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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비평의 존재론

작성자

bloom

작성일자

2007-06-24

이메일

bloom.pe.kr

조회

2948


나같은 문학선생이든 영화학선생이든 남이 쓰거나 이미지로 만들어놓은 텍스트를 읽고 분석하고 평가하고, 혹은 감동받고 열받는 사람들은 왜 그런 일을 하는 걸까? 그런 행위가 간단히 말해 '비평'이다. 말을 조금 어렵게하자면 이 질문은 비평의 존재론을 묻는 것이다. 남의 텍스트를 읽고 그 텍스트가 촉발시킨 사유를 다시 글쓰기로 표현하고 그런 글쓰기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밥벌이로 삼는 이라면 회피하기 힘든 질문이리라.

아마도 한국문학이나 영화계의 문제점 중 하나는 '비평의 존재론'을 문제삼는 '비평가'들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주어진 비평 게임의 룰을 의심하지 않고 그 '코드'를 충실히 지키면서 작품을 평하고 미덕을 칭찬하고 한계를 논하는 비평이야 널렸다. 하지만 이런 비평들은 왜 자신이 그런 활동을 하는가를 묻지 않는다. 그러니 재미가 없고 배우는 바도 없다. 읽으나 읽지 않으나 텍스트를 이해하고 즐기는 데 별 상관이 없다.

제대로 된 비평은 자신의 행위의 근거를 묻는다. 비평의 존재론을 성찰한다. 그리고 비평 행위를 할 때 사용되는 자신의 비평방법론, 읽기의 틀거리가 과연 타당한가를 되묻는다. '나는 텍스트를 왜 이런 식으로 읽을까? 내가 이 텍스트를 읽는 방법론이나 이해의 틀은 온당한가? 이런 읽기를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도대체 비평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비평행위에서 매번 성찰하지 않으면 읽으나마나 별 상관이 없는 비평이 '상품'처럼 생산될 뿐이다. 그럴 때 독자는 더이상 비평을 신뢰하지 않게 된다.

비평은 소통과 대화라는 자기근거를 스스로 허물어 뜨리고 자기복제의 길을 걷게 된다. 거창한 담론들을 떠들기 전에 비평은 자신이 대하는 텍스트들이 왜 좋은지, 나쁜지를, 그리고 그렇게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는 비평적 판단의 근거를 엄정하게, 진솔하게 드러내야 한다. 비평가는 정답을 쥐고 있는 판관이 아니다. 단지, 사회적으로 좀더 예민하게 텍스트에 반응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런 판단력으로 대중의 미적 판단에 문제를 제기하고 대중과 대화함으로써 좀더 객관적인 미적 판단에 도달하려는 이들이다.

비평에 정답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비평의 객관성은 없다. 다만, 객관성의 근거를 되묻고, 좀더 나은 객관성의 근거를 매번 새롭게 사유하고 세우려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한국문학계에는 그나마 그렇게 신뢰할 만한 비평가들이 있다. 물론 그수는 많지 않다. 그들의 비평적 판단을 신뢰하고 나는 그들의 조언에 따라 작품을 구해 읽고 나의 미적 판단의 적실성을 따져본다. 물론 때로는 그들의 판단이 과연 타당한가를 되물을 때도 많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각자의 비평적 판단의 타당성을 되물어 성찰하게 해주는 비평이 좋은 비평이다. 비평의 개방성이란 이런 뜻이다. 그것은 애매한 다원주의나 상대주의가 아니다.

텍스트의 정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각자가 믿고 있는 정답의 근거를 성찰하게 해주는 비평이 좋은 비평이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그리고 비평의 역사가 아직 짧은 탓이겠지만, 한국영화계에는 그렇게 신뢰할 만한 비평가가 거의 없다. 그들은 자신의 주관적 감상을 비평이라고 야무지게 착각한다. 물론 감상과 비평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만리장성이 놓여있지는 않다. 비평은 감상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비평은 감상이 아니다. 감상은 단지 출발점이다. 비평은 미적 판단이고 미적 판단의 근거를 최대한 치밀하게 성찰하는 노력의 표현이다. 그런 영화비평은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비평이라고 쏟아져 나오는 글들은 대개 세련된 감상문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한국의 비평가들은 영화텍스트를 너무 우습게 안다. 그러니 많은 경우 대중의 비평적 판단보다도 못한 '감상'을 비평이라고 내놓는 일이 벌어진다. 그런 일이 잦아지면 영화비평은 신뢰를 잃게 된다. 물론 비평의 존재론에는 비평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좀더 넓은 의미의 비평제도의 문제가 관련된다. 하지만 역시 비평의 위기라는 문제해결의 단서는 비평의 존재론을 성찰하는 좋은 비평가들이 쥐고 있다. 신뢰할 만한 영화비평을 좀더 많이 만나고 싶다. 관련 글을 하나 퍼온다. [씨네21]에 실린 편집자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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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씨네21

사람들은 어떻게 영화와 만나는가? 극장에 가서 만나거나 TV나 비디오로 만나는 것이 일반적인 경험이겠으나 그것만으로 영화와 만났다고 하기는 석연치 않다. 스크린에 명멸하는 빛의 스펙트럼은 극장을 나서는 순간 꿈을 깨듯 잊혀지기 십상이고 한번 본 영화도 정확히 기억하기란 쉽지 않아서 볼 때마다 새로운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람들이 흔히 영화를 보고 나서 타인과 얘기를 나누거나 글을 쓰는 것은 그처럼 짧게 스쳐가는 인상을 붙잡기 위해서일 것이다. 과연 방금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고 싶다! 영화평론은 그래서 시작된 일일 것이다.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에 썼던 앙드레 바쟁의 표현을 빌리면 방부처리를 해서 미라로 만들어서라도 언젠가 혼이 찾아와 되살아나길 기원하는 것이다. 오늘날 영화평론이 철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등 여러 갈래 학문과 교류를 맺으며 출발점을 알아보기 힘들게 변했다 해도 근본은 다르지 않다. 영화는 기록되고 연구되고 토론의 대상이 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 100년 전 영화도 그렇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동안 살아 있는 것이며 1년 전 영화도 더이상 언급되지 않을 때 죽은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영화평론가란 일종의 주술사다. 영화에 혼을 불어넣는 자 또는 영화가 살아 숨쉬게 만드는 자. 위대한 영화들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게 마련이지만 그 위대함을 문자로 전파하려는 노력 없이는 영혼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미국에서 평범한 흥행작가로만 인정받던 히치콕을 서스펜스의 위대한 창조자로 입적시킨 것은 가장 유명한 예다. 앙드레 바쟁이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수잔 손택이 로베르 브레송을, 조너선 로젠봄이 마스무라 야스조를, 하스미 시게히코가 오즈 야스지로를, 정성일이 임권택을, 로빈 우드가 70년대 공포영화를, 이영일이 60년대 한국영화를 재발견하게 한 것도 비슷한 예다. 그런 점에서 하스미 시게히코가 <감독 오즈 야스지로>라는 책의 서문에 쓴 표현은 영화평론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관한 가장 간명한 요약처럼 보인다. “이 책 <감독 오즈 야스지로>가 꿈꾸는 유일한 내용은 그것이 수없이 존재하리라 희망하는 독자들이 다 읽기 전에 오즈를 보고 싶다는 욕망에 부채질되어 그대로 영화관에 달려가든지, 아니면 오즈가 상영되지 않는 것을 용서하기 힘든 부당한 사태라고 단정하고 이유 없는 울분으로 몸을 떠는 것 외에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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