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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절한 금자씨>: 장면의 우아함과 이야기의 빈곤

작성자

Bloom

작성일자

2005-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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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m.pe.kr

조회

4035


얼마전 평일 오후에 설마 매진이랴 되었을까 하고 <친절한 금자씨>를 보러 갔었다. 그런데 매진이란다. 이 영화가 장안의 화제작인은 화제작인가 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보기는 봐야겠군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나답지 않게 부지런을 떨면서 다시 극장에 가서 기어코 <친절한 금자씨>를 보았다.

영화의 평가? 영화를 보는 취향이야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매번 실감하지만 주위 몇몇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보니 다들 나보다는 이 영화를 좋게 본 듯 싶다. 몇 군데 인터넷을 뒤져봐도 소위 영화평론가들은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 썩 좋게 보지 않았다. 취향의 차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갖게 된 몇 가지 단상들이다.

> 평점
내 생각에 별 다섯 개 만점으로 절대평가를 하자면 2.5개 정도이다. 다른 한국영화와 비교해서 상대평가하자면 잘해야 3개 정도이다.

<올드보이>에서 박찬욱은 자신이 나름의 색깔과 개성을 갖춘 '스타일리스트'의 소양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별로 그렇지 못하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영화 장면들을 꾸미는 그의 재능이 영화의 이야기가 지니는 힘을 갉아먹었다는 느낌이 크다. 내가 보기에도 박찬욱은 분명 재능과 개성을 지닌 감독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의 재능의 '방향'에 대해서 선택을 해야할 기로에 선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좋은' 장면 만들기에서 재미를 찾는 (나쁜 의미에서의) 탐미주의자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깊이 있는 '스타일리스트'의 거장이 될 것인가.

> B급 영화
영화지식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이해하는 '좋은' B급영화의 정의는 이렇다. 통상 '예술영화'들이 표방하는 폼잡는 주제의식이나 무게 있는 이야기에 얽매이지 않는 영화. 전달하려는 이야기가 무겁든, 가볍든, 황당하든 사실적이든, 있을 법한 이야기든, 그렇지 않은 이야기든 그런 이야기를 영화의 각 장면들과 음악,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 속에 잘 버무려 놓을 줄 아는 영화. 한마디로 잘 짜여진, 잘 만들어진(well-made) 영화. 그게 내가 이해하는 좋은 B급 영화이다. 그리고 나는 잘 만들어진 B급 영화들을 소위 '예술영화'들만큼, 아니 그보다 더 좋아한다.

따라서 B급 영화에서 주제의식의 심오함을 갖고 시비를 거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박찬욱은, 언젠가 자신도 그런 얘기를 했듯이, 한국영화에서 드물게 B급 영화의 거장이 될 자질을 갖고 있다. 그는 영화가 단지 이야기의 예술이 아니라 이야기, 그림, 인물, 음악, 배경 등을 모두 아우른 다른 종류의 장르임을 그의 영화로 보여준다. <올드보이>를 주제나 이야기의 의미 등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기야 하겠지만 그건 영화의 재미를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이 못된다. 거기서 근친상간의 '정신분석적' 주제를 잡아 '썰'을 푸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게다. 그리고 좀더 조야하게 이 영화의 주제는 역시 "사람은 '입조심을 해야 혀"라는 전래의 진리를 재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이 영화가 주는 힘이나 재미와는 거리가 멀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올드보이>를 보면서 감탄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관객을 영화의 끝까지 몰입시키는 영화의 짜임이 주는 힘이 그것이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인물들이 무슨 '사실성'을 띤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올드보이>든 <친절한 금자씨>든 벌어지는 사건이나 인물들의 모습은 과장되어 있다. 인물들은 '극한적 인물'들이고 벌어지는 '사건'도 극한적이다. 그러나 루카치가 다른 곳에서 지적했듯이 삶의 진실은 좁은 의미의 사실성에서가 아니라 '극한성'에서 드러난다.

<올드보이>의 힘은 극한적 인물들이 극한적인 상황에서 벌이는 극한적 사건의 절묘한 짜임을 끝까지 견지한 데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뛰어난 B급 영화의 한 전범이 이 영화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이 영화의 원작이 이미 나름의 평가를 받는 일본만화였다는 것, 그리고 원작을 뛰어넘는 씨나리오로 새롭게 각색한 각색자의 역할이 컸다. 아무리 영화가 영상예술의 꽃이라지만, 그 영상을 연결하고 짜 맞추는 이야기 만들기의 힘은 역시 좋은 영화가 되기 위한 핵심인 것이다. 아날로그 문화의 대표자격인 문학을 공부하는 이의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예쁘고 멋진 장면만으로 좋은 영화가 되기는 힘들다. 물로 이때 좋은 영화는 예술영화가 아니라 모든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뜻이다.

> 이야기의 빈곤, 장면의 우아함
내가 보기에 <금자씨>의 장점과 문제점은 <올드보이>와 겹친다. <금자씨>에서 박찬욱은 이미 <올드보이>에서 잘 보여줬던 스타일리스트의 면모를 다시 과시한다. 그렇게 된 데는 이제 <올드보이>로 국내외의 주목을 받게 된 만큼의 자신감도 깔려 있을 것이다. <금자씨>에서도 감독은 '좋은 장면' 만들기의 역량을 드러낸다. 영화의 장면 모두가 그냥 예쁘다는 뜻이 아니다. 그 순간의 컷에 어울리는 스타일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백선생을 죽일 사제권총을 받아들면서 "뭐든지 예뻐야 하거든요"하고 금자씨가 툭 던지는 말은 어쩌면 감독 자신이 이 영화를 만들 때 관심을 두었던 일종의 '탐미주의'를 드러내는 게 아닐까.

영화가 주는 힘과 감동, 재미도 그렇게 만들어진 장면들이 주는 강렬함에 주로 있다는 걸 나도 모르지 않는다. 영화는 어쨌든 언어예술, 좁혀 말해 문학이 아닌 것이다.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 어떤 영화를 되돌이켜 볼 때 기억에 남는 것은 이야기나 주제보다는 그 영화에서 인상 깊게 보거나 들었던 장면 몇 개와 음악인 경우가 많으니까.

하지마 그렇다고 이야기의 빈곤함을 장면의 스타일이 대체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금자씨>가 <올드보이>에 비해 결정적으로 쳐지는 점이 바로 이야기의 빈곤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뒤로 갈수록 느슨해지는, 금자가 펼치는 복수극의 전말은 때로는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특히 유괴 당해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이 백선생을 집단적으로 '처리'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어이가 없었다. 이야기의 실패이다. 그 실패에는 전체 영화의 톤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를 명확히 결정짓지 못했던 감독의 문제의식의 빈곤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 블랙코디미?
영화가 전하는 서사의 전체 톤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이 문제에서 <금자씨>의 문제의식은 아쉬운 대목이 많다. 되풀이 말하건대, <올드보이>의 미덕은 영화 전체를 팽팽하게 지배하는 냉철한 시선, 어떤 면에서는 운명의 장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무자비할 정도의 냉철한 시선의 유지이다. 영화에서 어떤 형식이나 기법을 쓰든 그건 감독의 자유이다. 문제는 그렇게 끌어들인 기법들이 영화 전체의 톤을 형성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는가에 있다. <금자씨>는 이 전체적 톤의 형성에 실패했다.

이 영화에서는 웃기는 장면도 많고 실소를 자아내는 장면도 있다. 하지만 매우 비장한 장면도 많다. 영화는 그렇게 웃음과 비장미와 울음 사이에서 찢겨져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다양한 감정들 사이에 찢겨져 있는 게 우리 삶이 아니겠냐고 영화는 묻는 듯하다. 맞다. 삶은 그렇게 다양한 모습들로 분열되어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어떤 상황에서 드러나는가를 제대로 포착하고 작품의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아는 능력이다. 문학이든 영화든 내가 생각하는 거장의 진면모는 여기서 있다. 그런데 울어야 할 때 웃게 만들고 웃어야 할 때 울게 만든다면, 비장해야 할 때 웃기고, 웃겨야 할 때 비장하다면 그걸 그냥 역설의 미학, 혹은 블랙코미디라고 넘기기는 곤란하지 않을까.

<금자씨>의 끝부분에서 벌어지는 유괴된 아이들의 부모들이 벌이는 복수극 장면은 이야기의 톤을 제대로 유지하는 데 실패한 좋은 예로 보인다. 마치 블랙코미디 연극의 장면들을 보는 듯한 장면의 톤. 나는 그게 불편했다. 내가 보기에 아이를 유괴하고 죽이는 행위와 그걸 경험한 부모들의 마음은 블랙코미디로 전달할 게 아니다. 그게 그냥 씩 쓰게 웃으면 넘어갈 일일까.

특히 유괴된 자신의 아이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살해당하는 것을 그 범인이 재미 삼아 찍어놓은 비디오로 다시 보는 부모의 마음을 그냥 블랙코미디의 쓴웃음으로 처리하는 게 온당할까? 특히 내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 백선생이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아이에게 두건을 씌워 교수형 시키는 끔찍한 장면은 어떤 웃음으로도 넘길 수 없는 잔혹함의 극치이다.

그러나 감독은 마치 그런 잔혹함의 세계에서 비껴 가는 게 삶의 진실이라는 듯이 블랙코미디의 톤으로 이들 장면들을 채색한다. 가령 기껏 백선생을 '처리'하고 나서 모인 부모들의 모습. 죽은 아이들의 '생일'을 기리는 듯한 모임의 장면에서 감독은 유괴범의 돈을 계좌로 넣어주기를 바라는 부모의 '이중적'인 모습으로 카메라의 앵글을 돌린다. 물론 이런 카메라의 시선을 어쨌든 산 자는 계속 비열하게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삶의 진실에 대한 냉철한 시선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아이들을 유괴하여 이유 없이 죽이는 잔혹함에 블랙코미디의 톤은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 때나 비장해서는 안되지만 비장할 때 비장할 줄 아는 게 거장의 면모가 아닐까. 세상에는 그냥 재미 삼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있는 법이 아닐까.

> 금자씨
이영애의 연기는 좋다. 특히 영화의 뒷부분에서 길게 잡힌 이영애답지 않은(?) 표정연기는 압권이다. 우는 것인지 울고 있는 것인지가 헷갈릴 정도로 착잡한 내면을 곤혹스럽게 드러내는 그녀의 연기는 <올드보이>의 마지막 장면에서 최민식의 비슷한 표정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 같지 않게(?) 예쁘기만 한 '산소 같은 여자'가 드디어 한 명의 배우가 되었었을 드러낸다. '친절한 금자씨'이자 주도 면밀하게 자신의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마녀'의 양면성을 모두 지닌 금자라는 캐릭터를 이영애는 무난히 소화한다. 이 경우에는 대개는 좋은 배우가 되기에 장애가 될 수도 있을 이영애의 '미모'가 역설적으로 캐릭터의 깊이를 더하는 힘으로 작용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의 복수극을 단지 아이 뺐긴 모성, 혹은 성난 암사자의 복수극으로 그린 것은 아쉽다. 성난 암사자의 복수는 이미 다른 형태로 <킬빌>에서 여실히 보여준 바 있으니까. 13년을 준비한 복수극을 '모성'의 분노로만 설명하는 것이 나는 마음에 걸린다. 하기야 이건 모성을 모르는 나로서는 함부로 말하기 어렵지만.


> 백선생
최민식이 역시 그답게 탁월하게 연기한 백선생은 '괴물'이다. 그는 인간적인 감정이 없는 괴물이다. 이건 무슨 비아냥거리는 말이 아니다. 사실의 진술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세상에 결점 없는 인간이 없지 않느냐'라는 말로 합리화한다. 하지만 그건 그냥 머리로 만들어낸 합리화의 말에 불과하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물건이요 대상이다. 사람들도, 심지어 아이들도 그냥 필요 없으면, 귀찮으면 제거해버리면 되는 물건이다. 그러니 그가 생명을 만들 능력이 없는 '성불능자'라는 것은 의미 심장하다. 그 또한 생명력이 없는 물건 같은 존재이니까 말이다.

단 하나의 컷으로 감독이 예리하게 보여주듯이 백선생에게 식욕과 성욕은 하나이며, 아이를 죽이는 것은 그냥 귀찮으니까 죽이는 일이다. 왜 아이들을 죽여 돈을 모았냐고? 그것도 별 이유 없다. (왜 백선생이 아이들을 유괴하고 애써 돈을 모았는지 궁금하신 분은 영화를 직접 보시길.) 싫증난 물건을 치우듯이 아이들도 재미없어지면 제거하면 된다. 그러니 그에게 남는 것은 돈이다. 어떤 물건이든 살 수 있는 돈. 아내에게 모임에서 저녁값 내지 말라는 백선생의 말은 그냥 한 말이 아닌 것.

그런데 백선생이 과연 예외적 괴물일까. 그런 의문은 남는다. 그는 우리 안의 괴물, 점점 그와 같은 괴물이 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 그것이 설사 어린이들일지라도 남의 존재와 생명을 그저 물건처럼 자기 편의대로 '처리'해버리는 이 시대 사람들의 '극단적' 표현은 아닐까. 아니, 이렇게 이유와 목적을 묻는 것조차 의미가 없어져 가는 시대의 표현은 아닐까. 그러니 이미 죽은 백선생에게 총질을 해대는 금자의 모습에서 통쾌함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면서도 과연 그렇게 짐승 같은 넘들은 죽여버리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남는 질문들이다.

> 유괴
아이를 기르는 사람으로서 아이들이 납치되어 살해되는 장면을 보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걸 블랙코미디로 그리는 감독의 시선을 느끼는 것도 불편하다. 물론 어떤 사건이든 그걸 묘사하는 시선의 선택이야 감독의 자유지만 말이다.

> 기독교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 그냥 웃음이 나오는 장면.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금자가 전도사에게 던지는 말이다. '너나 잘하세요'. 기독교신자들은 이 장면을 비롯해서 영화 곳곳에서 감독이 보이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불편했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런 장면들이 재미있었다. 남에게 설교하고 잘 살라고 떠들기 전에 '너나 먼저 잘 하라'는 말, 흘려 듣기 곤란하지 않은가. 요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심으로 나에게, 그리고 가능하면 남에게 "친절"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니 "친절한 금자씨"가 그 친절함 뒤에 감춰 놓은 복수의 욕망은 기독교 등에서 말하는 종교적 '가르침의 말'보다 강한 셈이다. 전도사는 금자씨를 전도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그는 돈의 노예가 되어 백선생에게 금자를 팔아 넘긴다. 그러니 이렇게 추하지만 강렬한 삶의 여러 욕망이 지닌 힘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종교는 그냥 듣기 좋은 말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나도 금자씨를 따라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말하고 싶다. 폼잡는 얘기들 그만하고 "너나 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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