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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가질까, 버릴까? <반지의 제왕>

작성자

성은애

작성일자

2002-01-07

이메일

easung@yahoo.com

조회

3177


"전세계 사람들은 이 소설을 읽은 사람과 읽을 사람으로 나뉜다"는 요란한 찬사로 둘러싸인 톨킨(J.R.R. Tolkien)의 소설 3부작(1954-55)을 피터 잭슨 감독이 3부작 영화로 만들어냈다.

21세기 최고의 소설이네, 판타지의 원조네 하는 휘황찬란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을 읽지 않았었는데, 일차적으로는 "인생은 짧고 읽을 것은 많다"는 그럴듯한 말로 종종 포장되는 나의 게으름 탓이고, 또 하나는 괴물과 무사들과 왕과 마법사가 등장하여 마구 싸우며 별거 아닌 거 가지고 목에 힘주는 따위의 얘기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탓도 있었다. (물론 심각하게 싸우다가 간간이 웃겨보려고까지 노력하는 <던전 드래건> 따위의 쓰레기는 말할 나위도 없다.)

극심한 몸살과 배탈로 고생하던 지난 연말, <반지의 제왕> 개봉 첫날 극장으로 향했던 것은 표를 예매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개봉 첫날 오전표를 예매하게 된 건, 물론 방학을 맞이하여 온갖 나쁜 짓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는 애 때문이었다. 아무튼 기운 없어 빌빌거리며, 영화가 길다는데 졸리면 어쩌지...하고 걱정을 하며 극장에 들어섰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3시간 내내 즐겼다. 일단은 장면장면 엄청난 돈으로 처바른 영화라 극장의 큰 스크린에서 보는 보람이 있었고, 딱부러지게 완결되지 않은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지만 이야기도 비교적 짜임새가 있었다. 게다가 이렇듯 요란한 볼거리로 가득한 영화에서 그나마 배우들이 '연기'를 하더라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야기의 기본 설정에서 참신했던 것은, 흔히 이런 류의 이야기에서 보이듯, 무엇인가 절대적인 것, 혹은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줄 그 무엇을 '찾으러' 가는 Quest가 아니라, 거꾸로 절대적인 힘을 지닌 반지를 '버리러' 가는 Quest라는 것이다. 게다가 선-악의 세계가 구분되어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싸워 물리쳐야 할 것은 '흑기사'나 괴물들뿐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유일반지'(부패할 수 밖에 없는 절대권력!?)에 대한 유혹이라는 점이 비교적 소상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재미를 더해주었다.

조금 거슬렸던 부분은 왜 하필 그런 인원 구성으로 Fellowship이 결성되어야 했는지, 그다지 설득력있게 제시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호빗타운에서 우연히 따라붙은 영~션찮은 넘들을 얼결에 데리고 가는 느낌도 들고, 각 종족을 대표하는 이들의 모습도 반지를 무사히 운반해 갈 '드림팀'이라고 보기에는 영 불안해보였다. 크고 작은 싸움 장면에서도 싸움의 '양감'은 압도적이었지만, 개별적인 몸과 몸이 부딪히는 데서 나오는 싸움의 미학(뭐 꼭 <황비홍> 시리즈같은 아름다운 무술의 몸놀림을 보여줘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사소한 찝찝함을 해소하려니, 할 수 없이(!) 원작 소설을 읽어야 했다. 3부작을 한 권으로 모아서 편집한 One-Volume Edition은 1100페이지가 넘었고, 1부를 덤벙덤벙 읽어나가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거 참, 뭐하는 짓인람... 그래도 명색이 영문학(그것도 소설!) 전공자인데, 책 한줄 안 보고 이 영화를 두고 어쩌구 저쩌구 하다가는 숨어있던 톨킨 팬들에게 얻어맞을 것같으니 어쩌랴. 영화가 재미있어서 소설책을 집어 들었는데, 솔직히 소설책부터 집어 들었더라면 한 두어 장 읽다가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자, 일단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피터 잭슨의 각색에 한표를 더 주고 싶다.

물론 원작 소설은 영화보다 훨씬 섬세하고 시적이고 심지어 학구적이기까지 하다. 작가가 섬세하게 만들어 놓은 엘프어와 역사적 설정이 그러하고, 북구와 브리튼의 각종 전설과 신화에서 차용하고 변용한 갖가지 이야기들과 노래들이 그러하다. 그렇다고 이걸 읽으면 고대-중세 영문학 연구에 딱이 도움이 된다는 건 아니다...-.-;; 까놓고 말하면, 고대어 학자였던 톨킨이 공부만 하기 심심하여(!) 어떻게 하면 좋은 머리를 조금 재미나고 황당한 쪽으로 팍팍 더 돌려볼 수 없을까....하고 넘치는 기운 빼가며 만들어낸 것이 이 소설인 것같다.

물론 굳이 이 작품을 현실적으로 풀이하라면 1,2차대전 거치며 '힘'에 대한 사람들의 탐욕과 살륙에 식상한 작가가 가공의 세계 속에서 '절대적인 힘'을 둘러싼 여러 종족들의 싸움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면서 현실에 대한 혐오감을 달랬다....뭐 이런 식으로 얘기할 수도 있겠다. 인간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왜소하고 소심하고, 나름대로 치사한 면모도 있지만 대체로는 훨씬 자연친화적이고 비폭력적인 호빗족의 대표격인 프로도(Frodo)를 이 모든 상황을 책임져야 할 '영웅'으로 만든 것도 의미심장하다. 세상만물을 손쉽게 통제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반지에 대한 욕망을 가장 잘 다스릴 수 있는 인물의 중요성, 혹은 그러한 '욕망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게다. 서로 다른 종족간의 상호 존중과 공존,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 또한 작가의 '현실적인' 희망사항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원작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온갖 죽을 고비 다 겪으며 겨우겨우 리벤델(Rivendell)에 도착한 프로도가 각 종족의 대표자 회의에 참석했다가, 결국은 다시 문제의 반지를 가지고 길을 떠나겠다고 나서는 장면이다. 그 자리에 모인 다른 이들과 비교해보아도, 별다른 무예도 재능도 없이, 어느모로 보나 무시무시한 괴물과 방해꾼으로 가득한 위험한 길을 헤쳐나가기에는 턱없이 역부족으로 보이는 프로도가 반지를 지니고 갈 적격자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차근차근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엘론드(Elrond)의 회의장면이야말로 이 작품의 주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며 소설이기에 가능했던 대목이다.

장르마다 특유한 표현방식이 있듯이, 섬세한 심리와 인물간의 미세한 갈등들을 포착해내고 구전 발라드의 형식을 차용한 갖가지 옛 이야기들을 군데군데 배치하여 문학적인 향취를 풍기는 원작 소설에 비해, 영화는 그러한 구도를 훨씬 단순화시킬 수밖에 없다. 단순화된 대신, 빛과 어둠, 선과 악의 대비가 분명하고, 따라서 그 효과도 훨씬 강렬한 것이 특징이다. 하염없이 유장하고 에피소드가 끝없이 이어지는 소설에 비해, 영화는 시종일관 아슬아슬한 긴박감이 넘친다.

반지의 힘을 이용하여 현자가 다스리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사루만(Saruman) 논리가 일견 그럴듯해보이기도 하는 원작 소설에 비해, 처음 사루만이 등장하는 장면 딱 하나만 봐도 간달프(Gandalf)를 골탕먹일 것이 분명해보인다든가, 잘 생겼거나 화사한 인상을 가진 인물은 그나마 좋은 사람들이고, 나쁜 놈들은 거의 구역질날 정도로 흉악한 외모를 지녔다는 것 등은 3시간 안에 긴 설명 없이도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영화의 특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장르의 특성상 불가피했던 단순화의 문제를 감안하고 본다면, 영화 <반지의 제왕>은 상당히 충실하면서도 개성이 넘치는 각색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독자들의 감각으로 보면 약간은 늘어지고 고리타분해 보이는 톨킨의 '로맨스'는 긴장감과 적당한 공포를 가미한, 리드미컬한 흐름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알 수 없는 운명에 의해 점지된 프로도의 '소명'과 반지를 둘러싼 '철학적'인 사유가 강조된 원작에 비해, 프로도 일행을 위협하는 구체적인 '힘'의 정체와 그것이 안겨주는 '실질적인' 공포가 강조된 영화는 톨킨의 소설에 대한 잭슨 감독의 개성넘치는 한 독법을 보여준다.

잭슨의 영화가 톨킨에 대한 '하나의' 독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면, 우리는 잭슨의 역량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다. 영화의 톤은 일관성이 있고, 그 긴 시간 내내 쓸데없는 웃음이나 남녀상열지사로 관객들의 주의를 흩트리지 않고도 긴장감을 유지한다.

그러니 여기서 톨킨의 원작 소설을 들어서 장면장면 비교하며 이게 빠졌네, 저것도 설명이 없네...하고 불평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원작 소설 딱 그만큼만 가자고 작심했던, 그래서 결국은 다소 밋밋해졌던 <해리포터>와 비교하면 잭슨의 각색은 "충실하면서도 자유롭게"라는 모순된 요구를 그런대로 잘 충족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신년 벽두에 그런대로 재미난 영화를 만났다. 원래 이렇게 돈으로 처바른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극장을 나서면서는 7000원어치는 충분히 즐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세계 영화사를 다시 쓰는... 뭐 이런 요란한 찬사에 선뜻 동의하긴 힘들지만, <스타워즈>나 <해리포터> 정도의 판타지를 기대하고 애들 데불고 가신다면 의외로 어른 보기에도 아주 재미있는 영화라고 느끼실 수 있을 거이다. (아, 요건 "12세 이상 관람가"이다. 좀 맘약한 애덜은 성형 외과에서도 견적내기 거부할 정도로 흉하게 생긴 오르크들 보고 무서워서 울기도 하니까 감안하시라....)

*** 사족 한 가지.....

톨킨 소설의 골수 팬들은 원작에서는 미미하게 등장하는 아웬(Arwen)이 프로도를 흑기사에서 구해주는 장면을 두고 '왜 저기서 쟤가 설치냐?'고 불쾌해 한다. 사실, 생략한 부분들을 제외하면 원작에서 가장 많이 변형된 인물은 아웬이다.

그런데, 아무리 알 수 없는 먼 과거가 배경이라지만, 20세기 작가의 작품에서 '배역'을 부여받은 여성이 거의 나오지 않는 원작이 '특이'한 거 아닌가? 이게 뭐 군대 배경으로 한 소설도 아니고, 한 번 배타면 죽을 때까지 인원 변동 불가능한 <모비딕>도 아니고 말이다. (3부작 전체에서 여성 인물이 다섯 명 나온다고 들었다. 읽어본 1부에서는 골드베리, 아웬, 갈라드리엘, 이렇게 딱 세 명의 여성이 나오는데, 그나마 '역할'이라고 할 만한 걸 맡은 인물은 갈라드리엘 뿐-.-;;)

여성이 없다는 듯 취급되거나, 용기있는 자의 '전리품'으로만 취급당하는 거 못 참는 현대 여성 관객의 취향을 고려하여 아웬의 역할을 좀 확대했다 한들, 그거야 여성들을 위한 감독의 따땃한 배려 아니겠는가. 원작을 좀 고쳤다 한들 뭐 큰 대수랴. 아웬이 죽어가는 프로도를 안고 "말~달~리~자!"하다가 개울 가에서 흑기사 물리치는 시퀀스, 내가 보기엔 원작에 비해봐도 손색없고 괜찮기만 하더구만...!!

** 사족 또 한가지

홈페이지 정식 오픈한 1월을 기해서 작성자 이름을 밝히기로 합니다. 그동안 <내겐 너무 좋은 영화>의 필자는 성은애였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러할 것입니다. 물론 저를 대신할 필자가 나설 때까지만요.^^ 새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만사형통하십시오.

문학에 관해서도 그렇지만, 특히 영화에 관한한,
전문가라기보다는 지극히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취향에서
딱 반 발자국 엇나가는 정도라고 자평하는,
성은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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