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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구와 유희: 영화 <포제션>과 소설 {사로잡힘}

작성자

박시영[자료실]

작성일자

200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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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1


허구와 유희:
영화 <포제션>과 소설 {사로잡힘}

박시영


미국 출신의 영화감독 닐 라뷰트(Neil LaBute)는 청각 장애자인 한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두 남성을 그린 <남자들과 어울려서>(In the Company of Men)라는 영화와 자신이 씨트콤의 등장인물이라고 착각하는 한 간호사의 이야기인 <간호사 베티>(Nurse Betty)라는 영화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미국문화의 폭력성과 대중매체의 영향에 대해 관중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정도로 비판적이고 도전적인 시각을 영화에 담아왔던 그가 현존하는 영국작가 바이어트(A. S. Byatt)의 소설 {사로잡힘}(Possession)을 영화로 만든다는 보도는 몇가지 점에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1)

우선 이 영화가 데뷔 이래 라뷰트가 만들어온 영화와는 다른 '시대극'(period film)의 성격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바이어트의 원작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 로제티(Christina Rossetti)와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을 각각 모델로 삼은 라모트(Christabel LaMotte)와 애쉬(Randolph Henry Ash)라는 두 시인 사이에서 벌어진 혼외정사의 비밀을 각 작가를 연구하는 젊은 영문학자들인 베일리(Maud Bailey)와 미쉘(Roland Michel)의 현재 시각에 따라 추적하는 과정을 그리고있다. 바이어트는 이 추적과정을 포우(Edgar Allan Poe) 이래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자주 사용된 '탐정소설'(detective fiction)이라는 틀에 담고 있다. 라뷰트의 영화에서도 빅토리아 시대의 재구성이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한다. 라뷰트 자신의 영화 해설에 따르면 실제로 영화를 만드는 데 드는 상당한 역량이 빅토리아 시대를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것에 투자되었다고 한다. 빅토리아 시대와 현재 시점을 오가면서 영화도 스릴러의 형식을 취한다.

그 다음으로는 5백 면이 넘는 방대한 원작을 두 시간에 못 미치는 영화로 만들어야 하는 원작과 영화 사이의 '고전적인 갈등'을 라뷰트가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이 작품의 경우는 이 갈등이 더 증폭되어 나타났다. 왜냐하면 원작의 길이는 물론 영화라는 장르로는 쉽게 소화해낼 수 없는, 문학작품으로서도 독특한 형식 때문이었다. 엘리어트(George Eliot)의 {미들마치}(Middlemarch)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유명한 바이어트의 소설에서는 작중인물인 라모트와 애쉬라는 빅토리아 시대 시인들의 삶을 재현하기 위해서 혼성모방(pastiche) 기법을 사용한다.

대학교단에서 문학을 가르쳤던 바이어트는 라모트의 시를 디킨슨(Emily Dickinson)의 시 형식에, 그리고 애쉬의 시는 테니슨(Alfred Tennyson)의 무운시(blank verse) 형식에 맞추어서 만들어낸다. 이런 맥락에서 바이어트가 자신의 책을 빅토리아 시대의 시 연구로 유명한 암스트롱(Isobel Armstrong)에게 헌정했다는 사실은 {사로잡힘}에서 시적 언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해준다. 동시에 부제인 '로맨스'란 말은 바이어트가 자신의 소설 서두에서 인용한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로맨스론에 근거해서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를 재규정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 배경에는 바이어트가 이 소설을 구상했던 1960년대를 지배한 문학조류, '누보 로망'(nouveau roman)의 영향을 들 수가 있다. 소설을 '텍스트'라고 정의하고 글쓰기란 즐거움을 주는 '유희'라고 정의함으로써, 인간의 상상력을 문학의 본질로 규정하는 극단적인 태도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바이어트는 자신이 성장한 1950년대 영국의 지적 풍토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그 당시 개인적 갈등의 축을 영국 소설가 보윈(Elizabeth Bowen)으로 대표되는 자연주의적이고 산문적인 지적 풍토와 테니슨이나 브라우닝으로 대표되는 시적인 언어세계의 충돌로 압축하면서, 자신의 선택은 후자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로잡힘}이라는 소설의 구조가 서술을 위한 매체를 뛰어넘어서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반성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작품 속에 혼성모방을 통해서 도입된 언어는 소설의 장식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바이어트는 혼성모방이 본질적으로 제기하는 원작과의 관계라는 문제를 독자들에게 들이대면서 '텍스트'의 허구성이라는 문제에 내재한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에 대해 반추하도록 만든다. 기존의 소설구조에 대한 작가의 이런 고민을 반영하는 소설은 영화를 만드는 일을 더욱 어렵게 할 수가 있다. 물론 어떤 영화를 평가할 때 원작과의 관계만을 유일한 잣대로 삼는 일은 문학과는 다른 영화의 허구적 구조에 대해 공평하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 <포제션>의 경우에는 주류 할리우드 영화계의 상업적인 고려가 제작 준비과정에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여기서 독립예술영화(arthouse film) 제작이었다면 더 쉽게 가능했을 실험적 해석이 애초부터 봉쇄당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들게 된다.

바이어트의 소설이 출간된 1990년 이래 10여 년 동안 이 소설을 영화화하려는 시도가 여러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주류 할리우드 영화계를 대표하는 워너 브라더즈는 각색의 문제를 들어 번번이 거부를 해왔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워너 브라더즈를 설득할 정도의 힘이 라뷰트의 영화 어디에 있는가를 질문해볼 수 있겠다. 그런데 그 힘이 꼭 긍정적이지만 않다는 암시는 바이어트가 자신의 원작과 영화 사이에 존재하는 내용상의 괴리가 할리우드적 사고 때문에 발생했다고 이 영화를 비판하는 데서 드러난다. 빅토리아 시대 문학과 시적 언어를 상징하는 두 시인의 이야기가 베일리와 미쉘의 사랑 이야기로 변하는 과정이 일반독자 수준에도 못 미치는 몰이해라는 바이어트의 비판은 역설적으로 그 몰이해야말로 라뷰트가 표현하고 싶은 의식적인 해석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든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포제션>이 원작과 어떻게 다른지, 또 그렇게 다른 부분이 어떻게 영화로 처리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작업은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작업은 동시에 주류 할리우드 영화가 수용할 수 없는 소설 {사로잡힘}의 특성을 우리에게 드러낼 것이다. 여기서 간단히 영화의 도입부를 살펴보자.

영화 <포제션>은 빅토리아 시대 시인인 애쉬가 벌판을 걸어가면서 여성은 남성에게 적대적인 존재라는 시를 읊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장면은 곧 시점이 현재로 바뀌면서 런던 쏘더비(Sotheby)의 경매장으로 이어진다. 앞 장면에서 애쉬가 낭송한 바로 그 시의 수고(手稿)를 경매하는 이 도입부는 짧은 시간 내에 한 장소에서 대부분의 주요 등장인물들을 관중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원작보다 더 깔끔하고 집약적인 효과를 거둔다. 또한 애쉬의 수고를 둘러싼 경쟁이 이 영화의 기본 줄거리라는 사실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관중들은 제일 먼저 팰트로(Gwyneth Paltrow)가 연기하는 여주인공으로서 여성학을 연구하는 교수인 금발미녀 베일리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이 영화에서 악의 세력을 대표하는 미국 출신의 애쉬 전공학자 크라퍼(Mortimer Cropper)를 소개받는다.

크라퍼는 애쉬의 수고나 소지품은 물론 그와 관계있는 유품들을 미국으로 사가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려는 맹목적인 학자로서 미국의 문화제국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영국 출신 애쉬 학자인 블랙애더(James Blackadder)가 이 경매 장면에서 등장한다. 대영박물관에서 애쉬 연구소를 총괄하는 블랙애더는 이 영화에서 거대한 자본을 앞세운 미국의 문화제국주의로부터 영국의 문화유산을 구해야 할 임무를 띠게 된다. 그러나 세련되고 자신감에 넘치는 크라퍼와는 대조적으로 늙고 현실감각이 부족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이 싸움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만든다.

이 도입부는 각색의 기준이 되었을 라뷰트의 의도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원작의 해당 부분과 꼼꼼하게 비교할 필요가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원작과는 달리 애쉬가 빅토리아 여왕의 계관시인으로 소개되고, 쏘더비 경매장이 도입부의 주요 배경이 됨으로써 영국 문화의 특정 부분인 '전통'(period)이 강조되고, 화려하고 고급스런 문화가 그 전통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한다는 점이다. 배우 선정에서도 라뷰트의 이런 의도는 잘 드러난다. 영국인들이 셰익스피어보다 더 선호한다는 오스틴(Jane Austen)의 소설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을 영국 공영방송(BBC)이 각색한 동명 텔레비전 연속물에서 여주인공 역을 맡은 엘(Jennifer Ehle)이 라모트로 나온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오스틴의 또다른 소설 {에마}(Emma)의 동명 영화에서 여주인공 역을 맡았던 팰트로가 베일리로 연기한 것은 이 영화가 강조하는 '영국성'에 무게를 실어준다.

그런데 라뷰트가 자신을 '친영국적'(anglophile)이라고 밝히듯이, 이 영화는 일부 미국인이 갖는 영국에 대한 동경을 바탕 시각으로 삼고 있다. 이런 시각의 문제점은 그것이 상투적이기 쉽다는 사실이다. 즉 영화로 재현된 빅토리아 시대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숨쉬고 있는 영국의 현재까지도 시대극이라는 잣대로 재단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역사의 현재성을 부정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런 예의 극단적인 형태는 라뷰트의 영화가 영국문화의 깊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대영박물관의 내부를 보여주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영화 해설에서 라뷰트는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그리스 조각들을 영화의 문화적 깊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했다고 말하는데, 공교롭게도 그 조각 중에는 우리에게 '엘긴의 대리석 조각'이라고 알려진 고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장식이 카메라에 잡힌다.

이 조각들은 그리스 정부의 끊이지 않는 반환요구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양식을 가진 영국인이라면 누구라도 부끄럽게 여기는 영국 제국주의의 과거를 상징한다. 이런 맥락을 무시하는 라뷰트의 태도는 <포제션>의 주요한 틀인 미국 문화제국주의 비판을 재고하게 만든다. 즉 과거 제국주의의 영광이 악몽이 되어버린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영국인들의 고민에 대한 성찰이 없이 관광안내서에 나옴직한 영국문화의 지표들에서 '영국성'을 찾는 라뷰트의 태도는, 영국문화뿐만 아니라 문화제국주의에 대해도 너무 단순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의심하게 만든다. 라뷰트가 미국 문화제국주의를 현실의 여러 층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기보다는 크라퍼의 공격적인 태도에 국한된 상징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애쉬와 라모트의 연애를 추적하는 베일리의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미쉘이라는 인물이 원작과는 달리 미국인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라뷰트는 미쉘의 국적이 바뀌어야 했던 이유가 미국 출신 배우 에카트(Aaron Eckhart)를 미쉘 역으로 발탁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에카트는 <간호사 베티>에서 주인공 베티의 망나니 남편으로 나온다). 팰트로의 경우에는 발음 교습을 통해서 영국 상류층의 어투를 어색하나마 구사하는 반면, 에카트의 경우에는 국적이 미국일 뿐만 아니라 런던으로 옮겨온 '미국의 아담'(American Adam)이라는 인상을 준다. 영화에서 미쉘이란 인물의 존재는 '돈'과 '명예'에 사로잡힌 미국학자 크라퍼와는 대조를 이루며, 순수하고 열정적인 미국인의 모습으로 부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헨리 제임스(Henry James) 이래 미국인들이 영국에 대한 '향수'를 그리는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주제 순수한 미국인이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문화에 실망하고 그 오랜 전통을 대신 이어받을 미래의 주인공이 된다는 주제 를 발견하게 된다.

원작과 영화 모두에서 미쉘은 애쉬가 라모트에게 쓴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를 발견함으로써 빅토리아 시대의 두 시인간의 관계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미쉘은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추적하는 동안 베일리와 사랑에 빠지는데, 영화 속의 미쉘은 자신의 연구를 사랑보다 앞세우는 책임감과 야심을 가진 인물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설 속의 영국인 미쉘은 애쉬 전공자로서 블랙애더의 지도 아래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연구원으로 근무하지만 집세를 낼 수 없어서 동거하는 여자친구에게 의지해야 하고 노동계급 출신인 자신의 가정배경에 대해서도 자의식이 강한 편이다. 이렇게 가난에 찌든 모습이 밴 영국인 미쉘과는 달리 미국인 미쉘에게서 나타나는 가난의 모습이란 남의 차를 얻어 탈 정도이고 그것도 미국과는 차 달리는 방향이 반대인 영국 교통체제에 익숙하지 못해서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미하다(물론 라뷰트도 영문학에 종사하는 연구원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순수한 미국인 미쉘은 성적인 매력까지도 가지고 있다. 영화에서는 같은 연구소의 여직원이나 심지어 원작에서는 남성에게 차가운 페미니스트로 등장하는 베일리마저도 그를 만나자마자 사랑의 청신호를 보낸다. 수취인이 누군지 불분명한 애쉬의 미공개 연애편지를 발견한 미쉘은 라모트가 바로 그 수취인이라고 추정하고 라모트 전공자인 베일리의 조언을 얻기 위해서 영국 링컨 대학의 여성학 교수인 베일리를 찾아간다. 미쉘의 호감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유지하는 원작의 베일리와는 대조적으로 베일리로 분한 팰트로는 그녀 특유의 태도로 수줍은 듯이 눈을 내리깔다가 방긋 웃으면서 자료 읽기에 몰두해 있는 미쉘에게 말을 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앞서 언급한 바이어트의 비판이 사실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비록 그 이유가 주류 할리우드의 영향만이라는 주장에 쉽게 공감할 수는 없지만, 라뷰트가 미쉘과 베일리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을 영화의 결정적인 축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결과로 <포제션>의 성공 여부는 미쉘과 베일리의 '사랑' 이야기가 얼마만큼 설득력이 있는가에 달려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미쉘의 인물 설정이 변함에 따라 베일리라는 인물도 그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원작에서 베일리는 20세기판 라모트로 다루어지고 있다. 라모트는 시인으로서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적인 질서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노처녀'(spinster)라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층의 삶을 오히려 여성들만의 독립된 세계로 변화시켜 살아가는 인물이다. 베일리가 존경하는 라모트는 바로 이 빅토리아 시대의 전투적인 페미니스트이다. 그런데 전투적인 페미니스트로만 알려졌던 라모트가 유부남인 애쉬와 연애를 했고, 그 충격으로 그녀의 페미니스트 동반자 글로버(Blanche Glover)가 자살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라모트가 애쉬의 아이까지 낳은 사실이 소설에서 밝혀진다. 소설에서는 여성학 교수로서 페미니스트 라모트의 삶을 흠모하던 베일리가 이런 충격적인 발견을 하는 과정이 기본 구조를 이루며, 이 과정은 단순한 '탐정소설'이 아니라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신의 삶과 나아가 이데올로기로서의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의 과정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베일리의 자기성찰 과정에서 미쉘은 빅토리아조 시인들인 애쉬와 라모트의 관계를 탐구할 계기를 마련해주는 도구적 존재이다. 이런 설정을 통해서 바이어트가 제시하는 가장 큰 주제는 '몸'(body)과 '지성'(mind)을 서로 섞일 수 없는 이중의 축으로 보는 여성들의 비극이다.

그같은 설정 아래서는 빅토리아 여성시인 라모트가 남성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여성의 '몸'을 거부하고 '지성'의 동반자를 애초부터 여성에서 찾는 것이 20세기 영문학자 베일리가 여성학을 전공하는 것과 같은 차원에 놓인다. 즉 자신의 거처를 '첨탑'(turret)이라고 규정하는 라모트의 모습은 상아탑의 세계에서 여성학을 전공하는 베일리가 여성학이라는 '지성'의 세계 속에 살면서도 안주하지 못하는 모습에 반영되어 있다. 바이어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여성의 존재를 위태롭게 만드는 '적'이 바로 같은 세계에 속한 여성이라는 자신의 입장을 라모트와 그녀의 페미니스트 동반자의 관계에 투영시키며, 동시에 베일리도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라모트와 애쉬 사이의 사랑으로 아이가 태어나지만, 이런 결실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헤어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라모트의 동반자 글로버의 죽음을 둘러싼 오해이다. 글로버의 자살에 대한 죄책감으로 라모트는 아이를 낳은 후에 그 사실을 애쉬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와 거리를 유지한다. 애쉬는 라모트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알고서 그녀를 찾아가지만, 그녀는 충분한 설명도 없이 그가 자신을 '살인자'로 만들었다는 말만 한다. 애쉬는 글로버가 죽은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라모트의 말을 자신의 아이를 죽였다는 말로 오해하게 되며, 그 결과로 그녀와 헤어진다. 즉 글로버의 죽음이 라모트와 애쉬가 헤어지는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페미니스트로만 알려져 있던 라모트를 전공하는 베일리가 여성학 교수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설정은 페미니즘과 여성학을 남성중심의 질서에 대조시키려는 바이어트의 의도를 그려낸다. 여기에는 앞서 말했듯이 자신이 성장한 1950년대 여성들의 지적인 풍토를 '몸'과 '지성'이라는 축의 갈등으로 규정하고, 이 과거를 반성적으로 살펴보는 작가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바이어트가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시각은 한층 더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런 내용이 영화에서는 어떻게 수용이 되는지 살피는 것에 국한하고자 한다.

바이어트의 소설에서는 페미니스트인 자신의 삶에 대한 베일리의 고민이 그녀의 사회적·계급적 위치에 대한 미쉘의 열등감과 더불어 두 사람이 관계를 맺는 데 방해물이 되면서 독자들은 페미니즘을 성찰하는 시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화 <포제션>에서는 페미니즘과 남녀관계를 성찰할 능력을 상실한 베일리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미녀배우 팰트로가 수줍게 드러내는 성적인 매력뿐이다. 영화 <포제션>에서는 원작과는 달리 베일리라는 인물에게 중요한 페미니스트라는 설정이 별로 의미가 없다. 영화감독인 라뷰트는 원작자인 바이어트가 왜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자신의 틀을 중심으로 라모트와 베일리 사이의 관계를 그리려고 하는지에 대해 오해의 정도를 넘어서 무관심하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는 남녀관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는 전혀 상관없이 기회만 있으면 미쉘을 '꼬시려는' 금발의 젊은 영국 여교수와 이 유혹을 물리치고 연구를 계속하려는 순수하고 야심에 찬 미국인 젊은이 사이의 사랑 이야기만 남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점이 라뷰트의 영화에 치명적인 결함을 초래한다. 그 결함은 원작을 충실하게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로 보더라도 베일리라는 인물이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베일리가 라모트의 이데올로기는 물론 혈통도 공유한다는, 원작에서의 중요한 발견이 영화에서는 그 의미를 상실하고 단순히 줄거리의 한 부분이 된다. 바이어트의 소설 도입부에서는 라모트가 베일리의 고조할머니의 이모로 등장함으로써 인척관계로만 알려져 있다. 라모트가 애쉬와의 관계에서 낳은 아이를 베일리 가문으로 시집을 간 동생에게 맡겨 기르고, 자신은 이모라고 속이며 같이 산 것이다. 소설의 결론부에서는 이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베일리가 라모트의 혈통을 고조할머니를 통해서 직접 이어받은 것으로 드러난다. 이런 설정은 베일리와 라모트 사이의 더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서 여성의 문제를 부각시키려는 바이어트의 의도와 관계가 있다. 그런데 여성의 문제보다는 현대 남녀의 사랑에 강조를 둔 라뷰트의 영화에서는 앞서 지적한 대로 오히려 미쉘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베일리의 주된 갈등은 사라져버린다.

이 결과로 영화 속에서는 베일리가 왜 라모트를 전공하는지, 그리고 왜 여성학 교수여야 하는지 그 이유가 흐려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지적인 배경이 전혀 필요없는, 아니 짐만 되는 '쉬운' 여성으로 남을 뿐이다. 베일리의 성격 상실은 영화 <포제션>이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여주는 금발 미녀와 야성적이고 순수한 사나이 사이의 도식적인 사랑을 반복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이런 측면에서는 크라퍼로 상징되는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라뷰트가 영국에서 전개되는 현실적인 문제를 무시한 결과 역설적으로 주류 할리우드의 틀이라는 강력한 문화제국주의를 재생산해버린 꼴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혼성모방에 기초해서 소설쓰기에 대한 고민을 여성의 문제에 결부시킨 바이어트의 소설을 영화화하려는 라뷰트와 워너 브라더즈의 시도는 높이 사주어야 하겠다. 영화에 삽입된 섬세하게 고증 재생된 빅토리아 시대 두 시인의 사랑 이야기는 강력한 시각적 효과를 유감없이 거두고 있다. 특히나 원작에서 상당한 부분이 '유희적인' 글쓰기를 통한 허구 만들기를 주장하면서 문학의 성격을 재규정하려는 노력에 쏟아졌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라뷰트의 시도는 대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도 바이어트가 주장하는 창작의 즐거움에 대한 강조는 분명히 나름으로 수용되어 있다. 라뷰트가 자신의 딸 이름을 냉장고에 자석 글자로 써놓은 것이라든지 또는 자신의 아들 생일을 편지의 날짜로 사용한 것은 지나치는 배경 장면으로 처리되었지만 '유희로서의 창작'이라는 주장에 공감한 결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라뷰트가 이 영화에서 극복하지 못한 주류 할리우드란 틀은 안타깝게도 영화의 실패를 초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포제션>은 우리에게 문학작품과 영화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갈등의 여러 측면을 어떤 영화보다도 잘 보여준다. 이 갈등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우리 일상의 주요한 부분인 인터넷을 지배하는 '시각'문화가 무엇이 결여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영화 <포제션>을 보기를 권유하고 싶다. 단 영화를 본 후에 소설 {사로잡힘}을 꼭 읽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 <안과밖> 16호에 실린 영화평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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