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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오스틴 현상’

작성자

조선정[자료실]

작성일자

200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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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614


‘오스틴 현상’

조선정
서울여대 교수.


1. 제인 오스틴‘들’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소설 ꡔ오만과 편견ꡕ(Pride and Prejudice, 1813)을 원작으로 2005년에 영국에서 제작된 동명영화의 국내 개봉을 앞두고 한참 설레던 올 봄, 나는 한 영화잡지에서 「제인 오스틴의 연애특강」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아직도 결혼할 생각이 없지만 연애와 결혼에 관해서는 척척박사요 뭇 관객을 울렸다 웃겼다 로맨틱한 결혼의 판타지로 관객을 집단 익사시키는 귀재인 이분” “여전히 연애와 결혼의 비밀에 관해 목말라 하는 전세계 언니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안겨주는 제인 오스틴 언니”를 모셔놓고 ‘조급녀’ ‘똑똑녀’ ‘절망녀’ ‘후끈녀’ ‘수렁녀’ ‘교양녀’ ‘소심녀’를 불러 모아 연애상담을 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글로서 오스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 속의 남녀관계 유형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이종도 「제인 오스틴의 연애특강」, ꡔMEꡕ 2006년 3월 22일자 참조.

<오만과 편견>이 개봉하는 때에 맞추어 기존 오스틴 영화들을 돌아보는 기사가 나온 것 자체는 그리 특별하달 수 없지만 오스틴 전공자인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이 기사가 전제한 ‘오스틴=로맨스’라는 공식, 그리고 이 기사가 취한 연애상담이라는 독특한 글쓰기 형식이었다. 오스틴의 소설을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소설가 오스틴을 친근하면서도 지혜로운 ‘멘토’(mentor) 같은 존재로 살갑게 여기는 것, 오스틴을 수용하는 이 두가지 (서로 연관된) 방식은 최근 10여년 동안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오스틴 현상’의 근간을 이룬다. 단순하게 말하면 오스틴 현상이란 오스틴 소설/영화를 로맨스로 환원하는 경향과 오스틴에게 마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든든한 언니나 이모를 대할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친밀감을 느끼는 경향이 융합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내가 ‘제인 오스틴 언니’의 연애상담을 즐겁게 엿들으면서 우리도 이제 ‘제인 오스틴 언니’라는 형식으로 (마치 영국에서 ‘제인 이모’라는 형식이 그랬던 것처럼) ‘제인 오스틴’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었다.

<오만과 편견>의 개봉 이후 이 영화의 포스터를 표지로 단장한 원작소설과 우리말 번역본 ꡔ오만과 편견ꡕ, 그리고 DVD가 모두 몇달 동안이나 베스트쎌러 목록에 머문 것이 오스틴의 인기를 가늠하는 척도임은 분명해도 우리가 오스틴 현상을 본격적으로 겪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제인 오스틴의 연애특강」이라는 흥미로운 기사가 보여준바 ‘제인 오스틴 언니’를 모셔와 연애상담을 하면서 여성의 속내를 맘껏 드러내려는 발상 자체는 오스틴 현상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기사가 적어도 오스틴 현상의 작은 징후이자 오스틴의 한국적 수용에 관한 더 많은 논의를 끌어낼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이 글을 쓴다. 물론 이것도 오스틴 전공자의 부푼 희망에 그칠 수 있으니 이 기사의 운명에 관한 얘기는 그만두고, 오스틴 현상의 면면을 소개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오스틴 현상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짚어보려는 이 글의 취지로 돌아가자.

우선 오스틴 현상의 실체와 그에 대한 다소 양극화된 반응을 살펴본 뒤 영화 분야로 오스틴 현상의 범위를 한정해서 원작과 영화의 관계에 접근하는 두가지 대립적인 태도, 그리고 그것과 연관된 대중문화에 대한 태도를 점검할 것이다. ꡔ오만과 편견ꡕ/<오만과 편견>을 간략한 사례로 소개하는 우회로를 거치면서 분석적이고 비판적이되 해석의 다양성에 관대한 태도로 오스틴 현상을 포용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왜 하필 제인 오스틴이며, 왜 하필 지금인가’라는 (단순한 대답이 불가능한)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대답이 우회적으로나마 읽히기를 바란다.

러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이 「제인주의자들」(The Janeites, 1926)이라는 단편소설에서 오스틴을 읽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빅토리아 시대부터 형성되어온 ‘오스틴 컬트’가 20세기 초 영국에서 하나의 ‘문학권력’으로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Rudyard Kipling, “The Janeites,” Debits and Credits, ed. Sandra Kemp (Harmondsworth: Penguin 1987) 119~40면. 키플링이 1923년에 쓴 이 단편은 오스틴 소설에서 따온 구절들이 소수의 사람들, 즉 ‘제인주의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암호(password)처럼 통용되는 이야기다. ‘오스틴 컬트’에 관해서는 Claudia Johnson, “Austen Cults and Cultures,” The Cambridge Companion to Jane Austen, ed. Juliet McMaster & Edward Copeland (Cambridge: Cambridge UP 1997) 211~26면 참조.

20세기 말 일어난 오스틴 현상이란 바로 이 ‘문학권력’이 좀더 총체적이고 조직적인 ‘문화권력’으로 진화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오스틴 현상은 오스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성공에 크게 빚지고 있다. 흔히 영국소설의 고전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헤리티지 영화’(heritage film)라 하는데, 헤리티지 영화가 ‘브랜드’로 자리잡는 데에 분수령이 된 작품으로 제임스 아이보리(James Ivory)와 이시마엘 머천트(Ismail Merchant)가 설립한 아이보리­머천트 프로덕션에서 1985년 포스터(E. M. Forster)의 동명소설을 각색하여 내놓은 <전망 좋은 방>(A Room with a View)을 꼽는다. ‘헤리티지 영화’의 대중화는 영국의회와 행정부가 1980년대 초반에 문화유산법(National Heritage Act)으로 문화유산과 유적지를 관리하고 보호하면서 ‘영국성’(Englishness)이라는 것을 국가의 정체성으로 확립하려 했던 사정과 맞물려 있다. Madaleine Dobie, “Gender and the Heritage Genre: Popular Feminism Turns to History,” Jane Austen and Co.: Remaking the Past in Contemporary Culture, ed. Suzanne Pucci & James Thompson (New York: State U of New York P 2003) 247~60면 참조.

이 영화 이후 포스터와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소설들이 잇달아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원작의 배경인 장소뿐 아니라 가구나 음식, 의상을 비롯한 소소한 디테일을 꼼꼼하게 복원하여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헤리티지 영화의 문법으로 자리잡았다. 영국소설의 고전이 현대 관객의 시각적 쾌락에 봉사하는 매끈한 상업영화로 재탄생하면서 헤리티지 영화는 ‘코스튬 드라마’(costume drama)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게 되는데, 이렇게 된 사정은 물질적 디테일의 복원을 통해 정교한 스펙터클을 구축하는 아이보리­머천트 프로덕션의 원칙 탓이다. 오스틴 소설이 헤리티지 영화산업으로 편입된 것은 1995년과 1996년 사이 앙 리(Ang Lee) 감독의 <쎈스와 쎈서빌러티>(Sense and Sensibility), 두 편의 <에마>(Emma), BBC 6부작 미니씨리즈 <오만과 편견> 등이 쏟아져 나와 큰 관심을 끌면서부터다.

이 영화들이 헤리티지 영화의 성공 덕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헤리티지 영화의 계보를 잇는다는 면보다 이후 10년이 넘게 지속될 오스틴 영화 열풍의 물꼬를 텄다는 면이 훨씬 중요하다. 헤리티지 영화의 화려한 스펙터클과 차별화된 소박한 쎄팅으로 원작을 잘 살려냈다는 찬사를 끌어낸 BBC의 <설득> (Persuasion)이 동일한 시기에 나온 것도 오스틴 영화 열풍이 헤리티지 영화의 후광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독자적인 문화현상임을 시사한다.

오스틴 영화 열풍은 오스틴 소설을 19세기 영국이라는 구체적 문맥에서 떼내어 우리 시대의 문화적 코드를 입히는 현대적 각색으로도 나타난다. 그 압권은 ꡔ에마ꡕ를 각색한 할리우드 영화 <클루리스>(Clueless, 1995)가 아닐까 싶다. 에이미 헤컬링(Amy Heckerling) 감독은 19세기 초 영국 시골마을을 로스앤젤레스의 부촌 비벌리힐스로 옮겨놓고, 명품 쇼핑이 주특기인 ‘개념 없는’(clueless) 철부지 여고생 셰어 호로위츠(Cher Horowitz)를 우리 시대의 사랑스러운 에마로 창조한다. <클루리스>에 관한 흥미로운 논의로는 Deirdre Lynch, “Clueless: About History,” Jane Austen and Co. 71~92면 참조. 이 논문에서 린치는 ꡔ에마ꡕ를 남성 중심적인 역사관에 대한 페미니스트적인 비판으로 해석하고 <클루리스> 또한 이런 원작의 여성적 세계관을 영리하게 재해석한 영화로 옹호한다. 그 과정에서 린치는 제임슨(Fredric Jameson)과 루카치(Georg Lukács)가 ‘올바른 역사의식’이라든가 ‘역사적으로 충실한 재현’에 집착한다고 지적하고, 근대 영국은 역사 서술의 ‘정당성의 위기’를 겪었고 오스틴 또한 역사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인식한 소설가였다고 주장한다.

오스틴 소설 중에 가장 사랑받아온 ꡔ오만과 편견ꡕ을 현대적으로 각색하거나 거기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영화도 여러 편이다. 19세기 초 영국 더비셔(Derbyshire) 지방에서 가장 훌륭한 저택을 소유한 귀족 신사였던 다씨(Mr. Darcy)는 할리우드의 로맨틱 코미디 <유브 갓 메일>(You’ve Got Mail, 1998)에서 뉴욕 맨해튼의 부유한 사업가로 변신하는가 하면, 인도판 뮤지컬인 발리우드(Bollywood)로 번역된 <신부와 편견>(Bride and Prejudice, 2004)에서는 시골 마을 딸부자 집에 소개된 캘리포니아의 갑부 호텔리어로, 그리고 두 편의 <브리짓 존스의 일기>(Bridget Jones’s Diary, 2001/2004)에서는 런던의 잘나가는 인권 변호사로 바뀐다. 다씨의 변신에 관해서는 필자의 「제인 오스틴의 삶과 문학」, ꡔ열정으로 산 사람들 IVꡕ(서울여대출판부 2006) 28면 참조. 덧붙여 오스틴 현상을 소개하면서 <브리짓 존스의 일기> 씨리즈의 원작인 헬렌 필딩(Helen Fielding)의 소설을 거론한 글로는 「결혼플롯과 그 불만: 제인 오스틴의 ꡔ오만과 편견ꡕ에 나타난 여성 주체의 욕망을 중심으로」, ꡔSESKꡕ 6호(2004 상반기) 113~37면 참조.

피해야 할 남편감 자리를 두고 일 순위를 다툴 위인들인 바람둥이 군인 위컴(Wickham)과 지루한 목사 콜린즈(Collins)는 <신부와 편견>에서 각각 배낭여행을 즐기는 신세대 ‘노마드’ 그리고 비벌리힐스에서 회계사로 성공한 뒤 순종적인 신부를 찾아 인도의 고향 마을을 방문한 속물 ‘마초’로 나온다. 뿐만 아니라 약혼하지 않은 상태에선 서신 교환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던 오스틴의 여주인공들도 갑갑한 코르셋과 틀에 박힌 날씨 얘기를 버리고 자기주장이 강한 현대여성으로 탈바꿈한다.

오스틴 영화의 인기는 영화 이외의 다른 문화 영역에서 오스틴 관련 상품의 소비를 부추기고 또 그렇게 확장된 오스틴 소비는 오스틴 영화가 지속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토대가 되면서 최근 10여년간 오스틴은 하나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출판계에서 등장인물들의 후일담을 담은 속편(sequel)이나 전사(前史)를 다룬 ‘프리퀄’(prequel)의 형식으로 ‘오스틴 다시 쓰기’가 성행해왔는데, 그 범위가 넓으면서도 다양하다. 엘리자베스 베넷(Elizabeth Bennet)과 다씨가 잘 먹고 잘살았다는 이야기에 만족하지 않고 결혼 이후 그들에게 (가령 그들의 침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오스틴 ‘마니아’의 세계, 이 세계에서 중요한 미덕은 갈 데까지 가는 상상력, 이를테면 <클루리스>에서 에마가 셰어로 변신하는 파격 정도는 거의 고상해 보일 정도로 발칙하고 불온한 상상력으로 원작을 비트는 솜씨다. 이 점잖지 못한 상상력의 세계에서는 다씨의 정력이 중요한 주제가 되는가 하면, 처치 곤란한 스물일곱의 노처녀였다가 콜린즈와 결혼해 엘리자베스를 경악하게 했던 강연 원고 루카스(Charlotte Lucas)가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흥미진진하게 제기된다. 예를 들면 Linda Berdoll, Mr. Darcy Takes a Wife: Pride and Prejudice Continues (Neperville, Illinois: Sourcebooks 2004)가 미국에서 비교적 최근에 주목받은 대표적인 오스틴 속편인데 노골적인 성 행위 묘사 때문에 열렬한 지지와 격렬한 비판을 골고루 받고 있다. 샬롯의 동성애자 논란에 관해서는 Karen Joy Fowler, The Jane Austen Book Club (New York: Putnam 2005)이 최근에 나온 것 중에 눈에 띈다. 두 작품 모두 우리말 번역본이 나온 것이어서 특별히 소개한다.

‘평범한’ 독자라면 더구나 ‘점잖은’ 주제를 다루기로 유명한 오스틴을 읽으면서 엘리자베스와 다씨의 성생활이 어떨까 혹은 샬롯과 콜린즈의 결혼은 정말 가짜일까에 집착하지 않을 듯하지만 그렇게 ‘평범한’ 독자야말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일반화된 추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어차피 ‘평범한’ 독자라는 카테고리로 포섭되지 않는 독자‘들’은 어디선가 자기 멋대로 오스틴을 읽을 것이고, 그 중 어떤 독자에게는 오스틴이 ‘점잖은’ 주제를 다루었다고 알려져 있거나 말거나 다씨의 은밀한 사생활과 샬롯의 성 정체성이 오스틴 소설과 소통하는 통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보는 것은 오스틴 다시 쓰기를 포함한 오스틴 현상 일반에 대해 너그러운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정반대로 이렇게까지 원작을 비틀어야 할 정당한 명분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이 모든 다시 쓰기 유행이 대중문화의 천박화와 상업주의에 공헌하는 것은 아닌지 따갑게 비판하는 입장도 있다. 나는 오스틴 현상이 대중의 다양한 문화적 욕망이 표현되는 매체임을 긍정하고 너그럽게 수용하는 입장에 서 있지만 오스틴 현상이 오스틴을 사랑하는 마니아층의 순수하고 자발적인 열정의 표현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포스트모던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마케팅 전략에 휘둘리지 않는 열정은 실로 희귀하고 열정을 착취하지 않는 마케팅은 더 그렇다. 영국이 유명 작가들의 생가나 묘지 따위를 ‘헤리티지’로 가꾸어 관광상품으로 팔기 시작한 지 오래고, 오스틴과 관련된 곳곳을 샅샅이 방문하도록 유도하는 영국관광청의 친절하고도 속 보이는 배려는 널리 알려진 대로다. 잘 꾸며놓은 오스틴 관광지 기념품 코너에 가보면 에마가 지루한 저녁 시간을 보내면서 아버지와 함께 하던 카드놀이 쎄트, 콜린즈가 베넷가 딸들에게 지겹게 읽어주려던 책, <쎈스와 쎈서빌러티>에서 매리앤 대시우드(Marianne Dashwood)가 불렀을 노래들과 엘리자베스와 다씨가 춤출 때 흘렀을 연주곡을 담은 CD, 여주인공들이 입었을 드레스와 장갑 등 오스틴 소설과 관련된 자질구레한 소품들에, 마치 그 시시콜콜함에 대한 집요한 관심과 유치한 애정이 ‘제인 오스틴 공화국’으로 진입하는 시민권이라도 되는 듯 열광하는 오스틴 팬들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ꡔ설득ꡕ에서 앤 엘리엇(Anne Elliot)과 웬트워쓰(Wentworth)가 스쳐지나가던 바쓰(Bath)의 길모퉁이, 지금은 의류 가게와 커피 전문점이 들어선 그곳에서 오스틴 팬들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도 익숙한 풍경이다. 사실 ‘오스틴 마니아’에 필적할 만한 문화현상은 흔하다. 미국에서 <스타워즈>(Star Wars) 씨리즈가 수십년 동안 몰고 다니는 엄청난 인기는 ‘팬덤’(fandom) 현상의 고전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나타난 소위 ‘폐인’으로 불리는 극성팬들의 적극적인 참여 역시 대중문화가 수용자들의 욕망과 소통하는 한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영문학 학술대회의 오스틴 관련 패널에서 전문 연구자가 아닌 ‘민간인 아줌마 부대’의 참여를 목격할 때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로부터 가령 ꡔ오만과 편견ꡕ의 다씨와 ꡔ에마ꡕ의 나이틀리(Mr. Knightley) 중에 누가 더 훌륭한 댄서라고 생각하느냐와 같은 ‘진지한’ 질문이 나올 때, 나는 그들의 오스틴에 대한 열정에 어설픈 연대의식과 함께 묘한 당혹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이제 오스틴 학술대회를 고급 가구업체나 여성의류회사가 협찬하는 일은, 이를테면 헤밍웨이(Hemingway)하면 맥주 광고가 먼저 떠오르고 체 게바라(Che Guevara)하면 그의 얼굴이 그려진 멋진 티셔츠나 그의 오토바이가 먼저 떠오르는 시대에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일 것이라 생각하곤 했다.

사실 ‘오스틴 순수주의자들’(Austen purists)의 결벽증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대중문화 전반에 침투한 자본의 논리에 조금만 민감하다면 오스틴 현상의 상업주의적 속성에 대한 비판과 걱정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오스틴 현상을 바라보는 나의 입장은 대체로 관대한 ‘제인주의자’의 것에 가깝다. 예컨대 오스틴 현상의 특징인 불온한 상상력이라든가 사소한 것들에 대한 편집증적인 관심 자체가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천박한 쇄말주의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오스틴 소설 본래의 장난스러움이나 일상의 정밀한 관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는 편이다. 그렇다고 오스틴 소설에 그 모든 맹아가 다 들어 있어 무한한 변주가 허용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오스틴 소설을 하나의 기원으로 절대화하는 시도에 반대한다. 오스틴 소설에서 나온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보다 이 이분법적 분리의 편파성을 비판적으로 해체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정품 오스틴’이라는 것 또한 문화적 구성물이고, 그런 점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정품도 짝퉁도 아닌 그저 오스틴‘들’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 주변에 갑자기 너무 많아진 오스틴‘들’에 약간의 멀미를 느끼지만 ‘정품 오스틴’만을 지키려는 완고한 고집 앞에선 더 큰 위협을 느낀다.

오히려 원전과 복제물, 과거와 현재,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경계들을 허물면서 무수히 복제되는 오스틴‘들’의 다양한 존재이유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이다. 오스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대중문화상품을 놓고서 그것이 원작에 충실한가만을 일면적으로 따져서는 자칫 문자매체의 우월성을 전제한 논리로 환원되기 쉬우며 오스틴 현상에 대한 생산적인 논쟁을 기대하기 어렵다. 오스틴이 우리 시대 ‘크로스오버’ 문화현상의 흥미로운 사례가 된 이상 ‘진짜 오스틴’을 복원하는 일보다 오스틴‘들’의 아우성에 귀 기울이고 또 이참에 해석의 다양성, 취향, 대중문화, 매체의 이질성 등 연관된 주제를 포괄적으로 고민해보는 것이 훨씬 즐겁고 유익하다고 믿는다.


2. 영화와 소설 사이

오스틴 소설을 하나의 ‘원전’ ‘기원’ ‘시작’으로 절대화하고 가공된 대중문화 속의 오스틴‘들’을 ‘이차적’ 텍스트로 차별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애초에 ‘원작’이 있었다는 사실을 하나의 출발점으로 전제하는 일은 필요하다.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각색 작업을 어떤 식으로든 평가하려면 원작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를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제프리 와그너는 각색을 원작에 충실한 순서대로 ‘전환’(transposition), ‘논평’(commen­ tary), ‘유비’(analogy)로 나눈 바 있고 더들리 앤드류는 ‘변형’(transformation), ‘교차’ (intersecting), ‘차용’(borrowing)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단순하고 형식적인 분류법에 딱 맞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Geoffrey Wagner, The Novel and the Cinema (Rutherford, NJ: Fairleigh Dickinson UP 1975), Dudley Andrew, Concepts in Film Theory (Oxford: Oxford UP 1984) 참조.

각색과정에서 집중과 선택이 어떤 방향에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잠시 후 ꡔ오만과 편견ꡕ/<오만과 편견>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원작과 영화의 관계에 대한 다소 원론적인 얘기를 하려 한다. 소설을 ‘읽는’ 일과 영화를 ‘보는’ 일는 두가지 서로 다른 경험으로 구별될 수밖에 없다. 특히 오스틴 소설은 ‘읽는’ 재미가 각별한데, 서술자의 생각과 등장인물의 내면을 자유롭게 오가는 ‘자유간접화법’의 역할이 크다. 서술자는 특정 등장인물의 시각으로 걸러진 판단을 자연스럽게 특권화하는가 하면 필요에 따라 그 인물과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기도 하면서 다성적인 목소리를 창조한다. 오스틴의 자유간접화법에 관한 소개로는 Norman Page, The Language of Jane Austen (New York: Barnes and Noble 1972)이 대표적이다.

여주인공의 속마음을 넘나들면서 그녀의 판단을 신뢰하다가도 그녀의 문제를 지적하는 데에도 게으르지 않은 서술자의 목소리가 두드러진 소설인 ꡔ에마ꡕ를 영화로 옮길 경우 여주인공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voice over narration)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영화적 대안일 수 있고 실제로 기네스 펠트로(Gwyneth Paltrow)가 나오는 <에마>와 <클루리스>가 이 기법으로 에마의 속마음을 생생하게 되살리지만 여전히 서술자의 복잡한 태도가 충분히 소개되지 않는 한계가 있다. Hilary Schor, “Emma, Interrupted: Speaking Jane Austen in Fiction and Film,” Jane Austen on Screen, ed. Gina MacDonald & Andrew MacDonald (Cambridge: Cambridge UP 2003) 144~74면 참조.

ꡔ에 마ꡕ의 첫 문장에서 서술자는 에마가 “세상의 가장 좋은 축복을 다 합해놓은 듯”해서 “그녀를 신경 쓰이게 하거나 짜증나게 하는 일은 거의 없이” 살아간다고 주인공을 소개하지만 막상 바로 이어지는 에피소드들은 에마가 지극히 평탄한 삶을 사는 복 많은 아가씨라는 쉬운 믿음을 뒤집는다. 원문을 소개한다. 텍스트는 Emma, ed. James Kinsley (Oxford: Oxford UP 1995)이다. “Emma Woodhouse, handsome, clever, and rich, with a comfortable home and happy disposition, seemed to unite some of the best blessings of existence; and had lived nearly twenty­one years in the world with very little to distress or vex her.”(1면)

“신경 쓰이게 하거나 짜증나게 하는 일”이 없다는 건 아무런 힘든 일도 없다는 뜻이 아니며, “세상의 가장 좋은 축복” 또한 성급한 단정이다. 동시에 “신경 쓰이게 하거나 짜증나게 하는 일”이 무수히 발생한다한들 결국 “신경 쓰이게 하거나 짜증나게 하는 일” 정도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의미도 숨어 있다. 그러니까 서술자는 에마가 처한 삶의 열악함과 매사를 “신경 쓰이게 하거나 짜증나게 하는 일”의 차원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에마 자신의 협소한 세계관을 공평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 그 유명한 ꡔ오만과 편견ꡕ의 도입부를 보자. “재산을 가진 미혼 남성에게 아내가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루 인정된 진리이다. 이런 남성이 이웃이 될라치면 그의 감정이나 생각이 하나도 알려지지 않았어도 이 진리가 주변 가족들의 마음에 워낙 강하게 심어져 있으니 그를 자기네 딸들 가운데 누군가에 의해 당연히 획득될 재산으로 여기고 만다.” 역시 원문을 덧붙인다. 텍스트는 Pride and Prejudice, ed. James Kinsley (Oxford: Oxford UP 2004)이다. “It is a truth universally acknowledged, that a single man in possession of a good fortune, must be in want of a wife. However little known the feelings or views of such a man may be on his first entering a neighbourhood, this truth is so well fixed in the minds of the surrounding families that he is considered as the rightful property of some one or other of their daughters.”(1면)

‘돈 가진 남성은 아내를 찾게 마련이다’라는 사실은 토를 달 수 없는 진리인가? 18세기 영국 문학을 줄줄이 꿰고서 열다섯살에 역사책을 패러디한 「영국의 역사」(The History of England)를 쓰면서 ‘편향되고 편견에 찬 무식한 역사가’가 쓴 책이라 ‘날짜도 거의 없을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던 오스틴, 그리고 앞서 쓴 소설 ꡔ노쌩거 사원ꡕ(Northanger Abbey)에서 “역사책엔 성직자들과 왕들의 다툼, 전쟁과 전염병이 가득해요. 남자들은 다 소용 없고 여자는 아예 안 나오죠. 정말 지루해요. 다 만들어낸 얘기인데도 어쩜 그렇게 재미없는지 참 이상하다니까요”라고 천연덕스레 투덜거리는 ‘무식한’ 여주인공을 그렸던 오스틴이라면 여기서도 ‘돈 가진 남성은 아내를 찾게 마련이다’는 ‘일반론’에 힘을 실어주기는커녕 딴죽을 걸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영국의 역사」의 인용은 http://www.bl.uk/collections/treasures/austen/austen_broadband. htm 참조. ꡔ노쌩거 사원ꡕ의 인용은 Jane Austen, Northanger Abbey, Lady Susan, The Watsons, Sanditon, ed. John Davie (Oxford: Oxford UP 1990) 84면.

오스틴은 ‘돈 가진 남성은 아내를 찾게 마련이다’라는 ‘진리’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진리’를 무작정 믿고 싶어하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두루 인정되는 진리’라는 이름의 지긋지긋한 인식론적 폭력에 대해 쓰고 있으며,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서도 무작정 ‘진리’를 신봉하는 베넷 부인으로 대변되는 사람들의 자기 중심성을 지적한다. 베넷 부인을 통해 오스틴이 제기하는 인식의 폭력성이라는 주제는 소설의 고비마다 일관적으로 나타나는데, 그런 점에서도 소설 첫장의 첫 대목이 선사하는 함축의 기교가 빼어나다.

앞에 소개한 두 대목은 오스틴 소설의 ‘읽는’ 재미를 드러내는 간략한 사례들로서 오스틴 소설을 읽는 경험이 어떤 종류의 지적 노동인가를 단적으로 예시한다. 문자 텍스트의 중층적인 의미작용을 중요하게 생각할수록 원작에 비해 영화는 너무 얇고 가벼우며 기껏해야 영화는 원작에 대한 (많은 경우에 아주 부실한) 보충자료일 뿐이라는, 즉 영화가 소설보다 못하다는 결론이 강화되기 십상이다. 예를 들면 Roger Gard, “A Few Skeptical Thoughts on Jane Austen and Film,” Jane Austen on Screen 10~12면 참조할 것. 제법 알려진 오스틴 연구자들 중에 이나마의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드문 편이고, 대체로 영화화에 관대하다.

결국 오스틴은 읽어야 제 맛이라는 결론인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자 텍스트의 절대적 우위를 상정하는 것일 뿐 매체의 고유성을 고려하는 태도는 아니다. 문자와 이미지의 차이에 관한 연구로는 W. J. T. Mitchell, Iconology: Image, Text, Ideology (Chicago: U of Chicago P 1986) 참조. 제임슨, 푸꼬(Michel Foucault), 리오따르(Jean­Francois Lyotard), 들뢰즈(Gilles Deleuze), 지젝(Slavoj Žižek)에 이르기까지 시각/영상 이미지와 문자 텍스트의 재현방식의 차이에 관한 사유의 역사는 길다.

영화는 영화로, 즉 시각적 영상 이미지로 보여지고 분석되어야지 문학작품의 대용물 정도로 치부될 수 없다고 본다면 오스틴 영화를 소설과 대등하게 경쟁하는 하나의 독립된 재현 형식으로 대접할 필요가 있다. 원작에 없는 장면이 추가되거나 원작에서 사소한 비중을 가진 인물이 부각되는 것과 같은 각색 과정의 필연적인 선별 작업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으면서 상업화의 위험을 일면적으로 과장하는 태도와도 거리를 두고, 영화매체의 가능성과 해석의 다양성을 신뢰하고 지지하는 입장이다. 이때에도 영화가 원작에 얼마나 충실한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 질문은 영화를 문자 텍스트의 의미작용으로 환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원작과 영화의 위계를 거부하고 원작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경쟁시키고 소통시킬 목적으로 제기되는 생산적인 질문이 된다. 영화는 원작이 가진 하나의 의미에 종속되기를 거부하고, 원작에게 빛과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가령 패트리샤 로제마(Patricia Rozema)의 <맨스필드 파크>(Mansfield Park, 1999)는 소설 ꡔ맨스필드 파크ꡕ를 다시 꺼내 읽게 만들고 소설과 영화의 대화 가능성을 고민하게 만든 훌륭한 예라 할 만하다. 이 영화는 말끔하게 잘 차려입은 영국인들만으로 스크린을 채우던 기존 오스틴 영화의 관습을 깨고 카리브 해 노예농장의 원주민 노예들을 강렬한 영상 이미지를 활용하여 등장시킨다. ꡔ맨스필드 파크ꡕ에는 여주인공 패니 프라이스(Fanny Price)가 카리브 해 농장을 돌보고 돌아온 토머스 경(Sir. Thomas)에게 현지 사정을 물었다가 아무 대답도 못 들었다고 진술하는 짧은 장면이 나온다. 영화는 스쳐지나가듯 언급된 토머스 경의 ‘침묵’을 노예착취에 기생하는 영국 지배계급의 윤리 불감증에 대한 상징으로 확대해서 착취당하는 노예의 존재를 충격적인 영상 이미지로 재현한다.

오스틴 영화를 대하는 대조적인 방식에는 문자매체와 영상매체의 이질성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개입해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popular culture)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깔려 있다. 오스틴 현상 자체가 대중문화의 한 부분인 만큼 오스틴 현상에 대한 반응은 어떤 면에서 대중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말해주는 지표일 수도 있다. 오스틴 영화에 부정적인 이유 중에는 영화가 ‘할로퀸 문고처럼 만들기’(harlequin­ization)나 ‘눈요기로 만들기’(prettification)에 희생되었다는 비판이 유력하다. ‘harlequin’은 1950년대부터 캐나다와 미국에 값싼 문고판 로맨스 소설을 공급해 성공한 출판사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할로퀸 로맨스가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된 것은 1986년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초창기에 비해 줄긴 했으나 아직 독자층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harlequin­ization’은 Deborah Kaplan, “Mass Marketing Jane Austen: Men, Women, and Courtship in Two of the Recent Films,” Persuasion 18 (1996) 171~81면에서, 그리고 ‘prettification’은 Carol Dole, “Austen, Class, and the American Market,” Jane Austen in Hollywood, ed. Linda Troost & Sayre Greenfield (Lexington: U of Kentucky P 2001) 58~78면에서 인용했다. 대체적으로 ‘할로퀸 문고처럼 만들기’라는 말에는 (고상한) 오스틴 소설을 (싸구려) 로맨스로 부당하게 각색했다는 비판이 함축되어 있지만 오스틴 소설 자체의 로맨스 요소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그 비판의 정도도 구별된다.

반면에 오스틴 영화를 긍정하는 입장은, 이를테면 영화가 할로퀸 문고판 로맨스를 닮고 볼거리 많은 코스튬 드라마처럼 보이는 면이 있거나 말거나 거기서 나름대로 위안받고 즐기면 그만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영화가 할로퀸 문고나 코스튬 드라마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다른 무엇’이기도 해서 그 ‘다른 무엇’으로부터 주류에서 소외되었던 소수의 저항을 읽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다. 어쩌면 실제로는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입장들을 조금씩 탄력적으로 조합한 채 영화를 대하는 것이 일반적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오스틴 영화에 접근하는 다양한 태도의 기저에는 영화매체를 비롯한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판단이 개입해 있다. 주지하다시피 아도르노(Adorno)와 호르크하이머(Horkheimer)로 대변되는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이해한 ‘대중문화’(mass culture)는 대중의 단순한 욕구를 채워주고 더 본질적인 욕구를 봉쇄함으로써 자본주의에 순응하고 살도록 길들이는 기제다. Theodor Adorno, “The Schema of Mass Culture,” The Culture Industry: Selected Essays on Mass Culture, ed. J. M. Bernstein (London: Routledge 2001) 53~84면 참조.

한편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을 비롯한 ‘문화 연구’(cultural studies) 이론가들은 대중문화 영역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구현되는 메커니즘을 밝혀내면서도 변화와 저항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대중문화가 미디어 메씨지를 ‘코드화’(encoding)하더라도 그 메씨지가 수용자들에게 의도한 대로 전달되지 않으며 수용자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해독’(decoding)해낸다는 홀의 고전적인 분석은 왜 대중문화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고 미완성이며 그래서 가능태/잠재태로 적극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한다. Stuart Hall, “Encoding, Decoding,” The Cultural Studies Reader, ed. Simon During (London: Routledge 1993) 90~103면 참조.

문화상품의 생산과 수용의 관계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으며 대중문화의 지형은 수용자의 적극적인 협상, 타협, 저항을 통해 끊임없이 재편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한 극단에 서 있는 자유주의적 ‘문화적 포퓰리즘’(cultural populism)은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다양성을 옹호하고 ‘팬 문화’(fan culture)의 참여성을 중요한 가치로 내세운다. ‘문화적 포퓰리즘’에 관해서는 Jim McGuigan, Cultural Populism (London: Routledge 1992); John Fiske, Understanding Popular Culture (London: Unwin Hyman 1989) 참조. ‘팬 문화’를 두고 벌어진 논쟁에 관해서는 Henry Jenkins, Textual Poachers: Television Fans & Participatory Culture (New York: Routledge 1992), Matthew Hills, Fan Cultures (New York: Routledge 2002) 참조할 것.

이러한 두가지 대중문화론과 거리를 두면서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이나 낙관을 모두 피하려는 대안적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여건종은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발원한 ‘비판적 대중문화론’과 스튜어트 홀을 중심으로 발전한 ‘(포스트모던) 문화대중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할 ‘비판적 문화대중주의’를 제안한다. 「영문학과 문화연구: 대중의 문화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ꡔ안과밖ꡕ 20호(2006 상반기) 66~89면 참조.

그런데 비판과 낙관을 모두 경계하고 구체적인 ‘물건’의 수준을 제대로 따져봐야 한다는 주장은 그 실질적인 내용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대중문화를 비판적으로 규정하는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결국 수준의 질적 평가를 내세워 다양성의 가치를 억압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지나친’ 비판과 낙관은 ‘지나치므로’ 당연히 피해야 하고 수준도 당연히 따져야 하는 것이니까, 이 주장이 선언으로 그치지 않고 힘을 발휘하려면 무엇이 왜 지나친지, 그리고 누구에 의해 그렇다고 판명되었는지 등을 세세하게 물어야 하고 무엇보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이후 많은 문화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질적 평가의 ‘기준이라는 것’에 대해 솔직하게 논의해야 한다. 예컨대 누가 오스틴의 원작을 ‘제대로’ ‘충실하게’ 재현했는가를 묻는 것은 궁극적으로 누가 오스틴을 소유할 ‘정당한’ 권리가 있는가를 묻는 일이며, 이 문제는 다시 말하면 누가 ‘역사’를 재현할 권리가 있는가를 묻는 일이다. Deirdre Lynch, 앞의 글 72면.

오스틴 소설을 할로퀸 문고나 코스튬 드라마로 축소/왜곡했다고 비판할 때 여기에는 할로퀸 문고나 코스튬 드라마는 정당한 역사가 아니라는 전제가, 즉 ‘역사’란 로맨스나 패션을 배제한 다른 곳에 면면히 존재한다는 전제가 작동한다. 오스틴 현상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를테면 ‘로맨스나 패션은 역사가 아닌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이 질문의 가능성이 계속 실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원작에 충실하다는 평가를 내릴 때 그 평가를 정당화하는 담론의 권력구조에 둔감하지는 않는지, 대중문화상품을 평가의 대상으로 설정하면서 그것을 특정한 메씨지와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일방적으로 전파하는 수동적인 실체로만 여기지 않는지, 대중문화상품의 생산과 소비를 각각 독립되고 단절된 과정으로만 편협하게 이해하지 않는지, 이미지와 문자 텍스트 사이에 존재하는 매체의 차이가 의미를 해석하고 인식하는 과정에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지 등의 까다로운 질문으로 우리를 자극하는 것, 나는 이것이 넓은 의미에서 오스틴 현상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궁극적인 성찰적 기능이라고 믿는다.

그런 맥락에서 ꡔ오만과 편견ꡕ이나 ꡔ에마ꡕ의 ‘읽는’ 재미가 영화적으로 재현될 수 없다고 해서, 또는 ꡔ오만과 편견ꡕ이나 ꡔ에마ꡕ를 각색한 영화가 원작의 복잡한 역사적 문맥을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관습으로 해소해버렸다고 해서, 영화는 소설보다 못할 운명이고 영화는 원작소설보다 열등한 ‘카피’(copy)에 불과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권위적인 발상이다. 영화는 물론 원작에 대한 더 풍부하고 다양한 이해를 위해서라도 각색을 거쳐 새롭게 탄생한 텍스트를 ‘원본’에서 이탈한 열등한 카피로만 이해하려는 우리의 문화적 관습에 대한 과감하고 발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3. 차이와 반복: <오만과 편견>들

이제부터 오스틴 영화 중 세 편의 <오만과 편견>에 대한 감상을 통해 다시 씌어진 오스틴‘들’을 비교하고 또 각 영화가 담고 있는 당대 현실의 변화를 읽어볼 차례다. 1940년 할리우드산 <오만과 편견>에 대해 말하자면 이 영화가 아주 미국적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겠다. 영화 초반에 워털루 전쟁(1815)과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저서가 언급되고 멘델스존(Mendelssohn, 1809~1847)의 피아노곡이 연주되는 등 전체적으로 1813년에 출판된 ꡔ오만과 편견ꡕ의 시간적 배경과 뭔가 잘 맞지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는데, 영화는 점점 영국을 벗어나 아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1939)를 닮은 듯하다. 메어리 파브렛에 따르면 오스틴 소설에 남북전쟁의 맥락을 덮어씌운 것은 미국이 오스틴을 자기 식대로 전유하는 전형적인 사례다. 미국이 이해하는 오스틴은 사회문제나 역사적 상처에 초연한 소설가다. 인종문제를 둘러싼 아픈 역사로부터 초연해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오스틴의 인물들을 (인종문제 없는 세상에 사는) 자유로운 개인들로 상상한다는 것이다. Mary Favret, “Free and Happy: Jane Austen in America,” Janeites: Austen’s Disciples and Devotees, ed. Deirdre Lynch (Princeton: Princeton UP 2000) 166~87면 참조.

ꡔ멋진 신세계ꡕ(Brave New World, 1932)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가 각색하고 영국배우 그리어 가슨(Greer Garson)과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가 (애초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출연했던 배우들에게 맡기려고 기획되었던) 남녀 주인공 역을 연기한 이 영화는 시카고 출신 감독이 미국 메이저 영화사의 투자로 만들었다. 메어리 파브렛(Mary Favret)이 명쾌하게 지적했듯이 영화의 장면과 대사들은 1800년경 영국의 작은 마을이라기보다 1850년대 미국 남부 마을에서 나온 듯하다. 이 영화를 미국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련하게 깔린 남북전쟁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오스틴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인 계급문제를 비껴가도록 다시 씌어진 줄거리의 변화이다. 소설에서 다씨의 펨벌리(Pemberley) 저택은 엘리자베스와 다씨의 계급 차이를 드러내는 장소이며, 이 저택에서 엘리자베스와 다씨가 만나는 순간은 계급 차이가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확인될 때 가장 열렬하게 사랑을 느끼는 엘리자베스의 욕망을 생생하게 담은 명장면을 이룬다.

영화는 펨벌리 장면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엘리자베스를 기존 계급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고 극렬하게 반대하던 캐서린 드 버그 부인(Lady Catherine de Bourgh)을 겉으로는 오만해도 엘리자베스와 다씨의 사랑을 내심 후원해주는 통 큰 귀부인으로 바꿔놓는다. 캐서린 드 버그 부인은 리디아와 위컴의 결혼을 도운 다씨의 선행을 엘리자베스에게 직접 알려주고 다씨를 격려하는 ‘쿨한’ 관용을 베풂으로써 이들의 결합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연인 사이의 계급문제를 포함한 사회적 문맥을 단순화하고 로맨스를 강조하는 것은 오스틴 영화 일반에 관철되는 특징이다. ꡔ에마ꡕ의 에마와 나이틀리나 ꡔ쎈스와 쎈서빌러티ꡕ의 엘리너 대시우드(Elinor Dashwood)와 에드워드 페라스(Edward Ferrars) 커플 앞에도 장벽이 놓여 있어 매끄러운 결합이 힘든 상태에 있지만 영화는 그런 장벽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처음부터 이들의 로맨틱한 관계에 집중한다. ꡔ쎈스와 쎈서빌러티ꡕ에서 오스틴은 불친절하게도 엘리너와 에드워드의 관계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는데, 나는 바로 여기에 엘리너와 에드워드의 됨됨이를 평가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앙 리 감독의 <쎈스와 쎈서빌러티> 초반부는 엘리너와 에드워드의 연애를 자상하게 보여주면서 소설에서 모호하게 남아 있는 이 두 사람의 심리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정의한다. 소설을 읽을 때 엘리너가 왜 에드워드를 좋아하는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마지막의 청혼 장면에 이르러서도 에드워드의 모호함을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는데, 영화를 볼 때는 이들을 잘 어울리는 커플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영화에서 엘리너를 연기한 에마 톰슨(Emma Thompson)이 각색의 책임자였다. 에드워드 역을 지나치게 멋진 휴 그란트(Hugh Grant)가 맡은 것부터가 원작을 거스른다는 지적이 많지만 이 영화가 가진 호소력은 바로 그런 의도적인 각색 덕분이다. 물론 이 영화가 원작에서 멀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길게 논할 지면이 부족하지만 막내딸의 비중을 상당히 키운 것이나 제닝스 부인(Mrs. Jennings)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강조한 대목 등에서 에마 톰슨의 창조적 다시 쓰기 능력이 신선하게 살아난다는 점만을 덧붙인다. Martine Voiret, “Books to Movies: Gender and Desire in Jane Austen’s Adaptations,” Jane Austen and Co. 229~45면 참조.

ꡔ에마ꡕ에서 나이틀리는 에마의 아버지뻘이자 이미 에마와 사돈지간이므로 근친 관계에 있다. 성 역할의 분리와 나이 차이 또한 이들의 결합을 쉽게 상상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두 편의 <에마>는 (특히 기네스 펠트로가 나오는 <에마>는 더욱) 이들의 나이 차이를 거의 고려하지 않고 이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장면보다 함께 어울리는 장면을 많이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로맨스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위해 원작이 로맨스의 관습을 내부로부터 조금씩 허물면서 구축하는 ‘반(反)로맨스’ 맥락을 무시해온 면이 있고, 이에 대한 불만이 오스틴 소설을 할로퀸 문고처럼 각색했다는 정당한 비판에 집약되어 있다. 하지만 이 비판이 놓친 점도 있다. 영화는 남녀가 어울리는 장면을 통해 전통적인 로맨스 플롯의 남녀 사이 권력관계를 수정함으로써 소설의 ‘반로맨스’ 맥락을 보충한다. 이를테면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가 다씨 앞에서 멋있게 활쏘기를 선보이고, <쎈스와 쎈서빌러티>에서 매리앤은 연인과 함께 셰익스피어를 읽는다. 여주인공을 남성과 동등한 신체적․정신적 활력과 소양을 갖춘 능동적인 주체로 그림으로써 로맨스에 ‘의해’ 행복해지는 여성이 아니라 로맨스를 주도하는 여성을 창조하는 효과가 있다. 할로퀸
로맨스를 닮은 것 같아도 들여다보면 다른 구석이 있는 것이다.

오스틴 소설은 남자 주인공에 대해 별로 할말이 없다. 말수 적고 어딘지 자기 세계에 몰입해 있는 남자 주인공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모호한 경우가 많다. 영화는 남자 주인공의 모호함이나 로맨스의 불확실성을 관용하지 않는다. 소설에서 정확하게 알 수 없던 남자 주인공들을 영화는 자상하게 그려낸다. 1995년에 나온 BBC 미니씨리즈 <오만과 편견>은 다씨를 위한 다씨에 의한 다씨의 영화이며, 바로 그런 방식으로 ‘여심’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영화다. 영화의 첫 장면은 멋있게 들판을 가로지르며 말을 타고 달려와 네더필드(Netherfield) 저택을 바라보는 두 남자를 소개한다. 그리고 두 남자의 말 달리기를 우연히 지켜보는 젊은 여성이, 등을 반듯하게 세우고 기품있는 자세로 말을 달리는 한 남자가 동행한 다른 남자를 앞질러 호쾌하게 달려 나가는 장면을 무심히 바라보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렇게 영화는 ‘더 잘생기고 말을 더 잘 타는 남자’인 다씨를 전면에 내세워놓고 관객의 시선을 다씨를 바라보는 엘리자베스의 시선에 동화시킨다. 이후 영화는 엘리자베스를 쳐다보는 다씨의 눈길을 거의 지배적인 미장센으로 활용한다. 영화의 볼거리는 엘리자베스의 몸이 아니라 엘리자베스를 향한 다씨의 눈길이며, 관객의 시선은 바로 다씨의 눈길에 꽂힌다. 영화가 어떻게 여성의 몸을 남자가 바라보는 대상으로 조작하는지에 관한 고전적인 분석으로 Laura Mulvey, “Visual Pleasure and the Narrative Cinema,” Screen 16 (1975) 6~18면 참조. 이 영화에서 다씨의 몸이 (여성)관객의 ‘시선’(gaze)의 대상이 되는 현상은 멀비가 분석한 정통 할리우드 영화문법에 맞지 않는다.

다씨는 마치 스크린을 뚜벅뚜벅 걸어 나와 현대 관객들에게 말을 걸듯 생생한 욕망의 주체이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표현하는 강렬한 눈빛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카메라는 놓치지 않는다. 보잘것없는 집안의 총명한 딸 엘리자베스를 사랑하게 된 귀족신사 다씨는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 할 일을 챙기면서 매사에 흐트러짐이 없이 처신하자 당황한다. 병으로 앓아누운 언니를 만나러 엘리자베스가 네더필드를 찾아와 머무는 동안 다씨는 점점 더 혼란에 빠진다. 카메라는 다씨의 얼굴을 오래 클로즈업하면서 엘리자베스를 향한 욕망과 그것을 억누르려는 자의식이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갈등을 부지런하게 잡아낸다. 이렇게 다씨의 갈등이 고조되는 지점에서 영화는 그의 복잡한 심정을 포착하는 한 방법으로 목욕 장면을 보여준다. 다씨의 어깨 위로 물을 쏟아 부은 늙수그레한 하인이 욕조에서 일어난 다씨에게 가운을 걸쳐주자 그가 가운을 여미며 창가로 걸어가 창밖을 내려다본다. 창밖에는 개와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엘리자베스의 건강한 뜀박질이 펼쳐지고 있고,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다씨의 얼굴에는 애틋한 미소가 순간적으로 스친다. ‘점잖은’ 오스틴의 소설세계에서 남자 주인공의 목욕 장면이란 어이없고 황당한 ‘데코룸’(decorum)의 위반이겠으나 소설이 나온 지 180여년이 흐른 시대의 관객은 ꡔ오만과 편견ꡕ을 다씨의 억압된 욕망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그 에로티시즘을 태연하게 즐긴다.

첫번째 청혼에서 보기 좋게 거절당한 다씨의 좌절된 쎅슈얼리티(sexuality)가 이 영화를 소설과 결정적으로 구별한다. 거절당해본 적이 없는 오만한 남자가 거절당했을 때의 상처와 고통, 자기혐오와 분노는 다씨를 연기해 스타덤에 오른 콜린 퍼스(Colin Firth)의 빼어난 표정연기를 통해 스크린 위에 실감나게 재현된다. 다씨는 땀에 흠뻑 젖은 흰 셔츠를 펄럭이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펜싱을 하고, 지금의 고통을 극복해야 한다(I shall conquer this!)고 다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펨벌리를 향한 마차를 탄 엘리자베스 일행과 거칠게 말을 타고 펨벌리를 향한 다씨가 번갈아 화면을 채운다. 격한 운동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다씨는 말에서 내려 펨벌리의 숲가 연못으로 뛰어든다. 그 다음 장면에서 다씨의 물이 뚝뚝 떨어지는 곱슬머리와 반쯤 헤쳐진 셔츠, 그리고 그를 만난 엘리자베스의 놀라고 미안한 눈길, 그리고 그 눈길을 받는 다씨의 유순해진 몸짓에 묻어나는 반가움이 모두 한 순간에 포착됨으로써 영화는 사실상 절정에 이른다. 한동안 영국에서 가장 많이 열린 모임이 바로 한 무리의 여성들이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이 문제의 수영 장면을 반복해서 돌려보며 소리 지르고 열광하는 이른바 ‘다씨 파티’였다는 사실은 이 장면의 에로티시즘이 여성들에게 가지는 엄청난 호소력을 말해준다. Devoney Looser, “Feminist Implications of the Silver Screen Austen,” Jane Austen in Hollywood 160면 참조.
다씨의 (재산, 지위, 능력이 아니라) ‘고통’이 여성 관객에게 그토록 매력적이라는 데 이 영화의 로맨스 플롯의 새로움이 있다.

2005년에 나온 <오만과 편견>은 어리고 여린 이웃집 처녀총각의 일상적인 로맨스를 보는 느낌이 묻어나는 귀여운 영화다. 베넷가의 저택은 정말이지 촌스러워서 정돈되지 않은 가구들과 옷가지들이 사방에 널려 있고 가축 떼는 집안 여기저기를 유유하게 지나다니며 장식이 없는 드레스를 편하게 걸친 베넷가의 딸들은 낄낄대며 몰려다닌다. 식탁 앞에 모인 가족들은 전혀 격식을 차리지 않고, 엘리자베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을 빨면서 음식을 먹는다. 기존 오스틴 영화는 여성 인물이 산책을 나갈 때 걸치는 숄이나 모자의 단아함, 무도회에 갈 때 끼는 장갑의 산뜻함과 헤어스타일의 우아함, 남성도 아름답고 멋있게 옷을 입었던 ‘섭정기’(Regency)임을 말해주는 깔끔한 신사복, 계급에 따라 달라지는 마차의 종류, 복잡하지만 엄격하게 지켜지는 호칭 체계, 견고한 계급적 질서와 성적 위계, 편지가 오가는 방식과 인사를 나누는 매너,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형식으로 차를 마시는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평화로운 응접실에서의 한때를 종종 보여주었고, 이런 물질적 풍요로움의 재현이 오스틴 영화 열풍의 한 동력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조 라이트(Joe Wright) 감독의 <오만과 편견>은 이 관습을 깨고 시골 마을 딸부자집의 정신없이 분주한 일상을 있는 그대로, ꡔ가디언ꡕ(Guardian)에 실린 한 영화평에 따르면 ‘거친 리얼리즘’(gritty realism)으로 보여준다. Robert McCrum, “Austen Powers,” Guardian 2005년 9월 11일자 참조.

이러한 새로움이 두드러진 곳은 초반의 무도회 장면이다. 멋있게 차려입은 선남선녀들이 사뿐사뿐 스치면서 움직이는 장면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헤어스타일과 복장이 평상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발을 쿵쾅쿵쾅 구르고 흥겹게 박수를 치면서 춤추는 시끌벅적한 ‘카니발’ 분위기에 신선한 충격을 받을 법하다.

앤서니 레인(Anthony Lane)은 ꡔ뉴요커ꡕ(The New Yorker)에서 오스틴이 ‘브론테처럼 되었다’(Brontëfied)는 말로 이 영화가 기존 오스틴 영화가 관습적으로 보여줬던 시각적 풍요를 답습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Anthony Lane, “Pride and Prejudice,” The New Yorker 2005년 11월 14일자 참조.

기존 오스틴 영화들에 비하면 이 영화 속의 살림살이는 훨씬 가난하고 풍경은 덜 인위적이며 인물들은 한결 분방하고 꾸밈이 적다. 거추장스런 디테일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소박한 쎄팅을 선택한 것은 ꡔ오만과 편견ꡕ에 관한 하나의 해석이자 기존의 오스틴 해석의 역사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영화는 ꡔ오만과 편견ꡕ을 우리 시대의 평범한 가족 이야기에 가깝게 재구성한다. 간소해지고 소박해진 분위기에 힘입어 엘리자베스와 다씨의 로맨스는 계급과 매너를 바탕으로 짜여진 19세기의 역사적 문맥을 벗어나 현재의 연애 감성에 맞게 새롭게 씌어진다. 엘리자베스와 다씨는 어딘가 소심하고 불안한 구석을 가진 청춘남녀의 이미지에 가깝다. 소설에서 첫번째 청혼을 거절하는 대목을 보면 엘리자베스와 다씨가 예의를 다 갖춘 정중한 문장을 구사하며 다툰다.

1995년의 <오만과 편견>은 언쟁이 끝난 뒤 발을 구르며 눈물을 흘리는 엘리자베스와 분노에 찬 다씨의 거친 발걸음을 덧붙여 두 사람의 감정을 드러낸 바 있다. 라이트 감독은 엘리자베스와 다씨가 폭우가 쏟아지는 야외에서 얼굴을 가까이 마주한 채 격렬하게 싸우도록 연출함으로써 이들이 경험하는 감정의 출렁임을 감각적으로 담아낸다. 또 소설의 펨벌리 방문 장면에서 엘리자베스를 사로잡은 것은 청년 다씨의 초상화였는데, 이 영화에서 초상화는 조각으로 대체된다. 엘리자베스는 다씨의 조각상에 매료될 뿐 아니라 갤러리를 가득 채운 눈부신 조각품들이 재현한 풍성한 육체의 아름다움에 크게 감동한다. 소설의 두번째 청혼 장면은 정원을 산책하면서 서로의 진심을 고백하는 것인데, 영화는 밤잠을 이루지 못한 엘리자베스와 다씨가 안개 낀 새벽 산책길에서 만나도록 설정한다. 에스코트도 없이 그 시간에 그런 ‘부실한’ 복장으로 들판을 산책한다는 것은 다씨의 목욕 장면만큼이나 생뚱맞지만, 앞서 폭우 속의 격렬한 논쟁이라든가 펨벌리에서의 조각품 감상과 같은 도드라진 장면들을 통해 엘리자베스와 다씨의 감성이 한껏 부각되었기 때문인지 중요한 프러포즈 장면이 몽환적인 새벽안개와 눈부신 아침햇살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4. 로맨스와 여성의 욕망

세 편의 <오만과 편견>에 공통점이 있다면 ꡔ오만과 편견ꡕ을 창조적으로 위반한다는 것, 그리고 그 위반의 양상이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 영화를 견인해가는 문화적 코드는 로맨스다. 오스틴 소설의 매력을 한두마디로 요약하기는 불가능하고 ‘남녀의 짝짓기’라는 요약이야말로 부실하기 짝이 없는 단순화이지만 ‘로맨스’로서 (범위를 한정하고 봤을 때) 오스틴 소설은 거의 완벽하다. 로맨스로 포괄할 수 있는 모든 주제들을 완벽에 가깝게 버무려놓은 오스틴 소설에서 해피엔딩은 그저 덤일 뿐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오스틴의 서술자는 언제나 장난스럽게 해피엔딩의 필연성을 고백하면서 소설의 관습성을 인정한다. 문제는 이렇게 덤으로 얹힌 해피엔딩을 소설의 궁극적 도달점인 양 과장하는 경향이 (오스틴 소설 비평의 역사에서도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으며) 각색의 방향이자 영화홍보의 핵심 전략으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세 편의 <오만과 편견> 모두 로맨틱 코미디로 수용되어왔다.

로맨스는 친여성적인 장르로 인식되어왔고 페미니즘과 복잡하고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오스틴 소설을 할로퀸 문고 로맨스처럼 만들어버렸다는 비판이나 앞서 언급한 ‘다씨 파티’의 선풍적인 유행에 쏟아진 영국 언론의 조롱은 로맨스 장르에 대한 비판을 오스틴 영화에 적용한 대표적인 예이다. 로맨스 코드가 여성의 독립과 해방을 가로막는 가부장제를 강화할 뿐인데도 여성들이 로맨스에 중독에 가까운 애정과 관심을 보이는 것은 문제라고 보는 고전적인 로맨스 비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는 로맨스의 인기를 여성적인 문화행위로 범주화하고 대중문화가 여성적 감상주의를 재생산한다는 지적으로도 이어지는데, 이 지적은 은연중에 단일하고 동질적인 여성성을 전제한다는 점, 그리고 감상적이지 않은 것과 여성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갈망을 강력한 남성성에 대한 암묵적인 승인으로 연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문제를 노정한다. 미국문학을 다룬 저서이지만 반(反)로맨스론과 연관된 흥미로운 논의로 Ann Douglas, The Feminization of American Culture (New York: Knopf 1977)와 Jane Tompkins, Sensational Designs: The Cultural Work of American Fiction 1790~1860 (New York: Oxford UP 1985)의 반론을 비교할 만하다. 한편 안드레아스 후이센은 반로맨스론이 ‘로맨스=대중문화=여성’이라는 낡은 공식에 기대고 있음을 비판한 바 있다. Andreas Huyssen, “Mass Culture as Woman: Modernism’s Other,” Studies in Entertainment: Critical Approaches to Mass Culture, ed. Tania Modleski (Bloomington: Indiana UP 1986) 188~207면 참조.

나는 오스틴 영화의 로맨스 플롯이 여성의 독립과 자유에 과연 득이 되는지를 마땅히 의심해야겠으나 로맨스 플롯이 주는 쾌락이 로맨스를 소비하는 여성의 일상에서 얼마나 절실한 경험이며 로맨스 플롯 속의 여성이 얼마나 유동적이고 모순적인 주체인가에 대해서도 면밀하게 짚어봐야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여성들이 좋아하면 그만이라고 강변하려는 것은 아니며 또 그럼으로써 여성을 로맨스의 소비주체로 비하하는 관행에 알게 모르게 편승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여성 관객이 해피엔딩 로맨스를 전면에 내세운 광고에 솔깃하여 영화관을 찾는다 하더라도 영화를 그런 틀에 맞춰서만 즐긴다고 할 수 있을지, 그리고 로맨스의 어떤 요소들이 어떤 식으로 경험되는지를 여성들의 주체적인 입장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하면서 로맨스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모색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할 따름이며, 그 작업의 기초를 닦는 의미에서 오스틴 영화의 로맨스가 자극하는 감수성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이 글의 결론 삼아 짤막하게 개진하고자 한다.

재니스 래드웨이(Janice Radway)는 여성을 보살피고 사랑할 줄 아는 따뜻한 인간으로 성숙한 남자 주인공의 존재가 여성 독자가 로맨스에서 성취하는 대리만족과 소망충족의 구심점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Janice Radway, Reading the Romance: Women, Patriarchy, and Popular Literature (London: Verso 1987). 래드웨이는 여성 독자들의 로맨스 ‘중독’은 가부장적 사회질서에 대한 탈출을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이면서 동시에 그 콘텐츠가 가부장제가 허용하는 환상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순응’이라는 모순적인 현상이라고 파악한다.

로맨스의 관건은 까다로운 여주인공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기를 낮출 줄 아는 남자 주인공에게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세 편의 <오만과 편견>이 이 공식을 배반한다고 생각한다. 엘리자베스를 위해 험한 일을 마다않는 다씨의 순정에 매혹되는 여성 관객의 감정은 남성에 의해 보호받고 사랑받으니까 좋다는 (여성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만족감에 멈추지 않는다. 세 편의 <오만과 편견>의 로맨스 플롯이 주는 쾌락은 전통적인 로맨스 비판론에서 제기한 바 있는 여성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신데렐라 판타지나 멜로드라마적 상상력과는 좀 다른 곳에서 온다. 예를 들어 1940년판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와 다씨의 결합이 가능한 것은 캐서린 드 버그 부인 때문이다. 다씨가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하도록 도와주는 캐서린 드 버그 부인의 존재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관객은 운 좋게 모든 걸 다 해결하게 된 엘리자베스뿐만 아니라 권력을 소유한 캐서린 드 버그 부인에게도 동일시의 욕망을 느낄 수 있다.

다씨 앞에서 마치 한수 가르치듯 멋있게 활을 쏘던 엘리자베스의 카리스마가 캐서린 드 버그 부인의 현실적 권력으로 치환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됨으로써 엘리자베스가 전통적 로맨스 구조로 편안하게 포섭되더라도 영화 전체는 수동적 여성상이 강화되는 결말로 내달리지 않게 된다. 전통적인 내러티브 프레임이 훼손되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여성의 다양한 욕망이 목소리를 얻는 것이다.

1995년 <오만과 편견>의 경우 앞서 지적했듯이 다씨의 매력의 원천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그의 고통이다. 카메라는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는 다씨와 가끔 그 눈길을 의식한 엘리자베스의 호기심어린 표정을 따로 담고 두 사람의 부딪히는 눈길을 한 컷 안에 담지 않음으로써 억압된 다씨의 쎅슈얼리티, 엘리자베스를 향한 보상받지 못한 열정, 그 관계의 어긋남을 견뎌온 절제와 고통의 풍경을 효과적으로 강조한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다씨의 몸, 말 달리고 펜싱을 하고 수영을 하는 다씨의 몸은 여전히 건장한 남성의 몸이지만 그런 장면들에서 어김없이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그의 흔들리는 눈빛과 불안한 얼굴은 그가 에로틱하게 여성화된 존재임을 말해준다. 로맨스에서 여성화된 남성을 향해 여성의 욕망과 환상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분석으로 Tania Modleski, Loving with a Vengeance: Mass­Produced Fantasies for Women (Hamden, Conn.: Archon Books 1982) 참조.

여성 관객은 다씨가 욕망하는 엘리자베스에게 동일시할 뿐만 아니라 욕망의 좌절로 고통스러워하는 다씨에게도 동일시할 수 있는 이중적 욕망의 주체가 된다. ‘동일시’(identification)에 관한 이론적 기초는 프로이트의 ‘매 맞는 아이’에 관한 분석에서 왔다. 이를 ‘환상’에 관한 이론으로 발전시킨 것은 Jean Laplanche & Jean­Bertrand Pontalis, “Fantasy and the Origin of Sexuality,” Formations of Fantasy, ed. Victor Burgin, James Donald & Cora Kaplan (London: Methuen 1986) 5~34면 참조.

<오만과 편견>은 억압된 욕망의 주체를 여성에게 ‘보여지는’ 남성으로 에로틱하게 재현한다는 점에서 로맨스의 관습 내부에서 여성의 욕망을 표현할 대안을 성공적으로 모색한 영화가 된다. 이런 점에서 ‘다씨 파티’야말로 오스틴 현상의 깊은 무의식인지도 모른다.

2005년의 <오만과 편견>은 소박한 일상성에 초점을 두어 한결 가볍고 동시대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엘리자베스가 다씨의 종아리를 태연히 쓰다듬으며 자유롭게 애정을 표현하는 마지막 장면은, 엘리자베스가 아버지에게 결혼을 허락받은 뒤 (다소 심심하게) 끝나버리는 결말에 만족하지 못하고 키스 장면을 넣어달라고 압력을 가한 (미국) 팬들의 성화로 추가되었다고 한다. 이 장면은 감정의 일상성, 표현의 자유로움, 소통의 평등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욕망이 일상에서 실천되는 방식이 다양하다는 이 영화의 일관된 메씨지를 관객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더 친절하게 요약해준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장면은 무도회에서 엘리자베스와 다씨가 춤추다가 위컴에 대한 언쟁이 절정에 이르자 갑자기 주변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채로 두 사람만이 계속 상대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춤출 때다. 갑자기 모두 사라지고 두 사람만이 춤추는 이미지는 이들이 얼마나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들 사이의 교감이 얼마나 철저하게 두 사람에게만 속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마차에 오르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준 뒤 돌아서 가는 다씨의 폈다 오므려지는 손을 카메라가 길게 따라가는 장면에서도 두 사람 사이의 교감이 얼마나 사소하고 미묘한 방식으로 형성되는지 암시된다.

가벼운 신체 접촉에 의해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감각이 자극받는 경험이라든가 군중 속에서 두 사람만의 고립을 상상하는 경험 등을 통해 일상의 틈을 뚫고 실천되는 욕망을 재현한 것은 엄밀하게 말해 ꡔ오만과 편견ꡕ의 것이라기보다 오스틴의 마지막 소설 ꡔ설득ꡕ이 보여주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나는 ꡔ설득ꡕ에서 오스틴이 로맨스를 하나의 사건이나 플롯이 아닌 여성의 일상적인 존재방식으로 이해함으로써 여성의 삶에서 로맨스가 가지는 의미를 다시 쓴다고 보고 이것이 오스틴 소설이 도달한 궁극적인 지평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2005년 <오만과 편견>은 ꡔ오만과 편견ꡕ이라는 개별 소설보다도 제인 오스틴 소설들이 총체적으로 그리고 있는 여성의 욕망에 대한 세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씌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오스틴 영화의 로맨스가 비록 전통적인 내러티브의 구조 안에 머물면서도 여성의 욕망을 표현하는 새로운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고 소통시키는 데 적극적임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여성의 욕망을 ‘역사화’ (historicize)할 필요가 있음을 환기하고 또 앞으로 더 생각해볼 숙제를 남기는 차원에서 오스틴 영화가 일깨우는 여성의 욕망이 어떤 물적 토대를 가진 역사적 구성물인가를 묻고자 한다. 1995년과 2005년에 나온 두 편의 <오만과 편견>은 헤리티지 영화가 제공하는 물질적 풍요로움이 주는 환상을 거부한다. 아예 헤리티지 영화의 관습을 비판한 2005년 <오만과 편견>은 말할 것도 없고 1995년 <오만과 편견>에서도 식사를 ‘서빙’하는 하인들에게 대사를 주어 주인공과 대화하도록 배려하는가 하면 무도회가 벌어지는 화려한 홀 밖에서 마차꾼들이 자기들대로 소란스럽게 저녁 한때를 즐기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오스틴 영화를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만의 이야기로 보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을 교정한다. 그 대신 두 편의 <오만과 편견>은 19세기적 풍경이 가진 어떤 질서정연함의 환상에 호소한다.

나는 이 환상이 페미니즘의 세례 이후 오히려 그것 때문에 남녀관계에 있어서 더 큰 불안과 불확실성에 노출된 현대 여성들의 복잡하고 불편한 자의식, 바로 ‘포스트페미니즘’의 이면과 속살을 들여다보는 일과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이 선명한 성역할의 분리와 결혼의 절대성이 보장된 오스틴 세계 특유의 질서정연함에 큰 만족과 위안을 맛본다는 사실은 성해방의 물결이 전통적인 남녀관계의 규범을 해체하면서 여성에게 자유와 독립을 주는 동시에 더 많은 혼란과 고통을 준 면은 없는가를 묻도록 요청한다. 엘리자베스와 다씨가 오해와 편견으로 괴로워하더라도 결국 이들이 누구를 사랑하는지를 깨닫게 되리라는 결론의 확실성이 보장된 세계, 누구를 사랑할지 선택하고 결정할 때 그 현실적인 기준이 분명하게 제시되는 세계, 남녀 사이에 오고가는 모든 것들이 투명하게 계산되지만 거기서 도덕과 윤리도 나오는 공정한 세계에 대한 갈증, 이것은 곧 아귀가 딱 들어맞는 스스로 완결적인 하나의 세계라는 환상과 통한다.

엘리자베스와 다씨의 로맨스에 열광하는 것은 그들의 질서정연한 세계가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보다도 그 세계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과 더 밀접하다. 말하자면 <오만과 편견>의 로맨스가 일깨우는 것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것,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다씨 같은 멋진 남자가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수동적인 기다림과는 사뭇 다른, 결코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잃어버린 그것을 예전처럼 똑같이 경험하고자 하는 불가능한 욕망인 향수, 즉 노스탤지어(nostalgia)다. 이 향수가 쾌락을 주는 것은 잃어버린 세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서가 아니다. 잃어버렸다는 느낌 자체가 쾌락의 근원일 수 있다. 1995년의 <오만과 편견>을 보면서 조금씩 어긋나면서 자꾸만 뒤로 연기되는 두 사람의 감질 나는 19세기적 로맨스에,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경우 해당되지 않는 극단적인 예를 들어) 고등학교에서 콘돔을 나눠주고 아침에 먹는 피임약을 처방할 정도로 성적 자유를 누리는 분방한 시대를 사는 여성들이 열광하는 것은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던 시대가 부과한 억압에 대한 노스탤지어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씨의 고통은 우리가 더이상 갖고 있지 않은 ‘진정성’에 대한 기호와 같아서 그의 고통은 그가 엘리자베스를 사랑하는 진심에 비례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런 진심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거기에 매혹되는 것이다. 진정성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꿔 말해 우리가 ‘관계’를 맺는 데에 실패한다는 의미이자 그만큼 ‘관계’(의 실패)라는 것에 집착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온갖 자기계발서와 남녀관계를 다룬 책들을 끼고 살면서도 언제나 관계에 실패하는 (또는 실패하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혀 상황을 악화시키는) 브리짓 존스가 일면 정확한 현대 여성의 초상화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관계에 관한 담론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종의 ‘풍요 속의 빈곤’을 겪고 있는 현실이 브리짓 존스의 코믹하게 과장된 연애실패담에 실감나게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와 다씨의 결합이 완벽한 관계처럼 보이는 것은 그들이 완벽한 ‘왕자님’과 ‘공주님’으로 만나서가 아니라 그들이 결코 완벽한 개인이 아니면서 상대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의 진정성을 시험받고 자신의 완벽하지 않음을 구원받기 때문이다.

ꡔ오만과 편견ꡕ을 비롯한 오스틴 소설의 로맨스가 탁월하게 보여주는 것은 남녀 사이의 깊은 의존성, 그리고 관계맺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개인이 되는 ‘주체’의 드라마이다. 오스틴을 다시 쓰려는 욕망은 관계에 대한 열망이자 관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역설적인 고백인 셈이다.□
-- [안과밖] 21호에 실린 문화평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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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 현상’ <- 현재글

조선정[자료실]
200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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