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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인문학은 더 뻔뻔해져야 한다.

작성자

bloom

작성일자

2007-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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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1


이제 인문학 위기 담론도 식상하다. 인기없는 인문학과들이 제도권 대학에서 없어진다는 얘기도 식상하다. 인문학으로 밥벌이를 하는 이들조차 이제 그저 그런가 한다. 소위 '시장'과 '경쟁'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이런 상황은 좋은 일이다. 경쟁력이 없는 학문은 도태되는 게 당연하니까 말이다. 요즘은 '경쟁력'(sic!)이 없는-- 그 빌어먹을 경쟁력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묻지 말자는 게 경쟁력 이데올로기의 효과이기도 하다--교수들을 부려먹다가 자신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몇 년후 자르는 것도 자랑이라고 언론에 떠들고, 그걸 '대학개혁'이라고 홍보하는 시대이다.

그럴 때마다 들먹여지는 게 미국의 대학 시스템이다. 언제나 미국 것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한국의 일부 대학이나 언론에서는 미국식 테뉴어 시스템을 들여만 오면 '대학경쟁력'이 높아질 것처럼 설레발을 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어느 신문 홈피를 보니 최근에 한국을 대표한다는 연구중심 이공계 대학에서 상당수 교수들이 테뉴어 심사에 떨어진 것을 잘 된인양 호들갑스럽게 보도한다. 더 나아가 '특종'을 잡았다고 자화자찬이다. 다른 대학들도 이 대학의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고 훈계한다. 묻자. 그게 잘된 일인가? 그게 다른 대학들도 따라해야 할 좋은 본보기인가? 물론 연구 안하고 학생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교수는 문제이다. 그런 교수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고 그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몇년 한껏 부려 먹다가, 자신들이 임의로 정해놓은 기준에 미달한다고 교수를 잘라버리는 게 대학 경쟁력 확보의 지름길인가? 설령 백보양보해서 그런 대학경쟁력 확보가 중요하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 얻게되는 그 경쟁력은 도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래서 어느 사이트에서 읽은 이런 우려에 나도 공감한다.

> "교수들만 다구친다고 좋은 교육이 이루어진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교수는 교육의 여러 축 중 하나일 뿐인데, 다른 축은 삐뚤어져도 교수만 희생하면 교육이 제대로 구를까요. 안타깝네요."

전가의 보도처럼 들먹여지는 미국식 테뉴어 제도가 미국에서 그나마 굴러가는 이유는 미국학계에는 한국보다 훨씬 유연한 직장 이동의 융통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 대학에서 잘려도 다른 대학으로 옮겨갈 여지가 적지 않다. 그렇게 다시 자리를 얻을 기회를 준다. 자신을 다시 검증할 기회를 갖는다. 그런데 한국 대학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좁디 좁은 한국 학계에서 한 대학에서 잘린다는 것은 학계에서 거의 추방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사정을 무시한 채 그저 미국 것만 따라하면 만사형통이라고 외치는 일부언론과 대학의 단순무식함은 누가 교정할 것인가? 경쟁만능주의, 시장만능주의는 이렇게 대학을 망친다.

더불어 묻고 싶다. 그렇게 철저하게 시장/경쟁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개혁'(sic!)의 칼질을 하는 이들 자신은 왜 그런 심사를 소급해서 스스로 받지 않는가? 자신들이 목을 자른 교수들처럼, 자신들도 그렇게 하루 아침에 목이 잘려도--그 근거가 얼마나 합당한지의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자--그걸 개혁이라고 언론에 떠들 수 있을까? 그렇게 '무능한' 교수, '경쟁력'이 없는 교수로 언론에서 매도당해도 그걸 학교홍보라고 자랑할 수 있을까? 그게 국가와 민족과 한국대학을 위한 길이라고 떠들 수 있을까? 자신들은 운이 좋아 세상 좋은 시절에 교수해서 편하게 정년보장 받은 주제에 이제 그나마 대학에서 안정되게 자기 연구를 하려는 신참교수들, 중견교수들의 목을 옥죄고 밥벌이 자리를 빼앗는 짓이 그렇게 언론에 나와 자랑할 만한 하고 떳떳한 일인가? 염치도 좋다는 생각 뿐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렇다. 교수들을 족치고 목을 자르기만 하면, 지금 전가의 보도인양 떠드는 한국의 대학 경쟁력(sic!)이 과연 나아질까? 양식이 있는 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듯이,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총체적 부실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 교육계의 현실은 그대로 둔 채 그저 교수들만 족치고 입맛에 안맞아 자르면, 과연 세계적인 대학이 탄생할까? 설사 그런 대학이 나온다 한들 그건 도대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대학일까?

그러면 이런 반론이 나올 게다. 온 한국사회가 다 경쟁과 시장 논리때문에 힘들고, 먹고 살기 힘든데, 교수들만 철밥통이냐고? 너희들만 편하게 사냐고? 그거 불공평한 것 아니냐고고 말이다. 나는 요즘은 대학선생들도 밥먹고 살기 피곤하다, 교수 좋은 시절 다 지났다는 식으로 변명하고 싶지 않다. 설사 그게 사실일지라도 말이다. 오히려 반문하고 싶다. 왜 철밥통이면 안되냐고 말이다. 철밥통이 뭐가 문제냐고 말이다.

내 반론의 근거는 이렇다.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언제 목이 잘릴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게, 그렇게 직업 안정성이 무너진 게 과연 좋은 일인가? 거기서 예외가 있는 게 그렇게 배아프고 비난받을 일인가? 오히려 문제를 삼아야할 대목은 여기이다. 왜 대학선생들 너희들만 철밥통으로 사느냐고 시비를 걸 게 아니라 왜 다른 밥벌이를 하는 이들도 최소한 밥벌이에 있어서 '철밥통'을 보장받고 살면 안되냐고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태도가 시장과 경쟁과 자본의 논리에 저항하는 태도이다. 시장과 자본이 부여한 게임의 룰에 따라 더 많은 지분을 얻는 경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 게임의 룰 자체를 문제삼고 해체하는 태도. 자본은 사회 모든 구성원들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들기를 원한다. 왜? 그런 '경쟁'의 논리에서 더 많은 이윤창출의 기회가 열린다. 현재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드는 고용구조의 불안정성, 엄청난 비정규직의 확산은 자본의 이윤창출논리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대학도 이제 거기서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경쟁력'(sic!) 없는 교수들도 목이 잘리는 게 당연하다고, 너희들만 안정된 자리를 보장받아서는 안된다는 논리는, 그런 감정의 배경이 이해 안되는 바는 아니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은 대응이다. 그런 태도는 시장과 경쟁 이데올로기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 신자유주의 논리에 순진하게, 자기도 모르게, 투항하는 것이다. 자본의 논리에 저항하는 길? 간단하다. 우리에게도 교수들, 혹은 공무원들과 비슷한 수준의 직업안정성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과연 현재 한국사회의 교수직이 그렇게 안정된 밥벌이 자리인지는 일단 논외로 하자.)

이제 한국사회에서 고용안정성을 말하면 '철밥통'을 요구하는 뻔뻔한 넘으로 찍힌다. 그런데 왜 우리는 밥벌이의 '철밥통'을 요구하면 안되는가? 우리는 자본와 시장에 맞서 지금보다 훨씬 더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요구해야 한다. 우리에게도 밥벌이의 '철밥통'을 보장해 달라고 말이다.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갔다. 하지만 돌아 돌아 통하는 얘기이다. 다시 묻자. 아래 기사들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국문과를 비롯한 소위 비인기 인문학과들이 소멸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 질문을 제기하는 기사들을 퍼온다. 특히 기사의 이런 대목이 마음에 와닿는다.

> "시장이라는 당장의 지배적인 가치에 그렇게 흔들릴 정도라면 사실 그것들은 인문학이고 대학이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인문학은 대학에서 그 교육을 받은 학생의 평생 직업을 보장해주기 위한 훈련과정이 아니며, 넓은 의미의 인문교육은 기본적으로 한 사회를 시장유일ㆍ경제제일주의의 밀림화로부터 지켜야 하는 보루이기 때문이다."

경쟁만능주의, 시장만능주의가 득세하는 한국사회에서 인문학은 바로 그렇게 자신의 목을 옥죄는 시장/경쟁 이데올로기들의 근거를 묻고 해체해야 한다. 그게 인문학이 처해있는 역설적 상황이다. 인문학 갱생의 길?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데올로기들, 주류 언론과 대학들이 내면화하고 선전하는 시장/경쟁 이데올로기들에 정면으로 맞설 때, 그리고 그것들의 논리적 맹점을 비판하고 설득력있게 해체할 때, 그럼으로써 다른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갱생의 싹이 희미하게나마 보일 것이다.

국가와 사회에 연구비 더 달라고 징징대는 앵벌이짓은 그 다름에나 할 일이다. 그런 앵벌이짓은 자본이 벌여놓은 게임의 논리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게임 안에서 좀더 많은 몫을 달라는 투정에 불과하다. 인문학은 주어진 게임의 논리에 충실히 따르는 법을 가르치는 학문이 아니다. 주어진 게임의 논리가 정당한지, 그 게임을 계속 해야 하는지, 그것이 혹시 편향된 룰을 강요하는 잘못된 게임은 아닌지,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손해이고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판돈이 돌아가는 불평등한 게임은 아닌지를 인문학은 물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게임, 더 나은 게임의 룰은 없는지를 묻고, 가능한 대안을 사유해야 한다. 인문학의 문제가 돈(연구비)의 문제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내 생각에 그이는 인문학자가 아니다. 다수의 인문학자들조차, 시장/경쟁 이데올로기와 자본의 논리에 포획되어 있는 상황. 내가 진단하기에, 한국 인문학 위기의 뿌리는 여기에 있다. 그래서 더 착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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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07. 09. 28) [편집국에서] 국문과 소멸론

올해 대학에서 정년퇴임한 김광규 시인, 정혜영 교수 부부는 독문학 전공의 대학생일 때 만났다. 한 사람은 현역의 우뚝한 시인으로, 한 사람은 한ㆍ독작가회의를 만드는 등 독일어권에 한국 현대문학을 알리는 전도사로 활동해온 이들에게 몇 년 전부터 큰 걱정이 생겼다고 했다. 한국의 대학에서 독문과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문과, 중문과 아니면 학생들이 오지를 않으니 과가 버틸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문과의 존폐 여부도 여부지만, 그들의 진짜 걱정은 한국의 인문학이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독문과 만이 아니다. 이제는 한국의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가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보도가 얼마 전에 있었다. 신설 대학이 국문과를 만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몇몇 대학을 제외하고는 기존에 있던 국문과가 폐지되거나 디지털 스토리텔링 혹은 디지털 문예창작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콘텐츠에 관한 실무를 주된 교과과정으로 하는 '아류' 국문과로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기자야 독문과도, 국문과 출신도 아니지만 놀라운 소식이었다.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시장 논리다. 전통적 국문과를 졸업해서는 취업이 안 되니 학생들이 지원하지를 않고,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던 교수들도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에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등 영상ㆍ뉴미디어 쪽으로 연구와 교육의 방향을 바꾼다. 과의 위상이 하락하고 존폐 위기에 몰리고 있는데 학문의 순혈주의만 고집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국문과 소멸론'에 생각나는 것이 지난해 꼭 이맘때, 전국 80개 대학의 인문대학장들이 모여 '인문학 위기 선언'이란 것을 해서 이슈가 됐던 일이다. 그걸 두고 인문학 교수들의 밥그릇 싸움이다, 언제 인문학이 위기 아닌 적 있었느냐, 인문학 전공자들부터 제대로 공부하고 자기성찰하라는 등 말도 많았지만 인문학 위기론의 본질은 그런 차가운 비판으로 그냥 비켜갈 문제는 아니다.

근대 이후 일본에서 일본어 폐지론이란 것이 두 차례 제기됐다. 메이지유신 직후에는 영어의 국어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프랑스어의 국어화를 외쳤던 움직임이 그것이다. "지배적인 것에 대한 동경은 때때로 억압된 반발과 나란히 가고, 그것은 증오로 돌변하기도 한다. 일본의 근대만 해도 그렇다… 근대의 여명기에 일본이 중국에서 서양으로 지향점을 바꾸었을 때 싹튼 것은 그때까지 스승으로 모셨던 중국에 대한 적대감과 경멸감이 아니었던가."(쓰지 유미 <번역사 산책>에서).

국문과 소멸론이 일본어 폐지론과 같은 수준의 논의는 물론 아니다. 특히 2차대전 후 일본인들의 일본어에 대한 절망감은 과거 자국 역사에 대한 전면적 부정의 의식과 겹쳐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국문과 소멸론, 넓게는 그것을 포함한 인문학 위기 논쟁을 보면 우리사회의 학문 혹은 대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속 빈 강정인가 절감하게 된다.

시장이라는 당장의 지배적인 가치에 그렇게 흔들릴 정도라면 사실 그것들은 인문학이고 대학이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인문학은 대학에서 그 교육을 받은 학생의 평생 직업을 보장해주기 위한 훈련과정이 아니며, 넓은 의미의 인문교육은 기본적으로 한 사회를 시장유일ㆍ경제제일주의의 밀림화로부터 지켜야 하는 보루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이나 대학에 너무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인가.(하종오 문화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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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07. 09. 18) '인문학 위기선언’ 그후 1년, 그러나…

“진정한 가치와 삶의 궁극적 의미를 탐구하는 인문학은… 무차별적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이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존립 근거와 토대마저 위협받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지난해 9월 15일, 고려대 문과대 교수 117명은 비장한 어조로 ‘인문학(人文學)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의 목소리는 9월 26일 전국 93개 대학 인문대학장들의 선언으로 이어져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1년, 과연 무엇이 달라졌는가?

◆1년 200억원… 치열한 경쟁
‘선언’의 가장 구체적인 반응은 지난 5월 교육부로부터 나왔다. 2016년까지 10년 동안 4000억 원의 예산을 인문학에 지원하고, 당장 올해부터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사업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한 해 200억여 원의 돈으로 거점 연구소를 집중 지원해서 인문학의 수준을 끌어올리겠다는 이 사업이 사실상 작년 ‘선언’의 유일한 성과라는 시각이 많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이 사업을 공고한 것은 지난 6월 29일이었고, 신청 마감은 8월 30일이었다. 전국 69개 대학 153개 연구소가 불과 두 달 만에 제안서를 제출했다. 11월 발표되는 최종 지원 대상 연구소는 10~20곳뿐이다. 실로 각 대학 인문대의 사활이 걸린 로스쿨 못지않은 경쟁이었다. 인문학 전공의 한 교수는 “방학 중에도 며칠 동안 합숙하고 밤을 새워 가며 제안서를 만들었다”고 털어놨다. “선택과 집중의 경제논리를 인문학에 적용하는 탓에 대학 사이의 양극화가 더 커진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여전히 ‘위기’에 선 인문학

한국 최고 ‘지성의 전당’으로 일컬어지는 대한민국학술원은 지난 14일 올해 ‘대한민국학술원상’을 자연과학자 세 명에게만 시상했다. 학술원 관계자는 “인문학은 수상 대상자가 마땅치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작년 상반기 교보문고 인문과학 베스트셀러 20권 중에 저서가 포함된 현직 인문학 정교수는 두 명이었지만 올해 9월 현재는 단 한 명(정민 한양대 교수)뿐이다. 학문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작년 이후 인문학이 ‘회복’되고 있다는 징후를 찾기는 쉽지 않다.

지난해 ‘선언’ 때만 해도 ‘지방대학의 경우 폐과 사태까지 일어나고 있다’는 우려가 일어났지만 올해는 서울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4월 동국대는 독문과와 북한학과를 폐과하고 인문학 정원을 축소하는 학제개편안을 내놓아 마찰을 빚었다. 가장 최근의 통계인 2006년 인문대 졸업생의 정규직 취업률은 40.1%로 의대(82.9%), 공대(59.8%), 사회대(47.3%)보다 크게 낮은 수준이며, 전공을 살려 취업하는 경우도 48.8%(전체평균 68.9%)에 그쳤다. 작년 고려대 선언을 주도했던 조광 전 문과대학장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인문학 위기란 짧은 시간 안에 개선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라

그런 가운데서도 인문학의 ‘기초’를 튼튼히 다지고 대중과 소통하려는 ‘각개 약진’의 노력들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정암학당의 플라톤 원전 번역 사업,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의 인터넷을 통한 철학강좌,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의 학문 통섭 노력, CEO를 대상으로 한 서울대의 ‘인문학 최고지도자 과정’ 등의 예는 그 일부일 뿐이다.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철학과는 ‘논술 인증제’, 국문학과는 ‘문화콘텐츠’와 같은 새로운 분야로의 개척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사능력 검정시험으로 다시 일어나는 ‘역사 알기’ 붐은 사학과를 고무시키고 있다. 전봉관 KAIST 교수(국문학)는 “정부 지원을 바라기 전에 인문학자 자신들의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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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07. 09. 03) 한국 인문학 ‘길은 여전히 멀다’

십수 년 뒤에는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 위기’라는 말이 사라질 지도 모른다. 지난해처럼 교수들이 모여 성명을 발표하는 일도 없고, ‘인문주간’ 행사도 더 이상 열리지 않을 것이다. 비정규직 강사·연구원도 크게 줄 것이고, 일자리가 없어 좌절하거나 실의에 빠진 박사 학위자들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정부의 바람대로 한국인문학지원사업(이하 ‘인문한국’)이 계획대로 튼실하게 뿌리를 내린다면 말이다.

지난주 학술진흥재단이 낸 보도자료에 따르면, 올해 처음 시작된 ‘인문한국’ 프로젝트에 모두 69개 대학의 153개 연구소에서 계획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웬만한 대학의 연구소는 모두 신청했다는 얘기다. 어느 대학에서는 11개 연구소가 응모했다니 ‘인문한국’의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이번 ‘인문한국’ 사업은 경쟁률이 8대 1에 달해 2~3대1의 경쟁률에 그친 ‘두뇌한국’(BK) 사업을 크게 상회하고 있다. 그도 그럴듯이 ‘인문한국’은 인문학 연구에 대한 최초의 정부 지원 사업이다. 지원규모, 기간 등에서 ‘두뇌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 연구소에 10년동안 매년 5억~15억이라는 거금을 지원하니, 과제가 채택되기만 하면 연구교수와 연구원들이 시쳇말로 ‘먹고살 걱정’을 안해도 된다. 게다가 연구교수급은 ‘인문한국’사업이 끝나도 연구소 교수로 남아 학교로부터 정년을 보장받을 수 있다니 ‘꿩먹고 알먹기’다. 그러니 대학교수들이 여름방학도 반납한 채 합숙하고 밤을 새워가며 연구프로젝트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점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지원 규모 이외에 ‘인문한국’은 연구 과제 공모에서도 BK와 다른 실험을 하고 있다. BK가 박사급 등 학문후속세대 육성을 위한 지원사업인데 반해 ‘인문한국’은 연구소 등 인문학 연구의 인프라 구축을 위한 지원 성격이 강하다. 당연히 공모하는 연구과제도 학제간연구, 인간과 현실을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주제 등으로 포괄적이다.

지난해 인문학 위기의 파장이 컸던 만큼 그 대가로 얻어낸 ‘인문 한국’ 프로젝트는 야심치고 희망적이다. 학술진흥재단 관계자의 말대로, 인문학의 물줄기를 바꿔놓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예기치 않은 성과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학문연구가 외부의 지원으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높은 보수에 편안한 연구실에서 수십년간 ‘연구’하고서도 변변한 학술서 한권 내지 못한 ‘학자’들을 우리는 숱하게 보아오지 않았던가.

한국인문학지원사업이 학문의 토대를 놓는 일이라면, 연구는 학자 개개인의 몫이다. ‘인문한국’의 지원이 연구소, 연구단 차원으로 이뤄진다 할지라도 연구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지적 활동이다. 학문은 ‘혼자 하는 놀이의 진수’이고 그 방법론은 ‘지적 도발’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최근 인문학자의 노력과 성취는 인문학 탐구가 어때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부산대 강명관 교수. 한문학자인 그는 지난달 4권이나 되는 학술서를 한꺼번에 내놓았다. 예전에도 여러권의 저서를 출간했기에 그가 많은 책을 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은 못된다. 눈여겨 봐야 할 점은 그의 학문 방법론이다.

대학원 시절, 강교수는 조선 후기 중인문학을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잡았다.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해 양반사대부 문학과 다른 중인문학의 특징을 찾아보자는게 그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막상 연구를 해 보니 중인문학과 양반문학은 다르지 않았다. 이후 그는 자신 뿐 아니라 한국 인문학 연구가 ‘민족’과 ‘근대’라는 틀 안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근대적인 것, 우리 고유의 것을 찾는 데 한국 인문학이 매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교수는 이후 우리의 눈으로 우리 것을 연구하는 대신, 타자의 시선으로 우리를 살폈고 우리의 눈으로 타자를 봤다. 안쪽과 바깥쪽을 함께 보고, 둘의 관계를 살폈다. 그로부터 얻어낸 결론이 ‘민족 국문학은 없다’는 점이다. 가장 민족적이라는 국문학·한문학에서조차 ‘민족’이라는 알맹이는 없었다는 그의 연구결과는 자못 논쟁적이다. 그러나 십수년간 중국과 한국의 문헌과 자료를 섭렵하며 얻어낸 결과이기에 설득력이 있다.

강교수가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았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그는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혼자 있었다. 그곳에서 한적을 뒤적이면서도 ‘지금 이곳’의 현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를 비롯한 4권의 저서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강교수는 책 머리말에서 “이제 다시 시작이다. 남은 길은 여전히 멀다”고 적었다. 개인의 다짐이지만, 모든 인문학자들이 새겨야 할 금언이기도 하다.(조윤찬/ 문화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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