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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리언달러 베이비>: 가족을 넘은 가족?

작성자

오길영

작성일자

2005-03-11

이메일

조회

4499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를 보았다. 오늘자 모신문의 짧은 영화평을 보니 거기에 '고급스런 신파' 어쩌고 하는 표현이 나온다. 글쎄, 이런 평을 쓴 이는 '신파'를 무슨 뜻으로 썼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눈물이 나오게 하는 영화이다. 왜 그랬을까? 그래도 이름 있는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영화를 보러갈 때 관객의 마음은 어떨까.

아마도 많은 경우 그 상의 '권위' 때문에 지레 영화를 보기 전부터 찬사를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이건 명색이 영화평론가라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닌 듯싶다. 그리고 적지 않은 경우 영화를 보고 나면 그런 준비된 찬사의 마음은 배반당한다. 특히 아카데미영화상 수상영화라는 것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지가 않다.

나는 요즘은 영화를 보든 작품을 읽든 마음이 움직이면, 눈물이 오면, 감동을 받으면, 그건 그대로 마음 깊이 인정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걸 사후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고 하는 행위는 사실 별의미없다. 하지만 문학작품이든 영화든 어떤 텍스트든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저 감동 먹었다는 식의 '인상비평'만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평소에 가르치는 선생의 직업병이라는 것이 발동한다. 그러니 왜 이 영화가 내게 단지 신파로만 단가오지 않았는지 살펴보고 싶다. 사실 그런 욕망을 자극하는 영화도 별로 없지 않은가.

> 신파
관객의 감정선을 정확히 예측하고 적절하게 극의 전개를 끌고 나간다는 점에서 이 영화에는 분명 신파적인 데가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단순히 여성 '록키'류의 권투영화가 아니듯이 그저 고급스런 신파만도 아니다. 신파의 인물들은 개별성, 혹은 개성이 없다. 그들은 단지 관객이 바라는 어떤 극적 감정을 표현하는 마우쓰피스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 이별, 재회 따위의 가장 본능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란 말씀.

하지만 이 영화에서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분), 매기(힐러리 스웽크분), 그리고 스크랩(모건 프리먼분) 같은 인물들은 신파물에서 표현되는 감정의 전달자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 삶의 굴곡을 지닌 개별성을 지닌 살아있는 인물들이다. 이 영화의 힘은 이들 세 명의 좋은 배우가 연기한 인물의 생생함에 있다. 그 생생함은, 지금은 홀대받는 말이 된, 삶의 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데 있다. 그리고 슬픈 일이지만 그 이면은 대개 어둡다. 하기야 그게 삶인 걸 어쩌랴.

> 권투영화
이 영화는 <록키>류의 권투영화인가? 매기는 여자 록키인가? 만일 그랬다면 아무리 아카데미가 별 신뢰성이 없는 영화상이라고 하지만 이 영화에 작품상과 감독상이라는 알짜배기 상을 몰아 주었을 성싶지는 않다. 사실 권투영화의 틀은 신파와 잘 어울린다. 도전-좌절-재도전-성공이라는 틀, 그리고 몸과 몸이 부딪치는, 특히 남성과 남성의 근육질의 몸이 부딪치는, 인간의 근원적 폭력성이 제도화된 경기인 권투는 인간감정의 신파적 전개를 표현하는 데 제 격이다.

하지만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런 틀을 충실히 따라가는 듯하면서 그 틀을 해체한다. 남성이 아니라 여성 권투선수라는 틀부터가 전통적인 권투영화에서 어긋난다. 영화에서 권투는 프랭키와 매기가 서로 교감하는 수단일 뿐이다. 물론 이런 지적이 영화의 전반부를 압도하는 권투시합 장면의 힘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 프랭키
듣자하니 이스트우드는 공화당을 열렬히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란다. 보수주의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미지는 아버지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프랭키는 보수주의의 대표적 상징인 '가족'에게서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그는 딸에게 매주 편지를 보내지만 편지는 계속 반송된다. 매주 빼먹지 않고 나가는 교회에서 그는 끊임없이 신부에게 시비를 건다. 이것도 전형적인 보수주의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더욱이 자신이 애써 키워놓은 유망주를 빼앗기고도,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딴넘이 버는 꼴을 당하고도 별 말도 못한다.

프랭키는 전형적인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아버지상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권투를 통해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의 가장 강력한 근거인 혈연을 넘어선 진짜 가족을 만난다. 그에게 스냅스와 매기는 가족이다. 매기는 그의 딸이다. 스냅스는 그의 형제이다. 어렵게 얻는 사랑하는 딸을 살리기 위해 죽여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이것도 역시 변형된 가족주의에 불과한 것일까?

> 매기
32살의 복싱에 미친 여자. 13살부터 음식점에서 일했고 가족은 콩가루집안. 아마도 그녀가 유일하게 교감했을 그녀의 아버지는 일찍 죽었다. 명색이 혈연이라는 그녀의 어머니와 여동생, 오빠는 오직 그녀가 죽은 후에 남길 돈에만 관심 있는 이름뿐인 가족을 지닌 여자. 권투하는 것이 그냥 즐거웠던 여자. 매기가 록키류의 남성 권투선수들과 다른 이유? 그녀는 타이틀을 따는 데 별 관심이 없다. 물론 그녀도 돈을 벌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권투실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시합을 원한다. 그러나 그건 단지 권투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했기에 행복하게 죽을 수 있다고, 그렇게 죽게 해달라고 프랭키에게 부탁한다.

어쨌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은 진부한 말처럼 들리지만 여전히 적어도 내게는 설득력 있는 말이다. 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허비하며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그 원하는 것을 즐기기 위해 노력조차 해보지 않기 때문이다. 32살의 여자가 권투를 한다고? 프랭키를 비롯해 처음에 모두가 그녀를 비웃었지만 그녀는 그걸 하기 원했기에 했고 죽었다. 이걸 단지 '인간승리'의 드라마로 읽는다면 그건 읽는 이의 감수성의 문제이리라.

워낙 씨나리오가 좋았기에 누가 매기 역을 연기했어도 상을 받았을 거라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힐러리 스웽크라는 배우가 아니었으면 누가 매기 역을 제대로 했을 지는 의문이다. 그녀는 헐리웃에 널려 있다는 '미녀배우'가 아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녀만이 매기 역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었을 게다. 공장에서 생산된 것처럼 규격화된 미모를 자랑하는 '공주'님들이 과연 무슨 삶의 슬픔과 비애라는 진실을 알겠는가. 어떻게 그런 역할을 소화하겠는가.

매기 역을 소화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고 이런 여자배우는 처음 봤다는 감독의 말처럼 배우는 이 영화에서 매기가 되었다. 세상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자에게 보답은 온다는 한 예? 자신만의 개성을 지닌 좋은 배우를 만나는 일을 즐거운 일이다. 30대초반에 벌써 두 번째 오스카상을 받은 그녀에게 축하를!

> 가족
그것이 신파든 뭐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프랭키가 매기를 그녀의 요청에 따라 안락사 시키는 장면, 그가 그녀에게 주었던 게일릭 이름인 모쿠슈라의 뜻을 알려주는 장면에서 웬만큼 강퍅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눈물을 참기는 어렵다. 나는 명색이 아일랜드 문학전공자이지만 게일어는 모른다. (하기야 아일랜드사람들조차 사정이 그렇다니 내가 별로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지만^^;;) 모쿠슈라는 내 사랑하는 혈육이라는 뜻이란다.

매기에게 프랭키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 옆에 있던 사람, 아버지가 되었듯이, 프랭키에게 매기는 회신한 번 주지 않는 핏줄의 혈육이 아니라 서로가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진짜 혈육, 딸이 된다. 그렇게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에서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헐리웃의 전형적인 틀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그 틀을 해체한다. 과연 가족이 무엇인가? 그저 피를 나누었으면 그게 가족인가? 과연 그런 혈연주의를 넘어선 가족의 가능성은 없을까? 그런 질문들을 이 영화는 제기한다.

> 아일랜드
영화에서 아일랜드는 중요한 모티프이다. 프랭키의 성이 무엇인지는 나오지 않지만 그는, 스냅스의 비아냥거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인지 게일어를 틈틈이 공부한다. 그리고 예이쯔를 게일어로 읽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잘 되지 않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그는 아일랜드계일 가능성이 크다. 그가 매기에게 모쿠슈라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것도 그냥 우연은 아니겠다.

매기는 그녀의 성인 피쯔제럴드에서 드러나듯이 아이리쉬계이다. 그녀 자신은 자신의 그런 '민족적' 정체성에 별로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지만. 그래서 영화에서 (아마도 아일리쉬들일) 관객들은 아일랜드 깃발을 흔들며 모큐슈라를 외치며 그녀를 응원한다. 그녀의 마지막 적수인 악녀이미지의 챔피언이 구동독출신의 창녀출신이라는 프랭키의 비난은, 시합장 여기저기서 휘날리는 아일랜드 깃발의 민족주의, 그리고 구사회주의 동독출신 챔피언의 악마적 이미지와 어울려 감독의 '보수주의'를 드러낸다고 본다면 과장된 해석일까?

또 한가지. 매기가 죽은 아버지와 함께 가던 곳이라며 프랭키를 데리고 간 음식점의 이름이 IRAs Road Sider(기억이 정확치는 않음)인 것도 흥미롭다. IRA(아일랜드공화군)의 이름을 맛있는 고향식 레몬파이를 파는 음식점에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신파든, 멜로물이든, 권투영화든, 혹은 가족주의 영화로 보든, 어떤 시각에서 영화를 보든 그것은 관객의 자유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힘은 그 모든 영화장르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해체하고 넘어서는 데 있다. 좋은 영화이다.

매기는 과연 죽어서 그녀가 프랭키와 같이 가고 싶어하던 이니스프리의 오두막집에 갔을까? 매기에게 이 시를 읽어주던 프랭키의 모습을 떠올리며 예이쯔의 이 시를 다시 찬찬히 읽어보고 싶다. (원문과 번역문은 인터넷에서 퍼온 것임).


>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윗가지 역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을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
벌 윙윙대는 숲 속에 나 혼자 살으리.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맛보리.
평화는 천천히 내리는 것.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라미 우는 곳에 이르기까지.
한밤엔 온통 반짝이는 빛
한낮엔 보라빛 환한 기색
저녁엔 홍방울새의 날개 소리 가득한 그 곳.

나 일어나 이제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물결 소리 들리나니
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 위에 서 있을 때면
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I will arise and go now, and go to Innisfree,
And a small cabin build there, of clay and wattles made;
Nine bean-rows will I have there, a hive for the honey-bee,
And live alone in the bee-loud glade.

And I shall have some peace there, for peace comes dropping slow,
Dropping from the veils of the morning to where the cricket sings;
There midnight's all a glimmer, and noon a purple glow,
And evening full of the linnet's wings.

I will arise and go now, for always night and day
I hear lake water lapping with low sounds by the shore;
While i stand on the roadway, or on the pavements gray,
I hear it in the deep heart's c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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