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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대중문화와 저주받은 걸작: 장필순 5집을 들으며

작성자

Bloom

작성일자

2005-10-21

이메일

bloom.pe.kr

조회

3531


1.
어제 연구회 학술대회건으로 몇 분 선생님들과 만나 얘기를 하고 술 한잔을 나누었다. 나온 여러 얘기 중에 대중문화의 힘에 대한 말들도 있었다. 예컨대 TV의 책 소개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등이 끼치는 막강한 영향력에 대해. 나는 어제 귀동냥을 통해 그동안 궁금해하던 의문을 하나 풀 수 있었다. 저녁 뉴스를 보다 보면 금주의 베스트셀러라고 소개가 된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게 한참 전에 나왔던 미하엘 엔데의 <모모>가 1위라는 거다. 아니, 저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런 내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모모>가 얼마 전에 종영되었던 인기드라마 <삼순이>에서 소개되었다는 거다. 그걸 본 사람들이 너도나도 이 책을 사대는 바람에 졸지에 베스트셀러 1위가 된 거라는 거다. 나는 드라마 재미없어서 안보니 그런 사정을 몰랐던 거다.

이러니 재미없어도 가끔은 드라마도 볼 필요가 있겠다 싶다. 오해가 있을까봐 한마디. 내가 TV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 건 그 장르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단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재미있어 한다고 내가 재미없는 걸 볼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뭐, <모모>도 괜찮은 책이지만 그보다는 차라리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같은 책, 혹은 욕심을 내서 <영미문학의 길잡이>가 드라마에 소개되면 드라마가 망치게 되려나. 그런 썰렁한 농담도 나왔다. 어쨌든 어제 아무개선생님이 지적했듯이 대중문화가 고급문화를 압도하고 사람들의 독서취향과 문화적 감수성을 지배하는 작금의 문화현실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2.
내가 하고 싶은 얘기? 사실은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이 이미 했다. 자신의 책이 TV 책 소개 프로그램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은 그걸 거절했단다. 소개만 되면 상당한 책 판매 이익이 보장되는 그 좋은 기회를 '어리석게도' 박찬 거다. 요새같이 영악한 이윤/이익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에 분명 바보처럼 보이는 짓이다. 그런데 왜 거부를 한 걸까. 선생의 답. 내 책만 소개가 되어서 많은 판매 부수를 올리고 서점가의 판매대를 장악해버리면 그만큼 다른 책은 묻혀 버리는 것 아니냐는 대답. 그건 독자의 책 선택 기회를 빼앗은 것이 아니냐는 대답. 그렇게 선생은 시장의 논리를 거부했다. 시장의 논리는 간단하다. 하나의 상품/책/영화/음악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면 다른 좋은 물건들은 죽어버린다. '제로 섬' 게임.

3.
물론 그렇게라도 몇 권이라도 좋은 책을 티브에서 소개해서 사람들이 읽으면 좋은 게 아니냐고 반론을 펼 수도 있다. 나도 그런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두 개의 의문이 생긴다. 첫째, 그렇게 선정된 책들이 과연 다른 좋은 책들을 모두 압도할 만큼 '좋다'는 기준은 무엇인가. 둘째, 설사 선정된 책이 그렇게 좋은 책이더라도 그 책 한 권만 수만권, 수십만 권이 팔리고 읽힌다면 다른 좋은 책들이 독자를 만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아닌가. 권정생선생의 선정거부는 이런 시장의 논리가 지니는 맹목을 지적한 것이리라.

4.
하나의 상품이 독점할 때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력이 어디 책뿐이랴. 영화나 대중음악은 그런 현상이 더 심하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다 본다는 영화, 특히 관객수가 너무 몰리는 영화는 보지 않거나 조금 시차를 두고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영화 한편이, 그런 음반하나가 시장을 압도함으로써 다른 더 좋은 영화나 음악들이 죽어버릴 수 있다. 이른바 '저주받은 걸작'들이 많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저주받은 걸작이 많이 등장하는 사회는 결코 문화적으로 건강하지 않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5.
사설이 길었다. 내가 보기에는 저주받은 걸작음반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장필순의 5집 앨범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이다. 사실 문학 같은 문자예술이 아닌 경우 글을 통해서 영상예술이나 음악 작품의 가치를 평한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좋은 영화나 음악의 가치를 어떻게 글로 표현할까. 그냥 직접 보고 들으라는 말이 제일 확실한 평이다. 하지만 그래도 말과 글을 통해서 생각을 전하는 것이 편한 면이 있으니 어쩌랴.

나는 이런 앨범이 있는지도 몰랐다. 1997년에 발매된 음반이라는 데 그때 내가 국내에 없었던 탓도 있지만 그래도 꽤 한국대중음악에 관심이 있고 찾아듣는 편이라고 생각하는 나 같은 이도 전혀 알지 못했던 음반이다. 이건 누구 탓인가. 좋은 작품, 좋은 문학/영화/음악을 대중에게 소개해주는 평론이 사라졌다는 것, 이른바 평론의 위기는 이런 데서도 실감한다. 대중과 소통하는 평론의 위기는 단지 문학평론계만의 문제가 아닌가 보다.

나는 우연히 지난 추석에 실린 신문기사를 통해서 이 음반을 알게 되었다. 추석 때 들을만한 이런 추천음반기사가 실렸다. "다섯 번째 앨범은 한 마디로 아주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조동익과 함춘호, 김영석 등 일급 세션 연주자들의 고급스러운 연주에 실리는 그의 낮고 잔잔한 목소리는 한없이 포근한 울림이 되어 가슴을 어루만져준다. 여기에 담긴 서정성은 마냥 달콤하고 따스하지만은 않다. 한 곡 한 곡 진행될수록 깊은 감성의 끄트머리에서부터 기분 좋은 서늘함을 안겨준다. 비교적 잘 알려진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를 채우는 가슴 벅찰 정도의 ‘쿨(cool)’함은 파란 가을 하늘의 빛깔을 띤 대부분의 곡들에 고스란히 이어져 온다."(<한겨레>)

6.
이 음반은 분명 "쿨"하다. 그리고 그런 쿨함은 단지 "포근한 울림"만이 아니라 "기분 좋은 서늘함"에서 나온다. 그리고 장필순의 "낮고 잔잔한 목소리," 약간 허스키하고 정감 있는 목소리가 그런 "서늘함"의 정조와 썩 잘 어울린다. 이 앨범전체에는 삶의 애환들, 기쁨과 슬픔, 간단히 말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어려운 질문들에 던지는 통찰이 깔려 있다. 하지만 앨범의 곡들을 대부분 조동익('어떤 날'의 그 조동익!)과 장필순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7.
어떤 일관된 이야기의 구조를 앨범에서 꺼내기는 힘들지만 이 앨범은 우리 삶의 축도와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거기에는 "그래도 난 오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대충 끝마친 하교길은 너무도 아름다워 / 늘 만날 그 약속을 넌 잊진 않았을까"(첫사랑)라고 가슴 조였던 청소년기의 첫사랑, "시간은 왜 그리도 빨리 흘러가는지"(첫사랑)라고 애타하던 푸르렀던 시절의 회상이 있다.

8.
하지만 사랑은 변한다. 아니, 사랑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변한다. 그래서 "널 위한 나의 기억이 이제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어/ 하지만 잊진 않았지 /힘겨운 어제들 나를 지켜주던 너의 가슴 /이렇게 내 맘이 서글퍼질 때면 또다시 살아나"(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라고 노래하는 때가 온다. 사랑은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또한 쉽게 포기하기 힘든 것이라는 삶의 진실. 그리고 지난 사랑에 집착하지 않는 때가 온다. "이 세상 살다보면 우리는 만나고 또 헤어지고 /그 속에서 울고 웃고 후회하는 일도 많아 /세월만 흘러가네 시간은 달려가고 /우리도 변해가고 세월만 흘러가네 /그리워해도 다시 되돌아 갈 수는 없지 /그리워해도 지난 날인걸 끝난 일인걸"(사랑해봐도).

삶에서 그런 때를 맞는 것은 성숙해졌다는 징표이기도 하지만 그만큼의 열정을 잃어버렸다는 슬픈 징후는 아닐까. 그래서 "모두 남겨져 있어 아직까진 변한 게 없어 /오랜만에 찾아온 우리 처음 만난 이곳 /다시 겨울을 준비하는 먼지 쌓인 난로 /아직 나를 기억하듯 웃음 짓는 사람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예전에 우리 아직 여기 남아 있지"(이곳에 오면)라는 평정의 정서는 푸근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9.
이 앨범이 여느 사랑노래를 읊조리는 음반들과 다른 이유. 세상의 '그늘'을 차분히 응시하는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시선에는 "지하철 풍경 참 오랜만에 노란 티켓 눈에 띄네/나를 감싸는 많은 사람들 하나같이 지친 표정"이 포착된다. 그들은 마치 "스파이더맨 스파이더맨 스파이더맨"같은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다. "이미 정해진 길을 가는 조금도 벗어날 수 없는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아" (스파이더맨) 동시대의 보통사람들에 대한 이런 깊은 공감이 앨범 전체를 관통한다. 그 정서는 "나만 생각하면 편안히 눕겠지만 함께 살아가긴 정말 힘들어"(집으로 돌아오는 길)라고 가만히 고백하는 정서이다.

80년대 민중가요들이 당대의 시대적 제약으로 놓쳤던 어떤 지점을 장필순과 그를 든든하게 서포트해주는 조동진/조동익 사단은 포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 음반을 듣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게 이 시대의 삶을 응시하는 시선은 "도로 위엔 오늘도 미친 자동차 /아이들은 어디에 텅빈 놀이터"를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TV앞에서 하루를 보냈죠/채우고 채워도 부족한 세상 /우리의 욕심은 하늘을 찌르네 나는 하루종일 먹고 또 먹었죠 /돼지처럼"이라고 자조하기도 한다.

그런 자조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이 시간 위를 /그대와 나도 걷고 있네요 /아무런 느낌조차 없는 날들을" 이라는 깊은 현실인식의 결과이다. 그러나 동시에 "들여다봐요 두려워 말고/ 헛된 꿈으로 가득 채워진 세상 /이 슬픔의 강은 언제쯤 /그 푸른 바다를 만날 수 있을까" (TV.돼지.벌레)라는 삶의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이런 노래를 들으면 문득 마음 한 켠이 싸아해진다. 오랜만에 그런 느낌을 갖는다.

10.
고종석은 어느 글에선가 앞으로 시는 노래로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날카로운 진단을 했었다. 나는 장필순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런 지적에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되었다. "밑빠진 물독에 땀흘려 물을 채우던 /그 허무한 날들 생각하지 말아요"이나 "험한 이 여행길 하나뿐인 그대 지팡이가 부러졌을 땐 /그냥 거기에 앉아 풍선을 불어 보자"(풍선) 같은 노래들. 혹은 삶에 대한 이런 응시의 시선. "그래 인생은 외로움 /영화 속엔 슬픈 사랑 얘기 서로 머릴 기대고 앉아 /우는 여자를 달래는 남자/... 그래 인생은 사랑 /혼자라는 게 좋아 보이겠지만 /내가슴엔 너에게 보일 수 없는 눈물 /그래 인생은 그런 것 /그래 인생은 그런 것"(그래!). 이게 시가 아니면 무엇이 시인가.

11.
노래가 된 시는 단지 말의 아름다움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요는 그런 말들 밑에 깔린 삶의 통찰이다. 그러니 "오늘 하루도 가고/문득 생각난 멀리 떠난 친구 /세월은 가고 추억만 남고 /그래 인생은 그리움"(그래!)이라고 노래할 때, "그토록 힘겹고 견디기 어려울 때마다 /그녀를 지켜준 건 무얼까 /오랜만에 그녀를 만난 날 /그녀는 이렇게 얘기했죠 /난 믿어요 사랑이 그 대답이라고 /난 믿어요 사랑만이 길을 찾을 수 있죠"(그녀에 관한 짧은 얘기)라고 노래할 때, 나는 그 노래에 깔린 동시대 사람들의 삶을 응시하고 공감하는 삶의 통찰을 느낀다. 이렇게 말이다. "넌 항상 너무나 힘들다고 내게 말하곤 하지/ 넌 때론 좋은 일 앞에서도 기뻐할 줄 몰랐어 / 하지만 그건 너만의 느낌이야 너만의 생각이지 /주위를 한번 되돌아봐 더 힘든 사람들도 있지/ 나름대로의 아픔 속에 살아가는 이 세상 /그게 세상이라는 거야"(넌 항상)

12.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이 앨범은 삶의 기쁨과 슬픔, 시간의 흐름에 놓인 보통 사람들의 초상화이다. 이만한 초상화를 낮게 차분히 노래하는 가수를 만나는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만한 걸작앨범들이 사람들에게 제대로 소개 되지 못하고 묻혀버린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대중문화평론이나 대중문화연구는 무슨 거창한 이론의 소개가 아니라 이런 숨은 걸작들을 대중에게 제대로 소개하고 그 숨은 가치를 가능한 널리 알리는 일을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13.
장필순의 5집 앨범을 포함한 그녀의 앨범들은 모두 다음 싸이트에 가면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들어보시고 좋다고 생각하시면 웬만하면 돈을 주고 씨디를 사서 들으시길 권한다. 그 정도의 대우는 해주는 것이 주목받지 못하고 묻혀버리는 걸작들에 대한 예우는 아닐까. 즐감하시길^^

장필순 노래 싸이트:
http://jangpillsoon.w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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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와 저주받은 걸작: 장필순 5집을 들으며 <- 현재글

Bloom
200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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