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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용기와 태평함

작성자

bloom

작성일자

2007-10-26

이메일

bloom.pe.kr

조회

2627


영미문학연구회 홈피에는 이번 주말에 열리는 가을학술대회의 발제문이 올라와 있다. 모두 흥미로운 발제문이다. 다운받아서 읽고 있다. 직접 가서 발제와 토론을 들으면 많이 배우겠다 싶은데 그런 사정이 안되서 유감스럽다. 그중에서도 정남영교수의 발제문을 재미있게 읽었다. 지난 20여년동안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가르치면서 느껴온 대학선생으로서의 소회와 비판적 대안이 잘 드러나 있다. 같은 일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는 내게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선생일을 제대로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겠다. 다음의 대목이 특히 눈길을 끈다.

> "교육에 있어서 “첫 번째 할 일은 생계를 벌지 못하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를 치료하는 것이다”라는 로렌스의 말이 적실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다. [D. H. Lawrence, "Education of the People," Phoenix: The Posthumous Papers of D. H. Lawrence (London: William Heinenmann Ltd., 1936), 592면.] 이는 학생들의 노동력을 좀더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적실하지만, 무엇보다도 자본의 논리가 삶에 가하는 정신적 족쇄를 극복하는 주체성들을 양성하는 일을 위해서도 적실하다. 그런데 이 공포의 치료란 선생이 지식을 주입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로렌스 말대로, “인간의 용기와 태평함”밖에는 치료제가 없다. 로렌스는 가난한 시대에는 가난에 대한 공포가 오히려 없었는데, 생산력이 발전한 자신의 당대에 오히려 더 심해졌고, 그 중에서도 부자가 내적으로 가난을 더 두려워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돈이 많을수록, 공포는 더 강렬해진다.” [같은 책, 593면]. 이는 우리의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더욱 더 높은 정도로 해당된다."

두가지가 문제이다. 첫째, 어떤 사회가 사람이 살만한 좋은 사회인가라는 문제. 요새 대선주자들이 떠드는 대로, 그리고 적지 않은 대중들이 희망하듯이, 국민소득이 3만불, 4만불, 경제성장률이 높기만 하면 좋은 사회인가? 그런 숫자놀음은 일종의 사기이다. 80프로의 다수가 생존의 "공포"를 느끼고 언제 밥벌이에서 잘릴지 몰라 전정긍긍하는 사회. 나머지 20프로의 구성원이 사회적 부를 독점하는 사회가 과연 사람이 살만한 사회인가? 극소수의 사회구성원이 전국토의 절반을 소유해서, 불로소득을 얻는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국민소득 3만불, 4만불, 경제성장율 몇프로의 숫자놀음은 이런 근본적 질문을 회피한다.

내가 이해하는 제대로 된 사회는 사회구성원들이 "생계를 벌지 못하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에 빠지지 않게 하는 사회적 방책을 깊이있게 논의하고 구체적인 안을 마련하는 사회이다. 그게 민주공화국의 토대인 사회적 연대(fraternity)의 참뜻이다. 자신이 어울려 사는 사람들을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먹고 살아 남기 위해서 짓밞아야 하는 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사회는 끔직한 사회이다. 지금 한국사회의 모습이 그렇다. 옆자리의 친구를 서로 아껴주고 배려하는 '벗'이 아니라 '적'으로 여기도록 가르치는 한국 학교는 끔직해져가는 한국사회의 축도이다.

경쟁과 효율성과 시장자본의 논리만이 득세하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문제? 경제적으로 부유하든 그렇지 않든, 사회구성원들 모두가 "생계를 벌지 못하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 공포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신자유주의의 효과이다. 부자라고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내적으로 가난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그리하여 “돈이 많을수록, 공포는 더 강렬해"진다. 새삼 발견한 로런스의 탁견이다.

생존의 "공포"에 사로잡힌 시대에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대안은 최소한 사회구성원들이 "생존"의 공포는 느끼지 않게 하는 방책은 무엇일까를 묻는 데서 나온다. 내가 이해하는 진보주의는 이 문제에 깊이 개입하는 입장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이 문제를 사유하지 못하는 진보의 이념은, 강하게 표현하면, 일종의 사기이다. 진보는 자기 가슴에 붙이고 다니는 우아한 이름표가 아니다. 지금 한국진보주의의 문제는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압도적 이데올로기에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창한 큰 말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의 구체적 분석, 그리고 구체적 대안이 필요하다. 그것을 못하는 한 진보의 미래는 없다. '진보'라는 이름의 유효성은 자신을 '진보'라고 자임하는 데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유와 대안이 현실적으로 가져오는 '진보적 효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생존의 공포를 넘어설 설득력있는 대안을 마련하고, 그것으로 신자유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에야 진보는 가능하다.

두번째 문제. 생존의 공포를 치유하기 위해 로런스가 제안한 “인간의 용기와 태평함”이라는 치유책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생존의 공포는 사회적 공감과 연대의 문제이기에, 단지 개별주체의 "용기와 태평함"만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책임하다. 하지만, 동시에 로런스의 지적은 새겨들을 지적이기도 하다. 경쟁과 효율성을 목표로 하는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시대에는 설령 부자라고 한들 언제든 가난의 공포로 떨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쉽게 말해 그 누구든 마음 편한 할 날이 없다. 지금은 밥벌이의 '철밥통'을 말하면 욕먹는 시대가 되었다. 생존의 공포없이 살자고 말하면 경쟁을 두려워하는 사회적 패배자로 몰리는 사회가 되었다. 심지어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이게 바로 신자유주의의 효과이다.

사회구성원들이 생존의 공포를 느끼지 않게 만들 사회적 방책을 마려하는 것은 사회적 연대에 기반한 민주공화국의 빼놓을 수 없는 전제조건이다. 강하게 표현해, 사회구성원들이 생존의 공포를 느끼는 사회는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따라서 되풀이 말하지만, 우리는 좀더 대담하고 뻔뻔하게 밥그릇의 철밥통을 자본과 국가에게 요구해야 한다. 민주공화국 구성원의 당연한 권리이다. 사회와 국가는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그게 내가 이해하는 개인주의의 참뜻이고, 그런 개인들이 연대하고 어울려 사는 사회가 민주공화국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마음의 교육, 욕망의 교육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 욕망의 교육에서 "용기와 태평함"은 빼놓을 수 없다. 결국 관건은 어떤 사회적 여건에도 굴하지 않는 태도, '나쁜 현실을 인정하고 거기서 출발하는 태도'(브레히트), 그런 "용기와 태평함"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의 훈련이 없는 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마음의 자유는 없다. 인문학은 바로 이런 마음의 훈련, 욕망의 훈련, "용기와 태평함"의 훈련에 자신의 소임이 있다. 영어/영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의 역할을 되돌아보며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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