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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수함이 주는 감동: 영화 [원스(Once)]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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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m

작성일자

2007-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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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8


밖에 나와 있어 좋은 점은 강의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구를 더 많이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전보다 영화를 많이 본다. 물론 주로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다. 여기 미국의 동네 극장에도 몇 번 가기는 했지만 좋은 영화를 별로 보지 못한다. 아니, 극장에서 본 것이든 어둠의 경로로 본 것이든 요즘 본 영화들 거의 대부분이 보고 나면 그냥 잊혀진다. 아마도, 요즘 내가 별로 신경을 쓰면서 영화를 보지 않아서, 그렇게 머리 쓰고 싶지 않은 영화를 골라봐서 더 그런가 싶기도 하다.

그렇게 되는대로 본 영화중 그나마 인상 깊게 본 영화는 엘리자베스 1세의 이야기를 다룬 [엘리자베스]와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의 모델이었던 체사레 보르자 일가의 이야기를 다룬 [보르지아]라는 영화였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시각에서 이 두 영화에 대해 몇자 적고 싶다. [엘리자베스]의 경우는 그 속편 격으로 [골든 에이지]가 개봉된다는 데 나름대로 기대된다.

좋은 영화가 어디 없나 싶어 웹의 이곳저곳을 다녀보니 많이 추천하는 영화가 아일랜드 영화인 [원스(Once)]이다. 아일랜드에서 만든 저예산 독립영화라는 데 격찬들이 대단했다. 그래서 영화를 챙겨 보았다. 영화에 대해서는 아래 퍼온 영화평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거의 다 해주고 있다. 나는 그냥 거기에 몇 마디 보태고 싶다.

인터넷의 여러 영화소개란에는, 이 영화를 멜로영화, 혹은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이 영화에는 통상적인 의미의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는 없다. 이름이 나오지 않는 영화의 주인공들인 ‘남자’와 ‘여자’는 짧은 만남을 통해 어떤 '위안'을 얻지만 그걸 과연 사랑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에 여자에게 보내는 남자의 피아노 선물은 많은 걸 함축한다. 런던으로 떠나기 전 공항에서 짓는 남자의 미소와 남자가 보내준 피아노를 앞에 두고 창밖을 바라보는 여자의 모습은 둘 사이의 어떤 감정선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격정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 어떨지도 잘 판단하기 힘들다. 그만큼 밋밋하다. 그렇다고 아무런 감정의 교감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순애보’도 아니다. 남녀간에도 그냥 그 사람을 위해주고 싶다는 말은 이제 ‘순애보’로 비웃음의 대상이다. 다만, 이 영화를 보면서 문득, 격정적 사랑이나 순애보라는 통념에 들어 있는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해묵은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남녀가 만난다고 꼭‘사랑’을 해야 하나? 다른 관계를 맺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줄거리로 보는 영화가 아니다. 좋은 문학작품이 그렇듯이 좋은 영화도 줄거리가 아니라 한 장면 장면이 만들어내는 디테일들이 더 큰 인상을 남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올라온 대개의 평들은 영화의 음악에 대해 말한다. 맞는 말이다. 1시간 반이 채 안되는 영화의 거의 절반을 남녀 주인공이 같이, 혹은 따로 부르는 노래가 채운다. 노래들은 어떤 말보다 극중 인물들의 심리를 잘 전달한다.(참고로, 극중 남녀 역을 맡은 배우들은 전문배우가 아니라 대중음악가수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영화가 뮤직비디오를 좀더 길게 늘려 놓은 영화, 통상적인 음악영화나 뮤지컬이라는 뜻은 아니다. 영화는 노래와 함께, 그 노래가 엮어주는 더블린 사람들의 삶의 단면들을 포착한다. 물론 그런 포착이 대단한 리얼리즘이나 자연주의의 성취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분명 소품이다. 하지만, 영화에 그려진 사람들인 두 주인공과 남자의 아버지, 스튜디오에서 음악녹음을 도와주는 사람들, 체코에서 이민 온 '여자'의 어머니와 어린 딸들의 모습 등은 인상적이다. 그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착하다.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서 비현실적이라고 느끼는 내 마음을 돌아보니 그게 더 답답했다. 우리는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이 맺는 관계를 현실에서 보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에 영화에서나마 선한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즐겁게 어울려 음악을 녹음하는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이 영화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던 데는 그런 이유도 있으리라.

‘남자’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진공청소기 가게에서 일을 하며 거리에서 노래를 한다. 그의 음악에 공감해 짧은 만남을 갖게 되는 ‘여자’는 어린 딸과 어머니와 함께 아일랜드로 돈을 벌러 왔다. 왜 아일랜드로 왔는지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그들의 삶에 대한 깊은 조명을 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것이 영화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다. 요는, 이들이, 그리고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행복해 한다는 것이다.

남자는 자신이 녹음한 음악을 들고 더블린을 떠나 런던으로 간다. 그가 과연 뒤에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고 돈을 많이 벌게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남자나 여자나 노래를 부르고 녹음을 하고 즐거워한다. 그리고 그런 순간 자체를 즐기고 행복해 한다. 그런 음악으로 돈을 벌지 어떨지는 그들이 느끼는 행복감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아래 퍼온 영화평에서 지적한 것처럼, 지금 세상은 음악이든 예술이든 모든 돈벌이와 직결되는 시대이다. 대중음악판도 그렇다. 그저 음악이 좋아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이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로 치부된다. 그렇게 ‘철없는’ 이들은 굶어죽기 십상이다. 소위 ‘스타’는 기획으로 생산되고, 홍보로 만들어진다. 몇개월 소비되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새로운 '스타상품'이 기획되고 팔린다. 묻고 싶은 질문. 그런데 '스타상품'들은 음악을 하면서 정말 행복할까?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리게 된 것은 한국에 있을 때 종종 보았던 ‘인간시대’라는 기획물이었다. 이 영화는 분명 허구이다. 그러나 동시에 허구로만 느껴지지 않는 묘한 지점이 있다. 영화의 촬영자체가 통상적인 영화제작의 사후작업을 거치지 않은 느낌을 준다. 그렇게 된 데는 무엇보다 불과 15만불로 영화를 제작했던 저예산 영화제작의 사정이 중요하게 작용했으리라.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거칠게, 아마추어적으로 찍은 각 장면과 음악들이, 이 영화보다 수백 배, 수천 배의 돈을 들인 영화들이 전하지 못하는 삶의 어떤 단면을 드러낸다. 그 단면에 지나친 의미부여를 하는 것은 오버이다. 영화는 과잉해석을 권하지도 않는다. 그냥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이런 삶의 모습도 있구나 하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화려함이나 눈에 당장 들어오고, ‘뜨는’ 것만이 각광받는 시대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수수함과 밋밋함의 가치는 인정받기 힘들다. 요새는 이런 얘기를 하면 세상물정 모르는 이로 몰린다. 음악이든 예술이든 다 돈벌이와 연결되어야 가치 있다. 돈벌이는 중요하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음악을 하는 것과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음악을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은 필요하리라. 분명 소품임이 분명한 이런 아마추어 영화가 거둔 그 나름의 ‘상업적’ 성공은 그래서 기분 좋다. 물론 이제 ‘수수함’조차 또 다른 이국적 상품으로 팔릴 수 있으리라는 염려를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그래도 수가 얼마가 되던지 이런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즐겁다. 이 영화와 사운드트랙이 거둔 뜻밖의 상업적 성공에 대해 주류영화계에서도 놀랍게 여긴다고 한다. 아주 가끔씩은 그렇게 놀랄 일이 있어야 그래도 세상 살 맛이 나리라. 나는 아일랜드 영화를 본 것은 거의 없다. 아일랜드 영화와 음악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것도 나는 즐거웠다.

그밖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래 퍼온 영화평이 거의 다 해준다. 영화평론'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의 글이 아니라 이런 영화판 '외부인'(?)의 글들이 대체로 더 읽을 만하고 공감이 간다. 이 영화도 그렇다. 아마도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신뢰할 만한 '영화평론'이 없다는 걸 새삼 실감한다. 영미연 홈피에는 음악 동영상 링크가 되지 않아 음악을 링크는 못한다. 하지만 유튜브 등을 검색을 해보면 이 영화에서 사용된 노래들을 들을 수 있다.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은 챙겨보시길 권한다.


============ 영화평

<원스>,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

<원스>라는 영화가 잔잔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전통적인 비수기로 불리는 늦가을, 그것도 10개 안팎의 스크린에서 개봉한 이 아일랜드 인디 영화는 어느덧 관객 15만을 돌파했다. 영화의 이야기는 단출하다. 가난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 남자는 진공청소기를 수리하고, 거리에서 노래를 부른다. 체코에서 온 여자는 가정부로 일하고, 틈틈이 거리에서 꽃을 판다. 여기에 ‘음악’이 파고든다. 그런데 이 음악이 예술이다. 멜로디는 귀에 착 감기고, 가사는 가슴을 후빈다. 극장에서 나오는 순간 (좀처럼 찾기 힘든) 레코드 가게에 들어가거나, 컴퓨터를 켜고 장바구니에 O.S.T를 담을 정도다. 스산한 가을, 자신을 위해, 혹은 마음이 통하는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 선물로 충분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 영화엔 없는 게 너무 많다. 우선 스타가 없다. 주연을 맡은 ‘글렌 핸사드’와 ‘마르케타 이글로바’라는 배우는 본래 뮤지션이다. 당연히 연기는 생초보. 여기에 비하면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의 캐스팅(휴 그랜트, 드류 베리모어)은 가히 블록버스터급이다. 돈도 없다. 영화에 들인 제작비는 고작 15만 달러(약 1억3천만 원).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세트도 짓지 않고 거리에서 모든 장면을 소화했다. 명색이 뮤지컬 영화인데 <물랭루즈> 같은 화려한 무대도, 춤과 노래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기타 하나, 피아노 한 대, 그리고 날것 그대로의 음악이 전부다. 영상도 소박하다. 단 17일 동안 디지털 캠코더로 찍은 영화 속 장면들은 ‘나도 능히 찍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 줄 정도다. 게다가 멜로 영화를 표방한 이 영화에는 그 흔한 키스신조차 나오지 않는다. 한 마디로 궁핍함이 곳곳에 묻어나온다.

그런데 이 영화엔 다른 영화에 없는 게 있다. 우선 따뜻함이 묻어나온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들의 비루한 삶을 결코 혐오하지 않는다. 스스로 자족해한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한다. 음악이라는 자기세계를 사랑한다. ‘몰입(flow)’의 기쁨. 또 한 가지. 이들은 서로를 존중한다. 서로를 비교하지 않는다. 같은 조건일지라도 단 한 가지라도 자신만의 비교우위를 내세우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일진대 이들은 진정으로 상대방의 영혼을 보듬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는 이렇게 보는 이의 마음을 촉촉이 적신다. 배려의 미덕.

그래서일 것이다. 이들의 가난함 속에 우아함이 깃들어 있는 것은. 배우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음악만 있다면, 영화만 있다면, 그리고 보고픈 사람만 있다면 행복한 게 아니냐고. 영화 속 배우들은 그렇게 ‘소통’하고 있었다. 피아노 앞에서 남자는 노래를 부르고 여자는 건반을 두드린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그러나 악보가 한 장 한 장 넘어가면서 두 사람은 ‘화음’을 만들어낸다. 조화(調和). 가난한 뮤지션에게 기꺼이 연주 기회를 허락하는 악기점 주인과 그럴싸한 앨범을 만들기 위해 의기투합한 거리의 뮤지션들, 그리고 아마추어 뮤지션들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기꺼이 밤을 지새우는 프로듀서까지.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통(通)’하고 있었다.

대안과 독립, 그리고 자유… 우리가 잊고 사는 것

<원스>는 단 한 장면도 무리하지 않는다. 영화는 좀처럼 오버하지 않는다. 얼핏 아둔해 보이는 영화 속 인물들은 결코 젠 체하지 않는다. 무심한 듯 일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영화의 힘은 바로 여기에서 잉태하고 있었다. 비어 있음의 참맛. 결핍의 미학. 그런 점에서 소설가 김애란은 이 영화를 정확히 짚고 있었다. “표정에 관한 영화”(씨네21).

이 영화가 거둔 시장에서의 성과도 눈여겨 볼만하다. 15만 달러로 만든 이 영화는 100만 달러에 배급사에 팔렸고, 지금까지 1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고 한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예술의 힘을 믿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잃지 않는다면 ‘돈’까지 벌 수 있다는 진리를 이 영화는 일깨워준다. 아니, 돈까지 벌었기에 더더욱 이 영화가 소중한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쩐(錢)’의 전쟁의 시대이다. 예술까지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 미술시장이 들썩이고 있다. 대안공간과 공립미술관에서 전시를 기획하던 이들이 기꺼이 경매회사로 자리를 옮긴다. 잘 나가는 작가들은 작품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한 달에 두 점을 그리며 자족해하던 내가 아는 작가는 일주일에 두 점을 그리느라 헉헉댄다. 넥타이만 매지 않았을 뿐, 사실상 직장인과 다름없는 삶이다. 출판은 또 어떤가. 인쇄소에 몇 번이라도 더 보내기 위해 유행을 따르는 고만고만한 책들이 서점에 깔려 있다. 책을 만드는 나 역시 변명할 수 없는 현실이다. ‘혁명’이라는 말을 입에 담아도 용서받을 수 있는 젊은 세대들은 ‘심장은 왼쪽에 있다’는 것을 잊고 살아간다. 정작 이들 중 상당수가 ‘88만 원’을 받고 있지만, 이들의 이데올로기는 오른쪽으로 경도되고 있다. 도덕적 상처가 곪아터지는 데도 대통령을 하겠다는 한 정치인이 저만치 달려가는 모습이 바로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모두다 눈앞의 성공에만 연연한다. 멀리 내다볼 줄 모른다. 진정한 성공은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체 한다.


부유함과 가난, 물질적 재산과 정신적 재산

이 저널이 인쇄소를 거쳐 서점에 깔릴 즈음 나는 서울의 한 구석에서 대학 동창들과 ‘송년회’를 갖고 있을 것이다. 만날 때마다 나를 향해 “밥은 먹고 사느냐”고 묻는 그들, 미술에 관한 글을 쓰고, 디자인을 논하고,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친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과의 만남은 반가우면서도 어딘지 옹색하다. 이날, 나는 <원스>라는 영화와 그 속에 들어 있던 음악을 얘기하고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들 중 단 한 명도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아, 그래도 작년부터는 미술에 관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투자에 성공해 공기 좋은 곳에 한옥을 구입한 친구가 미술관과 와인 바를 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올해는 그 친구가 구입한 이런저런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지도 모르겠다. 다행인 걸까?

물론 이런 글을 쓰는 나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나 역시 은행구좌의 잔고액수에 민감해 한다. ‘감각과 취향’을 입에 달고 사는지라 마음 속에 찍어둔 자동차의 스타일도 만만치 않다. 다만 그들에 비해 아직도 대안(alternative)과 독립(independent)을 마음 한 구석에 담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좋은 전시가 있으면 찾아가고, 찜해둔 영화는 보아야 직성이 풀리고, LP나 CD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아니면 감동하지 않고, 남들이 한 권쯤 갖고 있는 베스트셀러가 아닌 나만의 ‘마이셀러(Myseller)'를 갖는 데서 행복을 느낄 뿐이다. 정신적 재산.

이번 송년회에는 내가 만든 몇 권의 책과 몇 장의 <원스> CD를 챙겨 가고자 한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여야겠다. 이 영화를 만든 ‘존 카니’라는 감독 말이지, 우리랑 동갑(72년생)이래. 가난한 친구지. 그런데 이 친구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어. 세상을 향해 눈치를 보지 않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 그래서 자유롭지. 참, 이 친구 여전히 희망을 믿어. 예술이 삶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무모함도 마음에 들어. 왜 우리도 그랬었잖아.

| 윤동희 _ 미술전문기자, 북노마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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