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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아름다운 시절 - <마리 이야기>

작성자

성은애

작성일자

2002-01-21

이메일

easung@yahoo.com

조회

3047


이성강 감독의 <마리 이야기>를 보러 간 것은 순전히 애국심(?) 때문이었다. (<애국자 게임> 본 이후로 '애국' 소리 들으면 좀 웃기는 짜장이다...뭐 이런 생각도 하게되었는데 말이다. 참, 소비자로서 '상품'을 이렇게 택하는 게 아닌데...쩝.)


도대체 '메이드 인 코리아'의 애니메이션을 극장에 가서 돈 내고 본 것이 얼마만이던가. <둘리의 얼음별 대모험>을 보고 열광했던 건 자식넘이고, <로보트 태권 V>를 보고 열광한 것은 내가 아니라 동생이었다.

나는 극장판이든, TV용이든, 우리 나라 애니메이션의 그 유치찬란한 시나리오가 짜증스러웠고, 조야한 그림과 싸구려 불량식품같은 색채가, 불안정한 사운드와 판에 박힌 성우들의 더빙이 짜증났었다. 극장에 갈라치면, 방학 맞아 극장 나들이 한 조무래기들 떠드는 소리에 완전히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내가 만화에 열광했을 법한 시절에 나왔던 <호피와 차돌바위>며,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따위의 애니메이션은 극장에 갔었다는 사실 말고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걸보니 별로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듯하다. 이런 형편이고 보니, 예고편의 예쁜 화면에 홀려 극장에 가자고 졸라대는 아이를 데리고 <마리 이야기>를 보러 갔던 것은 순전히 '에라, 국산품 애용!'이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래도 심혈을 기울여서 열~~쒸미 만들었다잖은가. 게다가 이성강 감독은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제법 이름이 있는 사람인 걸로 안다. 인터넷 이곳 저곳에서 단편적으로 보았던 이성강 감독의 그림들은 도대체 내용은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상당히 실력과 개성이 있어 보였다. 그랬다. 그림이 좀 된다는 게 어딘가.

예고편에서 보았던 갈매기가 도심의 빌딩 사이를 날아 다니는 장면은 상당히 멋있었고, 배경에 흐르는 이병우의 음악도 듣기가 좋았다. (오래된 얘기지만, 한때 늦잠 자고 일어난 일요일에 이병우의 기타 연주를 들으면 그 '오후만 있던 일요일'이 정말 세상에 다시 없이 나른하고 달콤하게 느껴졌던 적도 있었다.)

<마리 이야기>의 줄거리는 참으로 유치찬란하다. 어른이 된 주인공 남우와 그의 친구 준호가 어린 시절 바닷가 마을을 추억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사춘기에 마악 들어서려는 남우에게 조그만 구슬을 통해서 환상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야그다. 마리라는 소녀가 등장하는 환상과, 별 사건도 없는 따분하고 쓸쓸한 현실을 오가며 남우는 고단한 일상을 그럭저럭 견뎌나가고, 폭풍이 몰아치던 밤 마을 어른들이 타고 나갔던 고깃배를 기적적으로 구하면서 어린 시절의 환상과 작별을 하게 된다는 거다. 아, 졸립다, 아...함.... 같은 얘기라도 조금 더 긴장감 있게 짜넣을 수 있었을 텐데. 가령 <이웃의 토토로>와 비교해봐도 시나리오는 영 엉성하다.

게다가 도대체 어른이 된 남우와 준호는 앞뒤로 나와서 뭘 어쩌자는 것인지도 분명치 않다. 그렇게 엉성한 연결고리 탓에 결국은 이 이야기 전체가 퇴행적인 향수 이상으로 나아갈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다. 각박한 도시 생활에서 잊고 살았던 유년의 환상을 다시 한 번? 이런이런...어른이 된 현재의 남우가 도대체 왜 나와서 우왕좌왕하는지 전혀 납득이 안 되는데, 그런 상황에서 유년시절의 회상이 어떻게 관객들에게 감흥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다. 빌딩 숲을 나는 갈매기와 삼겹살집 상 위의 반찬들이며, 눈내리는 저녁 버스에서 흔들리는 주인공의 모습을 얼마나 잘 그렸는지, 그거나 보라구?

게다가 확 깨게 만들다 못해 보는 내내 '저걸 어쩌나'하고 조바심을 하게 만드는 건, 형편없는 대사와 무성의한 더빙이다.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는 대사빨을 가지고 뭐가 그렇게 구구절절 설명이 많은지, 게다가 유명한 배우들 써서 녹음했다는 대화들은 그림과 완전히 따로 놀아 생경한 느낌을 준다. 오죽하면 대사가 한마디도 없는 신비한 소녀 마리가 나올 때마다 쟤가 혹시 입을 열어서 새된 목소리로 뭐라고 말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하고 걱정스러울 정도였다니까....제발 좀 입다물고 있어라...가만 있으면 중간은 간다...-.-;;

그러나 그런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한시간 반 남짓한 상영시간을 견디게 해준 건, '우리나라'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정성스럽고 예쁜 그림과 부드러운 색감, 그리고 몽환적인 음악이었다.

그 그림체가 얼마나 개성있고 독창적인 것인지, 여기서 평가할 재주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마리 이야기>의 그림은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나 픽사의 컴퓨터 그래픽, 지브리 스튜디오의 그림들과 '다른' 개성을 지녔으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이 얼마나 '한국적'인 것인가는 따져볼 여지가 있다손 쳐도, 친근한 얼굴 모습과 튀지않는 중간색의 절묘한 배합, 디테일에 들인 정성은 눈여겨 볼 만하다.

도입부의 자신만만한 롱테이크도 좋고, 남우와 준호가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를 질주하는 장면이며, 물 속에서 남우와 준호가 노는 장면, 잠자고 있던 남우의 방에서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면서 물속으로 변하는 장면도 정말 멋지다. 마리 로랑생의 그림에 나오는 것같은 소녀의 모습과 환상 속의 동식물들은 어디선가 본듯한(<토토로>,<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개로 변신한 마시마로?) 모습이지만, 환상 속에서 소년과 소녀가 서로의 뺨을 어루만지는 장면도 아주 예쁘다.

옆에 앉은 아이넘은 그 장면을 보고 한숨을 폭 쉬며, "아아, 고달파라. 사랑은 저런 것인가?"라고 중얼거린다. 그 예쁜 그림을 보고서 '고달픈 사랑'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 도대체 가당키나 한 것인가, 하여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만 어른들은 하품하고 중간에 나가기도 하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자질구레한 일상에 완전히 감정이입하고 재미나게 보는 아이들의 눈높이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려니...한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이야기가 무색하게도 어른들 보기엔 참으로 시시한 이야기지만, 남우 또래의 어린아이에게는 뭔가 눈높이에 맞는 요소가 있겠거니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건 또한 <마리 이야기>가 그나마 은근히 이뤄낸 것이 있다는 얘기도 된다.

국산 애니메이션을 언제 극장 가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분덜, 큰 기대 걸지 말고 그냥 애덜 데불고 한 번 가보시라. '와....! 울 나라 애니메이션이 언제 이렇게...?'하고 감탄사를 내지르지는 않겠지만, '흠...이 정도면...'하고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66.6666666666....%의 만족? 그런 정도만 기대하시라.

또 한가지, <마리 이야기>를 보면서, 그림 솜씨와 디지털 기술과는 별개로 이런 종류의 문화적 상품에 적절한 '이야기'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하여 문학 교육이 얼마나 긴요한 것인지도 아울러 새삼스럽게 느끼시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멋대로 시리즈: 방학맞이 아동동반 영화관람기"는 <마리 이야기>로 일단 막을 내린다. 다음에는 '성인용'(^^;;)으로 모실 것을 기약하면서...할 일은 무지 많은데, 정신없이 지내버린 1월이 못내 아쉽다는 얘기로 오늘은 이만 사라지려 한다. 휘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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