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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운 평결' 50주년을 생각한다

작성자

안지현[자료실]

작성일자

200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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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689


<안과밖>에 실린 학술시평을 올린다. 조만간 여기 영화평 꼭지는 영화만이 아니라 영화, 음악, 연극, 공연평 등의 문화평과 학술/문화 동향을 다루는 학술시평을 아우르는 <문화 리뷰> 꼭지로 개편할 예정이다.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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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평결' 50주년을 생각한다

안지현

들어가는 말

브렌트 스테이플즈(Brent Staples)라는 흑인 기자가 쓴 "그냥 지나가고 있는 중임"(Just Walking By)이라는 에세이에서 저자는 흑인 남자로서 겪는 고충을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다. 스테이플즈는 행인들이 흑인 남자인 자신에게 위협감을 느껴 움츠러들거나 자신을 피하는 게 괴로워 고안해 낸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시카고에서도 백인 동네에 속하는 하이드 파크(Hyde Park)에서 길거리를 지나다닐 때마다 사람들이 흑인인 자신을 보고 지레 겁을 먹다가도 클래식 음악의 곡조를 휘파람 소리로 부르면 다들 긴장을 풀고 지나간다는 이야기다. 하이드 파크를 둘러 싼 60가(Sixteeth Street)와 49가(Fourty Nineth Street)만 넘어서면 흑인 게토인 이 동네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흑인 남자를 위협적인 외부 침입자로 인식할 정도로 시카고의 사우스 사이드(South Side)에서는 흑인과 백인 주거 지역이 아직까지도 확연하게 분리되어 있다.

주거 지역의 인종 분리 현상은 전통적으로 시카고나 뉴욕과 같은 미국의 대도시에서 아직까지도 남아있으며, 백인 동네에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수도 없이 많다. 이와 같은 에피소드는 게토에 사는 흑인 청년들에 국한된 이야기일 뿐 아니라 "흑인" "남자"이면 공통적으로 한 두 번씩은 으레 겪는 일이다. "흑인" "남자"인 필자의 지도교수도 하이드 파크와 특히 노스웨스트 대학이 소재한 백인들이 주로 사는 부촌인 에반스톤(Evanston)에서 밤에 청바지와 파카를 입고 외출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도망간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며, 정장 차림을 싫어하지만 밤에는 사람들이 심장마비에 걸릴까봐 단정한 차림으로 다녀야해서 괴롭다고 우스개 소리로 하곤 했다.

이렇듯, 주거지역의 인종 분리 현상은 오랜 세월 동안 미국인들의 삶을 지배해 왔던 법적 아파테이드(apartheid)의 잔재라 할 수 있다. 실은 주거지역 뿐 아니라 미국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인종 분리가 이루어져 왔는데, 인종 분리가 위헌임을 공표한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1954년의 브라운 평결이다. 공교육에서 흑인과 백인 학생들의 분리는 위헌이라는 미 대법원의 브라운 평결 50주년을 맞은 지금, 브라운 평결이 일차적으로 철폐하고자 했던 공교육의 인종분리 현상과 평결의 여파로 인해 없어질 것으로 여겨졌던 주거지역의 인종 분리 현상은 여전히 미국의 삶의 일부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브라운 평결이 이루어낸 성과는 무엇이며 미국 역사상 이 평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브라운 평결의 의의에 대해 미국의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은 극단적인 이견을 보인다.

미국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정치 주간지 「더 네이션」(The Nation)지의 편집진들은 이 평결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 바 있다. 평결이 내려진 당시에는 "백인 우월주의자(white supremacist)들이 예견대로 평결을 비난했던 반면, 유명한 학자들과 법학자들은 브라운 평결이 역사를 거부하고 사회심리학을 지지하고 법적 우월주의를 옹호했다고 지적했다.

50년이 지난 지금은 전선이 뒤바뀌었다. 즉 저명한 흑인들은 브라운 평결이 "실패작"이었다고 비판하며, 자유주의 법학자들도 평결이 1950년대와 60년대의 흑인 민권 운동에 기여한 바가 없다고 주장한다. 보수주의 평자들과 판사들은 이제 이 평결을 열성적으로 칭찬하며 이 획기적인 사건으로 인해 "피부색을 초월한"(colorblind) 미국 건설의 길이 열렸다고 찬사를 보낸다." 즉 보수주의자들의 논리에 따르면, 인종통합(integration)을 지향하는 브라운 평결이 피부색을 초월했기 때문에 인종을 고려하는 약자보호정책(affirmative action)은 위헌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평결이 내려진 당시 보수진영은 "피부색을 초월한"이란 말을 거부하며 흑·백간의 평등을 받아들이지 않고 브라운 평결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던 반면, 오랜 세월 간의 인종차별로 인한 현재의 정치적, 사회적 불평등을 시정하고자 약자보호정책이 도입된 현 시점에서 보수진영은 도리어 이제 더 이상의 흑·백의 피부색 구별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브라운 평결을 둘러싼 현재의 쟁점은 과연 미국 헌법이 피부색을 초월했다고 해석하는지, 그렇다면 약자보호정책의 존폐 여부는 어떻게 되는지, 헌법이 피부색을 초월했다는 것과 역사적 과오를 바로 잡는 것과는 어떤 관계인지 기타 등등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사이에 극단적인 이견을 보이는 약자보호정책의 미래는 브라운 판결문과 "피부색을 초월한"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달려있기도 하다. 브라운 평결과 뒤이어 살펴볼 플레시 평결에서도 대법관들이 당대 사회과학의 지대한 영향을 받아 인종차별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평결을 내렸다는 것이 중론임을 기억할 때, 브라운 평결은 단순히 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법적인 해석의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점을 암시하기도 한다.

브라운 평결을 둘러싼 현재의 논쟁은 사실 브라운 평결로부터 58년을 거슬러 올라가 1896년 플레시 평결의 대법원 평결과 할렌(Harlan) 대법관의 소수의견을 이해하고, 대법원이 무엇에 근거하여 플레시 평결을 뒤집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플레시 평결과 브라운 평결에 관한 간략한 분석과 양 평결의 상관관계의 분석을 통해 왜 "피부색의 초월"이 문제가 되고 있으며, 인종통합이 과연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브라운 평결이 제시한 인종통합이 과연 미국의 인종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는 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플레시 평결 (Plessy v. Ferguson)

1896년 미 대법원은 루이지에나(Louisiana) 주의 하급심 평결을 인정하는 기차 객실의 인종분리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 사건 이후 1890년과 1910년 사이에 인종분리 정책은 강화되었으며, 1890년대에 인종 문제가 "최저점"(nadir)에 달했다는 역사학자 로건(Rayford Logan)의 유명한 전언은 이 평결에 의한 인종정책의 변화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플레시 평결은 19세기 말 점진적으로 악화된 인종 문제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잘 알려진 대로,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 재건시대(Reconstruction 1865-1877)에는 수정조항 13조(노예제 폐지), 14조(흑인들에게 동등한 법적 권한 부여), 15조(흑인 남성들의 참정권)이 미 헌법에 더해지면서 흑인들의 법적 지위가 향상되는 상당한 성과가 있었지만, 재건 시대가 막을 내리자마자 흑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남부에 주둔한 북부의 군대가 철수하고 1883년의 대법원의 민권법(Civil Rights Act, 1875) 위헌 평결과 1896년의 플레시 평결을 거쳐 재건시대 때의 성과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 중에서도 플레시 평결은 인종문제를 퇴보시키는 데 가장 결정적인 위력을 끼쳤는데, 예컨대 1899년에는 남부의 3개 주에서만 전차에서 짐 크로우(Jim Crow)법을 적용했으나 1910년에 이르러서는 9개의 주가 이에 합류했다. 즉 플레시 평결로 인해 "분리하되 평등한(separate but equal)" 이란 문구는 명백하게 헌법의 일부가 된 것이다. 이 평결 이후 남부의 모든 공공장소에서 인종분리가 이루어졌으며, 인종분리는 남부인들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 감옥, 공중전화 부스에서도 인종분리가 적용되었으며, 심지어 플로리다 주에서는 흑인 학생들이 사용했던 교과서를 백인 학생들이 사용하는 것이 불법이었다. 플레시 평결은 노예 해방 이후 남부에서 백인 우월주의 사회를 공고히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셈이다.

그렇다면 대법원은 무엇에 근거하여 동일한 시설이 제공되는 한 흑·백의 분리가 합헌이라는 평결을 내린 것인가? 브라운(Brown) 대법원장이 발표한 평결문에 의하면 이러한 결정이 수정조항 14조에 전혀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대법원장은 인종적인 차이(distinction)와 분류(classification)는 인간의 본능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 변화시키기가 어렵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결정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수정조항 제 14조에 위배된다는 점은 루이지에나의 법규가 정당한지의 문제로 수렴된다. 그리고 이에 관한 한 입법부는 신중한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정당한지의 문제를 결정할 때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공공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도록 기존의 관습, 전통, 관례를 참조할 자유가 있다. 이러한 기준으로 판단을 할 때, 인종간의 분리를 인정하거나 심지어 요구하는 법이 정당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요구가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흑인 학생들을 분리된 학교에 보내는 의회의 법령보다 더 잘못되었다고도 할 수 없다." 즉 대법원은 인종간의 평등은 법적,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라는 점에 강조점을 두었으며 사회의 규범에 어긋나는 법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사회적으로 열등하다면, 미국 헌법이 이 두 인종을 같은 수준에 놓을 수 없다...만약 두 인종이 사회적 평등이란 지점에서 만나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친화성 즉 서로간의 장점의 상호인정과 개인의 자발적인 동의를 토대로 한 것이어야만 한다." 이러한 발상은 물론 19세기의 생물학적 본질주의로 인종을 파악하여 인종적 '차이'와 법적 평등의 문제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 것이다. 쉽게 말해서, 아무리 법적인 규제를 가하려 한들 흑인과 백인 간의 육체적 차이는 법으로 바꿀 도리가 없다는 말이다.

이 같은 노골적인 인종 차별적인 대법원의 평결에 반대하여 유일한 소수의견을 발표한 할렌 대법관은 미국 헌법이 "피부색을 초월"함을 강조했다. 할렌은 수정 13조와 14조에 의거하여 이러한 판단을 하였으며, 법적으로 용인된 인종분리 정책은 미국 헌법에 비추어 보았을 때 정당하지 않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위헌이라고 발표했다. 이로부터 58년이 지나서야 플레시 평결이 뒤집히게 되었다.

브라운 평결 (Brown v. Board of Education)

1954년 5월 17일 미 대법원은 만장일치의 평결로 플레시 평결을 뒤집었다. 캔저스(Kansas) 주 교육위원회가 한 흑인 어린이에게 집에서 가까운 백인학교 입학을 금하고 멀리 떨어진 흑인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한 결정이 위헌이라는 평결을 내린 것이다. 브라운 소송은 단 시간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사실 흑인 인권 단체인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는 1930년대부터 공립학교의 인종분리 정책을 철폐시키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는데, 브라운 평결이 내려질 때 까지만 해도 미국 내의 17개 주와 콜롬비아 특별구에서 공립학교의 인종분리는 합법적이었다.

이 협회를 통해 실제로 다섯 건의 소송 - 브릭스(Briggs v. Elliott, South Carolina), 브라운(Brown v. Board of Education, Topeka), 데이비스(Davis v. County School Board, Virginia), 게바트(Gebhart v. Belton, Delaware), 볼링(Bolling v. Sharpe, Washington D.C.) - 이 각각 제기되고 그 후 이 소송들이 모두 합쳐져 "브라운 평결"로 명명된 이 평결은, 미국 역사상 드레드 스콧(Dred Scott) 이후 가장 중요한 평결로 지목되며 20세기 대법원 평결 중 가장 중요한 평결로 간주된다. 공립학교의 인종분리가 위헌이라는 평결이 내려지면서 미국 사회 내의 인종 문제는 변화의 급물살을 타게 되었으며, 5, 60년대의 민권운동과 맞물려 흑인들이 법적 위상의 변화를 맞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의 대변자로서, 후에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대법관으로 임명된 서굿 마샬(Thurgood Marshall)이 제시한 소송사건 적요서는 흑인 학생과 백인 학생을 다른 공립학교에 다니게 하는 것은 수정조항 14조에 위배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원고 측의 주장은 플레시 평결의 소수의견을 발표한 할렌 대법관의 비판과 거의 흡사하다. 그렇다면 워렌(Warren) 대법원장이 발표한 평결문은 어떠한가?

워렌의 평결문은 어린이들이 민주시민으로 성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교육임을 밝힌 후, 이렇게 묻는다. "물리적인 시설과 기타 유형의 요소들이 동등하다 손치더라도 순전히 인종에 기반한 공립학교의 인종분리가 소수 그룹에 속한 아이들로부터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물론 그렇다 였다. 하지만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순전히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비슷한 능력을 지닌 또래로부터 분리시킨다면 사회에서 열등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이는 아이들의 마음과 정신에 큰 영향을 미쳐 평생 남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즉 대법원은 할렌의 소수의견의 정당성을 인정하거나 원고측의 주장에 동의를 표하기 보다는, 당대 심리학자들의 실험을 통해 밝혀진 결과에 의거하여 이러한 평결을 내리게 된 것이다. "플레시 평결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심리학적 지식이 어떠했던 간에, 현재의 이 결과는 현대의 권위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된다. 우리는 이 결과와 모순되는 플레시 평결문의 그 어떤 언어도 받아들이지 않겠다."

대법원의 이러한 평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예컨대, 워렌 판사가 의도적으로 인종분리 지지자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일종의 타협적인 결론을 내렸다는 견해도 있으며, 인종간의 평등을 직접적으로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남부 정치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견해도 있다. 이 평결문에서 해결되지 않은 점은, 워렌 대법원장이 결말에서 "공공 교육의 영역에서 "분리하되 공평한"이라는 정책은 설 자리가 없으며, 이러한 점에서는 백인 학교로부터 입학을 거부당한 학생들은 수정조항 제 14조가 보장하는 동등한 보호(equal protection)를 박탈당했다고 할 수 있다"라고 공언하며 인종분리가 제 14조에 대한 위헌임을 명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시 평결문에서 누누이 강조했던 인종적 '차이'의 구분이 상당부분 유효하다고 암묵적으로 용인한 혐의가 남는다는 문제다.

즉 사회과학, 그 중에서도 특히 심리학자들이 제시한 실증적인 증거에 의해 "분리하되 공평한"이라는 정책이 불평등하다고 판단한 것이지, 인종간의 '차이'의 불인정을 명시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브라운 소송으로 더욱 힘이 실린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의 흑인 민권운동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 평결이 시행되기까지는 너무나도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왜냐하면 예상했던 대로 남부 주들의 거센 반발로 인해 1955년 대법원은 시행기간에 초과 시간 규정(over time provision)을 포함시켜 "서두르지 말고 찬찬히(with all deliberate speed)" 법을 실행하도록 권했기 때문이다. 즉 언제, 어떻게 인종을 통합할 것인지 대법원의 지시를 받기를 거부하는 남부와 1955년과 1956년 사이에 즉각적으로 공교육의 통합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원고 측 사이에서 유례없는 타협을 하게 된 것이다.


브라운 평결과 미국의 미래

브라운 평결로 인해 미국의 법적인 아파테이드는 확실히 무너졌다. 또한 브라운 평결은 플레시 평결을 뒤집어 흑인들에게 백인과 동등한 법적 지위를 부여했으며, 나아가 민권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쳐 노예제의 유산과 인종차별이라는 법적 불평등을 해결하는데 큰 몫을 해 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브라운 평결에 이어 1964년 민권법 (Civil Rights Act)이 제정되어 모든 인종차별이 불법으로 규정되었고 1965년에는 대통령이 투표 소장(Voting Rights Bill, 1965)을 승인하였으며, 1967년에는 흑백간의 결혼금지법도 철폐되는 등 흑인들은 백인들과 동등한 시민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법적 위상이 격상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브라운 평결이 없었더라면 당연히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브라운 평결이 법적 평등의 상징적 사건으로 갖는 의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브라운 평결이 원칙적으로 제시했던 법적 (de jure) 평등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실상의 (de facto) 평등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육의 경우만 보더라 하더라도, 미국 북부 도심의 공립학교는 흑인 학생들이 대다수며, 일부 도심 지역의 경우는 백인들이 도시를 떠난 후 다시 인종분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즉 인종통합이란 이상에도 불구하고 인종분리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을 뿐더러, 도시의 공립학교들은 교외의 백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공립학교에 비해 재정적으로나, 교사의 자질로 보나 무척이나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브라운 평결 이전의 "분리하되 공평한"에서 실제적인 인종차별을 은폐하기 위해 억지 수사로 내세운 "공평한"의 기준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으니, 브라운 평결 이전보다도 실제적인 교육의 내용 면에서는 퇴보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의 남부 주에서도 겨우 1/3 이하의 흑인 학생들이 백인 학생들과 공(共)교육을 받고 있을 정도로 아직까지도 심각한 인종분리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남부의 백인들이 인종통합이란 개념에 얼마나 완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브라운 소송의 하나의 시발점이 되었던 사우스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주의 클레렌던 군(Clarendon County)에서는 1970년 법원의 명령에 따라 학교를 통합하기로 했을 때, 거의 모든 백인 학생들이 사립학교로 전학을 갔다. 이는 아직도 미국 공립학교에서의 인종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다.

브라운 평결이 명령한 교육 분야의 인종통합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서 미국의 보수진영은 브라운 평결과 60년대 제정된 민권법들을 통해 미국의 모든 시민들에게 동등한 권리가 주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흑인들이나 유색인종들에 대한 "특별" 대우는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약자보호정책의 철폐를 정치 이슈화하고 있다. 이들은 브라운 평결로 인해 "피부색"의 "차이"는 더 이상 인정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인종을 배려한 약자보호정책은 "역차별"(reverse discrimination)이며 위헌임을 주장한다. "약자보호"란 말은, 잘 알려져 있듯이, 민권운동의 영향으로 케네디 대통령이 "공평한 취업 기회 위원회"(Committee on Equal Employment Opportunity)를 창설하며 처음으로 사용했던 말이다. 이후 약자보호정책은 취업, 교육 등에 있어 여성들과 유색인종에게 특별한 배려를 하는 것을 뜻해 왔다. 그러나 곧 이어 바크 (Bakke v. Regents of University of California, 1978) 소송에서 유색인종을 위한 할당제는 위헌이라는 평결을 내렸으며 (5대4), 홉우드(Hopwood v. University of Texas Law School, 1996) 의 경우는 심지어 다양성을 고려한 유색인종의 입학허가도 위헌이라는 평결을 내렸다.

바크 소송 이후 가장 중요한 평결로 꼽히는 최근의 미시간 대학 소송(University of Michigan, 2003)의 경우 대법원은 다양성을 위해 인종을 고려하는 것은 합헌(5대4)이라는 평결을 내린 반면, 학부 입학제의 경우 유색인종 학생들에게 가산점을 주는 것은 위헌이라는 평결(6대3)을 내렸다. 진보진영은 단 한 표 차로 다양성에 근거한 약자보호정책의 합헌 결정이 내려진 것으로 보아, 앞으로 공화당의 추천으로 대법관이 임명될 경우, 이러한 평결도 곧 뒤집힐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미국의 공교육의 인종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과거의 불평등을 시정하려는 약자보호정책마저 이토록 위태로운 상태에 놓인 것을 볼 때, 우리는 인종통합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종분리란 좁은 의미에서 일차적으로 백인과 흑인이 육체적으로 같은 장소에서 일을 하거나, 교육을 받거나 등등을 할 수 없도록 하는 법적 장치이다. 이런 의미로 해석할 때 인종분리의 반대는 인종분리 철폐(desegregation)일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플레시 소송에서 브라운 대법원장이 관습상 인종간의 "차이"는 "자연스러우며"

그러므로 인종분리 역시 "자연스럽다"라는 논리를 편 것이다. 인종분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브라운 평결이 내려지기 직전 워렌 대법원장이 백악관에 초대되었을 때,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이 (남부인들) 나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저 자신들의 예쁜 딸들이 몸집이 큰 흑인들 옆에 앉아 있는 걸 불편해 할 따름이죠."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인종분리를 이해하는 것은 인종분리 문제의 본질을 간과하고 은폐하는 몹시 단순하고도 위험한 논리다.

인종분리 흑·백이 사회적으로 이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동일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수 없다 라는 전제하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깊은 백인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백인들이 법적, 정치적, 사회적 권력을 독점하며 총체적으로 미국 사회를 지배하던 체제라는 사실임을 인식한다면, 인종통합이란 단순히 흑인과 백인이 같은 공간에서 교육을 받거나,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것을 넘어서서 흑인들이 사실상의 평등을 누릴 수 있도록 정치적, 사회적 힘을 근본적으로 재분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존슨 대통령이 1965년 하워드 대학(Howard University) 졸업 연설에서 역설한 바는 여전히 미국 사회의 크나큰 숙제로 남아있다.

"우리는 자유 뿐 아니라 기회를 찾고 있다. 법적인 공평함 뿐 아니라 인간적 능력을 찾고 있다. 권리와 이론으로서의 평등이 아니라 사실이자 결과로서의 평등을 말이다." 즉 교육과 그 밖의 모든 분야에서 출발점이 다른 상태에서, 법적인 평등을 획득했으니 더 이상의 "혜택"은 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혜택"은커녕, 제대로 된 시작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특히 어린 흑인 학생들에게는 억지에 불과하며, "인종통합"이란 아무런 쓸모없는 말잔치에 불과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 대법원이 보수진영의 힘에 밀려 브라운 평결이 "피부색을 초월"했다고 해석하여 앞으로 약자보호정책을 철폐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내려진 해석을 이용해 더욱더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데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브라운 평결 이후 50년 동안 사실상의(de facto) 인종차별 철폐가 미미한 발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피부색의 초월"이란 원칙의 미명하에 약자보호정책을 철폐한다면, 19세기 말 플레시 평결이 그러했던 것처럼 인종문제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반면, 미국의 일부 진보진영 학자들은 사실상의 인종 문제가 거의 해결되지 않은 현실을 보며 브라운 평결은 실패작이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하지만, 브라운 평결의 상징적 의미를 폄하하는 것 역시 몹시 위험하다.

실제의 사회 개혁은 법과 정책의 변화로 이루어진다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사실을 고려할 때, 이러한 자세 역시 대법원의 지지를 받지 못할 매우 무기력하고 심지어 패배주의적인 자세임이 틀림없다. 그보다는 브라운 평결의 막중한 상징성을 인정하면서, 60년대 민권운동이 끝난 지점과 현재의 과제들이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사회 개혁을 모색하도록 노력하는 태도가 브라운 평결을 이끌어 낸 사람들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 <안과밖> 17호에 실린 학술시평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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