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세미나들

 *영미연 안팎 소식

 *이달의 학술행사

 *문화 리뷰

 *다른 집 가기

 *책읽기,세상읽기

연구회소개 / 회원가입 / 분과연구실 / 도서실 / 회의실 / 사이트맵 / 자료회원연구실 / 자유게시판

                     

제   목

 우리는 모두 자폐증 환자다: 정윤철 감독의 <말아톤>

작성자

장시기

작성일자

2005-02-21

이메일

조회

4203


우리는 모두 자폐증 환자다: 정윤철 감독의 <말아톤>


얼룩말과 초코파이를 좋아하는 초원(조승우 분)이는 자폐증 환자다. 따라서 초원이는 경험과 기억으로만 판단한다. 경험과 기억으로만 판단한다는 것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을 자신과 동질의 관계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없다. 그들은 모두 미래의 사랑하는 친구나 연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자폐증은 불치병이 아니다. 자폐증은 단지 사회화(socialization)가 이루어지지 않는 장애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회화가 100% 이루어지는 비장애인이 존재하는가? 아니다. 사회화가 100% 달성되는 소위 정상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에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로봇이거나 그 사회가 시키는 대로만 일하는 노예일 것이다. 사회화에 100% 적응한 것 같은 히틀러나 박정희, 혹은 스탈린이나 부시와 같은 인물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초원이보다 더 심한 자폐증 환자다. 그들도 초원이처럼 자신들의 시선으로만 사회를 보지만, 초원이와는 전혀 다르게 그 사회로 사회화되지 못한 사람들을 무참히 짓밟고 죽인다. 치유 불가능한 자폐증 환자들만이 항상 사회화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한다. 나는 사회화에 100% 적응하는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사회화에 부적응하는 자폐증 환자다.

특히 예술가는 대부분 자폐증 환자다. 자폐증 환자가 아닌 예술가는 예술가가 아니라 남의 예술을 모방만 하는 기술자이다. 소위 전문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자폐증 환자다. 그 어느 부분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선 먼저 자폐증 환자가 되어야만 한다. 어린이와 여성은 대부분 자폐증 환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와 여성들은 한 사회가 아닌 또 다른 사회를 구성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다. 사랑을 할 때, 모든 사람들은 자폐증 환자가 된다. 마치 <말아톤>에 등장하는 초원이가 얼룩말 무늬만 보면 미친 듯이 달려가서 만지고 싶어 하듯이, 사랑을 하는 사람은 그나 혹은 그녀만 보면 미친 듯이 달려가서 그나 그녀를 만지고 싶어 한다. 우리는 모두 자폐증 환자이고, 사회가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자폐증 환자는 더욱 많다.

알튀세르의 말처럼 사회화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억압적 국가장치(RSA)”이고,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SA)”이다. 군대나 경찰, 혹은 법률과 같은 “억압적 국가장치”는 사회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억압적 폭력을 사용하여 사회화에 적응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군대나 경찰, 혹은 법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억압적 폭력을 사용하여 그 사회가 부여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억압적 폭력을 사용하는 “억압적 국가장치”는 가족, 교회, 절, 마을, 학교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의하여 유지되고 보장된다. 따라서 “억압적 국가장치”는 항상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억압적 국가장치”와 유사한 구조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 구조는 “신-사제-신도”의 구조처럼 “국가-정부-국민”, 혹은 “선생-반장-학생”, “교수-조교-학생”이거나 “아버지-엄마-나”의 구조이다. 정윤철 감독의 <말아톤>은 초원이의 가족이 지니는 “아버지-엄마-나”라는 사회(가족)화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어린 초원이는 경숙(어머니, 김미숙 분)이 가르쳐주는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라는 말을 따라하지 못한다.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기 때문에 초원이는 그 물방울이 왜 “비”인지, 조록조록이나 질질, 혹은 좔좔이나 쿨쿨 내리는 것이 아니라 왜 “주룩주룩 내린다”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경숙에게 하나의 청천벽력과 같다. “아버지-엄마-자식(들)”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행복한 가족”이라는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경숙이의 반란은 초원이의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기를 선택한 순간부터 시작한다. 초원이에게 얼룩말처럼 즐거움을 주는 친구이며 연인인 경숙은 자신의 어머니이다. 그러나 경험이나 기억 속에서 친구이거나 연인인 적이 없었던 아빠나 동생은 결코 자신의 아버지나 사랑스러운 동생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나 동생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아주 강력하게 사회화 되어 있는 아버지와 동생만이 초원이의 아버지와 동생같이 행동한다. 초원이의 아버지나 동생은 그의 친구나 연인이 되는 아버지나 동생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자신과 엄마의 친구관계나 연인관계를 위협하는 적들이다. 그래서 초원이는 항상 아버지와 동생 앞에서 조심스럽다.

친구가 되거나 연인이 된다는 것은 즐거움을 공유하거나 그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친구나 연인은 서로서로 즐거움을 스스로 생산하도록 도와주고 또한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즐거움은 항상 순간순간 소비되어야지 저장하여 소유하면 안 된다. 순간순간 즐거움을 소비하거나 생산하지 못하는 사랑이나 우정은 둘의 관계를 파괴하는 집착이 되거나 업보가 된다. 그래서 사랑이나 우정도 지나치면 병이 되거나 악이 된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20살의 청년이 된 초원. 그러나 경숙이의 초원이에 대한 사랑과 우정은 마치 경숙이가 “내 소원은 초원이가 나보다 하루 먼저 죽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관계의 즐거움을 소비하고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의 집착이나 운명의 업보로 변해간다. 초원이와 경숙이가 공유하는 즐거움은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해온 초원이의 “달리기.” 그러나 “달리기”의 반복은 즐거움의 소비와 생산을 반복하지 않는다. “달리기”의 반복이 거듭되면 될수록 즐거움의 질과 양은 줄어들고 또 줄어든다. 그래서 경숙은 또 다른 즐거움을 생산하기 위하여 “초원이의 마라톤 서브쓰리 달성”으로 정한다.

그러나 달리기와 마라톤은 다르다. “달리기”가 아마추어의 자폐증을 필요로 한다면, “마라톤”은 프로페셔널의 자폐증을 필요로 한다. 영화 <말아톤>에는 프로페셔널의 자폐증 환자가 등장한다. 그는 시카코 세계 마라톤대회에서 우승을 한 전력이 있는 전직 마라토너 “정욱(이기영 분)”이다. 그는 음주운전으로 사회봉사 명령을 받고 초원의 학교로 오게 된다. 영화의 카메라는 그가 얼마나 골수의 자폐증 환자인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그의 엉망진창인 원룸 아파트와 폐쇄적인 생활공간을 아주 자세하게 보여준다. 자폐증 환자가 과거의 경험과 기억이 없는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마라톤이 프로페셔널의 자폐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어슴프레 감지하고 있는 경숙은 애원하다시피 해서 기어이 정욱에게 아들의 코치 역할을 떠맡긴다. 자폐증 환자들은 순수하고 솔직하다. 순수하고 솔직한 정욱과 초원, 즉 아마추어 자폐증 환자와 프로페셔널 자폐증 환자의 사랑과 우정은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나 친구의 우스꽝스러운 행동들처럼 우습지만 밉지 않고, 즐겁지만 경박스럽지 않다. 정욱이는 초원이가 되어가고 초원이는 정욱이가 되어간다.

문제는 경숙이다. 경숙은 초원이와 정욱이 가까워지는 것을 못미더워하고, 심지어 질투 비슷한 것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한다거나 친구가 된다는 것은 즐거움의 소비와 생산이기 때문에, 경숙은 “자식 사랑과 집착을 착각하지 말라”는 정욱의 말에 자신의 즐거움이 사랑의 즐거움인가, 아니면 즐거움에 대한 집착의 강요인가를 다시 생각한다. 문제는 반성이나 사색이 아니라 변화이다. 어느 야생의 풀 한포기를 사랑하는 식물학자라고 할지라도 그 풀 한포기를 완전하게 알 수는 없다. “좋다”와 “싫다”의 이분법이 있는 사회에도 “좋다”와 “싫다” 사이에 무한한 변수가 존재하는데 아무런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는 야생의 풀 한포기와 초원이는 무한한 생성의 즐거움이 있다.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경숙이는 자신만의 사랑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즐거움과 쾌락은 스스로 드러나겠지... 아니나 다를까... 초원이는 자신만의 즐거움, 자신의 경험과 기억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경숙이와 정욱을 즐겁게 하는 일을 찾는다. 그것은 “말아톤”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만의 사회화에 성공한다. 그가 만든 사회에는 경숙이와 정욱이 뿐만 아니라 그들만의 사회 속에 머물러 있었던 아버지와 동생도 들어올 수 있다. 그리고 초원이와 함께 말아톤을 한 수천 명의 사람들과 초원이가 지쳐 넘어졌을 때에 초코파이를 건네주고 달아난 어느 어여쁜 소녀도 그 사회에 들어올 수 있다. 초원이가 즐거움을 넘어 환희(jouissance)와 열락에 도달하는 순간,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들도 또한 환희와 열락의 순간을 맞이한다.

 

   관련글 제목

작성자

작성일자

조회

우리는 모두 자폐증 환자다: 정윤철 감독의 <말아톤> <- 현재글

장시기
2005-02-21
4203

 

 

 

연구회소개 | 회원 가입  |  분과 연구실  |  도서실  |  회의실  |  사이트맵  |  자료회원연구실 | 자유게시판

운영위  |  안과밖편집위  |  자료실편집위 |  영미문학연구 편집위 |  출판기획위번역평가위

Copyright 2001 All rights reserved SESK.net