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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역겨움과 매혹 사이 - <나쁜 남자>

작성자

성은애

작성일자

2002-01-29

이메일

easung@yahoo.com

조회

3421


'나쁜 남자'라고 잔뜩 위악을 떨고 나서, 사실은 그 남자가 나쁜 남자는 아니며, 나아가서 '나쁜'과 '좋은'의 구분이라는 것 자체가 웃기는 거라는 식의 얘기로 흘러갈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되는 일. 게다가 영화 내용 대충 다 보여줘서 산통 깨기로 악명높은 TV의 영화 소개 프로그램도 보고, 웬일로 나보다 한발 먼저 이 영화를 봐버린 우리집 아자씨의 요란한 입선전까지 들었던 터. 그렇다고 김기덕의 스타일에 열광하지는 않는 편이니, <나쁜 남자>를 보러갔을 때는 사실 좀 김이 빠진 상태였다.

그래도 영화보고 나서 드는 느낌은 김기덕 감독의 이전 영화들보다 훨씬 대중적으로 깔끔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심심찮게 들어오는 관객들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물론 관객 동원에는 연출의 힘보다는 최근 TV에서 인기몰이한 배우 조재현의 힘이 더 크게 작용했겠지만. (저...조재현 보러온 아줌마덜을 보라...-.-;;)

그러나 이 영화가 '김기덕표' 치고는 부드럽고 대중적이라 해도, 불이 켜진 후 주위 사람들의 표정은 그저 '에휴... 빨리 잊어버려야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어디 가겠는가, 김기덕인데.(에...혹시 만에 하나..하는 기우에서 한말씸 드리것심다. 이 글 읽으시는 분덜 중에 김기덕을 <두시의 데이트> 김기덕 DJ와 혼동하는 분은 안 계시죠?-.-;;) 게다가 이번에는 자기 영화에 나온 셋팅들을 '재활용'하기까지 했으니, 담 영화가 뭔가 확 달라지지 않으면 이제 밑천 다 우려먹었다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을 듯하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본 사람들의 소감은 대개 '고약하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나 역시 김기덕의 영화를 꼭 극장까지 가서 봐야하나, 그런 생각을 한참동안 했더랬다. 어거지로 '읽어달라'고 마구 들이대는 그 거칠고 생경한 비유와 불쾌한 화면들,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보아도 그럴싸하지 않는 인물들과 상황, 특히 페미니스트들이 분개해 마지않는바 폭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길들여지고, 나아가서 남성들의 '구원'이 되는 여성들...

이번 영화를 두고도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사람들과 김기덕을 옹호하는 사람들 사이에 다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이 영화에 시선 끌기 위한 마케팅의 일종이든 어떻든, 논쟁의 와중에 휘말린 영화에 대해 무슨 말을 할라치면 괜히 어느 한쪽 편을 '선택'해야 할 것같은 압박감도 느껴지는 것이 영 개운치도 않다.

자, 워낙 줄거리가 황당하니까 영화보시기 전에 미리 알아도 상관없다. 홍등가에서 깡패 노릇하는 한기(조재현 분)가 여대생 선화(서원 분)에게 매혹되어 접근했다가 모욕을 당하자 그녀를 창녀로 만들어 놓고 가까이 두고 엿보고, 선화는 그녀대로 그 어이없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결국은 한기의 '사랑'까지 받아들인다는 거다. 디 엔드.

논쟁의 핵심은 이 영화가 전적으로 한기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는데, 그 시선이 여성들로서는 (사실은 대부분의 남성들로서도) 수용하기도 납득하기도 힘든 시선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지로 한기의 감정과 시선을 멋있는, 혹은 최소한 절실하고 눈물겨운 어떤 것으로 만드는 순간, 우쨌든 '좋고 나쁨'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마련인 대부분의 관객들은 불쾌감을 느낀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쾌한 것인가?

일단 한기의 시선을 따라가보자. 그게 감독이 애초에 원하는 거니까. 한기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계급의 장벽과 사회의 편견을 뛰어넘는 애절하고 '낭만적'인 러브 스토리다. 그가 처음 선화를 바라보는 표정은 그냥 예쁜 여대생을 한번 건드려보고 싶은 치한의 표정이 아니다. 그야말로 순수한 의미에서의 '매혹'이다. 한기에게 성이란 그의 생활터전에서 그러하듯 돈을 주고 사고 파는 것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없이 '사랑'이란 말과 손쉽게 등식을 이루는 것, 둘 중의 하나지 정작 '사랑'하고는 아무 상관 없다. 한기는 선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냥 바라보고 지켜주기만 한다.

혹자는 여기서 거울 뒤에 자리잡은 한기의 시선을 관음증의 시선으로 규정하지만, 막상 조재현의 표정을 보라. 어찌할 도리 없이 매혹된 자신의 내면을 눈빛 하나로 보여주는,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는 그의 연기를 보면서 관음증 운운하기는 좀 어려워진다.

영화가 상영되는 두어시간 내내 한기와 선화의 신체적 접촉은 깜짝 놀랄만큼 적고, 사창가를 배경으로 한 영화답지 않게 노골적인 성행위의 묘사는 지극히 절제되어 있다. 이런 식의 셋팅과 여배우의 몸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수많은 영화들, 가령 임권택 감독의 <노는 계집 창>같은 영화를 <나쁜 남자>와 비교하면 <창>은 교훈 따위로 포장한 포르노그라피에 가깝고, <나쁜 남자>는 포르노그라피의 셋팅에서 만들어낸 청교도적인 영화라고 할 만하다.

아무튼 끝내 한기는 선화와 같이있게 된다. 계급간의 장벽, 사회적 편견, 소시민적 도덕률이나 선악의 구분을 모두 넘어서는, 지독하고도 눈물겹고 순수한 사랑의 승리. 이것이 한기의 시선을 따라가는 이 영화의 메시지다. 한기와 자신의 감정을 동일시할 수 있는 관객이라면 이 메시지만으로도 족할 터. 실제로도 조재현이라는 뛰어난 배우 덕에, 황당하기 짝이 없는 한기라는 인물에 공감할 여지도 많다.

<봄날은 간다>가 상우(유지태 분)의 영화이듯이, <나쁜 남자>는 한기의 영화이다. 이 영화에 대한 모든 논쟁은 이것을 전제로 해야 할 것이다. (말 나온 김에 비교해보자.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가 비현실적으로 예쁜 풍광과 비현실적으로 멋진 배우들 동원해서 가장 '현실적인' 연애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나쁜 남자>는 가차없이 현실적인 셋팅과 배우들을 동원하여 가장 '비현실적인' 혹은 '낭만적인' 사랑을 옹호하고 있다. 자, 둘 중 누가 더 냉정한 리얼리스트인가?)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는 모든 연애질 영화는 필연적으로 여성을 남성의 시선에 맞추어 보여준다. 경우에 따라서 여성들은 하나의 이미지가 되고, 판에 박힌 정형이 되기도 하고, 실제 그 인물이 어떻건 간에 남성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나 인상만으로 묘사된다. 그러니 그 여성의 동기나 감정들을 섬세하게 이해하려 해도 뭔가 부족하기 마련이다.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우리나라 영화 대부분이 남성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 <나쁜 남자>의 남성적 시선 자체가 뭐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다. 단지 위선떨지 않고, 조금 더 노골적이고 솔직할 뿐이다. <초록물고기><박하사탕><8월의 크리스마스><봄날은 간다><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번지 점프를 하다> 심지어 <엽기적인 그녀>에 이르까지 정도 차이만 있을 뿐이지, 여성 인물들이 남성의 시선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혹은 불가해하게 보여지기는 마찬가지. 언제 울나라 영화에서 여성 인물을 정말 제대로 그려 보여준 적이 그렇게 많던가? 갸우뚱...-.-a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남자>가 특히 여성 관객에 입장에서 불편한 것은, 한기의 시선을 통해 보여진 선화의 변화가 사실 한기의 감정만큼 그다지 절실하게 다가오지 못 함은 물론, 그녀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을 위한 단서들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가장 설득력이 없는 부분은 늘 그러하듯 폭력과 성의 거래에 무참하게 무너지고 길들여지면서도 그것 때문에 그녀가 인간으로서 망가지지는 않는다는, 그리고 오히려 한기에게 '구원'이 된다는 발상이다.

돈을 벌려고 몰래 카메라 설치한 똘마니들 패는 장면에서, 살인용의자도 TV에 나오면 얼굴 가려주는데, 쟤네들이 살인자만도 못한 거냐고 일갈하는 쥔 아줌마의 호통은 사실 한기가 하고싶었던 대사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사창가에서 웃음과 몸을 파는 여성들에게도 인권이 있고, 지켜져야 할 존엄성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정갈한 공원 벤취에 앉아서 남자 친구를 기다리는 여대생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존엄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과, 그런 폭력과 매매춘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런 극한적인 상황 때/문/에/ 여대생차림이었을 때보다도 새롭게 사랑을 깨닫고, 겸허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며, 더욱 존엄한 인간이 된다는 암시를 풍기는 발상은 엄연히 다른 차원이다.

문제는 이것이 비단 <나쁜 남자>에서만 특이하게 드러나는 일회성의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서, 혹은 다른 감독의 다른 영화들, 다른 매체들을 통해서 이러한 관념이 끈질기게 반복되고, 심지어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라는 옷을 입고 선을 보이게 될 때, 그것은 여성의 인권을 위해서는 물론, 영화의 '현실감'이라는 차원에서도 그렇게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덜거리면서 나는 그의 영화를 본다. 그리고 남들한테도 한번은 보시라고 권해본다. 일단은 <나쁜 남자>에서도 그렇지만 찝찝하면서도 특이한 느낌을 주는 강렬한 화면들이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참으로 보기 드문 것이라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게다가 그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무엇이든 간에 어설프게 사회의식 내세우는 웬만한 감독들보다 이 사회 전체에 대한 적대감, 중산층적 도덕률에 대한 반감, 계급적 적개심, 아웃사이더의 감성을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그려보여주는 감독이라는 점 때문에, 전혀 열광하지는 않더라도, 때때로 역겨워지더라도, 가끔은 그의 영화를 보게 된다. 감독의 시선이 아무리 문제가 있다손 치더라도, 어쨌거나 그의 공격 대상은 바로 그의 영화를 보고 불편해하는 우리들 마음 속의 편협한 고정관념 자체일 듯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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