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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기야, 노올~자!" -- <Caro Di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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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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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허연 '새문서' 창을 뚫어지게 보면서, 모 배우가 입가에 설탕을 허옇게 묻혀가며 맛나게 광고하는 도넛을 우적우적 씹고 있다.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하루 일과의 정점이자 핵심인 점심을 도넛으로 때우냐구? 새 홈페이지에 처음으로 올리는 글이니 쬐께 성의를 보여야 할 듯하여, 아침부터 '하이퍼텍 나다'까지 가서 난니 모레띠 감독, 각본, 주연의 <나의 즐거운 일기>(Caro Diario, 1994)를 보고 왔단 말씀.

난니 모레띠의 형님인 프랑코 모레띠를 영미연 사무실에서 만난 것은 근 한달 전이었다. 동생의 최근작 <아들의 방>이 한국에서 개봉된다는 소식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던 '행님' 모레띠는 동생이 영화감독이라는 데 정말이냐, 동생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된다는 얘기 들었냐, 뭐 이런 질문에는 시큰둥하게 의례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아들의 방>과 더불어 <나의 즐거운 일기>도 같이 개봉된다는 소식을 전해주자, 갑자기 반색하며 정말이냐고 되묻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좋은 영화"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이는 거였다. 그으래...? 글케 좋은 영화란 말여? '행님'이 추천하는 '아그'의 영화라... 이 '모'씨 형제를 좀 더 자세히 파악하려면 이 영화를 봐야 할 것같았다.

10시 30분, 썰렁한 대학로의 아침. 표 파는 아가씨는 아직 출근도 하지 않았다. 아니, 출근은 했지만 어디선가 동료들과 수다를 떨고 있을 거였다. 할 수 없이 대학로 뒷골목을 하염없이 걸어다니며 시간을 죽였다. 음식점과 주점은 모두 문을 닫았고, 시간 때우려고 들어간 음반 가게에서는 피로한 표정의 여자가 대걸레로 바닥을 북북 문대다가 내 발등 위로 걸레 지나간 자국을 내고야 말았다.

11시. 매표구를 두들겨 표를 사서 극장에 들어섰다. 백오십석쯤 되는 좌석엔 나까지 달랑 다섯 명. 불이 꺼졌다. 이러고도 장사가 되나...?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지. 음악도 없이, 빨간 바탕에 유성펜으로 아무렇게나 끄적거려놓은 듯한 타이틀이 지나간다.

3부로 구성된 이 영화에서 아주 유쾌하고 인상적인 건 1부 <베스파>. 흰 헬멧을 쓴 난니는 조그만 스쿠터를 타고, 다들 휴가를 떠나 유령도시처럼 텅빈 8월의 로마를 질주한다. 두서없이 이곳 저곳 돌아다니는 그를 산뜻한 음악과 카메라가 줄창 따라다닌다. 난니가 이따금씩 만나는 사람들은 난니를 이상한 표정으로 본다. 뭔 저런 또라이가 다 있어? 에에... 괴짜구나. 흠... 푼수! 사람들에게 돌발적으로 말을 거는 난니의 행보는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우화적이다. 우스꽝스러운 90년대 로마판 '오디세이'....

난니는 격렬한 구호를 외치던 옛날을 회고하며 '아, 우리는 이제 속물이야...'라고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를 늘어놓는 느끼한 중년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며 이를 갈고, 정의를 외치다 '빛나는 40대'가 된(혹은 되고 싶은) 자신을 돌아본다. 도대체 내가 설 자리는 어디란 말인가? 난니는 춤을 잘 추고 싶고, 건물들을 구경하고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어쨌다고? 근데 쟤 좌파 맞아? 건 모르지롱. 촬영장소 헌팅하는 척하며 맘에 드는 집 구경을 하러 들어가서 무슨 영화를 만드냐고 물어보면 "50년대 로마에서 제빵업을 하던 트로츠키주의자에 관한 뮤지컬"이라고 엉뚱하게 둘러대는 웃기는 장면.

75년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파졸리니의 암살장소를 찾아가는 1부의 마지막 시퀀스는 아주 인상적이다. 하염없이 이어진 좁은 길, 난니의 조그만 스쿠터와 흰 헬멧, 그 뒤를 롱테이크로 하염없이 따라가는 카메라, 부드럽게 애조를 띠다가 조금씩 격렬해지는 피아노의 선율. 마침내 허름한 바닷가 마을을 거쳐, 멀리 새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가 바라보이는 황량한 벌판에 철골을 앙상하게 드러낸채 서있는 파졸리니의 허름한 기념비가 나타난다. 갑자기 숙연해지면서 1부 끝.

2부, 3부는 소재만 바뀌었지 좌충우돌 왔다갔다하는 건 비슷하다. 아무래도 정통적인 이야기 구조를 거부하고 싶은 욕구가 우선이었던 듯. 실제 촬영 과정도 그렇게 두서없었다는데...?! 그냥 여기저기 찍어서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 듯 보이려고 아예 발버둥을 쳤다. 조이스의 <율리시즈>만 11년간 연구했다는 게라르도라는 친구와 시실리의 섬들을 돌아다니는 2부 <섬들>은 좀더 <오디세이>, 혹은 <율리시즈>의 패턴에 가깝다. 집중해서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잡다한 세상사에 부대끼지 않고 글쓰기에, 학문에 골몰할 수 있는 '섬'을 찾아서 이 두 친구는 여행을 계속한다. 키르케, 칼립소, 나우시카를 거쳐 고향에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처럼 이들은 여기 가면 이게 걸리고, 저기 가면 저게 걸려서 계속 떠돈다. 문제는 그 어디에도 페넬로페가 기다리는 고향집은 없다는 것이다. 어디로 도망가도 발 끝에 걸리적거리는 우스꽝스럽고 남루한 현실들, 유토피아는 없다. 바닷가의 허름한 운동장에서 혼자 공을 뻥뻥 차는 장면의 외로운 느낌과, 난니의 형인 프랑코 모레띠가 문학의 '전복적인 힘'에 대한 회의를 표명하며 '나도 내 말이 틀렸다면 좋겠다'고 덧붙인 장면이 겹쳐졌다. 이놈의 현실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난감함, 쓸쓸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어 보이는 놀랍고도 감동적인 솔직함!

3부에서는 그 현실의 짜증스러움이 모레띠 개인의 가려움증과 불면증으로 나타난다. 보는 사람까지 막 온몸이 가려울 정도로 실감나는 가려움증을 연기하는 난니. 별 것도 아닌데 무진장 열받게 만드는 이 가려움증에 대해 의사들은 각양각색의 처방을 내놓는다. 마치 현실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처방을 내리는 정치인들처럼, 이들은 말도 안 되는 약들을 내놓고 이걸 쓰면 다 나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막상 설명서를 하나하나 따져 읽어보니 대부분의 약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들이다. 난니는 의사들이 환자들의 무지를 이유로 제멋대로 처방을 내리고 환자 위에 군림하며, 그 알량한 권위를 휘두르고, 피부과의 '왕자'니 뭐니 하는 허황된 명성을 쌓는 것에 기막혀한다. 그렇지만 어쩌랴. 의사의 면상이라도 한번 후려칠 것같은 예상을 뒤엎고 결국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어버린 김수영, 아니, 난니 모레띠?)

이탈리아 의료계에 대한 부드러운 풍자라고도 볼 수 있는 이 대목은 사실 의료계를 정계로 바꾸어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실제로 이 대목에 나오는 의사들은 당대의 정치인들, 특히 그해에 우파 연정의 총리가 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에 대한 풍자라고도 한다. 어, 그래...?! 그렇다면 그렇겠지 뭐. 역시 이런 얘기들은 국경을 넘기가 참 힘들다. 이탈리아 정치에 대해 뭘 알아야 말이쥐....-.-;;

무식함을 좀 덜어보려고 신문을 뒤져봤다(아이고, 기특해라. 무식하면 부지런하기라도 해야쥐...^^;;). 이 영화가 나온 1994년 8월의 로마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1993년 11월의 지방선거에서는 네오 파시스트 정당인 이탈리아 사회운동당(MSI)이 최강의 정당으로 떠오른다. 이듬해인 1994년 5월에 출범한 우파 연정 신임 내각의 총리는 전국 규모의 방송사와 출판, 신문, 잡지사들을 소유한 언론재벌에다가 AC 밀란 축구팀의 구단주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베를루스코니는 그해 말 실각하지만, 올해 5월에 거행된 총선에서 우파연합 '자유의 집 동맹'이 승리하면서 다시 7년만에 정권을 탈환한다. 이런, 이런.....게다가 연정의 동맹군인 '민족동맹'의 지안프란코 피니 당수는 무솔리니의 후예를 자처하는 극우파시스트 아니던가. 유럽의 언론은 부패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베를루스코니와 우파 연합의 승리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 이탈리아가 곧 잘못된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미국인'이라고 비웃음을 살 정도로 부시의 MD 정책을 적극 지지한다든가, 최근 아프간 침공 이후 이슬람에 대한 폄하 발언을 둘러싸고 구설수에 오른다든가, 아무튼 베를루스코니를 둘러싼 입방아는 그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탈리아에서 극우파가 득세한다고 한들, 당장 이탈리아가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는 것도 아니겠고, 파시스트 시대와 같은 가혹한 탄압이 시작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당장은 그저 피부 가려움증처럼 짜증스러울 뿐. 문제는 80% 이상의 투표율을 보이며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부정선거 시비도 없이 베를루스코니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올해의 상황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바로 이 영화가 나왔던 1994년의 재판이다. 단, 94년의 내각은 1년도 못 가고 단명했지만, 이번에는 베를루스코니가 얼마나 오래갈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즐거운 일기>는 2001년에도 '정치적으로 유효'하다.

지금 우리가 뭐 남 얘기 할 것도 없지만, 이탈리아 애들도 딱하긴 참 딱하다. 움베르토 에코가 "반 베를루스코니 전선"의 형성을 강력하게 외친다던가...? 그럼 뭐하냐, 어차피 지식인들이 이불 속에서 활개치는 거지. "돈 냄새, 성공의 냄새는 섹시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국민 정서, 베르루스코니처럼 '자수성가'한 인간은 나라도 잘 경영할 거라는 순진한 생각. <어려운 시절>의 바운더비가 정치하면 이렇게 될 거다.

이런 상황에서 자칭타칭 '좌파'이며, '정의를 외치는 빛나는 40대'이자, 항상 '소수'의 편에 서겠다고 외치는 '투덜이 스머프' 난니 모레띠가 도대체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가려움증을 해결해야 하고, 시나리오도 써야하고, 춤도 잘 추고 싶고, 제니퍼 빌즈를 만나는 게 소원이고, 건물에 대한 영화도 찍고 싶고, 쓰레기같은 영화평에도 분개해야 하고.....일기장에나 털어놓을 수 있는 사사로운 것들을 통해서 당대의 상황을 '우화적'으로, 혹은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것밖에. 로마의 거리와, 시실리의 섬들과, 북적거리는 병원을 배회하며 그가 찾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아니, 그것은 더 이상 '낡은' 방식의 서사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도 아닌 어떤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난니의 새로운 '다짐'을 보여주어 웃음을 머금게 한다. 의사들이란 믿을 수 없으며, 아침 공복에 마시는 물 한잔이 건강엔 최고라는 소박한 대사와 함께 난니는 카메라 앞에서 정말 맛있게 냉수를 들이킨다. 정수기 선전에 나오는 것처럼 비스듬히 서서 물 맛을 음미하는 관습적인 앵글이 아니라, 관객을 응시하며 정면으로 눈을 똑바로 뜨고, 그리고 아주 시원하게 물을 마신다. 두서없이 속내를 털어놓은 일기장을 덮으며 난니는 관객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렇지만....이제 다시 시작이야!"

그래, 짜증나도 포기하지 말아야지. 할 수 있는 한 재밌게 한 번 해보는 거지. 이렇게 안 되면 저렇게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다시 첨부터 생각해보는 거지. 그리고 어쨌든 아무 것도 포기하지 말고, 이리저리 뒤죽박죽 헤집어 보는 거지. 그러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안 나와도...할 수 없지, 머. 난니의 일기는 여기서 끝난다. 물론, 그 '즐거운 일기'를 이어가는 것은 난니 모레띠의 몫이겠지만, 또한 그건 지금 여기,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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