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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펌> 근대적 관계의 '개 되기'

작성자

성은애

작성일자

2002-03-03

이메일

easung@yahoo.com

조회

3507


서술이론 연구회(http://www.freechal.com/narratology/) 게시판에서 퍼왔습니다. 옛날 홈페이지 자게에 종종 재미난 글 올려주시던, 그리고 <파파라치...> 코너의 첫번째 주인공이신 장 모 선생님께서 쓰신 건데, 앞부분에 졸고가 인용되었길래, 속편으로 같이 보시라고 퍼올려 봅니다. 인터넷에 띄우신 글이니, copyleft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걍 제 맘대로 퍼 온 것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리라 믿슈미다....^^;; 좀 더 읽기 편하시라고, 단락을 몇 차례 나누었음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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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스 페로스>와 <저수지의 개들>: 근대적 관계의 '개 되기'

- 장시기(aka 산나무)


성은애 선생님이 추천을 한 영화, <아모레스 페로스>를 보고 성선생님이 이야기한 "영화의 마지막, 마치 고야가 말년에 자기 집 벽에 잔뜩 그려놓은 '검은 그림'의 색조와 닮은 황량한 벌판으로, 엘 치보와 검정 개 코피가 터벌터벌 걸어간다. 사랑은 그런 건가? 사랑이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사람 사는 건 그런가보다. 정말 그런 거 같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을 하면서 스스로 자문하여 본다. "사람 사는 것이 엘 치보와 검정 개 코피가 황량한 벌판으로 떠나는 것 같다면, 사랑은 모두가 사치와 허영, 그리고 얼토당토하지 않은 낭만적 환상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아무리 고민해도, 그 답은 "그렇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엘 치보와 검정 개 코피가 떠나는 것처럼 황량한 벌판(혹은 강원도나 지리산의 깊은 산중)으로 우리도 떠나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아모레스 페로스>의 마지막 장면이 <파리, 텍사스>의 마지막 장면과 아주 유사하다. 그러나 <파리, 텍사스>의 마지막 장면은 사랑과 섹스에 환멸을 느낀 주인공이 혼자서 황량한 벌판으로 떠난다.

그렇다. <아모레스 페로스>에 등장하는 개가 없다. 또 다시 "사랑은 개"라는 섬뜩한 용어에 현혹되어 생각하다보니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고전적인 영화 <저수지의 개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돼지도 "사랑은 개"라는 <아모레스 페로스>와 연관지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돼지나 개나 추한 것은 마찬가지이니까.

<저수지의 개들>에는 여성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감옥에서 나오자 마자 은행을 털기 위해 모인 남자들은 마치 <친구>에 나오는 유오성이나 장동건처럼 쌍소리를 하면서도 남성적인 힘과 깡패의 의리가 철철넘치는 멋있는 친구들로 나온다. 서로서로 가명으로 부르는 6명의 갱단은 서로의 개인적인 삶의 흔적들에 대해선 절대 묻지도 답하지도 않는다는 불문율이 존재한다.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는 대원칙을 지니고 있는 이들은 마침내 은행을 터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6명의 갱단 속에 경찰 끄나풀이 있을 줄이야.

비밀 아지트의 창고에 모여 있는 갱들은 마치 저수지 앞에 모여 있는 목마른 개들과 흡사하다. 단지 갱들만이 개들과 흡사한 것이 아니라 경찰 끄나풀로 갱단에 들어간 비밀 경찰이나 은행을 털면서 일어난 갱들과 경찰의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온 경찰마저도 똑같은 개들이다. 저수지 앞에 모여 있는 목마른 개들이 서로 순서대로 저수지의 물을 마시면 아무런 문제가 업을 터인데, 이 개들은 누가 먼저 물을 마시려고 하면 자기가 먼저 물을 마시려고 서로서로 물어뜯는다. 결과는 모두의 처절한 상처투성이의 죽음이다.

<대부>나 <친구>. 혹은 그 이전의 서부영화나 홍콩 갱영화들이 모두 남성들로 구성된 "저수지의 개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개와 늑대는 동종의 동물이다. 그러나 개와 늑대의 차이는 개와 사람의 차이보다도 더 크다. 개가 늑대의 무리에서 벗어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개는 "사람 되기"를 수행하고 사람은 "개 되기"를 수행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가다 신문에 나는 "주인찾아 삼만리"라는 사람 되기를 수행하는 개의 이야기를 목도하게 된다.

개의 사람 되기와 사람의 개 되기를 생각하다 보니, <아모레스 페로스>에 등장하는 세 개의 사랑관계가 "사랑은 개"처럼 근대적 사랑의 개 되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모레스 페로스>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 이성애적 관계이지만, 이야기와 카메라의 초점은 남성 중심적으로 작동되고 여성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옥타비오와 그의 형수 수잔나의 관계는 옥타비오에게 초점이 가 있고, 다니엘과 슈퍼 모델 발레리아의 관계는 광고사 사장으로 있는 다니엘의 관점이고, 칼 맑스를 닮은 엘 치보와 그의 가족(아내와 딸)과의 관계는 과거에 혁명을 위해 가족을 버렸던 엘 치보의 시각이다. 그리고 이들 세 관계를 대표하는 것이 투견개, 애완용 복슬개, 그리고 주인 잃은 길거리 개다.

근대의 이성애적 사랑의 관계가 "투견개 되기", "애완용 복슬개 되기", 그리고 "주인 잃은 길거리 개 되기"의 관계를 맺는 방식은 근대적 사유나 삶의 방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서구적 근대가 구성하고 있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이성애적 관계는 남성/여성의 이분법적 대립으로 구성되어 있는 "대립적 투쟁의 관계", 부르쥬아나 남성 중심의 소유적 관계, 그리고 이데아 중심의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계몽주의적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 개의 관계에는 항상 자본이 매개되어 있다.

사회적 하층민을 구성하는 옥타비오와 수잔나의 관계는 대립적 투쟁의 관계이다. 옥타비오가 형수인 수잔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형과 대립적 투쟁의 관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아버지가 없는 가족 속에서 아버지가 되는 길은 형의 소유로 있는 수잔나를 쟁취하는 길이다. 그래서 옥타비오는 투견개가 된다.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 있는 모든 구성원들을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대립과 투쟁의 관계로 몰고 가는 사회는 옥타비오의 개도 투견개가 되게 한다. 코피라는 개의 입장에서 보면, 대립과 투쟁으로 구성된 싸움의 사회는 본원적이다. 가만히 있어도 다른 투견개가 목숨을 내걸고 싸움을 걸어오기 때문에 자신도 목숨을 내걸고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하기 이전에 이미 주인이 된 옥타비오가 목숨을 내건 사랑의 싸움에 들어선 이상 자신은 그가 이끌고 가는 싸움터로 나가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야만 한다. 투견개가 된 옥타비오에게 형수를 사랑하는 것을 막는 형이나 어머니, 그리고 사회 전체가 죽여 없애버려야할 적이듯이, 옥타비오가 된 코피는 이 세상의 모든 개라는 개는 목숨을 내걸고 죽여야만 하는 적이다.

부르쥬아이면서 사회적 상층민을 구성하는 다니엘과 발레리아의 관계는 부르쥬아나 남성 중심의 소유적 관계이다. 소유적 관계를 구성하는 것은 소유자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그 소유를 유지시킬 수 있는 절대적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을 지녀야만 하고, 소유되는 입장에서 끊임없이 그 소유를 유지시킬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지녀야만 한다. 그래서 다니엘은 자식을 낳고 나이가 들면서 아름다움을 상실한 아내를 버리고 싱싱한 새로움의 아름다움을 자니고 있는 발레리아라는 애완용 복슬개를 구입한다. 그러나 다니엘은 새로운 보금자리로 구입한 아파트의 마루를 온전히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한 자본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래도 상관없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발레리아의 아름다움이 광고사업을 통하여 자본을 벌어들일 것이고, 그 자본을 통하여 자신은 발레리아를 끊임없이 소유할 수 있으니까. 이러한 다니엘과 발레리아의 자본을 매개로 한 소유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팔아야만 하는 애완용 복슬개 되기 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 삶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랑을 듬뿍 받던 복슬개 리치는 얼결에 마루 밑으로 들어가서 빠져나오질 못하는 것처럼 발레리아는 우연의 사고로 한 쪽 다리를 잃게 된다. 한다. 들어온 구멍을 도로 찾아 나오지도 못하는 복슬개 리치처럼 다니엘과 발레리아는 새로운 삶의 관계를 창조할 수 없다. 자본과 아름다움의 상실은 곧 관계의 상실을 의미한다.

칼 맑스를 닮았으면서 지식인을 구성하는 엘 치보와 그의 가족이 맺는 관계는 엘 치보라는 지식인의 머리로 구성되어 있는 계몽주의적 관계이다. 게몽주의적 관계는 주로 플라톤의 이데아 중심의 이성을 토대로 하는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지 상호생성을 원칙으로 하는 관계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엘 치보는 가족이라는 이데아보다 더 큰 이데아인 사회와 국가의 혁명을 위하여 가족을 버리고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장기복역후 출소를 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간 가족에게 돌아가지도 못하고, 딸을 그저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허름한 창고에 살며 청부 살인이나 하며 살고 있다. 그가 맺고 있는 유일한 관계는 여기 저기서 줏어온 개들을 보살피는 관계이다. 따라서 엘 치보는 떠돌이 주인없는 개가 된다. 우연히 목격한 교통사고에서 피투성이가 된 검정 개를 한 마리 줏어온다. 그런데 정성들인 치료로 회복된 이 검정 개는 데리고 있던 다른 개들, 즉 자신의 가족들을 모두 물어 죽여버린다. 이 주인없는 개가 옥타비오의 개인 코피이다. 그리고 코피와 마찬가지로 엘 치보의 계몽주의적 관계를 구성하는 근원적 모델은 옥타비오와 수잔나의 관계처럼 대립적 투쟁의 관계이다. 그래서 주인없는 개가 그 전의 "피코"라는 이름을 상실한 것처럼 엘 치보는 혁명가라는 이전의 이름을 버리고 황량한 들판으로 길을 떠난다. 근대적 관계에서 주인없는 개는 수많은 주인없는 개들을 죽이는 더돌이 투견개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일가?

실제로 이들 세 쌍의 관계는 서로서로 얽혀 있다. 수잔나가 옥타비오의 돈을 가지고 도망친 후, 다시 돈을 벌러 간 투견장에서 옥타비오는 부르쥬아 사기꾼을 칼로 지르고 도망을 치게 되고, 옥타비오가 정신없이 몰고가는 차와 충돌하여 발레리아는 다리 불구가 되고, 그 교통사고에서 치명상을 입고 길거리에 버려진 피코를 데리고 가는 것은 엘 치보이다.

온통 피로 물들여져 있는 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근대적 삶이나 이성애적 관계가 생명의 관계가 아니고 죽음의 관계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따라서 <아모레스 페로스>가 이야기하는 삶이나 사랑은 인간의 근원적인 삶이나 사랑이 아니라 근대적 삶이나 사랑의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엘 치보처럼 현실적 관계를 떠나 황량한 사막이나 첩첩산중으로 들어가는 길 뿐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를 낳고 하는 끊임없는 연쇄고리처럼 대립적 투쟁의 관계는 소유의 관계를 낳고, 소유의 관계는 계몽주의적 관계를 낳고, 계몽주의적 관계는 대립적 투쟁의 관계를 낳는 변증법적 연쇄고리는 현실로부터 떠나지 않는 이상 끊을 수가 없다. 이태리의 영화, <하몽 하몽>이나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이러한 근대적 관계의 비생명성이나 죽음이 극단적으로 발현된 영화서술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유대교의 연쇄고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기다리듯이 근대적 죽음의 연쇄고리를 끊고 길을 떠난 엘 치보가 되돌아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엘 치보가 돌아오는 것은 대립적 투쟁의 관계나 소유적 관계, 혹은 계몽주의적 관계가 아닌 상호 생성의 관계를 보여주는 영화나 문학서술을 통하여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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