜센터나 허드렛일 대신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분야인 인력송출업체를 스스로 차리기로 맘먹는다. 신용카드로 오토바이를 하나 사고, 사업자 허가도 얻지 않은 채 무작정 웹사이트를 만들고 명함을 찍고 단골 바 뒷편 마당을 집합소로 이용하기로 한다. 머뭇거리는 로즈도 어거지로 끌어넣는다.

의욕적으로 일을 시작한 앤지의 사업은 처음에는 꽤 순조롭게 보인다. 비록 무허가인 것이 마음에 좀 걸리지만, 몇 달만 이렇게 하면 사무실을 얻고 사업자 허가를 내서 버젓한 회사를 차릴만큼은 될 것같은 느낌이다. 부업도 벌인다. 세가 아주 싼 집을 얻어서 방 하나에 2층 침대를 두 개씩 놓고, 2교대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숙소로 활용하여 별다른 노동 없이도 현금을 꼬박꼬박 걷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일이 쉽기만 하겠는가, 제대로된 여권이 없으면서도 일자리를 구하겠다고 와서 죽치는 사람들, 사업이 부도나서 임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 업체, 노동자들이 일을 느적거린다며 사람을 바꿔달라고 잔소리를 해대는 공장 관리인...그러나 앤지는 크고작은 문제들을 나름대로 시원시원하게 해결해낸다. 빚도 갚고, 아들과 함께 살 형편은 못되지만 사달라는 것들을 팍팍 사줄 형편이 되어간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동구권에서 온 싼 노동력이 유연하다 못해 말캉해진 노동시장에 비정규직으로 투입되어 기아 임금을 받으면서도 노조는 커녕 불평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혹사 당하는 틈새에서 생겨난 이윤 덕분이다. 앤지는 사업의 확장에 고무되어 점점 과감해진다. 그녀는 불법 체류자들의 직업 알선이 불법인만큼 더 알짜배기 사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불법체류자들을 더욱더 낮은 임금에 조건이 열악한 직장으로 몰아넣고 자신도 그 사이에서 좀 더 많은 커미션을 챙긴다. 가령 위조된 여권의 대가로 여권 사용료를 주당 20파운드씩 제하는 식이다. 처음에는 이란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도망쳐 나온 마흐무드의 가족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시작한 불법체류자 알선이, 나중에는 앤지의 가장 주요한 수입원이 된다.

영화는 비정규직 '싱글 맘'의 비애를 고스란히 느껴야 했던 앤지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거칠기 짝이 없는 '무허가 자영업'의 세계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 세계에서 어떻게 조그만 성공을 거두는 듯 보이게 되었으며, 그 조그만 성공 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는지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또한 그 과정에서 앤지가 가련한 해고자에서 야비한 고용주로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보여준다.

관객은 유능하고 야무지고 나무랄 데 없는 앤지가 황당하게 해고되는 모습에서 일단 앤지에게 공감하면서 영화를 보게 되지만, 앤지의 변화가 점점 가속화되면서는 더이상 그녀에게 전적으로 공감하기는 어렵다고 느낀다. 그렇다. 이 자유로운 자본의 세계는 사람을 그렇게 쉽사리 자발적으로 망가지게 만든다. 멀쩡하던 사람이 자진해서 괴물이 되는 데는 그리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영화는 야비해진 앤지를 비난하고 그녀의 변화를 안타까워하는 친구 로즈나 앤지 아버지의 말을 도덕적 대안으로 지지하지는 손쉬운 대립구도를 만들지도 않는다. 그들의 말은 구구절절 옳지만, 그것이 앤지에게는 현실적으로 매우 무기력하게 들린다. 무허가 사업은 섣불리 하지 말자고? 그럼 평생 '88만원 세대'로 집세도 제대로 못 내면서 살래? 불법 체류자와는 거래하지 말자고? 그들도 생존하려면 일이 필요한데, 서로 좋은 일 아닌가? 체불 임금을 조금이라도 줬어야 했다고? 사장이 떼어먹은 돈을 우리가 왜? 아이랑 시간을 좀 보내라고? 지금 자리잡지 않으면 길거리로 나앉을 판인데? 너무 돈돈 하지 말라고? 아버진 뭘 했든 30년 평생 직장이었지만 나는 서른세살이 되도록 서른 번도 더 직장을 옮겼는데?

감독은 이 사회를 지탱하는 착취의 기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는가, 한때 그 시스템의 피해자로 착취를 당하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더 약한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스스로의 생존을 보장받으려 하는가, 대략 선의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사회적으로는 가혹한 착취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가, 이 거대한 착취의 고리가 어떻게 부분적으로 뒤집히고 교체되고 변화하면서도 계속 유지되는가, 그 과정에서 어떻게 약자들끼리의 경쟁과 폭력이 과열되는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이야기는 신자유주의의 득세 이후 늘 있어왔고, 또한 켄 로치가 이 사안을 어떻게 다룰지도 다 예측이 되지만, 사실적인 스토리와 세밀하고 담담한 묘사는 '역시 켄 로치!'라는 감탄사를 내놓게 만든다.

게다가, 켄 로치의 영화가 대개 그러하듯,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기륭전자, KTX, 이랜드 등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서, 아직 해고되지 않았을 뿐이지 언제라도 삶의 벼랑으로 내몰릴 수 있는 8백만명의 비정규직과, 가깝게는 학교에서 매일 마주치는 건물 청소 아줌마, 주차 관리 아저씨, 매점 아가씨, 시간강사, 그리고 맨날 나한테 쪼이는 조교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비지니스를 갖고 당당하게 성공해보이겠다고 야무진 결심을 보이는, 그러나 그 역시 인간성의 황폐화를 대가로 치르면서 불안정한 소규모 착취자의 자리에나 겨우겨우 올라설 수 있을 따름인 수많은 '청년실업가'들까지 말이다.

[자유로운 세계]에 나오는 배경은 먼 나라지만, 이야기는 너무나 가깝고 친숙한 얘기이기도 했다. 역시나, 세계는 하나, '위 아 더 월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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