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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사실'에 충실하기

작성자

bloom

작성일자

2007-10-29

이메일

bloom.pe.kr

조회

2542


깊은 수양이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나같은 평범한 사람은 자신이 별로 좋지 않은 상황에 앞으로 놓일 것이라고 예상하면 걱정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될 몇가지 단서라도 주어지면 그런 걱정은 더 커진다. 그래서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을 예단하고 추측하고 더욱 걱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걱정이 마음의 평정을 깬다. 혼돈스러운 감정이 이성을 압도한다. 그렇게 되면 상황을 오판하기 쉽다. 자칫 일을 그르치게 된다. 내가 이런저런 비평이론들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배우게 된 것 중 하나는 사실(fact)에 근거한 판단과 행동의 중요성이다.

그러나 섣불리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말 그대로 ‘지금, 이곳’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실에 근거해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많은 경우, 주어진 지금의 사실이 아니라, 이미 지나가버렸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일때문에 돌이켜 후회한다. 하지만 과거의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는 죽어버린 사물이다. 그것을 돌이켜 후회한다고 지금, 이곳의 내게 주어진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반면에 아직 오직 않은 미래의 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에 오직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는 미래의 일로 걱정하고 예단하고 마음의 평정을 잃는 때도 많다. 그때마다 오직 사실에 근거한 판단과 행동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그리고 어디선가 루카치가 지적했던 것, 가능성과 현실성을 구분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본다.

사람은 좋지 않은 일일 수록, 그것이 앞으로 실제로 현실화될 가능성을 더 많이 우려한다. 그리고 마음의 걱정으로 실제 그 일이 생겼을 때 상황을 오판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걱정하는 그 많은 걱정스러운 일들이 실제로 현실로 바뀔 가능성, 루카치 식으로 표현하면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전화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물론 그런 가능성에 대비해서 미리 마음의 방비책을 세우는 것은 때로 필요하다. 실제로 걱정하던 일이 현실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대비 또한 지나치면 문제이다. 아직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이지 지금, 이곳에서 내 눈 앞에서 벌어진 현실화된 팩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팩트로 바뀌 다음에 대처해도 늦지 않다. 섣부른 예단과 대처는 좋지 않은 결과를 낼 때가 더 많다. 아래 글에서 내가 인용했던 로런스의 조언인 "용기와 태평함"이 이때 필요하다. 끝까지 상황을 지켜보는 "태평함"과 그것이 설사 나쁜 현실일지라도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맞서는 "용기."

따라서 쉽지 않지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가능한 정확하고 냉철한 판단을 하려면, 오직 지금, 이곳에서 내게 주어진 팩트에만 근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최대한 과거와 미래의 시간이 아니라 지금의 시간, 지금 내 눈앞에 주어진 팩트에만 충실하려는 노력. 그렇게 현재의 사건을 과거와 미래로부터 끊어서, '지금, 이곳'의 순간과 팩트에만 즉해서 사유하려는 노력이 긴요하다. 그래야 일단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고,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도 결과가 꼭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 때로는 그렇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자신의 정황이 짜증스러울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은데 왜 나는 이런 힘든 문제 때문에 힘들어해야 하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쓸데없는 짓이다. 내가 자주 인용하는 브레히트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나쁜 현실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자조나 한탄은 주어진 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못된다. 한탄한다고 주어진 나쁜 현실, 나쁜 팩트가 휙 하고 어디론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나쁜 팩트에 대처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선택뿐이다. 어떻게 이 문제에 대처할 것인가? 나쁜 현실에서 출발하는 것, 그 현실이 좋든 나쁘든 그 현실과 주어진 나쁜 팩트만이 내가 받을 딛고 서 있는 유일한 판단과 행동의 근거라는 것을 냉철히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런 판단과 행동의 결과가 설사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 운명의 사랑(amor fati).

그게 내가 맑스를 비롯한 유물론적 사유에서 특히 배운 것들이다. 물론 나는 이제 '맑스주의자'가 아니다. 아니, 어떤 '주의자'도 아니다. 나는 지금은 어떤 ‘주의’나 이념에 대해서나 거리를 두고 있고, 가능한 거리를 두려는 편이다. 나는 더 이상 맑스주의이든 무엇이든, 현실을 하나의 이론으로 온전히 해명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하나의 이론에서 배워할 것은 충분히 배워야 한다. 동시에 이론은 이론일 뿐인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이론으로서의 맑스주의의 미덕과 한계와는 별개로, 나는 세상을 사는 어떤 태도를 맑스에게서 많이 배웠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문제이든, 좀더 공적인 문제이든, 오직 지금, 이곳의 팩트에 냉철히 근거해 판단하고 행동하지 못할 때가 여전히 많다. 그때마다 내가 공부하는 이론과 삶의 거리를 새삼 절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그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뿐이겠다.

유물론적으로 사유하고 사는 것, 쉽지 않다. 하지만 가능한 그렇게 살아야, 살려고 노력해야 내 삶이 그래도 조금 덜 피곤하고, 좀더 행복해지리라 생각한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으로 이 고단한 삶을 헤쳐 나가겠지만, 무신론자인 나에게는 오직 사실에 근거한 판단과 행동의 필요성을 깨우쳐 주는 유물론적 사유가 내 삶이 기대는 나침반들 중 하나이다. 그 나침반을 여전히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울 때가 많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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