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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탈근대 영화의 시작: 나카히라 코우의 <미친 과실> (狂

작성자

장시기

작성일자

200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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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988


일본 탈근대 영화의 시작: 나카히라 코우의 <미친 과실> (狂った果實)


지난 2월 28일(월)부터 3월 28일(월)까지 매 주 월요일 오후 7시부터 다섯 번에 걸쳐서 서울 아트 시네마에서 <일본 영화의 역사와 미학>이라는 주제로 일본 영화 특별전이 열린다. 지난 월요일에 “태양족이라는 신조어를 유행시키며 대대적인 흥행몰이에 성공했던” 나카히라 코우(中平康) 감독의 <미친 과실>(1956)이 상연되었다. 다음 주부터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일본곤충기>(1963), 신도 가네토 감독의 <벌거벗은 섬>(1960),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도쿄방랑자>(1966), 그리고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의 <백만량의 항아리>(1935)이 상연될 예정이다. 영화가 상연된 이후에는 일본 영화 전문가들의 영화설명과 토론도 이어지니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유익한 시간이 될 것 같다.

<미친 과실>은 1950년대와 60년대의 일본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 영화이다. 일본영화의 “새로운 흐름”이란 1950년대까지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에서 이어져 왔던 근대 고전주의 영화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의 영화들에 대한 일반적인 지칭이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을 들뢰즈(Gilles Deleuze)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0년대 후반의 이태리를 휩쓸고 간 “네오 리얼리즘”의 영화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의 프랑스를 휩쓸고 간 “누벨 바그(Nouvelle Vague, New Wave Cinema)”, 그리고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독일의 “뉴 저먼 시네마(New German Cinema)”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언급에서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의 일본영화들에 대한 언급은 생략되어 있다. 서구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탈근대의 철학자인 들뢰즈에게도 일종의 유럽 중심주의가 존재하는 셈이다.

프랑스의 “누벨 바그”를 주도한 프랑소와 트뤼포가 프랑스에서 1956년에 발표된 <솔직한 악녀>와 <미친 과실>의 유사성을 비교하면서 “전체적으로 <미친 과실>이 <솔직한 악녀>의 성과를 넘어선 작품”이라고 말한 것처럼 <미친 과실>이 프랑스와 미국의 1960년대 영화들에 끼친 영향은 아주 지대하다. 1960년에 발표된 알랭 들롱 주연의 프랑스와 이태리 합작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미친 과실>의 유럽판 복사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60년대의 박정희와 김종필, 그리고 삼성과 현대의 행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역사에서 벗어났지만, 정치와 경제는 여전히 일본 식민지의 노릇을 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일본 영화는 전혀 빛을 발하지 못했다. 일본의 기계 상품과 싸구려 포르노 영화와 극우 정치행태는 판을 치면서도 일본의 진정한 대중문화는 단 한 발작도 이 땅에 발을 드려놓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미친 과실>에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일반적으로 <미친 과실>은 “실제 촬영기간이 17일이라는 무모한 제작조건에도 불구하고 일본영화와 세계영화의 역사를 바꾼 나카히라 코우의 놀라운 데뷔작”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제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이태리의 1940년대 후반의 “네오 리얼리즘”의 영화가 근대 고전주의 영화들이 지닌 “근대적 내러티브(the modern narrative)”에서 벗어난 것처럼 동일한 패전국인 일본의 <미친 과실>도 또한 근대적 내러티브의 영화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미친 과실>에서 영화의 쇼트와 쇼트는 서술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각각의 쇼트들은 개별적으로 아름다울 수도 있고, 또한 추할 수도 있다. 또한 각각의 쇼트들은 앞과 뒤에 있는 쇼트들의 원인일 수도 있고 결과일 수도 있다. 결국 영화의 전반적인 문제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관계의 내용과 표현에 의하여 각각의 인물들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미친 과실>은 일반적으로 “한 여름 하야마(葉山) 해변을 무대로 매혹적인 한 여성을 둘러싼 형제의 욕망과 배반을 그리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太郞)가 쓴 <태양의 계절>은 각색한 <미친 과실>은 근대 사회의 두 가지 형태, 즉 근대 제국주의와 근대 식민지 사회가 얼마나 파괴적이고 비생성적인가를 아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미친 과실>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은 1950년대 일본 사회의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이다. 이들 젊은이들의 문화는 미국 젊은이들의 문화를 꼭 빼닮았다. “하야마 해변”에서 이루어지는 이들의 자유분방한 문화의 중심에는 미국과 일본의 혼종성(hybridity)이 존재하며, 그 혼종성의 밑바닥에는 일본의 잃어버린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와 미국에 대한 종속적인 식민주의가 내재하고 있다. 영화에는 할 일 없고 돈만 있는 젊은이들의 유흥은 존재하지만, 남성과 다른 주체적인 여성이나 삶을 고민하는 일반적인 젊은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가 다루는 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혹은 남성이 여성에게 매료되거나 매료시키는 과정을 다룬다.

영화는 관악기의 귀에 거슬리는 불협화음과 더불어 불안한 눈동자를 지닌, 거의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초점이 없는 아름다운 젊은이가 모터보트를 타고 해변으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는 부유한 집안의 형인 “나츠히사(이시하라 유지로(石原裕次郞) 분)”와 동생인 “하루지(Harold Conway 분)”가 해변의 파티장에 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하루지는 전철역에서 만난 미모의 아가씨 미에(기타하라 미에 분)를 잊지 못하고, 형제는 어느 날 수상스키를 타러 나갔다가 수영을 하는 그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문제는 두 형제가 모두 한 여자를 사랑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동생인 하루지는 아직 육체를 모르고 열정만이 넘쳐흐르는 <소년 같은 청년>이고, 형인 나츠히사는 이미 육체의 쾌락을 모두 알고 있는 <중년 같은 청년>이다. 중년 같은 청년인 나츠히사에게 미모의 아가씨 미에는 육체의 쾌락을 모두 알고 있는 <중년 같은 젊은 여성>이지 결코 하루지에게 어울리는 <소녀 같은 여성>이 아니다.

실제로 미에는 영화에서 단 한 마디의 대사도 나오지 않는 중년 미국인의 부인(혹은 현지처)이다. 나츠히사의 매력적이고 과감한 육체적 공략에 의하여 미에는 나츠히사와 육체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고, 하루지에 대한 정신적인 사랑의 관계를 추구한다. 그러나 1950년대의 일본이 “겉”은 미국의 식민지이고 “속”은 잃어버린 일본 제국주의이듯이, 미에는 이미 “겉”의 외관적인 관계는 중년 미국인의 부인이지만 “속”의 내부적인 관계는 제국주의도 아니고 식민주의도 아닌 미래의 아름다움만이 있는 순수한 하루지의 애인이다. 미에에게 나츠히사가 들어갈 틈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인 하루지와 사랑하는 애인인 미에를 하나의 독자적인 생명체로 바라보지 않고 자신이 육체적으로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 있는 단순한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나츠히사는 동생의 사랑을 무시하고 미에를 파괴한다. 이러한 관계는 마치 1970년대와 80년대의 청평이나 양수리에서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중년의 일본인 현지처와 재벌이나 벼락부자의 형제들 이야기와 흡사하다. 싸구려 포르노 영화와 정치나 경제는 일본을 닮아가면서도 최소한의 진지함을 갖춘 일본영화가 국내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 영화 속에 일본의 모습분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도 똑같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결말은 파국이다. 동생 하루지는 모터보트를 타고 형과 미에의 밀월여행의 요트를 추격한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요트의 주위를 빙빙 도는 모터보트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하다. 형 나츠히사의 어색한 웃음과 하루지에게 가려는 미에의 탈출. 그러나 이미 대는 늦었다. 강력한 모터보트의 분노는 미에를 깔아뭉개고, 나츠히사를 들이받으며 요트를 산산조각으로 부순다. 그러나 하루지는 미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분노하여 파괴시킨 사람들은 자신의 형이고 자신의 애인이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난 적이다. 나츠히사는 미에의 미국인 남편을 알고 있고 그의 집에서 도둑고양이처럼 미에와 밀애를 즐겼지만, 하루지는 미에를 옭아매고 있는 중년의 미국인 남편을 알지도 못하며 미에가 정신과 몸, 혹은 육체와 영혼이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미에를 사랑하면서 나츠히사가 중년의 미국인을 닮아가듯이, 하루지는 미에를 빼앗긴 분노와 함께 나츠히사를 닮아가고 있는 중이다. 아니, 이미 하루지는 나츠히사를 꼭 빼닮았다. 진정한 적을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형을 죽여야만 하는 하루지는 미칠 수밖에...

문제는 미국 중년 남성의 제국주의나 나츠히사의 식민지적인 아류 제국주의도 사랑하지 않고 순수하고 아름답게 세상을 바라보는 하루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미에와 미에와 같은 수많은 일본의 여성들이다. <미친 과실>에 미에나 미에와 같은 여성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웃음소리와 껍데기 몸밖에 드러나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김지하의 <쿄오또 1>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시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을 소개한다.

일본의 혼은
쿄오또
쿄오또는
백제혼

이 말은 철인(哲人) 쯔루미(鶴見)의 말이요
메이지에 거역했던
숱한 일본 귀족들의 말이다

_ _ _

일본은 경제적으로 망해야만
정신적으로 산다는,
일본의 해방은 여성들과
피차별 소수 민중의 것이라는
철인 쯔루미의 말,

나의 말이 아니다
나는 도리어 놀라고 있다
배용준을 보러 공항까지 나온
5천명의 일본 40대 주부들에게

_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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